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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한응 목사의 설교나눔 원문보기 글쓴이: 아모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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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감리회 삽교교회 원로목사 박 한 응(朴 漢 應)H.P 010-5452-4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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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10. 주일낮예배 설교문
본 문 : 마태복음 16 : 21 - 28
제 목 : 주님을 따르는 자의 자격 기준
찬 송 : 311, 323, 324, 339, 341, 440, 461.
할렐루야!!
오늘이 3월 둘째주일이지만 3월이 시작된 지도 열흘이 지났습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이 시간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3월은 봄이 시작되는 달입니다. 그리고 3월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기 위한 고난이 시작되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계절적으로는 추웠던 겨울이 지나가고 새롭게 따뜻한 계절을 맞이하게 되어 좋기도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자숙하고 경건된 생활을 하여야 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의 표현을 여러 가지로 나타내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우리들에게 주신 자연입니다. 하나님은 이 자연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주시는 것을 나타내 주었습니다. 때가 되면 정확하게 계절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면 그 계절에 따라서 자연의 모습이 변화합니다. 한겨울 앙상하던 나뭇가지들이 봄이 되면 저마다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꽃과 새싹들을 피웁니다.
(창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봄이 지나 여름이 되면 봄에 피워온 신록들은 뜨거운 폭염에 짙은 녹음으로 변하고 또 가을에는 열매를 맺어 풍성한 계절이 되며 겨울에는 매서운 추위에 모든 식물들이 잎사귀들을 떨어뜨리고 겨울잠을 자고 하늘과 땅도 꽁꽁 얼어붙는 계절이 됩니다. 이와 같은 계절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표현이며 사랑의 송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 계절을 찬양하기를
(시19:1-6)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좋은 계절에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시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항상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오늘은「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 주님께서 겪으신 일들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또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보면 지금까지 예수님은 당신이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오신 메시야임을 드러내지 않으시다가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로 믿느냐?”는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라는 고백을 한 후에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을 처음으로 밝히 말씀하셨습니다.(21-23절) 그리고 이때부터 십자가의 고난을 서서히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지금까지 비밀에 붙여졌던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신분이 공개적으로 드러난 획기적인 사건이요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한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진실 된 그리스도의 제자도(disciple-ship)를 설명하시며 이러한 제자 도에 따라 행하는 자들에게 임하게 된 하나님의 보상과 영광을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 된 제자란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self-denial) 자기의 본분을 다하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이방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후 3일 만에 부활하시리라고 말씀을 하셨을 때 성격이 성급한 베드로는 주님의 그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 속에는 ‘꼭 그렇게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뜻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즉 베드로는 주님께서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으나 하나님의 아들이 하찮은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와 같은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말속에는 남다른 의협심과 충성심을 가진 베드로가 목숨을 걸고라도 주님께는 해가 미치지 않게 하겠다는 결심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사역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십자가의 죽음과 대속하신 후에 얻어지는 구원과 영생을 상징하는 부활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면에서는 실로 충성스러운 제자였지만 예수님의 사역을 사람의 일로 생각하는 무지함을 범하여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 라고 모진 책망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 자신이 사단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 뒤에 바짝 붙어서 호시탐탐 베드로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마귀를 물리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마귀는 처음으로 만나는 마귀가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일을 방해를 하였고, 에덴동산에서는 아담과 하와를 여지없이 타락시켰으며,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셨을 때 예수님을 시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실패한 사탄은 베드로를 통하여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을 방해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도 실패한 사탄은 후에 가롯 유다를 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무리 사랑하는 제자라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고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방해가 될 때에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고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베드로나 가롯유다는 똑같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가롯유다도 베드로 못지않게 예수님께 신임을 받은 제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사탄이 그를 시험할 때 빨리 깨닫고 돌이켰지만 가롯유다는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탄은 오늘날도 우리들을 수도 없이 유혹하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이 사탄의 시험을 베드로와 같이 이겨야 합니다. 이기지 못하면 결국 가롯유다와 같이 되고 맙니다. 한 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고 같은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생활을 함께 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베드로가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가롯유다가 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일이 있은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른 제자의 길(道)을 가르쳐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올바른 도리를 가르쳐 주시게 된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하시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필수 조건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많은 조건들이 있습니다. 어느 회사에 들어가려고 해도 그 회사의 사원으로서의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기술자도, 의사도, 목사도, 교인도 모두 조건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꼭 갖추어야 할 조건들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받기를 바랍니다.
1. 첫 번째 조건은 “자기를 부인하라” 고 하였습니다.
(본문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라고 하였는데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잘 참아내는 인내심’ 이나 ‘극기’ 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이 말씀에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아주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이기주의적인 사고방식과 편의주의와 자기 체면과 자기의 안일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나와 주님 둘 중에 주님을 선택한다는 것이고 나의 일과 주님의 일 중에 주님의 일을 먼저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왜 주님의 뜻대로 살지를 못합니까? 왜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키지 못합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너희가 내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면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과, 신상의 건강의 복과, 자손 천대까지의 축복을 주신다고 약속을 해 주셨는데 왜 지키지를 못합니까? 바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왜 주일을 거룩하게 성수(聖守)하지 못하고,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고, 예배시간을 지키지 못합니까? 바로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웁니까? 참고 또 참고, 그래서 속병이 생겨도 참고 견디고, 주님만을 위하여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머리 둘 곳도 없이 지내셨고, 또 우리가 지은 허물과 죄악 때문에 성체를 상하셨습니다. 우리의 잘못 때문에 매를 맞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내 욕심대로 내 고집대로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지금까지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인간적인 것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빌3:4-6)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또 말하기를
(빌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2. 두 번째 조건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1) 십자가를 지되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찬송가 339장>
1.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2.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늘 지고 가리다
그 면류관을 쓰려고 저 천국 가겠네 <아멘>
십자가는 영광이 아닙니다. 고통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고통과 죽음까지라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끝까지 참고 감수를 하여야 합니다.
세상에서 돈 벌려고 얼마나 고생을 합니까?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새벽같이 일어나 밤중까지 일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공부해서 학위를 받으려고 얼마나 고생들을 합니까? 하물며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는데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남의 것 넘보지도 말고 자기 것 벗으려고도 하면 안 됩니다.
<예> 외경의 베드로행전 35장을 보면 로마에서 기독교를 박해할 때 베드로는 여러 성도들이 ‘지금은 베드로 사도께서 죽을 때가 아닙니다. 사도님은 더 살아서 많은 성도들을 가르치고 돌보아야 합니다’라고 권고하여 로마의 성을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이른 새벽 변장을 하고 막 성문을 빠져 나갔을 때 앞에서 주님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네가 지지 않으려는 십자가를 지려고 로마로 간다” 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 베드로는 깜짝 놀라 “아닙니다. 십자가는 제가 지겠습니다. 주님은 한 번 지신 것으로도 족합니다” 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 체포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를 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외경 베드로행전 제35장~37장)
다 같이 찬송 한절을 부르겠습니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아-멘!
(2) 십자가는 날마다 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루 이틀 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1년, 2년 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해야 합니다. 신앙은 결코 일회용이 아닙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앞으로 전진하여 나가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계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라”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내일도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계신 천국을 향하여 전진하여 반드시 주님 앞에 갈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3. 세 번째 조건은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까지 버려야 합니다.
(본문16:25-26)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고 또 흠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숨까지도 주님을 위해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극심한 고통과 수치를 당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셨고 영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꺼이 주님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목숨까지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목숨이란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숨이 바로 주님 때문에 얻은 것이므로 이것도 주님을 위해서 버릴 수 있는 용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우리는 지난 주간에 3.1절을 지냈습니다. 3.1절하면 많은 애국지사들을 생각할 수가 있지만 제일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유관순 열사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그의 나이 18살 때에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 순국을 하였는데 그의 남긴 말 중에 “나는 나라를 위하여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한 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분명히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영생입니다. 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나의 목숨을 주님께 바칠 때에 비로소 얻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숨은 오르지 주님만을 위해서 드려져야 합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나의 유일한 목숨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주님을 위해서 지금 목숨까지 드릴 수 있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성도로서 주님의 뜻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또 내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목숨까지도 주님을 위해서 바치는 사람에게 주님은 약속하시기를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2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주님의 사역이 어떻게 완성이 될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시는 길을 막았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감정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감정적이고 세상적인 관점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는커녕 주님의 사역을 방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지금까지 주님의 사역을 방해한 적은 없습니까? 자신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는 책망 받을 일은 없습니까? 가롯유다는 사단이 들어가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또 주님으로부터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책망들을 말이나 일은 하지 않았는지 자신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들은 주님을 위해서 목숨도 버릴 수 있는 믿음이 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종종 착각을 잘합니다. 무슨 일을 자기 생각대로 하다가 잘 안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고 또 무슨 생각을 자기 마음대로 해 놓고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 주님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것을 이루어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 주님이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알리는 말씀을 전합니다.
할렐루야!!
부족한 저의 설교를 사랑해 주시는 전국, 세계의 모든 동역자님들과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알려 드립니다. 저는 설교문을 작성함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맞추려고도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주 수요일 오후에는 나의 카페를 비롯하여 몇몇 기독교 사이트에 업로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황당한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설교는 누구나 사용하실 수 있고 인용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설교를 자신의 사이트나 다른 곳에 자신의 설교인양 전제를 하여서 이것을 보신 분들이 내가 그것을 보고 도용을 하였다고 오히려 나를 책망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안되겠습니다. 나의 부족한 설교를 인용도 하시고 전문 사용을 하셔도 좋으나 다른 곳에 전제를 하는 것은 삼가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만약 앞으로 이와 같은 사례가 또 다시 발생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법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항상 부족한 저를 사랑하는 동역자님들과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임마누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