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에 널린 이불 / 최정례
아파트 창에 널린
햇살에 적나라한 솜이불
애국도 매국도 아닌
태극기도 일장기도 성조기도 아닌
목화솜 이불인지 폴리에스터 요깔개인지
이념도 아니고 사상도 아닌
우리의 생활
이미 비난받은
우리의 내부인 것 같은
내장을 꺼내
뒤집어놓은 것처럼
입 꾹 다문 일 가구의
내면을 햇살에 내어 말리고 있는
작은 창 가난한 방의
두툼한 저 무념무상
- 시집 『빛그물』 (창비 2020.11)
* 최정례 시인
1955년 경기도 화성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
1990년 《현대시학》 추천 등단.
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숲』 『햇빛 속에 호랑이』 『붉은 밭』 『레바논 감정』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개천은 용의 홈타운』 『빛그물』
영역 시선집 『Instances』
번역 시집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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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속옷, 속살에 닿는 물건. 정면으로 바라보면 미안한 생각마저 들게 하는, 늘 부끄러운 표정의 사물, 이불입니다. 좀처럼 노출이 불가한 물건인데 누군가 적나라하게도 이것을 ’작은 창‘에 내 널었습니다.
예리한 시선이 이것을 그냥 지나칠 리 없습니다. 국경일의 태극기나 걸려야 할 자리였으니 가히 ’생활‘의 국기라 불릴 만합니다. 늘 ’애국‘이니 ’매국‘이니 떠드는, 소위 직업적 애국자들, 도덕주의자들에게는 불경할 풍경이기에 “이미 비난받은/ 우리의 내부인 것 같은” 풍경이고 더 나아가 ’내장‘ ’뒤집어놓은 것‘ 같은 반항적 ’회화(繪畫)‘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생활‘은 국적 이전이고 이념 이전이고 정치 이전입니다.
’가난한 방‘ 앞의 ’두툼한 저 무념무상‘이 실은 심대한 사상의 풍경임을 이 예민한 시인이 제시합니다.
가만히, 자세히, 가까이 좀 보라는 뜻이지요.
- 장석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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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좋은 날은 집마다 빨랫줄에 빨래가 열린다. 마당 멍석과 지붕 위에 곡식과 고추와 고기들도 말린다. 요즘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많아 마당이나 옥상이 없어, 아파트 베란다에 여는 걸 이따금 본다. 이 시는 아파트 ‘창가에 열린 이불’을 보고 시상을 떠올려 쓴 현실비판이 담긴 작품이다.
밝은 햇살 아래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같은 사물이나 일이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시인은 이불을 창에 여는 행위를 깃발을 내다 건 행위로 비유한다. 그 행위가 애매모호 하다. ‘애국도 매국도 아닌, 태극기도 일장기도 성조기도 아닌‘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목화솜 이불인지 폴리에스터 요깔개인지’인지도 확실치 않다. 이것은 ‘이념도 아니고 사상도 아닌 우리의 생활, ‘창에 열린 이불’ 자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게 우리 사회의 현실 비유로도 적나라하지 않은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와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는 사회로 양분된 이분법 해석의 안타까운 사회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서로 다른 편을 국정 동반자로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든 다시 회생불능으로 녹다운시킬 기회를 찾고 있다. 어려운 시기에도 나라와 국민 걱정에는 큰 관심이 없다. 세계적인 코로나 사태에서 우리 국민은 세계가 인정하는 일등 국민이지만. 같음과 다름 속에 갇혀 싸우는 현실은 정치 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 이것 또한 ‘이미 비난받은/ 우리의 내부인 것 같은’에 해당하지 않는가.
사회 정치적인 수많은 사건이 신문, 방송, 유튜브, SNS 등을 통해 보도되지만, 역시 편 갈라서 이분법 잣대로 정답이 없거나 모호한 게임으로 몰고 가서, 국민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는’ 밝힘과 감춤으로 ‘입 꾹 다물고 화가 난 한 가구의 내면’을 그래도 희망의 ‘햇살’에 조용히 말리고 있다. ‘가난하지만 두툼한 무념무상’의 역설적인 행위와 경지가 우리 국민의 생활 우리의 내부인 것이 아닌가.
- 김진광 시인
음악 / For Smyrni / Stamatis Spanoudak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