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아마도 영화에 관련된 사람이나, 자신이 영화를 꽤 오랫동안 봐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조폭마누라’의 성공은 하나의 ‘폭거’였던 듯 싶다. ‘조폭 마누라’가 예상을 깨고 서울 관객 100만 이상,
전국 관객 400만(!!!!!!) 이상을 동원하자 각 영화잡지에서는 모두 한국영화의 ‘거품론’을 제기하고 있고, 더불어 ‘조폭의 사회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씨네 21’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폭마누라’의
흥행은 완성도와 비교해볼때 어떤 ‘선’을 넘은 영화라는 것이다.
어느정도 흥행이 되는 것은 이해해도 이정도로 흥행이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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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음악 = 한국영화?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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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제기되는 이야기가 바로 한국영화의 ‘한국음악화’이다.
물론 이는 언론매체보다는 영화팬들이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한데, 지금까지 작품성과 대중성을 어느정도 함께 가져가던 한국영화가 ‘립싱크’와 ‘표절’이 판치는 한국음악처럼 ‘수준낮은’ 작품들로
흥행하면서 거품이 끼고, 곧 몰락할 징조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음악에 아이돌 댄스가수가 등장하면서 한때 엄청난 인기를 모았지만 그 반작용으로 지금 불황에 빠져있고, 질적으로 저하됐다는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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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한국음악과 한국영화는 비슷한 부분이 많다. 어쩌면 지금 한국영화의 진행과정 자체가 한국음악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19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모았던 그룹은 듀란듀란이었고,
마이클 잭슨은 ‘제주도’를 줘야 올 것 같은 ‘춤의 신’이었다. 또
영화계에서는 직배를 막기 위해 극장에 뱀을 풀어넣기까지 했다.
1980년대는 당시 독재정권의 정책에 의해, 그리고 일부는 한국 대중문화 시장의 보호를 위해 폐쇄적인 시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제한적으로 수입되는 몇몇의 작품들이 시장을 휩쓸었던 것이다. 심지어 TV 드라마에서도 지금은 당연히 ‘한국 드라마’의 차지인 밤 10시에도 ‘KBS'(!)에서는 ’전격Z작전‘과 ’A특공대‘를 방영하며 MBC를 제쳤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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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현상은 1990년대 초반까지 계속된다. 이제는 거의 전설(?)이 되어버린 ‘뉴키즈 사건’은 그당시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던 가수가 누구였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으며, 한국영화관객이 서울관객
100만을 돌파한 것은 ‘서편제’에 의해서였고, 그 기록은 ‘쉬리’가 등장할때까지 깨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한국음악과 한국영화는 시장이 제한되어 있는 대중문화 장르였던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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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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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국음악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후 이 ‘선’을 넘어서게 된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당시 10대와 20대 초반의 관심을 ‘한국
대중음악’에 돌리게 함으로서 엄청난 속도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고, 동시에 사회현상화 되었다. 그들의 음악적 완성도에 대해서는 여전히 각자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한가지 확실한건 그들은 당시 서구음악의 트랜드를 한국적인 스타일로 가져오면서 그들의 문화적인 감각이나 스타일역시 대중화 시키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튄다’싶던 랩, 모자, 반바지등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대중화 되었고, 그것은 대중의 관심을 팝에서 한국 대중음악으로 돌리는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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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진 것은 한국 대중음악의 엄청난 양적 팽창과, 향후 10년을 책임질 음악인들의 등장이다. 어지간히 인기있는 가수면 매번 앨범을 낼때마다 밀리언셀러에 ‘도전’했고, 김건모는 2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이때 등장하거나 본격적으로 인기몰이를 시작한 서태지와 아이들, 015B, NEXT, 듀스, 전람회, 솔리드, 패닉등의 그룹들과 윤상, 이승환, 신승훈, 김건모등의 가수들은 지금까지도 대중음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정말 ‘내면 팔리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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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뭐 그당시는 너무 ‘댄스음악’으로 시장이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지만 위의 음악인들의 음악색깔에서 볼 수 있듯 시장은 장르별로 상당히 균등하게 나뉘어져 있었으니까. 당시의 관점에서는 ‘트롯’과 고전적인 의미의
‘발라드’외에 조금만 리듬이 강해도 무조건 댄스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관점에서는 다양한 음악들이 서로의 개성을 보여주고 있었고, 인터넷에서 흔히 ‘최고의 음악인’을 이야기할 때 논쟁이 되는 음악인들도 대부분 저들 사이에서 결정나는 것이니까.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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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five of Teen-ager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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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HOT가 등장하면서 이런 한국음악의 팽창은 상당한 논란에 쌓이게 된다. 그냥 이전의 댄스그룹처럼 ‘단명’할 것만 같았던 HOT가 말그대로 시장을 ‘휩쓸어’ 버리고, 그와 비슷한 컨셉의 그룹들이 속속 나오면서 시장구조가 확실히 댄스로 옮겨진 것이다. 그리고
이전까지의 인기 가수들이 자신이 직접 음악을 만들고 매니지먼트에서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HOT 이후의 가수들은 기획사의 힘이 더욱 커졌고, 가수들은 음악적인 능력보다는 그룹의 컨셉에 의해 캐스팅되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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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의 등장은 음악시장에 10대를 완벽한 중심에
놓았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10대가 20대와 시장을 어느정도 나누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HOT의 폭발적인 인기는 음반시장의 포커스를 10대, 그리고 20대 초반에 맞추게 했다는 것이다. 방송사들은 이들을 경쟁적으로 출연시켰고, 앨범은 불티나게 팔렸다. 어느순간 발라드 가수나 싱어 송 라이터의 음반 판매량은 급감하기 시작했고, 10대시장을 향한 치열한 경쟁은 표절, 지나치다 싶을정도로 많은 방송출연, 그에 따른 립싱크, 자질이 부족한 가수의 캐스팅등의 부작용을 가져왔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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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정말 뻔한 얘기다. 확실히 댄스음악은 10대를 중심으로
가요계를 재편했고, 그 사이에 많은 부작용을 일으켰다. 그리고 인터넷에서는 어느순간부터 ‘아이돌 댄스 = 쓰레기’라는 등식이 성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거품은 지금 어느정도 걷히고, 요즘의 아이돌그룹을 비롯한 상당수의 댄스그룹들은 이전처럼 성공확률이 높지 않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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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말 그런가? 그 모든게 아이돌 댄스음악의 책임일까? 물론
아이돌 댄스음악중에는 정말 듣기 짜증나는 곡들도 많았고, 어찌되었건 간에 ‘표절’은 용서하기 힘든 음악적 범죄다. 아무리 SM이 이후에 ‘멀쩡한’ 음반들을 내놓았다고 해도 그당시 표절한 것은 표절한
것이고, 이것은 ‘당연히’ 끝까지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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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가 무슨 죄냐?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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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당시 10대의 반응이 과연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은 그저 사고 싶은 앨범을 샀고, 다른 세대에 비해 보다 ‘극성’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에 대한 감정을 표현했을 뿐이다. 가장 급부상하고 가장 뚜렷한 시장이 있는데 그 기호에 맞추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물론 장르의 편중화는 전체적인 음악시장에 걱정을 끼칠만 했지만, ‘장사’하는 기획사 입장에서는 매번 음악성 때문에 상업성을 포기하기도 힘들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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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중요한 문제는, 아이돌 댄스음악이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쓰레기’가 되어버린 그 과정이다. 물론 기존의 음악팬들의 입장에서 보았을때 아이돌 댄스음악은 매우 수준낮고 별볼일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고, 언론이나 음악평론가들 역시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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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음반들이 ‘미친 듯이’ 팔려나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앨범이 왜 팔려나가는지를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는 없었을까. 그저 단순히 10대의 비이성적인 열광이라고 판단하기 보다는 그 음반사업의 매커니즘과 그들의 ‘음악’이 어떤 요소를 담고 있는지 보다 관심을 가졌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말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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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댄스음악을 그저 쓰레기로 치부하고, 그들의 대중성을 무시하는 순간, 아이돌 음악은 완벽하게 ‘음악’적인 평가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10대 아이돌
댄스라 하더라도 그것을 보다 음악적으로 이야기했다면, 즉 ‘10대를
위한 댄스’라는 측면에 맞추어 어떤 인기요소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음악적으로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얘기했다면 어땠을까.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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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그들 나름대로의 ‘음악성’을 향해 나아가지 않았을까. 10대의 음악이 시장에서 가장 큰 점유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음악적으로는 철저히 무시당하는 순간, 한국의 음악 비평과 언론의 저널리즘은
대중과 유리된 것이다. 대중음악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많은 대중이
사는 음반에 대해 ‘무시’하는 상황에서, 기획사와 가수, 대중은 모두 정체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잘만들어도 쓰레기고 못만들어도 쓰레기이며, 잘만들어도 잘 팔리고 못 만들어도 잘팔리는 상황이라면 기획사는 어떤 길을 선택하겠는가.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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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무슨 음악을 들어도 다 ‘수준 낮은’ 음악을 듣는 것을 취급되고,
그저 ‘얼굴만 보는’ 대중으로 취급받는 상황에서 정말 대중이 그들
나름의 음악관을 확립하기 쉽겠는가. 언더그라운드는 언더그라운드
나름대로의 미덕이 있고, 아이돌 댄스는 아이돌 댄스 나름의 장점과
역할이 있다. 그것을 무시한채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 아이돌 댄스그룹을 ‘몰아내고’ 주류로 자리잡기를 바란다는 것은 오히려 반대로
대중의 취향을 무시한 것 아닐까. 실제로 1990년대 후반에는 황신혜
밴드가 TV에 출연하고, 델리스파이스의 기적이 일어났으며, 홍대의
드럭이 인디의 ‘성지’가 되기도 했다. 또 그 뒤에 이어진 테크노클럽의 붐은 어떤가. 그러나 지금은? 그중 지극히 일부만 살아남은채(그것도 대중적으로는 입지가 줄어든 모습으로) 다시 ‘땅속’으로 들어갔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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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필자도 솔직히 아이돌 음악쪽보다는 다른 스타일의 음악이 담긴
앨범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10대 아이돌 댄스음악을 좋아하는 대중에게, 그리고 ‘사랑타령’으로 채워진 발라드를 좋아하는 그 대중들에게 그것을 ‘포기’하고 ‘수준높은’ 음악을 들으라는 것 자체가 ‘대중’의 취향을 무시한 것 아닐었을까? 우리가 그토록 바꾸어야한다고 소리높이는 그 ‘대중음악’의 ‘대중’에 HOT를 좋아하고, god에 열광하며, 조성모에 눈물흘리는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들의 ‘취향’은 인정했어야 하지 않을까.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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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댄스음악만 나오면 무조건 ‘기획사의 종’이라고 욕하고, 그들은 노래조차 제대로 못하는 ‘인형’들이라고 얘기하며 시작하는
것이 미덕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대중은 제대로된 음악관을 정립할 기회조차 빼앗겨 버린 것이다. 최소한 ‘아이돌 10대 댄스음악’에서도
대중의 기호를 잘 맞춰나가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음악성을 인정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었겠는가 하는 말이다. 물론 이런 대중의 취향은 당시 댄스에 편중한 방송사의 영향도 크다고 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대중은 아이돌을 너무나 ‘사랑’했고, 동시에 철저하게 무시당하면서 전혀 통제되지 않은 상태로 그들 나름의
문화를 만들어나갔다. 한국의 대중음악 비평이 언젠가부터 대중적인
인기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할정도로 권위를 잃어버리고, 10대 팬들의 ‘냉소’를 사기 시작하며, 언론에서는 지나칠정도의 호평만으로 채워지기 시작한 것은 ‘대중’을 놓쳐버린 그들이 자초한 일일지도 모른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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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리, JSA, 친구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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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렇다면 한국영화를 보자. 한국 음악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있었다면 한국영화에는 ‘쉬리’가 있었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서구 트랜드를 가장 빠르게 따라잡은 음악과 매니지먼트 기법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면 ‘쉬리’는 한국에서도 ‘블록버스터’가 가능하고, 거대한 마케팅과 배급에서의 우위등 기획과 자본의 힘을 통한 영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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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와 함께 한국영화 시장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고, 한국 음악과 마찬가지로 질적인 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얻은 영화들이
대중적으로 성공한데 이어 시장의 엄청난 확장을 보여주고 있다. ‘쉬리’로부터 시작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해피엔드’로 이어진 1999년의 영화계는 한국영화계에 ‘르네상스’라는 표현을 쓰는데 어색하지 않게 만들었고, ‘공동경비구역 JSA'의 성공은 한국영화의 저력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한국영화는 1990년대 초중반의 한국음악과 마찬가지로 대중성과 음악성이 함께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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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은 유치한가?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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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제는 올해부터다. 다들 알다시피 ‘친구’는 기록적인 흥행과 더불어 작품성의 논란을 겪게 되었고, 그 뒤를 이은 ‘신라의 달밤’과 ‘엽기적인 그녀’는 100만 관객을 돌파했으나 작품성이 좋다고 할 수는 없는 영화였으며, 그것은 ‘조폭 마누라’에서 절정에 달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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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을 과연 한국영화의 전체적인 질적수준 저하와 ‘유치한’ 대중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다시 생각해보자. 서울관객 100만 이상이 한 해에 몇 번씩 기록되고, 전국 관객 400만 이상이 동원된다는 것은 지금의 한국영화가 ‘새로운’ 시장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음악이 10대가 그 중심에 나서면서 시장의
규모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듯, 지금의 한국영화역시 한국영화를 보지 않던 관객들이 들어서면서 관객수가 늘어난 것이다. 설마 ‘조폭마누라’나 ‘신라의 달밤’을 한국영화 팬들이 몇 번씩 봐서 이런 기록이 세워졌을리는 없지 않은가.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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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전의 한국영화가 특정 성향의 사람들만이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한국영화는 헐리웃 영화와 마찬가지로 ‘아무나 돈내고 보는’
사람들이 대거 들어온 시장인 것이다. 이는 영화음악에서도 쉽게 확인될 수 있는데, 이전의 한국영화는 그 음악에 있어 한국음악의 현재
인기와는 상관없이 올드팝을 선곡하거나, 인디밴드를 참여시키고, 일반인에게는 이름도 생소한 음악인들이 영화음악을 맡았다. 그것이 한국영화를 보는 이들의 감수성에 맞았고, 그것이 대세일때는 그 주변의 사람들도 그 영화를 보았기 때문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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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엽기적인 그녀’에는 신승훈의 노래가 실렸고, 곧
개봉할 배창호 감독의 영화 ‘흑수선’에는 작곡가 김형석이 앨범을
제작한다. 그만큼 한국음악을 듣는 시장과 한국영화의 시장의 관객이
가진 감수성이 비슷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계는 대중의 취향이
바뀐 것이 아니라 없던 대중이 새로 생긴 것이고, 이들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할때가 된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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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조폭 마누라’와 비교되곤 했던 ‘봄날은 간다’의 관객은
현재 서울에서만 37만을 동원하고 있고, 이는 허진호 감독의 전작 ‘8월의 크리스마스’에 비해 그다지 뒤지지 않는 상황이다. 또한 ‘킬러들의 수다’는 장진감독의 영화중 가장 많은 관객이 든 영화가 되었다. 사실 이들 영화가 100만, 200만 관객을 동원하는 것도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8월의 크리스마스’와 ‘간첩 리철진’을 사랑했던
관객들이 ‘조폭 마누라’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 다르게 영화에서 웃음을 얻기 위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또 생겨난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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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말할 것인가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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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다음순서는 무엇일까. 한국음악계는 이 단계에서 그 안에 담긴 그 작품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찾고 발전적인 방향을 찾기 보다는 아예 무시함으로서 질적으로 쇠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한국영화는 지금이라도 이 ‘조폭마누라’같은 ‘어이없는’ 작품들에도 나름대로 그 작품속에 담긴 흥행원인을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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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마케팅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한국 대중이 그만큼 작품에 상관없이 마케팅에 휘둘리는 관객이라는 생각과 마찬가지이며, 동시에 그것은 영화사로 하여금 대중의 취향을 ‘오판’하게
만들어 정말로 ‘형편없는’ 작품만을 양산하게 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아무리 보기에 ‘저질 코미디’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평가를 하면서 철저하게 장단점을 얘기하고, 그 안에서 호평과 비평의 이유를 정확하게 밝힌다면 대중은 대중나름대로의 영화보는 시각을 가질 것이고, 평론가나 언론과 영화에 대한 관점을 어느정도는
‘합의’할수도 있을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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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을 이해하라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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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고 ‘대중’문화 이야기를 하면서 ‘대중’의 ‘수준’을
한탄할 수 없지는 않은가. ‘조폭마누라’의 ‘엽기적인’ 성공을 한탄만 하기전에 그런 영화를 찾는 ‘평범한’ 대중의 마음부터 생각하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 대중에게 ‘제대로된 B급영화’나 ‘제대로된 조폭영화’의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과정은 생략한체 ‘엽기적인 그녀’의 성공에는 ‘마케팅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조폭 마누라’의 성공에는 ‘한국영화 위기론’이 따르는 언론(정확하게 말하면 위의 기사를 실었던 ‘씨네 21’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의 모습은 공정하지도 않고, 대중의 취향을 인정하지도 않는 모습이며, 이것이야말로 한국 영화계를 ‘과거’로 돌리는 첫 번째 징후일지도 모른다. 대중은 그렇게 ‘계도’할 대상이 아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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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대중적인 것, 혹은 상업적인 것에 무조건 너그러운 시선을 보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중’문화의 주인공인 대중을 좀 ‘이해’하면서,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과 순수한 음악적, 영화적인 완성도를 함께 고려해 ‘정확한’ 평을 해주자는 것이다. 어찌 언더그라운드 밴드와 아이돌 댄스가수, 예술영화와 조폭영화를 똑같은
선상에 올려놓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 예술영화의 심오한 철학에서
작품성을 발견한다면 조폭 영화에서는 ‘발차기 각’이나 ‘대사의
리얼함’으로도 나름의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영화 언론과 평론가가 정말 걱정해야할 것은 ‘조폭 마누라’의 기록적인 흥행이 아니라 개봉도 안된 ‘소림족구’가 인터넷을 통해 한국의 영화팬에게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켜도 그 작품과 작품이 일으킨 현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