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운명의 별 김진규

[연금술사]

내 운명의 별 김진규
김보애 지음｜21세기북스｜304쪽｜1만4000원

지금 20~30대는 낯설겠지만 한국영화사에는 김진규(1922~1998)라는 걸출한 배우가 있었다. 그는 1955년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에서 지적(知的)인 빨치산 역으로 데뷔한 이후 1960년대에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펼친 탁월한 연기로 대중적 지명도를 얻으며 스타로 부상했다. 김기덕 감독의 대표작 《하녀》를 비롯,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 《카인의 후예》 같은 문예영화에서 특유의 내면 연기를 선보였다.

김진규는 6·25전쟁의 전후 복구 과정에서 생긴 스타 시스템 1세대의 주역으로 70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이민·최무룡·신영균과 경쟁했으며, 최은희·김지미·조미령 같은 여배우의 상대였다. 김진규는 다음 세대인 신성일과 엄앵란의 선배 연기자였고, 문희·윤정희·남정임 트로이카에게는 아버지뻘 연기자이면서도 여전히 상대 남자 배우였다. 그러나 그는 1960년대에 직접 제작·주연을 맡은 《성웅 이순신》 《난중일기》가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서 파산하게 된다.

 
▲ 영화 '벙어리 삼룡'(1964). 김진규(왼쪽)와 최은희./21세기북스 제공

그 김진규와의 사이에 1남3녀를 뒀던 김보애(72)씨가 자전적 에세이 《내 운명의 별 김진규》를 냈다. '2009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에서 쟁쟁한 경쟁작들을 제치고 영예의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김보애씨는 서라벌예술대학 재학 중 충무로 관계자에 의해 전격 발탁, 《옥단춘》(1955)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배우이기도 하다. 《종자돈》(1967) 등으로 인기를 얻었고, 《고려장》(1964)에서는 남편인 김진규와, 《수렁에서 건진 내 딸》(1984)에서는 둘째딸 김진아와 함께 출연했다. 두 아들을 둔 35세 홀아비 김진규와 결혼했다가 14년 만에 이혼한 뒤 '세보' '못 잊어' 등 정·관계 실력자들이 드나들던 고급 음식점을 운영했다. 1990년대에는 남북 문화사업에 뛰어들어 수차례 방북도 했다.

이 책은 저자의 '운명의 별'이었던 톱스타 김진규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는 동시에, 한국 영화사를 수놓은 수많은 배우를 실명으로 등장시키면서 1950~60년대 충무로의 실(實)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 1967년 미 국무성 초청 여행중인 김보애(왼쪽)와 김진규./21세기북스 제공

김진규는 영화 속에서 부드럽고 어진 남성 역할을 도맡아 하면서 특히 중년층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스크린의 신사'로 통했다. 그러나 김보애씨가 말하는 김진규는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 주사(酒邪)가 너무 심했다. 취하면 닥치는 대로 물건을 부쉈고, 곁에 있는 사람을 두들겼다. 아내 김보애뿐만 아니라 식모와 아이들, 심지어 집에 들어와 살던 연기 문하생(전무송·홍성우)도 그의 주먹 앞에서 무사하지 못했다. 그렇게 부인을 때리고 난 다음날이면 아내에게 선글라스로 멍든 눈을 가리게 하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맛있는 것을 사주고 평소 아내가 갖고 싶어했던 보석이나 명품 가방을 사주었다.

부인 김보애를 괴롭힌 또 다른 요인은 '김진규를 나눠 가진 여자들'이었다. 인기 절정의 배우라 저녁이면 청운각·삼청각 같은 고급 요정의 마담들이 그를 앞다퉈 초대해 질펀하게 먹고 마셨다. 재벌 회장과 유력 인사의 부인 등 귀부인들까지 그와 식사하려고 줄을 섰다. 미모 여류시인과의 관계는 3년을 끌었고, 이는 김보애의 이혼 결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담담히 서술된 저자 김보애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로(旅路)도 긴 여운을 남긴다. 특히 10년이 넘는 세월을 외롭게 살면서 병마와 싸워 이긴 김보애씨가 자식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늙고 병든 옛 지아비를 끌어안는 대목은 진한 감동을 전한다. 이에 대해 최은희씨는 책 '추천의 말'에서 "우리 영화계에서 사랑하고 멋지게 살다가 헤어졌다는 말은 많다. 심지어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까지 있다. 하지만 늙고 병들어 오갈 데 없는 전남편을 따뜻하게 끌어안고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켜본 대목은 어느 영화에도 나오지 않는다. 훌륭하다"고 박수를 보냈다. 꼼꼼한 기록의 소중함을 웅변하는, '인생 대선배'의 역작(力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