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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가운데 계신 하나님
출 14: 12-14
오늘의 우리들이 걷는 인생의 길이나 삶의 자리들은 참으로 어려운 상황들이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런 상황들을 해결하여야 하는 방법이 성경이 제시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일년동안 사도행전을 묵상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 2~3회에 걸쳐서 사도행전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행전 23장에서 하나니은 바울에게 말씀을 하시기를 이제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인도를 하십니다. 그것이 24장에서 26장의 내용입니다. 24장에서는 벨릭스 앞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25장은 바울이 베스도 앞에서 말씀을 전하고 26장은 아그립바 앞에서 말씀을 전하고 27장은 바울이 예루 살렘의 여정을 끝내고 로마를 향하여 가는 과정을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로마를 향하여 가는 과정이 저와 여러분들이 인생을 항해하면서 달음질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기에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행전27;1절을 하께 봅니다. "우리의 배를 타고 이달이아로 갈 일이 작정되매" 이제 바울이 배를 타고 목적지에 갈 일이 작정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로마로 가게 됩니다. 로마의 항해는 오늘날의 우리들이 항해를 하는 것처럼 그리 쉽게 갈 수 있는 여정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여정은 276인이 하께 하는 커다란 여정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여정에 인간적인 방법들을 다 동원하여 행해를 시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슬림을 피하여 구보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바람이 일어나서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은 일을 이루어 갑니다. 그런데 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나도 맞은편에 이르러" 항해는 그들의 이야기처럼 쉽게 만들어가지 않습니다.
계속하여서 9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은 그 항해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선주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행선을 하는데 참으로 많은 어려움과 손해가 잇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말을 하였지만 13절의 말씀을 보니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순하게 부는데는 그들이 득의를 한 줄 알고 항해를 지속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깁니다.
14절을 보면"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그들은 지중해의 계절풍을 만나게 됩니다. 그 계절풍은 그들의 그 동안의 기술로 쉽게 헤어 낼 수 있는 것의 모양이 아니기 때문에 18절의 말씀을 봅니다.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그들의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구상을 하여 보았습니다. 20 절의 말씀을 봅니다.
"여러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수고하고 애를 썼으면 그것에 대한 대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결과는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와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마다 각자의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는데 때로는 그 인생의 배가 순풍에 돛을 달고 미끄러져 나가는 것처럼 잘되는 것 같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위기를 만났던 바울은 그 위기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갔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분명한 것은 바울은 그 속에서도 평안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것이 가능 할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276명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그 풍랑중에 안심을 할수 있는가를 보여 줍니까? 불가능 한 것들을 성경은 기록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풍랑가운데 어떻게 평안할 수 있을까?
첫째로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물론 바울 사도는 다메섹 도상에서부터 주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기초 삼아서 살아가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어떤 환경속에서도 변한 것이 아닌것입니다. 오히려 그로 하여금 그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대하여 바울은 말하기를 울어서 왜 내 마음을 슬프게 하느냐고 나물하였던 사람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 때문입니다.
23절의 말씀을 봅니다.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밤에 내곁에 서서 말하되" 그는 사공들이나 선주의 마을 들었기 때문에 평안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적인 위로로 인하여 평안을 소유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평안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 우리들에게 전달이 됩니까?
내가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데 그 음성이 들려옵니까? 채널을 바꾸지도 않았는데 여러 방송들이 자동적으로 비추어 집니까? 아닙니다.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은 늘 하나님과 교제를 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오늘날처럼 참으로 많은 일들이 도전하여 오는데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해결을 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가 어디 입니까? 그 중의 하나는 기도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 주십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미래적 하나님의 계획들을 알려 줍니다. 기도가 상실이 될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기도가 없어질 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향상을 그리게 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나보다 나의 모양을 더 잘 그리고 계신 하나님, 나의 현재와 미래와 영원까지 알고 계신 하나님, 내 실패도 아시는 하나님, 나의 장점도 아시는 하나님, 이런 분 앞에서는 나는 아무런 낙망과 실망을 가지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에게 희망이요 그분이 나에게는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아니 바울처럼 그 하나님에 대하여 분명한 선언을 할 수가 있다면 그는 아무런 염려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아무리 많은 풍랑이 닥친다 할지라도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대 한 풍랑 속에서도 주님을 찬양 할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풍랑이라는 위기에 왔습니까 다시 한번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인생의 사명이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대개는 은퇴를 한 이후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나는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환난과 문제 앞에서 아무런 몸부림도 치지 않고 안타까웁게 죽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할 수 있고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명은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24절의 말씀을 보시면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쎄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바울은 그에게 그가 감당을 할수 있는 풍랑은 아니지만 그 풍랑 속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풍랑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가이사 앞에 서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명을 알고 있는 바울에게는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명령을 허락하신 사명을 받고 있는 한은 그에게는 참으로 그 위기가 위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너와 함께 행선 하는 모든 사람을 다 네게 주었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유라굴로하는 그 태풍 앞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죽음의 그림자로 씌워진 사람들 앞에서 바울은 선언하지 않습니까? 안심하십시오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는데 우리가 풍랑을 이길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풍랑 속에서 이렇게 담대 할 수 있습니까? 저는 모세를 기억을 하여 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몰이로 하루를 살아가는 모세를 하나님은 부르십니다. 나는 내 백성의 고통을 알고 그들의 우고를 들었으니 그들을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라 그리고 모세를 하나님은 보내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애굽의 바로에게 상당히 많은 아픔 당하게 됩니다. 그리함에도 모세는 그들의 그 방해하는 자리에서도 여전히 실망하지 않고 가나안으로 인도를 하지 않습니까? 모세를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일으켜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왜 살아야 하는지 알고 게십니까? 고작 돈이나 벌어서 먹고살기 위하여 하나님이 생명을 유지하여 주고 인도하여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적어도 하나니은 어려분들에게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때로는 어려움 앞에서 때로는 고난 앞에서도 일어서야 할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존 밀톤이라는 사람은 어렸을때에 창세기 1장에서3장까지를 일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것을 가지고 멋진 한편의 글을 쓰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는 좀처럼 그의 뜻을 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불우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어른이 되어 정치활동을 하다가 감옥에 갖히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 갖히게 되었을 때에 그를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편지를 써보내었습니다.
"이 감옥이야말로 내 서설의 언어와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적절한 장소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실낙원이라는 찬란한 꿈을 붓으로 옮기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후에 참으로 위대한 실낙원이라는 책을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망이 있습니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그보다 휠 씬 높은 계획을 갖고 여러분들을 부르셨음을 인정을 하시고 풍랑 속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 볼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2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선언을 합니다. 이런 고백을 하실 수 있습니까? 그 풍랑이는 자리에 우뚝서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바울을 상상을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의 신앙의 자리가 가장 큰 고난을 당하였을 때에 그의 신앙의 위치를 발견 할 수 가 있다는 것입니다. 풍랑가운데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대서양을 건너면서 풍랑을 만났을 때에 그는 참으로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선교사였습니다. 그 풍랑이 나를 덮친다면 나는 어떻게 할것인가로 고민을 하고 있을 때에 갑판 한복판에서 찬송의 소리가 납니다. 그곳으로 올라가 보니 모라비안 교도들이 풍랑이 이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갑판에서 기도회로 모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들은 두렵지 않소 그랬더니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소.
내가 사랑했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면 우리는 구원의 주님 앞에 설 것이 아니오?라고 반문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훗날 일기장에 이런 고백을 썼습니다. "풍랑을 만났다는 사실보다도 죽음 앞에서 담대 할 수 있었던 모라비안 형제들의 신앙간증이 나에게 커다란 도전이었고 충격이었다"고 썼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그를 부르신 하나님을 믿었던 모세 그는 백성을 이끌고 홍해 앞까지 다달았습니다.
바로의 철병거 600승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달음질하여 올 때에 백성들은 철병거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갈등을 가지고 있는 지 모릅니다. 그때에 모세는 이런 선언을 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니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모세는 불평하며 원망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이 상황을 하나님이 만들어 가리라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세입니다.
만약에 그 성난 모습으로 죽음의 현실 앞에서 고민하고 있는 그들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만약에 그들이 고난을 당하게 되었더라면 백성들은 모세를 어떻게 하였을까? 아마도 살아있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부르신 하나님을 신뢰하였던 모세는 그 상황 중에도 하나님의 역사를 믿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 우리들은 늘 이런 신앙고백을 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사오며"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적 고백입니까? 그런데 이 신앙의 고백이 우리들의 자리에서 표현되고 있습니까?
삶 속에 만들어지는 그 고난의 모양을 보면서, 심각한 풍랑을 만나는 우리들의 삶의 깊은 질곡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런 신앙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있는가? 믿음이 정적 필요한 시기에 우리들의 신앙의 자리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좋을 때만 우리는 믿습니다. 라고 할뿐이지 정작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는 그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풍랑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이 면제되었다고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33"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어떤 의미에서는 환난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환난의 자리에 서게도 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 사도가 풍랑을 만나셨을 때에 주님은 그들속에 닥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바울 곁에 닥아 오시는 주님이 똑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모습으로 우리들의 자리에 닥아 오심을 인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에게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24절의 말씀을 보시면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여망이 없다고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선주도 불안하여하고 죄수 276명의 사람들도 염려를 하는 순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는 그 사람들에게 소리쳐 알려주기 시작을 합니다. 22절의 말씀부터 시작이 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서서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너와 함께 행선 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 고난을 이겨 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그가 섬기는 하나님을 소개를 합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리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상황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아무런 이야기를 못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런 소리는 하나님 앞에서 지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당신도 구원하실 것입니다.! 아우성치는 사람들에게 이런 선언을 할 수 잇는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그들은 모아놓고 34-36절까지 봅니다. "날이 새어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을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음식을 먹지 못하고 주린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 음식을 먹으라 권 하노니 이것은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하고 떡을 떼어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저희가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똑같이 고난을 당하는 현장에서 그렇게 놀라고 허둥대고 염려하고 낙심하시렵니까? 아니면 우리의 그 건강한 믿음으로 풍랑을 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뚝 서서 일어나 바울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시겠습니까?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애굽기 14: 13-14
<서언>
지난 주간에 제가 아는 분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남편이 두 달 전에 갑상선암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방사선 치료를 앞두고 CT촬영을 했는데 또 직장암이 의심스럽다고 이번 주간 대장내시경과 MRI 촬영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 이번 기회를 통해 많은 간증거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많은 난관들을 만납니다.
<본론>
1. 이스라엘 백성은 난관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애굽왕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수가 점점 많아지자 그들을 쇠잔하게 하려고 고역을 시켰고 아들을 낳으면 죽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은 극에 달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을 이끌고 애굽을 나오게 했습니다. 모세는 6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애굽왕 바로는 그들을 붙잡기 위해 병거 600승과 군사들을 이끌고 추격해왔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애굽으로 되돌아가 가려고 했는데 이제 애굽 추병이 추격해 오니 마지막 보루도 없어졌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인도해온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애굽에는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11절).
2. 모세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었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아라.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13-14절). 모세는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 내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기서 실패하게 하지 않으리라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가나안 땅에서 제사장 나라를 이루실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목적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부터 언약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거기에서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이 원하는 질서 속에서 살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열방 민족이 부러워 하는 나라를 세울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방 민족이 이스라엘의 번영을 보고 하나님에 대한 좋은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려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려는 목적을 가졌습니다 (출3:18, 19:6).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이 난관도 해결해 주시리라 믿은 것입니다.
3. 하나님은 기적으로 역사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선포대로 역사했습니다. 이스라엘 앞에서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들 뒤로 옮겼습니다. 구름이 이스라엘 백성 뒤에 서니 추격해 오던 애굽 추병들이 어두워 이스라엘 백성에게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바다에 내밀자 밤새도록 동풍이 불어 바닷물을 갈라져 마른 땅처럼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갈라진 바닷길로 건넜습니다. 애굽 추병도 그리로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이 병거 바퀴가 빠지게 하여 어지럽게 하므로 그들이 전진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습니다. 그 사이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를 다 건넜습니다. 모세가 새벽녘에 다시 손을 내밀자 동풍이 물어가 바닷물이 다시 합쳐졌습니다 (15-31절)
<결언>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난관을 만납니다. 하나님이 난관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애굽과 같은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에서 극심한 환난을 당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세상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육신적인 생활을 다시 돌아보지 않고 죄적인 상태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상황에 개입하여 역사하심을 경험할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가지신 목적을 바라보고 앞만 향해 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극한 고통이 있을 때 두려워 하지만 말고 하나님이 역사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통해 영광받으시려고 우리에 대한 선한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과정 속에서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분이 아닙니다. 민수기11:23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서서 구원을 보라
출애굽기 14:13-14
고달픈 인생, 험한 세상을 살다 보면 힘들고 고통스런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원한 실패도, 영원한 성공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번 성공했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하단 법도 없고, 한번 실패했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실패로 남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위대한 성공도 잘못 다루면 실패가 되고, 제아무리 처절한 실패도 잘 다루기만 하면 위대한 성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한국 사람들에게는 큰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이유는 우리는 땅도 작고, 키도 작고, 인구도 작고, 나라도 작고, 경제 규모도 작은 나라안에서 작은 것만 대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것을 그리워하면서도 큰 것을 멸시하는 이중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 나왔습니다.
나라 이름도 대한제국, 대한민국이라고 해서 크다는 「대(大)」자를 나라 이름 앞에 붙였습니다. 한강을 건너가는 다리 이름도 한강대교, 성산대교, 성수대교, 동호대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땅덩어리가 비교도 안될 만큼 큰 미국, 러시아, 중국, 브라질, 캐나다 같은 나라들은 나라 이름 앞에 크다는 「大」자를 넣지 않았습니다. 그뿐입니까? 한강 다리보다 더 큰 다리들이 세계 곳곳에 많습니다만 역시 「대」자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런가하면 큰 나라나 큰 것을 모멸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중국사람은 뙤놈, 짱꼴라, 미국사람은 양코배기, 흑인은 검둥이, 러시아사람은 오랑케, 로스케라고 불렀습니다. 키 큰 사람은 키 크고 속없다, 키만 멀대처럼 크다는 등 꼬집고 헐뜯었습니다. 「재벌」하면 마치 모두가 협잡이나 사기로 돈을 벌고 성공을 한 것처럼 여기는가 하면 「대형교회」하면 마치 부패의 온상인 것처럼 공격하고 매도하는 습성이 우리들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우린 여기서 큰 것을 공격하면 그 사람은 결코 큰 인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성공은 비난하면 그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바로 믿고, 주님을 사랑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들의 행위를 비난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들은 일평생 성공적 신앙생활이나 행복한 교회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공적 신앙생활,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데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 위해 오셨고, 죽으셨고, 부활 승천하셨고,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예수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요즘 모 신학대학 교수가 예수는 하나님도 구주도 아니다. 예수는 단순히 사람이었고, 예수 아니어도 구원이 있다는 해괴 망측한 글을 쓰고, 얘기를 해서 말썽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구원을 안 믿으면 구원도, 천당도 없어져 버립니다.
우리의 신앙대상은 오직 예수입니다. 그 예수를 사랑하고, 사모하고, 그리워하고, 섬기고, 높이고, 자랑해야 신앙이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앙이 성공해야 사업도, 인생도, 성공하는 것은 정해진 공식입니다.
둘째는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의 대화는 모두가 은밀하고, 그윽하고, 긍정적이고, 고백적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코 교회를 비난하거나 폄하하지 않습니다. 민주화 투쟁이 한창일 때, 그리고 군사독재 정권의 탄압이 한창일 때 국내에 머물며 단식투쟁하고, 감옥에 갇히면서 싸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미국으로 건너가 머물면서 군사정권을 돕지 말라, 미군을 철수시키라며 떠들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국내에서 고통받고 압제받는 사람들이 훨씬 더 훌륭한 투사들이었습니다.
자기나라를 비하하고 욕하는 것은 결코 애국적 발상이 아닙니다. 교회를 비난하고 폄하하는 것은 결코 신앙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유는 교회라는 모판에서 신앙이 싹트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교역자와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제 아버님은 소시민중의 소시민이셨습니다. 제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남겨 놓으신 것은 과부 한 사람, 철없는 외아들, 가난, 그리고 평소 보시던 책 한 권뿐이었습니다. 양복 한번 입어보지 못하셨고, 구두도 신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자식된 입장에서 그런 정도의 아버지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아버지를 단 한번도 "내 아버지가 아니다"라든지, "있으나마나한 아버지"라든지, "차라리 없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라든지 하는 생각을 해 본 일이 없습니다. 미남도 아니고,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재벌도 아니셨던 아버님을 저는 지금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없이 내가 어떻게 태어납니까? 어머니 없이 내가 어떻게 존재합니까?
교역자가 위대한 인물이어야 존경할 수 있다든지, 특성이 있어 따른다는 것은 큰 문제가 못됩니다. 내 영혼을 돌보는 사람으로서 존경하고, 따르고, 협력할 때 내 신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있는 우상을 섬기는 것만으로 부족해서 황금덩이를 모아 우상을 만들고 숭배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사이가 나빴습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그들은 광야를 40년 동안이나 방황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숱한 고생을 겪어야 했습니다.
본문의 경우도 그런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하긴 했지만 바로 왕의 군대가 추격작전을 시작하면서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추격해 오는 바로의 군대, 앞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 여기서 그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뒤쫓아오는 바로의 기병대에게 붙잡혀 죽느냐 아니면 일제히 홍해 바다로 뛰어 들어 집단 자살을 하느냐? 그러나 문제는 창에 찔려 죽고 싶지도 않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고 싶지도 않다는데 있었습니다. 살고 싶은데 살길이 없었습니다.
여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잘살고 싶은데 잘살 수 없고, 떼돈을 벌어 떵떵거리고 싶은데 돈이 안 벌리고, 잘난척하며 살고 싶은데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지도자 인척하고 싶은데 따라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곧 현대인의 홍해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14:10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했다"고 했고, 11절을 보면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려느냐"라고 했고, 12절을 보면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것 보다 애굽에서 애굽사람을 섬기는 쪽이 나을 뻔했다"며 소리 높여 원망했습니다. 어이없고 기가 막힐 일은 기적을 보고도 기적을 믿지 못하고, 사랑을 체험했으면서도 원망하는 그들의 태도였습니다.
우린 여기서 모세의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13절을 보면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다시는 보지 못하리라"고 했고, 14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했습니다.
세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 있으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렵고 겁나면 안정감을 잃고 서성거리거나 당황해 합니다. `두려워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의 뜻은 겁내거나 당황하지 말고 하던 일을 흔연스럽게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서고 설치면 하나님은 잠잠하시고, 내가 덤비고 좌지우지하면 하나님은 침묵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이사야 43:5을 보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했고, 요14:1에서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5:7에서 사도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 나는 가만히 서서 바라보면 됩니다. 막을 필요도 없고, 반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막아서고 반대하면 나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맙니다.
둘째, 구원을 보라.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영혼도 구원받고, 육체도 구원받고, 환경도 구원받는 것을 전인 구원이라고 합니다. 사람 몸의 신경조직은 크게 두 가지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내 마음대로 팔다리를 움직이는 체신경이 있고,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자율 신경이 있습니다. 체온, 맥박, 심장박동, 소화기 운동, 혈압, 뇌파 등은 내 마음대로 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팔을 위로 올려야지`라고 마음먹는 순간 팔을 위로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맥박 빨리 뛰게 해야지`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갑자기 맥박이 빨리 뛰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육체 구조도 내 마음대로 안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 몸인데 왜 마음대로 못합니까? 내 몸도 매 맘대로 못하는데 다른 것을 내 맘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무슨 능력으로 영혼도 구원하고, 육체도 구원하고, 거기다 환경까지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앞에는 홍해, 뒤에는 바로의 기병대, 절박한 위기 앞에서 모세가 본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을 바라봅시다.
셋째,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왜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창도, 활도, 칼도 없지만 하나님이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며, 구원이시며, 반석이시며, 요새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누구도,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옛날 전쟁은 몸으로 하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투구를 쓰고, 방패를 들고, 성을 쌓아 올려 적의 침략을 막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밖 주변은 큰 강을 파서 물이 흐르게 해 적의 침입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런 것으론 안됩니다. 전투기로 하늘에서 쏘아대고 터트립니다. 미사일을 반사하고 핵폭탄을 떨어뜨립니다. 50미터 지하 벙커도 뚫고 들어가는 폭탄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힘에 견줄 수는 없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나약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고 해서 힘없는 예수로 보았다간 큰 일 납니다. 요한복음 16:33에서 주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승리하신 하나님, 싸워 이기시는 주님,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높이고 사랑하고 증거합시다.
날마다 영원히 주를 높이고 찬양합시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 하리이다
왕이신 나의 예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 하리이다
왕이신 나의 성령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 하리이다" 아멘.
출처: 여호와닛시♥ 글쓴이: 주님의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