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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주님을 맞이한 요셉 마태복음 1:18-25
(설교자: 마경훈 목사 비전교회)
이천 년 전,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예수님께서 육신을 빌리신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요셉입니다.
요셉은 약혼녀인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히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주의 사자의 현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임신한 마리아를 받아드립니다. 그리고 초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주님을 맞이한 요셉”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가 되었던 요셉이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과 마리아를 맞이하면서 일어난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령의 역사를 받아드리라(18-20절).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은 하였으나 동거하지 않았습니다. 그 둘은 혼전 순결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리아가 임신한 것입니다. 18절에 보니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에게는 마리아의 임신이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정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꿈에 주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임신의 비밀에 관하여 말해주었습니다. 20절에 보면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4절에 보면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였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요셉은 주의 사자의 현몽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성령의 역사로 잉태 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성령의 역사를 받아드렸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고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건강한 신앙생활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 성령님은 마음을 열고 성령님의 일하심을 받아드리는 사람에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하시는 일들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믿음을 주십니다.
고전 12:3입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아멘이죠?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이 고백은 거짓된 고백이 아닙니다.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그렇게 믿습니다. 왜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 생긴 것일까요? 성령님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은혜인 것입니다.
엡 2:8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 누구이신가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예수님이 구세주로 믿어집니다. 그 결과 우리는 구원의 선물을 받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입니다.
2)예수님의 성품을 주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내면에 역사하시면 열매가 열립니다. 그 열매를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데, 자세히 보면 성령의 열매는 바로 주님의 성품입니다. 갈 5:22-23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는 이유는 믿는 자 안에 오신 성령님께서 믿는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의 성품의 열매를 맺으시기 때문입니다.
롬 11:17을 봅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이 말씀은 본래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씀이지만 열매에 관해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돌감람나무의 가지는 당연히 돌감람나무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돌감람나무의 가지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였습니다. 그러면 그 가지는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공급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돌감람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참감람나무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자신의 인격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받아드리면 성령님은 우리를 통해서 우리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짜로 만난 사람은 인격이 변화됩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예수님의 성품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성품을 주십니다.
3) 예수님의 능력을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성령의 9가지 은사를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은사를 주셔서 예수님에게 나타났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게 하십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성령의 은사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9가지 은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이 다윗에게 역사하실 때는 전쟁의 능력, 문학의 능력, 음악의 능력, 정치의 능력 등이 나타났습니다.
사 11:2을 보겠습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성령님이 예수님에게 역사하실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에게 역사하셨던 성령님은 오순절을 기점으로 공식적으로 남종과 여종들, 즉 만민에게 역사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오셔서 지혜와 총명을 주십니다. 모략과 재능을 주십니다.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함을 주십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게 하십니다.
4) 인도하십니다.
롬 8:14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님은 인도의 영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증거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성령으로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하여 감동하십니다. 감동이라는 것은 마음의 움직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을 터치하셔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십니다. 성령의 감동은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눅 2:27을 보면 예수님을 기다렸던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성전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거기서 말한 성령의 감동을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개정판에서는 ‘성령의 인도’로 번역을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하여 감동하시고 또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꿈과 환상을 주십니다. 또 마음의 소원을 주십니다. 빌 2:13을 보겠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하여 우리 마음에 소원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소원을 따라가다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제 마음에 소원이 있습니다. 저는 그 소원이 하나님이 주신 소원이라고 믿습니다. 교회 땅이 567평입니다. 그린벨트가 해제되고, 건축 규제가 풀어지고 지역이 개발 되면서 건설사 대토와 건축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제가 소원하는 것은 땅이나 건물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교회에서 위비캠프를 하고 싶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에게 한 학기에 100만 원 정도만 받고 먹여주고 재워주며 마음껏 공부하게 하고 싶습니다. 또 만 19살이 되어 보육원에서 나온 아이들이 거할 처소를 제공하고 그 아이들을 케어하고 싶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청년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이 정말로 주님이 주신 소원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기 위하여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소원의 출처를 따져봐야 합니다. ‘내 욕망이 만들어낸 소원인가? 아니면 성령님께서 나를 인도하시기 위하여 내 속에 넣어주신 소원인가?’ 분별해야 합니다. 내 욕망이 만들어낸 소원이라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주신 소원이라면 그 소원에 헌신해야 합니다.
따라합시다. “위대한 비전이 위대한 인생을 만든다” 우리는 위대한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비전을 받아야 합니다. 큰 소원이 아니라 위대한 성령님이 주신 소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따라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 속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타인을 배려하라(19절).
19절에 보면 요셉은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셉 입장에서는 마리아를 배려한 행위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율법에 의하면 혼외정사를 한 사람은 죽이게 되어있습니다.
저는 요셉의 배려심이 주님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잠 10:12입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배려심입니다. 주님의 배려심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성육신입니다. 주님이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배려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려면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든지 하나님이 우리처럼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처럼 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입니다. 요일 5:20입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십니다. 딤전 2:5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십니다. 인간을 배려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행위가 성육신입니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작은 사람은 자기만을 생각합니다. 작은 사람은 남이야 마음이 상하든 말든 개의치 않습니다. 큰 사람은 마음이 넓기 때문에 넓은 마음으로 상대를 받아줍니다. 작은 사람은 마음이 좁기 때문에 상대를 받아줄 수 없습니다.
피아노를 잘 치지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한 피아니스트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연주회를 앞두고 ‘리스트의 제자, ○○○ 피아니스트의 연주회’라는 광고를 냈습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제자가 연주회를 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리스트가 여행 차 그 도시에 왔다가 그 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 내 제자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라는 제자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리스트가 그 피아니스트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가 리스트인데, 언제 내게 배웠지요?” 그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사실은 제가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를 알아주지 않아 고명하신 선생님의 제자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래야 연주회에 사람들이 모일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리스트가 “이 나쁜 사람 같으니라고!”하며 꾸지람을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리스트는 “그러면 피아노를 한 번 쳐 보겠소?”라고 하더니 잘된 부분과 잘못된 부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내게 배웠으니 당신은 진짜 내 제자가 되었소. 떳떳하게 연주를 하시오.” 그래서 연주회가 예정대로 열렸고, 리스트의 제자가 연주회를 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 무명의 피아니스트가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크게 탄력을 얻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배려하는 리스트는 마음이 큰 사람입니다.
남을 배려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는 사람입니다. 상대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가 많든 적든, 사회적인 지위가 있든 없든, 경제력이 있든 없든, 많이 배운 사람이든 배우지 못한 사람이든,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고전 13:5에 보면 사랑의 특징 중에 하나가 예의입니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상대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을 본질적으로 알라(21-23절).
예수님을 알아야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다니지만 예수님을 본질적으로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교 집안에 너무나 개구쟁이가 학교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부모를 불러 말했습니다. “이 아이를 우리는 가르칠 수 없으니 데려 가십시오. 아이들을 때려서 병원에 데려가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학교 유리창을 모조리 깨뜨렸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내 방 앞에 초칠을 해서 내가 넘어져 머리가 깨질 뻔하였습니다. 데리고 가십시오.” 그 아이는 퇴학을 당했습니다. 다른 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는 학교마다 그 모양이었습니다. 이제 갈 학교가 하나 남았는데 기독교 학교였습니다. 유대교 집안이라 기독교 학교에 보낼 수가 없었으나 학교가 하나 밖에 안 남았기에 할 수 없이 그 학교에 보냈습니다. 그 학교마저 퇴학당하면 이제 교육을 끝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부모를 불렀습니다. 부모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학교에 갔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일등감이요. 이렇게 착실한 아이를 어떻게 길렀나요? 상을 줘야 합니다.” 아이의 부모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집으로 돌아 와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너 어떻게 된 것이니?”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그 학교에 갔더니 어떤 사람이 십자가에 매달려 피투성이가 되었어.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잘못 하면 저렇게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니 아찔했어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만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 아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고는 학교에서 말썽부리면 그렇게 된다고 오해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오해들이 교인들에게도 많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요셉은 꿈속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사자가 주는 메시지를 통해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이 마리아가 어떤 놈하고 놀아나서 원치 않게 잉태된 불행의 씨앗이라는 생각을 벗어버렸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본질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게 되었을까요?
1)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메시야이십니다.
21절에 보면 천사는 요셉에게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이름의 뜻을 알려주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관한 지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행하신 가장 위대한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마땅히 지옥에 가야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고난당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들에 관하여 예언했습니다. 그 중에서 사 53:5을 보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찔리시고 상하시고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실 것에 관한 예언입니다. 주님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이 세상에 오셔서 찔리시고 상하시고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사하시고,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가 건강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2)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메시야이십니다.
한 사람이 산길을 가다가 계곡을 가로지르는 줄다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만일 줄다리가 끊어지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을 만큼 계곡은 깊었습니다. 줄다리는 약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줄다리를 무사히 건너게 해주신다면 제가 갖고 있는 전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하고 마음을 다짐하면서 서서히 건너기 시작합니다. 삐꺽거리는 다리의 중간쯤 왔을 때, 그는 마음을 바꿉니다. “하나님 제가 갖고 있는 재산의 절반을 틀림없이 바치겠습니다.” 이제 거의 맞은편 언덕으로 가까이 왔을 때 그는 “끝까지 건너면 제 재산의 1/4을 바치겠습니다.”라로 바꾸었습니다. 이윽고 무사히 건너자 땀을 닦으며 “하나님, 그런 약속은 없는 걸로 하겠습니다.”하며 스스로 약속을 깼습니다.
사람은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의 약속하셨고 신약에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철저히 지키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메시야에 대한 약속입니다.
22절에 보면 예수님이 동정녀 탄생을 하셨던 이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동정녀 탄생을 하신 것입니다. 요셉은 천사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책입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예수님의 그림자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는 실체로 오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요 5:39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책입니다. 우리는 구약을 통해서 예수님의 그림자를 보고, 신약을 통해서 예수님을 실체적으로 봅니다.
3)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3절에 보니 예수님의 다른 이름이 나옵니다.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예수님이 오신 것은 하나님이 오신 것이라고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 9:6은 초림하시는 예수님에 관한 예언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아기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분이 초림의 주님, 즉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어깨에 정사를 메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를 통치자이십니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기묘자이십니다. 놀라운 분이십니다. wonderful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모사이십니다. 참된 지혜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주적인 전략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또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전능자이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천지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영원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은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본질적으로 알았습니다.
4.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라(24-25절).
믿음은 순종이고 순종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순종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순종으로 자신의 믿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사자를 통해서 요셉에게 명하셨고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에 요셉에게는 특별한 꿈이 몇 번 있었습니다. 요셉은 꿈을 통하여 주의 사자의 지시를 받았고 그 지시에 순종했습니다. 20절에 보면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예수님에 관하여 말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요셉이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마 2:13입니다.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돌아간 후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애굽으로 가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요셉은 마리아와 예수님을 데리고 밤에 애굽으로 피하였습니다. 그때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았으면 헤롯의 칼에 의하여 아기 예수님이 위험을 당할 뻔하였습니다. 마 2:19-20입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은 또 다시 주의 사자의 분부를 받았고 그 지시대로 순종해서 이스라엘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참된 예배자는 교회에 나와서 예배만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삼상 15:22-23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 왕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하나님은 번제와 다른 제사보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순종이 제물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완고하게 거역하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를 버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몸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라고 합니다. 롬 12:1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신앙생활은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참된 신앙생활은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나를 드리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주님을 맞이한 요셉을 통해서 몇 가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1. 성령의 역사를 받아드리라.
1) 믿음을 주십니다.
2)예수님의 성품을 주십니다.
3) 예수님의 능력을 주십니다.
4) 인도하십니다.
2. 타인을 배려하라.
3. 예수님을 본질적으로 알라.
1)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메시야이십니다.
2)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메시야이십니다.
3)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