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詩選集『비타민 詩』의 가을詩
서늘하리니,
비루먹은 망아지 한 마리 끌고 올라와 오늘은 잘 닦은 침묵의 칼로 목을 치니 온 산이 피로 물들어 빨갛게 단풍 들다.
2. 상강霜降 가을걷이 기다리는 가득한 들판 시인들은 가슴속이 텅텅 비어서 서리 맞은 가을 거지 시늉을 내네 천지에 가득한 시를 찾아가는 길 가도 가도 머언 천리 치는 서릿발 시 못 쓰는 가을밤 바람만 차네.
3. 칼 눈썹 한 올 하늘에 떠서 푸르게 빛나고 있다!*
* 1350년에 만들어졌다는 '칼' 을 꿈에 선물 받고 들여다보니 위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음.
낙엽을 밟으며 - 홍해리
개벽의 울음에서 묵연한 적멸까지 이승에서 저승인데 내가 가야 할 길 한치 앞이 천리인가 만리인가 피는 아직 시커멓게 울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앉은뱅이야 쳔년 만년 살 것처럼 하지 마라.
소리 없이 세상 열고 조용히 흔들리다 그냥 떨어져 내리는 화엄의 경을 보라 상처 없이 물든 이파리가 있는지 느티나무 옻나무까지 한평생 눈물로 씻고 울음으로 삭인 한 잎 한 잎 사리로 지는데 함부로 밟지 마라 낙엽만도 못한 인생들아.
가을 산에서 - 홍해리 -午耳詩篇 · 8
혼백을 하늘로 땅으로 돌려보낸 텅 빈 자궁 같은, 또는 생과 사의 경계 같은 가을 산에 서 있었네 지난봄 까막딱따구리가 파 놓은 오동나무 속 깊이 절 한 채 모셔 놓고 가지에 풍경 하나 달아 놓았네 감국 구절초 쑥부쟁이에게 안부를 남기고 물이 만들고 간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무장무장 먼 산에 이는 독약 같은 바람꽃 맑은 영혼의 나무들이 등불을 달고 여름내 쌓인 시름을 지우고 있었네 서리 내릴 때 서리 내리고 스러지는 파도가 다시 일어서는 것처럼 지나간 세월이 내일의 꿈이 될 수 있을까 먼 길이 다가서는 산에 혼자 서 있었네.
가을 들녘에 서면 - 홍해리
다들 돌아간 자리 어머니 홀로 누워 계시네 줄줄이 여덟 자식 키워 보내고 다 꺼내 먹은 김칫독처럼 다 퍼내 먹은 쌀뒤주처럼 한 해의 고단한 노동을 마친 허허한 어머니의 생生이 누워 계시네 알곡 하나하나 다 거두어 간 꾸불꾸불한 논길을 따라 겨울 바람 매섭게 몰려오는 기러기 하늘 어둠만 어머니 가슴으로 내려앉고 멀리 보이는 길에는 막차도 끊겼는가 낮은 처마 밑 흐릿한 불빛 맛있는 한끼의 밥상을 위하여 빈 몸 하나 허허로이 누워 계시네.
가을 엽서 - 홍해리
풀잎에 한 자 적어 벌레소리에 실어 보냅니다 난초 꽃대가 한 자나 솟았습니다 벌써 새끼들이 눈을 뜨는 소리, 향기로 들립니다 녀석들의 인사를 눈으로 듣고 밖에 나서면 그믐달이 접시처럼 떠 있습니다 누가 접시에 입을 대고 피리 부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창백한 달빛을 맞은 지상의 벌레들도 밤을 도와 은실을 잣고 있습니다 별빛도 올올이 내려 풀잎에 눈을 씻고 이슬 속으로 들어갑니다 더 큰 빛을 만나기 위해 고요 속에 몸을 뉩니다 오늘도 묵언 수행 중이오니 답신 주지 마십시오.
머나먼 슬픔 - 홍해리
나무들은 꼿꼿이 서서 꿈을 꾼다 꿈에 젖은 숲은 팽팽하다
숲이 지척인데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적막에 들지 못하고
눈을 들면 푸른 게릴라들이 국지전 아닌 전면전을 감행하고 있다
녹음 아래 노금노금 가고 있는 비구니의 바구니 안 소복히 쌓이는 그늘,
그늘 속으로 이엄이엄 질탕한 놀음이 노름인 줄 모르는 한낮의 머나먼 슬픔.
석류石榴 - 홍해리
줄듯 줄듯
입맛만 다시게 하고 주지 않는
겉멋만 들어 화려하고
가득한 듯 텅빈
먹음직하나 침만 고이게 하는
얼굴이 동그란 그 여자
입술 뾰족 내밀고 있는.
한가을 지고 나면 - 홍해리
기적도 울리지 않고 열차가 들어온다
한갓되이 꽃들이 철길 따라 피어 있다
굴을 지날 때 승객들은 잠깐 숨이 멎는다
역사에는 개망초처럼 소문이 무성하다
기약없이 열차는 다음 역을 향해 떠난다
꽃잎 지는 역은 장 제자리에 있다
봄이 오기까지 몇 년을 기다려야 한다.
연가 - 홍해리 - 지아池娥에게
맷방석 앞에 하고 너와 나 마주앉아 숨을 맞추어 맷손 같이 잡고 함께 돌리면 맷돌 가는 소리 어찌 곱지 않으랴 세월을 안고 세상 밖으로 원을 그리며 네 걱정 내 근심 모두 모아다 구멍에 살짝살짝 집어넣고 돌리다 보면 손잡은 자리 저리 반짝반짝 윤이 나고 고운 향기 끝 간 데 없으리니 곰보처럼 얽었으면 또 어떠랴 어떠하랴 둘이 만나 이렇게 고운 가루 갈아 내는데 끈이 없으면 매지 못하고 길이 아니라고 가지 못할까 가을가을 둘이서 밤 깊은 소리 쌓이는 고운 사랑 세월을 엮어 한 생生을 다시 쌓는다 해도 이렇게 마주앉아 맷돌이나 돌리자 나는 맷중쇠 중심을 잡고 너는 매암쇠 정을 모아다 설움도 아픔까지 곱게 갈아서 껍질을 후후 불어 멀리멀리 날리자 때로는 소금처럼 짜디짠 땀과 눈물도 넣고 소태처럼 쓰디쓴 슬픔과 미움도 집어넣으며 둘이서 다붓 앉아 느럭느럭 돌리다 보면 알갱이만 고이 갈려 쌓이지 않으랴 여기저기 부딪히며 흘러온 강물이나 사정없이 몰아치던 바람소리도 추억으로 날개 달고 날아올라서 하늘까지 잔잔히 어이 열리지 않으랴.
시읽는 마을 (시선집『비타민 詩』2008, 우리글) |
출처: 홍해리洪海里의 집 <洗蘭軒> 원문보기 글쓴이: 洪海里
첫댓글 댓글을 달아 주신 '모과' 님께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본문에 오자가 있어 다시 올렸습니다. 댓글은 아래 다시 달아 놓았으니 해량하시기 바랍니다. 대신 위에 잘 익은 '석류'를 한 알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석류한알 기다리겠읍니다 ^^
시골의 가을 정거장에 서 있는 기분입니다.^^ 가을을 만끽케 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 모과.
귀뚜리우는 저녁 어떤 이는 하늘로 오르고 어떤이는 이 비루한 삶자리에 향기 하나 피우지 못하고있고........해서 이 시심들이 저의 마음을 눅눅히 젖게 하는 어둑한 밤.........고운 필향 그저 고맙기만 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홀로 앉아 있으면 귀뚜라미 합창이 요요합니다. 정년 가을입니다. 파아란하늘 님도 이 가을에 좋은 글 많이 쓰시길 기원합니다.
이렇게 선생님 주옥 같은 시를 읽을 수 있어 행복합니다 깊이 가슴에 담고 선생님의 시상에 세계를 가늠하며 묵상으로 품어봅니다 언제 보아도 시어 하나 하나 마다 깊은 의미 담아 내신 시향에 늘 감동으로 감명으로 읽어봅니다 가만히 하늘방에 앉아 선생님 시를 읽는 다는 것이 참 기쁨입니다 감사합니다 몇번이고 다독 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시상이 금방 떠 오르곤합니다
토파즈 님이 곰곰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글 많이 쓰셔서 보여 주십시오. 시 쓰는 일이야 죽을 때까지 해야 할 평생의 멍에라 생각하시고 묵묵히 작업에 임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가을시 ...제가 몇편 가져다 제 블로그를 멋지게 꾸미려는데 괜찮을까요?..출처와 시인님을 분명히 밝히겠습니다
얼마든지 가져 가십시오. 발표된 작품은 제 것이 아니라 읽는 분의 것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바라기 님!
저 오늘 처음 들어왔습니다. 감동적이고 제 삶을 다시한번 점검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귀한 정말 감사합니다. 많은활동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삽다리 총각 님!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