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숫물 소리
이 수 영
아파트에서는 낙숫물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아파트뿐만 아니라 도시의 대부분의 추녀 없는 건물에서는 낙숫물이 사라졌다. 지붕 혹은 옥상에서부터 물받이를 거쳐 홈통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은 소리도 없고 볼 수도 없다. 비가 제법 오는 날, 그 홈통에 귀를 가까이 대고 들어야 돌돌돌 물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낙숫물 소리와는 너무 다르다.
아파트에서는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거나 내려다보아야 겨우 알 수 있다. 그것도 얼마나 왔는지 그게 이슬비인지 가랑비인지 아니면 싸락눈인지 진눈깨비인지 구별하기가 어렵다. 무심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가 ‘아차! 비 오는 걸 몰랐구나.’ 우산을 가지러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18층까지 오르내릴 때 느끼는 황당함이란, 그리고 출근 시간에 쫒기는 그 짜증스러움이란.
나는 추녀가 있는 시골집에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꿈이었다.
현실에서, 아내와 아이들은 늘 아파트가 꿈이었고 그것도 평수가 넓을수록 만족해했다. 솔직히 나도 그랬다. 그런 속에도 어릴 적 살았던 한옥에서의 추억과 낙숫물 소리에 대한 그리움은 늘 가슴 언저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60년대와 70년대, 시골학교를 전전할 때는 어디를 가나 추녀가 있는 집이었다. 섬돌에서 우산을 펴 들면 뚜닥뚜닥 제법 굵고 무게 있는 낙숫물을 받으며 마당을 나서는 낭만이 있었다. 때론 그 우산 속에 희뿌연 안개를 동반하기도 했고 세찬 비바람에 허둥대기도 했지만, 그건 한 폭의 수채화였다.
80년대 초, D시에 전근 와서도 얼마 동안은 단칸 셋방을 전전했다. 집의 구조는 대개 한옥이었다. 한옥이라고는 하지만 시골의 한옥과는 달랐다. 추녀에는 물받이가 달리고, 물은 홈통을 통해 내려왔다. 간혹 기왓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낙숫물이 있는 집에서도 마당을 콘크리트로 덮어 놓은 탓에 낙숫물 소리는 부드럽지가 못했다. 그리고 물이 떨어지면서 분수처럼 튕겨나가는 물의 군무라든지, 물이 떨어지는 자리에 남은 작은 자갈돌의 반짝거림과 그것이 낙숫물과 어우러지면서 내는 미세한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학교에 출근해서 교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흙으로 덮여있는 운동장에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와 교정의 수목과 화단의 꽃잎, 그리고 작은 연못에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는 걸 좋아했다. 그건 자연이 만들어 내는 교향곡이었다.
사람들은 낙숫물 소리 같은 원초적인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 소리에 동화되어 살아왔다. 신체의 리듬도, 정신적 안정도 그런 자연의 소리와 함께 했을 때 평온함을 느껴왔다.
그 낙숫물 소리가 나는 곳에는 꽃잎과 풀잎에 맺히는 이슬방울이 옥색구슬처럼 빛났고, 땅에서 튕겨오르는 물방울에 섞인 흙과 모래가 만들어 내는 자연의 그림이 있었다.
나뭇가지에는 후줄근히 젖은 깃털의 물방울을 툴툴 털어내는 앙증맞은 참새나 곤줄박이의 날갯짓이 있었고, 마당에는 그 모든 자연현상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주인에게 재롱을 떠는 강아지가 있었다.
어릴 적 시골집은 참새 소리에 새벽잠을 깨고, 대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계절을 느꼈다. 방아 찧는 소리와 어머니의 키질 소리에 삶의 고단함을 배우고, 비오는 날 모처럼 찾아온 어머니의 쉼터에 낙숫물 소리를 자장가로 곤하게 낮잠을 즐기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지금 눈을 감고, 내 고향 들머리에 있었던 원두막에 앉아 있다. 원두막에서 듣는 낙숫물 소리는 때론 폭포소리로, 때론 곰삭아 맛이든 묵은 된장처럼 정이든 오래 된 친구의 걸쭉한 목소리가 되어 내 가슴으로 온다. 나는 그와 함께 왕소금 안주에 막걸리 한 잔을 마시며 세상사를 논하던 그날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풍경이 스르르 사라진 고요와 적막 속에서 내 마음은 덧없는 생각으로 시끄럽다. 이 모두 낙숫물 소리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낙숫물 소리!
그건 , 속으로 속으로만 삭이다 자기도 모르게 뚜닥뚜닥 떨어지는 슬픔의 눈물일수도 있고, 심장이 쿵쾅거리도록 행복에 겨워 흘리는 환희의 눈물일수도 있다. 그 어느 것이든 자기만이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소리다. 나는 아직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에 살고 싶다.
2016. 4. 22
첫댓글 고향에 가면 선친이 살던 스레트 집이 아직 있습니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수물이 머리위에 떨어지면 귀찮기만 합니다. 인심이 메말라 가니 낙수물의 정서도 시들해 지는가 봅니다. 낙수물의 옛 정취를 다시 찾아볼가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어릴적 살던 고향마을과 시골의 정든집이 떠오르는 정겨운 글 감사합니다.
지금은 보기가 쉽지 않은 낙숫물 소리. 엣날을 생각하며 잘 읽었습니다. 최상순드림
시골 방안에서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소리를 듣던 옛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글입니다. 정겨운 초가집 처마에서 타고 내리는 그 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낭만적이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낙숫물, 초갓집, 보릿고개 연결이 됩니다. 어릴적 빗물이 맺혀 똑똑 떨어지는 고향집 추녀가 그립네요. 모두가 떠나버린
빈터에 세월에 뚜께만 쌓여있네요.
비는내리는 장소에 따라 소리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지요. 선생님의 글 읽으며 그 옛날 그 곳에 살던 분들과 만나고 온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