압도적인 승리와 짜릿한 역전극으로 5개 메달 거머쥔 펜싱
동의대‧대전대, 배출한 대표선수들의 선전으로 펜싱 메카로 주목
펜싱, 엘리트체육에서 생활체육으로 거듭나려면 지원과 관심 더 필요해
도쿄올림픽 여자 사브르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획득하고 시상대에 선 우리나라 대표팀. 왼쪽부터 최수연, 김지연, 서지연, 윤지수 선수 (사진 = 윤지수 선수)
[한국대학신문 허정윤 기자] 우리나라 펜싱 대표팀이 2020 도쿄올림픽에서 남녀 모두 사브르, 에페 부문 단체전과 남자 사브르 개인전에서 메달 5개를 획득하며 코로나19로 지친 국민들에게 기쁨을 안겨줬다. 국가대표선수들의 노력, 지도자들의 열정, 국가‧각 협회‧후원기업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피스트 위의 전쟁, 펜싱 = “의심하지 마, 의심하니까 (칼을) 자꾸 드는 거야!”
선배 구본길이 팀 막내인 오상욱에게 외쳤다. 도쿄올림픽 펜싱 사브르(Sabre) 남자 단체전 마지막 세트인 9세트. ‘40-21’, 승기를 잡았다고 할 만큼 벌어진 점수 차이였다. 그럼에도 순식간에 역전이 일어나는 것이 펜싱이다. 구본길의 말에 오상욱의 칼은 다시금 중심을 잡았고 이내 5연속 득점을 해냈다. ‘45-26’ 2012 런던올림픽에 이어 한국 남자 사브르 대표님 ‘펜싱 어벤져스’는 금빛 찌르기에 성공했다.
또 다른 단체전을 치른 여자 사브르 대표팀은 동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펜싱의 새역사를 썼다. 8강에서 세계 5위인 헝가리를 물리치고 4강에 올랐지만 세계 1위 러시아를 만나 동메달 결정전으로 온 터였다. 동메달을 두고 마주한 상대는 이탈리아. 초반부터 이탈리아의 맹공에 경기 중반부인 5세트에는 15-25로 점수가 10점이나 벌어지고 말았다.
패색이 짙어갈 때쯤 윤지수가 피스트에 올랐다. 주심의 ‘알레(Allez, 시작 신호)’ 소리와 함께 윤지수는 상대 선수보다 빠른 잔발과 깊고 과감한 팡트(Fente, 런지 자세)로 무려 11점을 득점하며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우리나라 대표팀은 이 여세를 몰아 윤지수가 8세트를 40-38로 마친 뒤 마지막 9세트에 나선 김지연이 45점에 선착하며 대역전극으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윤지수 선수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기약 없는 훈련으로 지칠 때도 있었지만 기다림 끝에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어서 기뻤고 그만큼 매 경기 간절하게 임했다”고 말했다. 도쿄올림픽은 전시가 아님에도 열리지 못한 최초의 올림픽이 될 뻔했기에 선수들의 마음은 남달랐다. 1년이라는 시간도 우리 대표팀에게는 알찬 시간이었다. 팀 기량을 끌어올릴 수 있는 시간도 벌 수 있었고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여자 사브르 김지연 선수가 재활에 성공하기도 했다.
메달 사냥은 다른 펜싱 단체전에서도 계속됐다. 남자 사브르 단체전보다 먼저 치러진 여자 에페(Epee) 단체전에서는 은메달, 남자 에페 단체전에서는 에페 단체 최초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개인전에서는 사브르 국가대표인 김정환이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동의대 출신 김준호 선수(왼쪽)와 구본길 선수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 동의대)
■동의대‧대전대, 한국 펜싱의 요람으로 우뚝 = 우리나라 펜싱 국가대표의 메달 소식이 전해지자 선수들을 배출한 대학들에도 스포트라이트가 옮겨졌다.
그중에서 동의대는 펜싱 사브르 인재들을 다수 배출하며 ‘펜싱 메카’로서의 명성을 다시금 입증했다. 이미 동의대는 오은석(레저스포츠학과 02학번)이 2012 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이력이 있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그 후배인 구본길(체육학과 08학번), 김준호(체육학과 13학번), 최수연(특수체육학과 09학번), 윤지수(레저스포츠학과 11학번)가 메달 사냥에 성공한 것이다. 여기에 한주열(체육학과 01학번)도 도쿄올림픽 사브르 여자팀 코치를 맡고 있다.
동의대 사브르팀은 2001년 이효근 감독을 중심으로 창단된 후 지금까지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는 이 감독의 수제자인 한우리 감독이 펜싱부를 이끌고 있다. 한 감독은 “우리나라는 펜싱 인구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서 선수풀이 풍족한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펜싱부가 있는 중학교에서 체육교사들이 재능 있는 아이들을 발굴해내고 그 선수들이 펜싱부가 잘 돼 있는 대학에 진학해 강한 훈련을 버티며 좋은 성과를 내줘서 고마운 마음”이라고 말했다.
대전대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펜싱 명문 대학 중 하나다. 이번 도쿄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선수 중 사브르에 오상욱(사회체육학과 15학번)과 에페에 송재호(사회체육학과 05학번)가 대전대 출신이다. 동의대가 사브르 명가라면 대전대는 두 종목에서 인재들을 기르고 있다.
대전대 펜싱부를 이끌며 한국대학펜싱연맹 전무이사를 맡고 있는 도선기 감독은 “펜싱은 신체 조건도 중요하지만 펜싱 경력이 중요하다”며 “오상욱 선수는 한국 펜싱의 향후 10년을 책임질 수 있을 것이고 송재호 선수는 그 성실함이 세계무대에서 인정받게 된 케이스”라고 자랑했다.
도 감독에게 한국 펜싱의 저력을 묻자 “상대가 한 스텝을 뛰면 두 스텝, 세 스텝은 더 뛰는 ‘잔발 펜싱’과 서로를 북돋아 주는 팀워크가 최상이다”고 답했다. 그는 한국 펜싱의 화려하고 경쾌한 스텝을 배우고 싶어 하는 외국팀의 러브콜도 줄을 잇고 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펜싱은 신체 조건상 유럽 선수들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종목 중 하나다. 특히 사브르는 찌르기만 가능한 에페와 플뢰레와 달리 베기까지 허용되는 경기라 체력 소모가 심하다. 하지만 한국은 그런 편견을 깨뜨리고 펜싱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도선기 대전대 펜싱부 감독과 오상욱 선수 (사진 = 대전대)
■펜싱은 ‘귀족 스포츠’? 생활체육으로 즐길 수 있을까 = 새하얀 펜싱복과 언뜻 봐도 비싸 보이는 칼. 한국 펜싱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는 있지만 펜싱을 생활체육으로 여기는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쉽게 납득이 간다. 여기에 종주국이 프랑스라는 정보와 어려운 펜싱 용어들까지 접하게 되면 펜싱은 국제대회가 있을 때만 보는 스포츠이자 ‘귀족 운동’이 되고 만다.
하지만 올림픽은 이런 귀족 운동의 이미지를 가진 펜싱이라고 할지라도 펜싱을 접해보고 싶은 일반인들을 많이 끌어모았다. 실제로 펜싱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펜싱클럽에 문의 전화를 해오고 전 국가대표인 남현희 선수가 운영하는 남현희 펜싱 아카데미 홈페이지는 접속자가 많아 한동안 접속이 되지 않기도 했다.
19년 동안 대한펜싱협회 회장사를 맡아온 SK의 오경식 SK텔레콤 스포츠마케팅 그룹장은 “펜싱이 이러한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고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둬준 우리나라 대표팀에게 고맙다”면서 “이러한 성과를 계기로 펜싱이 대중의 관심을 끌고 생활 스포츠로도 정착해 더 좋은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오 그룹장은 현재 대한펜싱협회 부회장으로 펜싱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그는 “SK가 사회공헌의 일환으로 펜싱에 지속적인 후원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표팀이 아니더라도 대학팀과 대학 펜싱 동아리에 장비 지원과 재정 지원을 꾸준히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SK는 어떻게 하면 각 대학에 펜싱 대학팀이 창단될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오 그룹장은 “대학팀이 늘어야 청소년 시절부터 펜싱을 접하는 선수들이 늘고 펜싱 저변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기에 대학에 펜싱 클럽이 더 많아 져야 한다. 또 국내 대학 리그에도 대학동아리 선수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검토해볼 생각이다”며 계획을 전했다.
지자체 단위의 지원도 있다. 대전시체육회는 ‘꿈꾸는 펜싱학교’ 사업에 2억 원을 투자한 상황이다. 대전 시민들이 쉽게 펜싱을 접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구성하고 은퇴선수들을 초빙해 학교체육과 생활체육, 엘리트체육의 선순환 구조를 구축할 계획이다. 펜싱 시설, 프로그램, 지도자를 갖춰 시민들에게 저렴하면서도 양질의 프로그램을 제공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다.
도선기 대전대 감독은 “예전보다 펜싱 클럽이 많이 생겼고 펜싱이 엘리트 체육이라는 편견도 이전보다 옅어졌다”며 “생활체육과 엘리트 체육을 통합해 상생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우리 동의대 감독은 “꼭 체육 관련 학과를 지망하지 않더라도 운동을 한 경험이 대학 진학에 가산점을 주는 구조가 된다면 어릴 때부터 다양한 스포츠를 생활체육으로 접하기 쉬운 구조가 될 것”이라고 의견을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