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일태 한국해양대학교 국제무역 경제학부
겸임교수 | |
매월 음력 초하루, 우리 집은 새벽부터 분주하다. 아들과 둘이 알아서 아침밥을 차려 먹으라는 말만 남기고 아내가 부리나케 절에 가기
때문이다.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가족 모두를 위한 일인데 만들어 놓은 밥도 챙겨먹지 못하느냐고 핀잔하기 일쑤다.
아내는 절에 가서 부처님께 가정의 평안과 가족들의 소망을 빈다고 한다. ‘빈다’는 말은 국어사전에도 없는 단어다. 아마 원형인
‘비다’는 빌다와 비우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지은 죄가 없으니 빌러 가지는 않을 것이고, 비우러 간다고 하기는 뭔가 좀 석연치 않다.
아내는 절에 빌러가는 것일까 비우러 가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아내가 열성으로 절에 가는 것을 권장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우선 종교의 자유가 있는 세상에서 종교에
대한 논쟁을 하고 싶지도 않고, 무엇보다 절에 갔다 온 아내의 얼굴에는 항상 행복함이 묻어있기에 이만하면 가정의 평안 기원은 이룬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다.
나는 중학교를 절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다. 학생들의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학생들은 매주 한 시간씩 불교 교리를 배워야만 했다.
담당교사가 교장선생님이라 수업은 엄격했고 또 열심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오십 년이 넘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인간의 육신은근본적으로 水, 風, 火, 土,로 이루어져 있기에 죽으면
본래의 원소로 돌아간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인간이 가진 생, 노, 병, 사의 고통으로부터 해방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부처님은 왕위 계승권까지
버리고 출가했다는 것, 보리수나무 밑에서 고행하다 마침내 깨우침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는 것과 그 깨우침이 욕심을 버리는 것이라는 것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하여 믿음과 신앙에 상관없이 나의 삶에 큰 지침서가 되었다.
늘 하시던 말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의상과 원효는 당나라 유학길에 같이 노숙을 하다 한밤중에 마신 꿀맛 같은 물이 해골에
고인 물임을 알고는 깨우침을 얻은 원효는 의상과 헤어져 혼자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다는 일화며, 인생은 고해라 그 고해는 번뇌에서 시작되며
번뇌의 원인인 욕심을 버리면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고 했다. 욕심을 불교에서는 108개로 분류하여 백팔번뇌라고 하면서 모든 화가 욕심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절에 오는 사람들이 복을 빌러 온다는 것은 불교의 교리를 모르는 것이라면서 불교는 기복신앙이 아니라고 했다.
빌다(빈다)라는 말을 두고 사람들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절에 와서 비느냐고, 빌 일을 만들지 말든지, 빌 일이 있다면 빌어야할 사람을 찾아가서
빌면 되지 왜 절에서 그러고 있는지 나무라시면서 절에는 빌러오는 곳이 아니라 비우러 오는 곳이라는 말은 수십 번은 족히 하셨다.
요즘 아내는 절에 가서 아들이 임용고시에 합격하기를 간절하게 빈다. 매일 새벽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비손하던 할머니의
모습과 똑같다. 비는 것이 일상화되어버린 할머니는 갓 태어난 손자가 젖을 잘 먹지 않아도 삼신할머니께 빌고, 감기에 걸려도 바가지를 엎어놓고
빌었다. 모두 당신의 잘못으로 생긴 일이라며 당신을 벌주고 자손에게는 해가 없도록 해 달라고 애원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죄라면 모르는 죄가 가장 큰 죄입니다. 자식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나를
벌주십시오.” 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지 않았을까. 빌어서라도 자식이 잘된다면 얼마든지 빌겠다는 마음, 자신의 욕심을 비워서 자식에게 채우는 일이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조상의 천도를 비는 것 또한 조상이 극락왕생을 못하고 구천에 떠도는 것이 자신의 허물로 여겨 대신 벌을 받고 조상은
극락왕생하도록 해주십사 애원하는 것이리라.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마음을 비우는 것과 자식이나 조상의 행복을 위해 허물을 뒤집어쓰고 잘못을 비는 것은 이기심과 이타심의 차이가
아닐까? 절에 가서 비우고 오든 다 나의 잘못이라고 우기고 빌고 오든 모두가 자비로운 모성애가 아닐까. 부처님께 빌러가든 욕심을 비우고 오든
무슨 상관이랴. 굳이 따진다면 대책도 없이 빌지도 비우지도 않는 내가 무심할
뿐이다.
기사입력: 2017/07/03 [15:29] 최종편집: ⓒ 광역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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