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영화 〈스팔타커스〉
영화 <스팔타커스>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걸작 영화 <벤허>가 있었다. 1959년 가을에 공개된 <벤허>는 대작 중의 대작이었다. 영화제작 초기 단계에서 벤허 역으로 거론된 배우는 커크 더글러스와 찰턴 헤스턴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헤스턴은 그다지 유명한 배우가 아니었다. 반면에 커크 더글러스는 할리우드에서 내로라하는 명장들과 작업한 대스타였다. 그런 커크 더글러스가 벤허 역을 탐내다가 그 역을 윌리엄 와일러의 <빅 컨츄리>에 출연한 찰턴 헤스턴에게 빼앗기자 기분이 몹시 상했다.
그래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자신이 직접 제작하고 지휘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자 생각했고 그렇게 나온 것이 바로 <스팔타커스>였다. 와일러 감독은 커크 더글러스에게 영화 <벤허>에서 벤허의 적수인 멧살라 역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주연 역을 탐낸 커크 더글러스에게 조연 역인 이런 제안은 씨도 먹히지 않았다. 하워드 패스트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할리우드의 유명한 좌파 달턴 트럼보를 각본가로 영입해 제작되었다. <스팔타커스>의 감독으로 처음에는 <엘 시드>, <로마 제국의 멸망>을 만든 안소니 만이 고용되었지만 제작자인 커크 더글러스가 그를 해고했다. 더글라스는 나중에 만 감독이 너무 유순해서 그랬다는데 그는 이 점을 항상 미안해했다.
그래서 4년 후 영화 <텔레마크의 요새>에서 주연으로 발탁되었을 때 안소니 만이 감독을 맡는다는 조건으로 수락했다고 한다. 만 감독의 후임으로 과거 <영광의 길>에서 한 번 호흡을 맞춘 적이 있는 영국 출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선택되었다. 그러나 큐브릭 역시 영화 촬영 내내 영화제작에 대한 권한을 행사한 실질 오너인 커크 더글러스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고, 영화의 완성 이후에 “다시는 이런 바지 감독을 안 하겠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더글러스는 로맨스가 짙게 깔린 영웅의 일대기를 만들고 싶어 했고, 다소 냉소적인 큐브릭은 멜로 드라마적 감동을 자아내는 인위적인 설정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포로가 된 노예들이 너도 나도 일어나서 “I am Spartacus”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는데 이건 정말 웃기는 일이라고 이죽거렸다. 한편 더글라스는 “큐브릭은 재능있는 개새끼(Stanley Kubrick is a talented shit)"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작가주의 감독인 카리스마 있는 거장 큐브릭과 기세가 등등한 할리우드 거물인 더글러스와의 만남은 이렇게 불화가 있었으나 다행히 영화는 매우 훌륭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스팔타커스>는 스펙터클한 영상과 멋진 대사, 배우들의 완벽한 연기, 적절한 긴장감의 조율 등 어느 것 하나 <벤허>에 모자랄 것이 없었지만 큐브릭에겐 평생 동안 트라우마처럼 따라다니는 영화였다. 이후 공식 자리에서도 종종 <스팔타커스>는 자신의 영화가 아니라고 했던 큐브릭에게 이 영화의 촬영은 꽤나 힘든 일이었던 것 같다.
배우 캐스팅도 화려했다. 영국의 명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쿼바디스>에서 네로 역으로 능글맞은 연기를 보였던 피터 유스티노프가 약삭빠른 검투사 양성소 소장으로, 준수한 용모의 존 개빈이 줄리우스 시저 역할을 맡았다. 고혹적인 자태의 아름다운 여배우 진 시먼스가 스팔타커스의 연인 바리니아를, <바이킹>에서 커크 더글러스와 호흡을 맞췄던 토니 커티스는 크라수스의 노예였다가 혁명을 원해 스팔타커스에게로 향하는 영민한 청년 안토나이너스를 맡았다. 처음에는 여주인공 바리니아 역으로 더글러스는 잔 모로를, 큐브릭 감독은 오드리 헵번을 염두에 두었으나 각각 사정이 생겨 성사되지 못했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하워드 패스트는 매카시즘(빨갱이 소탕 운동)의 광기가 미국을 강타할 무렵 반미 활동 조사위원회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3개월간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스팔타커스>의 이야기를 구상했고 출판사들이 거절해 결국 자비로 소설을 출간해야만 했다. 그리고 각색을 맡았던 달턴 트럼보 역시 매카시 선풍으로 쫓겨나 있었던 인물이었다. 커크 더글러스는 당시 이런 풍조에도 달턴 트럼보의 이름을 엔딩 크레디트에 올려놓으며 그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당시 트럼보는 가명으로 여러 영화의 각본을 숨어서 쓰고 있었다. 그러나 커크 더글러스는 이에 전혀 개의치 않고 그를 실명으로 공개했고 이는 할리우드에서 그가 진정한 용기와 의리 있는 진짜 상남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커크 더글러스는 이 영화를 한마디로 ‘사랑에 대한 영화’라고 정의했다. 스파르타쿠스와 바리니아의 사랑은 물론 민중에 대한 사랑, 자유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고 했다.
옆의 사진은 마지막 장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스팔타터스를 떠나고 있는 바리니아
II. 완벽주의자 스탠리 큐브릭 감독
스탠리 큐브릭은 영화 역사상 가장 창의적이고 환상적인 영상을 만들어낸 감독으로 평가 받고 있다. 특히 영상물에 대한 뛰어난 감각과 완벽주의적인 제작 방식으로 독보적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스파르타쿠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계태엽 오렌지>, <배리 린든>, <샤이닝>, <풀 메탈 재킷>, <아이즈 와이드 셧>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그의 최고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SF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영화 역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반드시 언급되는 작품이다. 당시 SF 영화는 B급 영화라고 취급받던 시절이기도 했다. <스타워즈>가 역사상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SF 영화라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SF 영화라고 평가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후에 나온 거의 모든 SF 장르의 영화나 소설 등은 대부분 이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고들 얘기되고 있다.
1968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인류에게 문명의 지혜를 가르쳐 준 검은 돌기둥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목성으로 향하는 디스커버리호 안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극히 미비했던 시절 아날로그 기술만으로 환상적인 시각효과를 연출하면서 영화인들의 극찬을 받았다. 특히 인류가 달에 가기 전에 만들어졌음에도 우주 공간과 관련된 뛰어난 여러 장면들은 지금도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큐브릭은 1928년 7월 26일 뉴욕의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자라면서 아버지 제이컵 큐브릭은 그에게 사진을 권했고 취미삼아 시작한 사진 세계에 깊이 빠졌다. 16살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죽음을 다룬 세트사진이 <LOOK>지에 실렸고, 17세부터 이 잡지의 견습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편 많은 시간을 근대미술관의 필름도서관에서 보내며 영화에 열중하게 되었다. 이후 <시합의 날(1951>을 포함해서 세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1953년 첫 장편영화 <공포와 욕망>을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였다. 큐브릭은 유대계 혈통이었으나 유대인 단체의 자금 기부 요청을 거부하거나 할리우드를 지배하고 있는 유대인들 횡포가 심하다고 툴툴거리는 등 유대인들로부터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옆의 사진은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한 장면
큐브릭은 어릴 때부터 체스광이었으며 세 번째 영화 <공포과 욕망>의 제작비는 거의 전적으로 그가 뉴욕의 워싱턴 스퀘어 공원에서 체스 경기를 통해 얻은 상금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미국을 싫어해서 영국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배리 린든>, <샤이닝>, <풀 메탈 재킷>을 만든 이후 10년간 침묵하다가 마지막 작품으로 1999년, 당시 부부였던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뉴욕의 한 의사가 그의 아내와의 갈등으로 인해 겪는 3일간의 성적 판타지를 다루고 있는데 큐브릭의 꼼꼼한 완벽주의 탓에 촬영 기간이 길었던(3년) 영화로도 유명했다.
영화의 배경은 뉴욕이지만 촬영은 영국 런던 그리니치의 파인우드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고 그래서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은 런던으로 이사를 해야하기까지 했다. 촬영과 최종 편집본을 넘기고서 비공개 인터뷰를 하고 1999년 3월 7일, 영국 세인트올번스의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생을 마감했다.
III. 로마 최대의 노예 반란 스파르타쿠스의 난
로마에서 남쪽, 나폴리 근처 카푸아 검투사 양성소에 트라키아 출신의 스파르타쿠스라는 검투사가 있었다. 그는 그리스 북부의 트라키아의 왕자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 트라키아는 수많은 부족이 난립한 야만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는 고작해야 일개 부족장의 아들 정도였을 것이다. 이 양성소의 주인인 바티아투스는 무척 포악해서 검투사들에게 못되게 굴었다. 결국 BC 73년 어느 여름 날, 스파르타쿠스는 바티아투스의 잔혹한 대우에 반발해 74명의 동료 검투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양성소를 탈출했다. 양성소를 탈주한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동료들은 인근에 있는 베수비오 산의 산악 지대로 도망쳐 틀어박혔다.
이들은 일단 스파르타쿠스, 갈리아 출신의 크릭수스와 오이노마우스 세 사람을 지도자로 선출했다. 보통 화산 지역은 암석만 그득한 황폐한 지역이지만 베수비오 산은 이로부터 150년 후 화산이 폭발해 폼페이를 덮치기 전에는 포도밭이 산재해 있는 기름진 옥토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진을 치고 지나가는 행인들의 짐을 터는 산적질을 하기 시작했다. 산적질이 점차 심해지자 마침내 카푸아 지방정부에서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소규모의 진압대를 파견했으나 스파르타쿠스 일당은 이들을 제압하고 빼앗은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뒤 점점 더 세력을 넓혀갔다. 이들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근처에서 노예, 불량배, 부랑자들이 모여들면서 카푸아 지방 정부로서는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마침내 로마 정부가 나서게 되었다. 그들이 일당백의 검술과 체력을 겸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로마 당국은 간과했다. 이 때문에 로마 정부는 소풍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정규 군단병이 아닌 시민군을 파견했다. 3천 명의 신병이 긴급히 징집되었고 이들은 법무관 가이우스 글라베르의 지휘 아래 소풍 가듯이 한가롭게 스파르타쿠스군을 토벌하러 갔다. 법무관 글라베르는 베수비오 화산으로 올라가는 유일한 길을 차단하고 차근차근 올라가며 노예군을 포위해 굶주리게 하면서 압박했다. 그리고 그들이 뛰쳐나오면 섬멸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노예군은 산포도 덩굴로 튼튼한 줄사다리를 만들어 살그머니 글라베르 군대의 후방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재빨리 로마군의 주둔지를 급습했다. 앞만 보고 있던 로마군은 전혀 예상 밖의 기습에 혼비백산하면서 혼란에 빠져 참패하고 말았다.
스파르타쿠스의 성공 소문이 연이어 퍼지자 노예, 탈영병, 목동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스파르타쿠스가 전리품을 공평하게 나누어준다는 소식에 자유민들도 합세하면서 노예군은 이제 1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러자 로마 정부는 2차로 법무관 바리니우스 지휘 아래 다시 시민군 4천 명을 편성해 보냈다. 이때 바리니우스는 그의 부관인 코시니우스에게 2천 명을 쪼개어 지휘하게 했다. 코시니우스는 별장에서 마음 푹 놓고 목욕을 하다가 스파르타쿠스군의 기습을 받고 간신히 가운만 걸치고 도주했다. 스파르타쿠스군은 계속 로마군을 쫓아 코시니우스와 그의 군대를 도륙했다. 한편 바리니우스는 스파르타쿠스 반란 도당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지만 스파르타쿠스는 한밤중에 시체를 주둔지에 세워놓고 빠져나가는 속임수를 썼다.
이 사실을 알아낸 로마군은 곧바로 스파르타쿠스를 추격했지만 얼마 못 가 괴멸 당했다. 두 차례에 걸쳐 로마 정부가 파견한 토벌대를 무찌르자 스파르타쿠스의 명성은 이제 로마 전역에 퍼졌고 그 소식을 들은 이탈리아 전역의 노예들이 속속 반란군으로 모여들었다. 이들 노예 외에도 그들과 처지가 별로 다를 것 없고 사회에 불만이 많은 하층민들도 반란에 합류했다. 스파르타쿠스 휘하의 노예군은 무려 4만 명으로 불어나게 됐다. 로마군이 참패한 것은 당시 로마는 노예군은 단지 강도떼에 불과하다고 우습게 생각해 대규모 군단병이 아니고 오합지졸들을 끌어 모아 찔끔찔끔 대처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로마는 소아시아와 스페인에서 전쟁을 하고 있어서 정규 군단병을 편성할 형편이 못되었다.
이제 스파르타쿠스의 탈주는 단순한 노예 탈주 사건이 아니라, 로마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상 최대의 노예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스파르타쿠스 휘하의 노예군은 누케리아, 메타폰툼 등의 도시를 함락시켰으며, 그때마다 병력을 보충하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 이런 와중에 스파르타쿠스는 야생마들을 잡아 길들여 기병대를 조직하고 억센 양치기들을 모아 군인으로 키우는 등 조직을 강화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했다.
상황이 예사롭지 않게 진행되자 로마 정부에서는 신경을 조금 더 쓴답시고 법무관 휘하 두 개 군단(1만 5천 명)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 모여든 노예의 숫자는 예상보다 많아서 그들을 얕잡아 보았던 로마군은 스파르타쿠스의 게릴라 전술에 말려 또다시 패배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연전연승으로 스파르타쿠스는 이탈리아 전역의 노예들 사이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약탈을 계속하며 남하하는 스파르타쿠스의 군대는 점점 불어나 거의 7만에 이르게 되었다. 영화와는 달리 여기에 참여한 자들은 육체노동을 주로 하는 하급 노예나 빈민들로서 노약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세력이 커지는 만큼 내부의 분열도 생겼다. 특히, 트라키아 출신으로 알프스를 넘어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두목격인 스파르타쿠스와 갈리아 출신으로 먹거리 등 물산이 풍부한 이탈리아 남부의 약탈에만 목적을 두고 있던 부두목격인 크릭수스 사이에 갈등이 커져 갔다.
결국 크릭수스는 절반에 가까운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영에서 이탈했다. 한편, 다음 해인 BC 72년에 이르러 로마 정부는 그해 안으로 이 반란 사건을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결의를 굳힌다. 이번에는 집정관 두 명(겔리우스 , 렌툴루스이 투입된 본격적인 토벌군을 편성했다. 두 명의 집정관이 군단 지휘권을 가지고 네 개 군단의 정규군을 일개 산적 토벌에 투입한 것은 로마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들은 각각 두 개 군단 1만 5천 명씩을 이끌고, 스파르타쿠스(4만 명)와 크릭수스(3만명)에게 각각 맞섰다. 본래 약탈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던 크릭수스의 군대는 가르가노 산에서 포위되었고 결국은 겔리우스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의 예상과는 달리 진로를 북으로 돌려 알프스 방면으로 나아갔다.
이에 두 명의 집정관은 급하게 방향을 틀어 뒤를 쫓았다. 두 부대는 스파르타쿠스군을 피체노 부근에서 만나 양쪽에서 협공하는 모양세를 갖추었다. 이때 스파르타쿠스는 휘하의 기병대를 십분 활용했다. 먼저 겔리우스 군단을 깨뜨리고 이어서 렌툴루스가 이끄는 나머지 두 개 군단도 궤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단은 파스케스와 군기를 모조리 스파르타쿠스군에게 빼앗겼다. 이것은 로마의 위신에 엄청난 상처를 입혔고, 망신은 망신대로 톡톡히 당했다. 그다음에 들어온 소식은 로마 고위층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스파르타쿠스는 포로로 붙잡은 로마 병사들에게 검투사 경기를 시켜 서로 죽이게 했던 것이다. 이래저래 로마는 화가 날 대로 났다. 두 집정관을 패배시킨 뒤에도 스파르타쿠스군은 계속 알프스까지 행군했고 더 이상 로마군은 이들의 탈출을 막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들은 목적지를 트라키아로 잡은 듯했으나 무슨 까닭인지 갑자기 남쪽으로 도로 내려왔다. 역사가들은 이것이 스파르타쿠스 최대의 실책이라고 평가한다. 그냥 알프스를 넘어갔으면 자유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이탈리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 본인이 이탈리아에서 탈출해 자유를 찾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던 것이 분명한 만큼, 왜 이렇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가장 설득력이 있는 설은 스파르타쿠스군의 상당수를 이뤘던 갈리아인, 게르만인들이 소위 2세대 노예였던 것을 지적한다. 즉, 그들에게 알프스 이북은 고향이 아니라 낯선 땅이나 다름없었다. 스파르타쿠스가 세력 확대를 위해 포섭했을 이탈리아 남부의 빈민과 양치기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한 평생 안온한 이탈리아 남부에서 살아왔을 그들에게 눈 덮인 알프스 거봉들이 주는 위압감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투가 어렵기는 하겠으나 몇 번의 승리로 자신감도 생겼다. 승리와 함께 약탈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눈에 어른거렸을 것이다.
이들은 척박한 땅이 기다리는 불확실한 미래보다 현실에 안주했을 공산이 크다.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홀로 고향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들과 함께 하기로 했다. 그들의 의견에 따라 남쪽으로 향해 메시나 해협을 건너 곡창지대인 시칠리아 섬으로 가기로 했다. 고대 시칠리아는 농산물이 풍부했다. 굶주린 반란군들은 붉게 물드는 바다 건너 시칠리아 섬을 바라보며 새로운 삶을 꿈꾸었을 것이다. 한편, 스파르타쿠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안 원로원은 로마 제일의 부자인 법무관 크라수스에게 스파르타쿠스군 토벌의 명을 내렸다. 그는 패주한 집정관의 군대와 자신의 사비를 털어 징집한 병사를 합친 여덟 개 군단으로 스파르타쿠스의 노예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집정관이 패배한 싸움에 등급이 낮은 법무관인 크라수스가 나선 것은 두 집정관들이 이미 산적 떼에게 패배했다는 망신을 당했으므로 더 이상 군단을 지휘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크라수스는 여덟 명의 법무관 중에서도 수석 법무관이었고 따라서 두 집정관의 패배 이후 크라수스가 지휘할 차례였던 것이었다.
크라수스는 군사적 경험도 거의 없고 특별한 군사적인 재능도 없는 인물이어서 여덟 개 군단의 대규모 부대를 지휘하는 부담감이 컸다. 더구나 정적이자 라이벌이기도 한 폼페이우스가 에스파냐에서 승리했다는 소식과 함께 그가 곧 귀국한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그가 돌아오면 노예군의 토벌은 그가 맡을 것이 분명할 것이고 그러면 자기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이 뻔했다. 그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먼저 토벌군의 군기를 잡기로 했다. 이전에 패배한 겔리우스와 렌툴루스 병사들에게 본때를 보여준다고 로마군의 가장 엄격한 형벌인 이른바 ‘10분의 1형’을 집행토록 했다. 이 형벌은 병사들 중 제비뽑기로 10분의 1을 가려내서 다른 병사들이 집단으로 때려서 처형하는 방식이었다. 본래 반기를 들었거나 도주한 병사들에 대해서만 행해지는 처벌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 효과는 대단했다.
병사들 스스로 몽둥이, 돌멩이, 채찍, 곤봉을 들고 동료를 죽이면서 병사들의 눈에는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악이 바짝 오른 크라수스군은 스파르타쿠스군을 뒤쫓기 시작했다. 대규모 로마군단의 세에 밀린 스파르타쿠스군은 이탈리아반도의 남서부 끝자락인 레기움까지 몰렸다. 스파르타쿠스는 인근의 칼리키아 해적들과 협상을 벌였다. 그들에게 반란군들을 시칠리아 섬으로 데려다주면 충분히 보상해줄 것을 약속하고 금화까지 건네주면서 먼저 2천 명을 실어 날라달라고 했다. 해적선은 크기도 작고 숫자도 작아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태울 수가 없었다. 스파르타쿠스는 먼저 선발대를 보내 시칠리아의 노예들을 부추겨 섬을 장악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물론 정예 병사들을 엄선했을 것이고 일단 이들이 섬을 제압하면 더 많은 사람들을 데려간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 해적들은 돈만 떼어 먹고 달아나 버렸다. 한 마디로 사기를 당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해적들이 쿠라수스에게 매수를 당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렇게 되자 뗏목을 만들어 메시나해협을 건널 생각도 해보았지만 급물살 때문에 이것도 불가능했다. 또한 메시나 해협 건너편에서는 시칠리아 총독인 가이우스 베레스가 상륙지점에 진지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이래저래 노예군의 시칠리아 섬 침공은 물 건너갔다. 이런 와중에 스파르타쿠스의 말을 안 듣는 노예들의 고질병이 또 터졌다. 카스투스, 간니쿠스가 이끄는 노예군 일부가 스파르타쿠스와의 의견 차이로 갈라지고 떨어져 나갔지만 이들은 곧 로마군에게 섬멸 당했다. 이제 노예군은 3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스파르타쿠스는 그래도 어떻게 해서라도 동쪽으로 이동해 부룬디시움 항으로 가서 이탈리아를 탈출해 보려고 움직였으나 크라수스군이 앞을 가로 막아섰다.
스파르타쿠스군은 인근의 산악 지대로 도피했다. 바다를 옆에 끼고 있는 이 산악지대는 험한 산이란 뜻의 아스프로몬테였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를 중심으로 노예군은 산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산 밑으로 내려왔다. 아마도 식량문제 때문에 별 수 없이 내려왔을 것이다. 그들은 산 밑의 계곡에서 포진하고 있던 로마군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동안 이리저리 쪼개지는 바람에 스파르타쿠스군은 크라수스 군단에 비해 중과부적으로 내몰렸다. 수적으로 수세에 몰린 스파르타쿠스는 마지막 수단으로 돌격대를 편성해 크라수스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했다. 로마 군은 전력을 다해 이를 저지했고, 스파르타쿠스는 그의 손으로 여러 명의 백인대장을 베어 쓰러뜨리는 등 분전했으나 결국 힘이 다해 쓰러지고 말았다.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은 곧바로 노예군의 붕괴를 야기했고, 수많은 시체가 쌓이는 것으로 끝나버렸다.
이 처참한 현장 속에 스파르타쿠스는 없었다. 아마도 시체들 사이에 파묻혔을 것이다. 그가 무사히 도망쳐 살아났다는 전설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듯, 노예들이 너도나도 나서서 “내가 바로 스파르타쿠스요!”라며 그를 두둔하는 가슴 뭉클한 장면은 물론 없었다. 포로로 잡힌 6천 명은 크라수스의 명에 따라 주인에게 반항한 노예에 대한 가장 무거운 형벌인 십자가형에 처해졌으며 아피아 가도 연변에 세워진 처형 행렬은 가히 수십 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반란군 6천 명의 이 십자가형은 아마도 고대 세계에서 기록된 가장 대규모의 십자가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조치에서 크라수스의 손길이 느껴진다. 그는 출세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잔인하고 요란한 제스처와 구경거리를 연출함으로써 로마인들에게 자신의 위상을 세우려 했을 것이다. 또한 로마의 노예들에게도 앞으로 이런 반란은 아예 꿈도 꾸지 말라고 본때를 보여준 것이다. 이후 스파르타쿠스의 난은 잊혀지다가 근세에 들어와 프랑스 대혁명을 비롯해서 민중들에 의한 여러 혁명이 거듭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화려하게 부활하기 시작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한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