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요한 세례자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긴 시간의 구약을 마감하고 신약에로 하느님의 백성을 이끈 마지막 그리고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또한 말과 행동에 권위가 있었고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메시아 예수님을 태중에서부터 알아보고 기뻐하던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과 같이 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그 출신과 어려운 환경을 이겨낸 성공한 사람이라고도 불릴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같은 아버지와 할머니 같을 뿐만 아니라 아이를 못 낳을 수 없었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 출신은 가난한 유다 산골이었고, 고작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 부모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루카 1,6)’이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개천에서 용(龍)이 되게 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결과적으로 말하면 ‘억울한 사람’이었습니다. 소박하다 못해 가난한 삶을 자청해 살면서도 엄청난 존경과 신뢰를 많은 사람들에게서 받았지만, 막강한 권력과 권세를 지닌 임금의 자존심 때문에 결국 참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도 세상의 힘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약자였습니다.
요한 세례자의 인생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을 봅니다. 시대적 문화적 상황에 의해 정도의 차이가 있었겠지만 우리도 태어날 때에 부모나 친척이나 이웃에게서 기대와 희망, 기쁨과 감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대단히 출세한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요한 세례자처럼 존경과 신뢰를 많은 사람에게 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게다가 신앙인이지만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처럼 훌륭한 신심을 지닌 그런 부모의 모습도 아직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넋두리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이사 49,4)”
정말 그럴까요? 정말 그렇게 허무하고 허망하게 끝날 우리들의 인생일까요?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우리 탄생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그 답을 우리는 요한의 죽음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이사 49,1.4)”
요한은 허무하고 허망하게 삶을 마무리했지만 그의 삶의 열매는 하느님께 있었습니다. 생명을 주신 분께 생명을 받은 이의 존재의 의미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그 무엇이 아닙니다. 우리의 권리, 우리의 보상, 우리의 의미, 우리의 가치, 우리의 삶의 열매는 존재와 그 존재에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내 삶이 왜 시작되었고 이 궁핍함 속에서도 살아야 하고, 이 상실과 쇠약에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