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6번째 편지 - 우리의 파라다이스, 정원
2주 전, 가족들과 아침고요수목원에 다녀왔습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정원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여러 번 찾은 곳임에도 갈 때마다 느끼는 아름다움은 여전했습니다.
벚꽃과 봄꽃들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우리는 가장 알맞은 때에 이곳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조성된 튤립 정원에서는 각양각색의 튤립들이 저마다의 빛깔을 아낌없이 뽐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정원에 올 때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어쩌면 여기가 천국의 한 모습이 아닐까요.
고전 공부를 하면서 저는 이런 의문을 품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는 바다로 둘러싸인 해양국가입니다. 그런데도 제우스를 비롯한 신들은 왜 ‘올림포스 산’에 머무는 존재로 그려졌을까요. 신화라면 섬이나 바다도 충분히 신들의 거처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산이었을까요.
이스라엘 역시 바다에 맞닿아 있고, 광야와 사막이 넓게 펼쳐진 땅입니다. 그럼에도 인류 최초의 낙원은 에덴 ‘동산’으로 상상되었습니다. 올림포스 산, 에덴 동산도 결국 모두 ‘산’입니다. 왜 인류는 오래전부터 산을 신성한 장소로 여겨왔을까요.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척박한 사막이나 끝을 알 수 없는 바다는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혼돈과 죽음의 공간이었습니다. 반면 산은 그 혼돈으로부터 벗어난 안전지대이자, 하늘의 신과 땅의 인간이 만나는 우주의 중심이었습니다.“
파라다이스(Paradise)의 어원인 고대 페르시아어 파이리다에자(Pairidaeza)는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을 뜻합니다. 곧 거친 야생으로부터 보호받고, 생명의 물이 흐르는 높은 지대야말로 인류가 갈망해 이상향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이 정교한 이론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딘가 한 조각의 생생한 상상력이 빠져 있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접하게 된 것이 데니스 더튼(Denis Dutton)의 이론이었습니다.
러시아 출신 작가 코마르와 멜라미드는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여 전 세계 14개국 수천 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매우 구체적인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무엇입니까?", "실내 풍경이 좋습니까, 야외 풍경이 좋습니까?", "사실적인 그림이 좋습니까, 추상적인 그림이 좋습니까?", "그림 안에 동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까?", "직선이 좋습니까, 부드러운 곡선이 좋습니까?"
그 통계 결과는 예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국적, 인종, 나이, 그리고 자신이 실제로 살고 있는 자연환경과 무관하게 전 세계인의 약 80%가 거의 동일한 대답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 또한 국가를 초월해 매우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데니스 더튼은 이 보편적 취향을 인간의 진화적 기억에서 찾습니다. 인류가 ‘탁 트인 초원,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 호수, 그리고 멀리 보이는 산’을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는 인류의 조상이 생존했던 아프리카 사바나의 환경이 우리의 DNA속 ‘아름다움’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진화생물학에서는 이른바 ‘사바나 가설(Savanna Hypothesis)’이라 부릅니다. 여기에 영국의 지리학자 제이 애플턴은 ‘조망-피신 이론’을 더했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숨길 수 있는 환경에서 가장 큰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좋은 풍경’이라고 부르는 장면은 대개 그 두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그러한 풍경을 본능적으로 ‘파라다이스’로 인식해 왔고, 그 이미지는 ‘동산’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올림포스 산과 에덴동산 역시 이러한 감각이 문화적으로 번역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하나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17세기 캔버스 위에 그려졌던 신화 속 이상향을 18세기 영국 귀족들이 실제 대지 위에 구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영국식 풍경 정원(English Landscape Garden)’이라고 부릅니다.
18세기 영국의 귀족 자제들은 이탈리아 그랜드 투어를 다녀오며 화가들이 그린 ‘이상향’의 풍경화를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베르사유 궁전식의 기하학적 정원을 거부했습니다. 대신 캔버스 속 그림과 닮은 자연스러운 풍경을 만들기 위해 조경가들을 고용했습니다. 산을 깎고, 물길을 돌리고, 자신의 영지를 그림 속 파라다이스와 같은 모습으로 구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 결과입니다.
그들이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이상향’이라고 믿고 빚어낸 그 형태가, 알고 보니 수십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들이 생존의 안도감을 느꼈던 ‘아프리카 사바나’의 지형과 놀라울 만큼 일치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DNA 속에 잠들어 있던 원초적 기억이 18세기 영국의 대지 위에 되살아난 사건, 그것이 바로 영국식 정원의 탄생이었습니다.
인간은 상상 속 에덴동산을 마침내 물리적 현실로 조형해 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아름다운 정원은 바로 이 18세기 영국식 풍경 정원의 미학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도시는 끊임없이 집중을 요구하는 공간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시선과 생각을 쉬지 않고 소모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인지, 애써 집중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붙드는 풍경 앞에서 비로소 긴장이 풀립니다. 흔들리는 나뭇잎, 느리게 흐르는 구름, 물가의 빛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요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정원입니다.
정원은 인류의 고향을 재현한 ‘성소’입니다. 우리가 정원을 찾는 일은 단지 꽃과 나무를 보러 가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성지, 곧 에덴동산으로 향하는 작은 순례입니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 미술과 문학에서는 이상향을 그리는 일이 급격히 줄어듭니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다”라는 유명한 선언을 하며, 신화 속 에덴동산 대신 채석장에서 뼈 빠지게 일하는 노동자들과 거칠고 불편한 시골의 현실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문학에서도 찰스 디킨스와 에밀 졸라 같은 작가들이 사회의 빈곤, 매연 가득한 도시, 그리고 그 안에 숨은 부조리를 고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상상력이 고갈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본과 기술이 상상 속의 낙원을 ‘영국식 정원’이라는 형태로 대지 위에 직접 건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파라다이스가 예술이라는 2차원의 세계를 떠나 물리적 공간이라는 3차원의 현실로 이주하고, 특정 계급에 의해 사유화되자, 예술은 더 이상 몽상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이제 예술은 파라다이스 바깥의 척박한 현실과 사회적 모순을 직시하는 고발자의 임무를 맡게 된 것입니다.
이 생각에 이르자, 아침고요수목원의 산책은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파라다이스에서의 산책. 곧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하지만 잠시 현실을 잊고, 지친 뇌를 회복하는 시간. 수목원을 거니는 일은 그저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저 자신을 온전히 회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봄이 지나기 전에 한 번쯤 수목원을 찾아가 보시는 건 어떨까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6.4.27 조근호 드림 <조근호의 월요편지>
첫댓글 항상 새로운 생각을 가져다주는 월요편지. ㄱㅅ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