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雉岳山)은 1984년 16번째로 국립공원이 되었으며,
주봉인 비로봉(1,288m)을 중심으로 동쪽은 횡성군, 서쪽은 원주시와 접하고 있다.
남쪽 남대봉(1,182ㅡ)과 북쪽의 매화산(1,084m) 등 1,000m가 넘는 고봉들 사이에
가파른 계곡들이 자리해 예로부터 산세가 뛰어나고 험난하기로 이름이 높다.
치악산 설경
치악산은 본래 가을 단풍이 아름다워서 적악산이라 불렀으나
뱀에게 잡힌 꿩을 구해준 나그네가 그 꿩의 보은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전설에서 치악산의 이름이 유래했다고 하며, 공원 면적은 175,668㎢이다.
서쪽은 남한강의 지류인 섬강 유역이고, 동쪽은 주천강 유역이다.
안봉·천지봉·투구봉·토끼봉·향로봉 등의 산봉과 입석대·세존대·신선대·
아들바위·구룡폭포·세렴폭포·영원폭포 등의 경승지가 있다.
구룡사계곡 입구의 전나무 숲
유적지로는 구룡사, 상원사 등의 사찰과 영원산성, 해미산성 등이 있다.
또한 동쪽 횡성군 강림면에는 태종대라는 절벽이 있는데,
조선 태종(이방원)이 왕이 되기 전 고려의 신하였던 원천석을 만나려고 기다렸으나
원천석은 고려에 대한 충절로 만나 주지 않았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치악산 등산로인 구룡길
치악산입구에는 조선시대에 세운 황장금표(黃膓禁標)가 있는데,
이곳 치악산 일대의 송림(황장목, 또는 금강송)은 궁중재목으로 쓰기위해
무단벌채를 금하는 방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표지라고 한다.
눈속의 계곡
치악산의 겨울 계곡
황장목 숲길
바로 이 계곡 옆에 유명한 구룡사가 있다
일주문인 원통문(圓通門)
원주 치악산(雉岳山) 기슭에 있는 구룡사(龜龍寺)는
668년(신라 문무왕 8)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의상(義湘)이 창건한 사찰이다.
전해오는 창건설화에 의하면 원래 지금의 절터 일대는 깊은 소(沼)로서,
그곳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의상이 절을 지으려 하자,
용들이 이를 막고자 뇌성벽력과 함께 비를 내려 산을 물로 채웠다.
한올까페 ~ 전망대 형태의 한올까페
의상이 부적(符籍) 한 장을 그려 연못에 넣자 갑자기 연못 물이 말라버리고,
그 중 용 한 마리는 눈이 멀었으며, 나머지 여덟 마리는 구룡사 앞산을
여덟 조각으로 갈라놓고 도망쳤는데, 의상은 절을 창건한 뒤
이러한 연유를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구룡사(九龍寺)라 하였다고 한다.
사찰입구의 은행나무와 스님
창건 이후 도선(道詵)·무학(無學)·휴정(休靜)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수찰(首刹)의 지위를 지켜왔으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세가 기울어지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쇠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 고 하였다.
사천왕문
그래서 거북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지만
계속 사세는 쇠퇴하므로,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잇는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룡사(龜龍寺)로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천왕문의 대형 사천왕 상
구룡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보광루(普光樓)·삼성각(三聖閣)·
심검당(尋劍堂)·설선당(說禪堂)·적묵당(寂默堂)·천왕문(天王門)·
종루(鍾樓)·일주문(一柱門)·국사단(局司壇) 등이 있다.
구룡사 보광루(普光樓)
보광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이층 누각이며,
이층 마루에 깔린 멍석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것이라고 한다.
보광루 좌우의 불음각(佛音閣,위)과 찻집(아래,차와 이야기)
보광루 위에서 보는 여덟굽이 치악산
대웅전
특히 대웅전은 조선 초기 개축된 건물로서,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나
내부의 닫집은 당시의 조각술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귀한 것이며,
못 하나 쓰지 않고 지은 건물이기 때문에 비록 낡았지만 소중힌 건물이다.
대웅전 뜰에서 보는 보광루와 치악산
구룡사의 전각들
(위)삼층석탑과 대웅전 측면, (중간)응진전과 지장전, (아래)설선당과 관음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