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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투르크 제국(Osman Turk Empire)
13세기 말 이후 셀주크 투르크에 대신하여 소아시아(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투르크족의 이슬람 국가(1299∼1922)이다. 오스만 1세(재위 1299∼1326년)가 건국하였으므로 이렇게 부른다.터키 북서부의 부르사를 공략하여 소아시아 지방을 거의 통일하고(1326) 1362년까지 수도가 되었다.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을 점령하고(1362년), 코소보 전투에서 제 3대 술탄인 무라드 1세(재위 1360~89년)가발칸 여러 나라의 동맹군을 무찔렀으며(1389), 나아가서 니코폴리스에서 유럽 여러 나라의 십자군을 격파(1396년), 발칸의 대부분을 병합하였다. 그러나 서진(西進)하여 온 티무르군에게 앙카라에서 패하였다(1402년). 즉 바야지트 1세가 티무르의 편을 든 소아시아의 제후국(諸侯國)을 압박하고 특히 시바스후국(侯國)을 공격하자, 티무르는 인도코끼리군을 포함한 20만 대군을 이끌고 소아시아로 침입하였고, 바야지트는 12만 병력으로 이에 맞섰다. 7월 20일 터키의 앙카라 북방 초원에서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전투는 벌어졌는데, 오스만투르크군 중에서 티무르군 쪽으로 달아나는 자가 속출하였다. 바야지트 자신도 도망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붙잡혀 우리에 갇혀 압송되었는데, 다음해 병사하였다. 그로인해 10년 동안 공위시대(空位時代)가 계속되었다.그러나 7대 술탄 메메드 2세(재위 1451~1481년) 때에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공략에 성공함으로써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수도를 아드리아노플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였다(1453).
이후 냉혹자 셀림 1세(재위 1512∼1520년)는 이란(1514년)ㆍ시리아ㆍ아라비아(1516년)를 제압하고 1517년이집트를 정복하여, 마지막 아바스왕조의 칼리프인 알 무타와킬로부터 칼리프 칭호를 물려받아 이슬람교의 종주권을 장악함으로써, 술탄 칼리프제를 확립하였다(1517). 쉴레이만 1세 치하(治下)에 극성기에 달하여, 영토는 아시아ㆍ아프리카 ㆍ유럽 3대륙에 걸쳤으며, 그 군대는 한때 빈(오스트리아)까지 육박하였다(1529). 또한 국내에서는 군사적 봉건제에 입각한 국가체제를 확립하고, 법률ㆍ학예ㆍ건축ㆍ공예 등 각 분야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17세기 이후로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중기에 전체주의적 개혁에 의하여 질서를 회복, 강경한 외교정책을 펴서 한때 부흥하였으나, 제2차 빈 포위공격에 실패(1683)하고부터는 오스트리아ㆍ러시아ㆍ폴란드 등 열강의 진출이 활발하여 17세기 말에 헝가리의 대부분을 오스트리아에, 18세기 후반에는 흑해 북안을 러시아에 빼앗겼다. 19세기에 들어서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1789∼1801)을 계기로 열강의 압력은 더욱 격화되어 그리스의 독립, 이집트의 이탈, 프랑스의 알제리 점령, 영국의 아덴 점령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아메드 2세(재위 1803∼39) 이후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의 ‘탄지마트’에는 근대화정책이 추진되어 신앙ㆍ출생의 구별없이 생명 ㆍ재산을 보장하는 일, 과세의 공정화, 재판의 공개, 군제의 개혁 등이 공약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유럽의 표면적인 모방에 그쳤기 때문에 효과는 거두지 못하였고, 그 후 러시아-투르크전쟁에 대패함으로써 유럽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이에 유럽 문명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은 전제군주 아브뒬 하미드 2세에게 강요하여 근대적 ㆍ자유주의적 헌법을 발포하게 했다(1876). 그러나 술탄은 이듬해 이 헌법을 정지시키고 절대주의적 전제정치를 강행하게 되자, 1908년 이에 반대하는 청년 장교들이 청년투르크당(黨)을 결성하고, 군대의 압력으로 술탄에게 헌법ㆍ의회정치의 부활에 동의하게 했다. 이것이 청년투르크당의 혁명이다. 이후 청년투르크당 내각이 조직되었고, 그 정권하에서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 독일측에 서서 싸웠으나 패하였으며, 그 결과로 가혹한 세브르 조약에 조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1920). 그러나 이 조약은 오스만투르크의 독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케말 아타튀르크는 터키 대국민의회를 소집하고, 1922년 11월 술탄 정부의 폐지를 선언함으로써 오스만투르크제국은 멸망하였다.
○ 터키공화국(Republic of Turkey)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요로에 위치한 터키는 기원전 힛타이트 시대부터. 14~20세기까지 600년에 걸쳐서 대제국을 건설한 오스만 터키까지 다채로운 변천을 거쳐, 1923년 10월 29일에 터키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이 나라 국기는 「초생달 기」라고 불리 우는 유명한 기로 붉은 부분 중앙에 가는 달과 5각별이 잘 배치되어 있다. 이 초승달 문장은 14세기에 오스만 터키제국의 무라트 1세가 유고슬라비아 전선을 방문했을 때, 초승달과 별이 빛났다고 하는 일화에서 유래하고 있다.
1923년 독립전쟁의 영웅 케말 아타튀르크이 왕정을 타파하고 스스로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1938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종신 대통령이었고, 그의 공화인민당이 27년간 일당통치시대를 해왔다. 그렇지만 이 기간 동안 문자를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바꾸고, 종교의 자유와 함께 정교분리에 성공하여 터키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1950년 다당제하에서 실시된 총선에서 처음으로 민주당이 집권하였고, 민선 수상 멘데레스는 한국전쟁에 터키의 파병을 결정했다. 그 댓가로 터키는 1952년 NATO에 가입하게 된다.
아타투르크 사후 공화인민당은 단독집권 보다는 연정의 형태를 띠면서 수 십 차례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경험하다가 2002년 11월 선거에서 이슬람의 가치를 표방하는 정의발전당(AKP)이 단독 집권하였다. 이슬람의 가치 수호 때문에 옥고를 치른 개혁적 성향의 수상 에르도안은 서구의 불안과 예상을 깨고 과감한 서구지향정책과 터키의 강력한 EU 가입의지를 밝힘으로써, 서구와 이슬람권의 협력이라는 새롭고 바람직한 모델을 창출해가는 가장 놀라운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각인되고 있다.
한국사처럼 영토와 민족이 일치하는 경우와는 달리 터키는 전형적으로 영토사와 민족사가 별개인 역사를 갖고 있다. 유목생활과 역사적 이동을 거듭해 온 터에 민족사가 역사의 중심으로 강조되며, 동시에 현재 뿌리를 내리고 있는 영토의 역사도 함께 고려된다. 터키의 역사는 아시아 전역과 유럽을 거쳐 온 전형적인 민족사이며 영토사는 메소포타미아, 오리엔트(히타이트, 아시리아), 그리스-로마, 초기 기독교, 비잔틴(동로마), 이슬람(셀주크, 오스만 제국) 등이 모두 거쳐 간 인류문명의 산실이다. 그래서 아놀드 토인비 같은 역사학자는 터키를 두고 인류문명의 살아있는 옥외박물관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 성 소피아 성당(聖─大聖堂, Saint Sophia Cathedral)
이곳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호칭되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교의 대성당으로 지어졌고, 터키 지배 때에는 이슬람의 모스크가 되었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인다.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가 ‘성스러운 예지(叡智)’(하기아 소피아)에 바친 구당(舊堂)(325) 대신에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새로운 구상으로 재건되었다. 안 길이 81m, 너비 70m의 광대한 3랑(廊) 바실리카 플랜과, 지름 약 33m의 거대한 원개(圓蓋)를 교묘히 조합시킨 절충적인 원개 바실리카식 성당이다. 본당(nave) 중앙에 4개의 대지주를 세우고 그 위에 대형 아치와 펜덴티브 구법(構法)에 의한 대원개를 덮고 있다. 동서의 긴 방향으로 가해지는 횡압(橫壓)을 대소의 반원개(半圓蓋)로 받치고, 남북 방향의 횡압은 대지벽(大支壁)(563 증설)으로 받친 매우 독창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
설계자는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와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라고 하는데, 그들의 재능이 만들어낸 풍부한 내부 공간과 동산을 방불케 하는 장대한 외관을 보고 헌당식(獻堂式)에 참석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감격하여 “오! 솔로몬이여! 나, 그대에게 이겼노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헌당 당시, 당내에 빛나고 있었을 6세기의 모자이크는 8∼9세기의 아이코노클래즘(성상 파괴운동) 때에 없어지고, 그 후에 제작된 모자이크도 15세기 이후, 이슬람교 투르크의 점거하에 거의 없어졌으나, 근년의 조사에 의하여 앞방[前室]과 2층 복도의 벽면에서, 석회칠 속에 그려져 있던 9∼13세기의 모자이크의 일부가 발견되어, 그 고도의 기술과 뛰어난 표현이 주목을 끌고 있다. 당내에는 대소의 주두(柱頭) 조각으로 대표되는 비잔틴의 세련된 장식 조각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 네이버 백과사전
○ 비잔티움 제국(Byzantium Empire, Byzantine Empire)
동(東)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이라고도 한다. 고대 로마제국은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결과 서방의 판도를 잃었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는 보스포루스해협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인 비잔티온(지금의 이스탄불)에 제2의 로마 수도를 건설하였다. 로마 역사에서 비잔티움 제국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가에 대한 학계의 합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많은 이들이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재위 AD 306~337) 황제가 최초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제국의 시작점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재위 379~395) 황제가 집권하고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포한 시점, 혹은 그가 사망한 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나뉜 시점으로 보고 있다.
제국의 수도 비잔티움은 330년 5월 11일 개도식(開都式)에서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누스의 거리)이라 불리게 되었고, 제국은 이곳을 중심으로 1000여 년에 걸쳐 존속했다. 제국의 멸망 시기에 대해서도 몇몇 이견들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Mehmed II : 재위 1444~1446, 1451~1481)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당한 시점이라는 견해가 가장 우세하다.
비잔틴 제국, 혹은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는 역사학자들에 의해 붙여진 명칭으로,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고대 지명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고, 그리스어로 로마 제국을 의미하는 ‘바실레이아 톤 로마니온(Basileia tōn Rōmaiōn)’ 혹은 ‘임페리움 로마노룸(Imperium Romanorum)’이라고 불렸다.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1557년 독일인 역사학자 울프(Hieronymus Wolf)가 자신의 역사서에서 '비잔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부터였으며, 후에 몽테스키외(Montesquieu) 등의 학자들의 저작물을 통해 일반화되었다.
정치적으로 로마의 이념과 제도를 이어받고, 종교적으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았다.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을 기조로 했으며, 언어, 문화, 생활 면에서 그리스의 전통을 많이 따랐다. 따라서 그리스를 중심으로 아나톨리아와 동지중해안의 여러 섬들을 포함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로 성장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Ⅰ, 재위 527~565) 황제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왕권이 안정기에 접어든 헤라클리우스 황제(Heraclius, 재위 610~641) 때 전성기를 누렸다.
비잔티움 제국은 그 지정학적 위치상 로마 제국의 고전적 전통 및 중세 가톨릭 유럽과 소아시아의 이교문화의 교차 지점으로서의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북쪽으로부터 잇따라 침입한 스텝의 유목민족, 슬라브족, 동방의 위협적 존재인 사산왕조 페르시아인 및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人), 투르크인에 대해 중세 그리스도교 세계의 동쪽 관문을 지켰던 것은 사실이나, 반드시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과 끊임없이 접촉하며 사회적ㆍ문화적으로 다원화된, 수용력이 큰 제국으로 성장했으며, 실크로드와 지중해 상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며, 중세 유럽의 상업을 부활시키는데 기여했다.
한편 그리스도교의 종주국으로서 동지중해의 신학, 학문,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동(東)유럽 제국(諸國)의 역사적 초기에 그리스도교 포교를 통하여 그 문화적 기초를 준비하였다. 또한 재건이 막 시작된 동시대의 서(西)유럽에 정치적ㆍ문화적 교섭을 통하여 계속 영향을 끼쳤다. 이리하여 그리스 정교권(正敎圈)이 형성되어 비잔티움제국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이반 3세의 '제3의 로마ㆍ모스크바'의 이념에 계승되었다. 또 이 제국에서 보존된 그리스어의 지식은 문예부흥기의 서유럽인에 의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12세기 이후 과도한 영토확장 전쟁과 여러 민족간의 갈등, 종교적 분열, 이민족의 침입 등으로 제국의 재정과 인력이 파탄에 이르렀으며, 행정 구조가 변화하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어 결국 붕괴되었다. / 네이버 백과사전
○ 비잔틴 건축 양식
비잔틴 예술은 궁전과 교회 건축에서 발전하였는데, 교회 건축은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긴 바실리카식 평면을 채용하였으나 점차 둥근 돔 지붕을 가진 집중형으로 바뀌었다. 박해가 그치고 그리스도교가 공인되면서부터 신앙의 영웅이 된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성당이나 경당이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순교자들의 성당이나 경당은 돔으로 된 동방 이방인의 무덤 형태를 모방한 것인데 이 건축에서 집중식 교회 건축이 유래되었다. 바실리카의 유축형(有軸形)과 중앙 집중식의 유심형(有心形)을 결합한 비잔틴 교회의 그리스 십자형 평면은 중앙 집중적인 방사상 평면으로, 동방 교회에서 강조하는 위계적인 우주관과 잘 들어맞았으며, 이러한 우주관은 건축적ㆍ회화적 표현 방식을 두루 융합하여 성당의 돔ㆍ벽ㆍ천장 등에 꾸며 놓은 프레스코나 모자이크와 같은 교회 장식의 도상(圖像) 체계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중앙 돔의 꼭대기에는 준엄한 모습의 ‘판토크라토르’(전능하신 분)라고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 아래쪽에는 천사의 모습을, 그리고 벽에는 성인들과 예언자들의 모습을 차례로 배치하였다. 성모 마리아는 대개 4개의 날개부를 덮는 반쪽 돔 중 높은 곳의 일부에 그려졌다. 빛은 이러한 성스러운 돔에서 발생하여 그 아래의 집중화된 공간으로 퍼진다. 동양적인 요소인 돔을 고전적인 열주식에 혼용시킨 비잔틴 성당은 돔을 연속된 벽으로 지지시킨 것이 아니라 4각형 평면 위에 펜덴티브를 사용하여 지지하였다. 이탈리아 북부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 베니치아의 산 마르크 성당,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 등이 대표적인 비잔틴 양식의 교회 건축이다. / 네이버 백과사전
○ 블루모스크(Blue Mosque, 술탄 마호멧 사원)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터키어: Sultan Ahmet Camii)는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대표적인 모스크로, 세계문화유산인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유서깊은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오스만 제국의 제14대 술탄 아흐메트 1세의 명령에 따라 1609년부터 착공에 들어가 7년이란 공사기간 끝에 1616년에 완성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모스크 안 벽면을 온통 뒤덮은 푸른빛을 띠는 도자기 타일 때문에 블루 모스크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불과 도보로 5분 거리에 위치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가운데 커다란 돔에 수많은 작은 돔을 얹은 형태로 구성되어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수많은 기둥이 받치는 각각의 아치 위에 작은 돔이 둥글게 솟았고, 4단을 이루며 돔 숫자는 점점 작아지다가 마지막 거대한 중앙 돔에 이른다. 직격 27.5m의 거대한 중앙 돔은 작은 네 개의 돔이 받치고 있다. 돔 주변에는 수많은 창을 내어 자연의 빛이 내부로 비치게 했다. 돔 위에는 황금색 장식을 달았고 맨 꼭대기에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별과 초승달을 얹었다. 모스크의 안뜰 가운데는 샤드르반이라는 분수대가 있고 사원 옆에는 신자들이 기도 전에 손발을 닦는 수도 시설인 육각형 모양의 세정소가 있다. 지금은 밀려드는 신자들을 위해 정원 바깥에 따로 대규모 세정시설을 마련해놓았기 때문에 이 세정소는 오늘날 쓰이지 않는다. 오스만 제국 때의 모스크는 신학교, 목욕탕, 시장, 병원 등 사회 시설을 주변에 다 갖추고 있었는데, 이런 시설을 퀼리예라고 부른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도 이 같은 복합 시설을 갖춘 모스크였다. 이 모스크는 전 세계에서 여섯 개의 미나렛을 갖고 있는 유일한 모스크로 오스만 제국 술탄은 매주 금요일 이곳에서 예배를 보았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크고 작은 돔의 균형과 모스크 양쪽에 쭉 뻗어 세워진 미나렛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또한 모두 다섯 개의 문이 있는데 이중 모스크의 정면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개로 이 남쪽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모스크 내부는 약 2만 1,000개에 달하는 파란색의 이즈닉 타일과 푸른빛의 260개 유리창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서양 사람들은 발음하기 어려운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로 부르기보다는 파란색의 타일이 많은 사원이라 하여 ‘블루 모스크’라 부른다.
모스크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2층 회랑은 현재 방문이 금지되어 있다. 내부에 있는 거대한 돔은 네 개의 거대한 기둥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 돔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육중하게 만들어진 이 기둥은 직격이 5m가 넘어 일명 코끼리의 다리라고 불린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모스크의 설교단(민바르)에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이 설교단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술탄의 전용 기도실이 있다. 여름에는 모스크의 내부를 아름답게 밝혀주는 조명이 켜진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의 바로 북쪽 자리에 히포드롬이라 불리는 고대 동로마 제국의 경기장이 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도 이곳을 말의 광장이라는 뜻의 아트 메이다느라고 불렀다. 히포드롬에는 과거의 웅대한 모습은 다 사라지고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청동 뱀 기둥, 유스티니아누스 기념탑 등 세 개의 기념물이 독일이 만들어 기증한 분수대와 함께 남아 있다 / 위키백과
○ 콘스탄틴 오벨리스크(Constantine Obelisk, Walled Obelisk)
이스탄불 히포드롬(Hippodrome:마차경기장)은 지금은 광장이 되었지만 이곳은 원래 검투경기장이었다. 4세기 검투가 금지된 이래 마차경기장으로 사용되었다. 10만명 정도를 수용하는 이곳은 비잔틴 제국의 대표적 문화 장소였다. 많은 유적들이 13C초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현재 오벨리스크는 비잔틴 제국의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A.D. 390년 이집트 룩소르에서 가져다 놓은 것이다. 오벨리스크 옆에 청동제 뱀 기둥은 콘스탄티누스 1세 때 그리스의 델피(Delphi)에 있는 아폴론(Apollon) 신전에 있는 것을 갖다 놓은 것이다.
높이는 32m이며, 거칠게 깎은 벽돌 모양의 돌을 쌓아 올려 세운 것이다. 869년에 지진으로 꼭대기가 일부 무너진 뒤 콘스탄티누스 7세(Constantine VII, 908-945 재위)가 보수했다. 당시에는 콘스탄티누스 7세의 조부인 바실 1세(Basil I, 867-886)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황금빛 청동으로 표면을 장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청동 장식은 제4차 십자군 원정 때인 1204년에 유실되었다. /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