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의 김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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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궁녀>는 지엄한 경고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궁녀로 궐에 들어오면 살아선 궁을 나가지 못한다”, “궁녀가 정절을 지키지 못하면 참형에 처한다”. 영화 속의 궁녀와 영화 밖의 관객에게 궁녀의 삶이 가진 비통함을 일러주는 이 목소리는 배우 김성령의 것이다. 1988년 미스코리아 진으로 당선된 뒤 영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로 연기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녀에게 <궁녀>는 자신의 두 번째 영화였던 <숲속의 방> 이후 15년 만의 영화계 복귀작이다. “정말 너무하지 않나? 왜들 그렇게 안 찾아주시던지… 내가 그 15년을 울면서 보냈다니까. (웃음)” 그녀의 말대로 극중에서 감찰상궁으로 분한 그녀의 연기는 지금껏 좋은 배우가 없다고 투덜거리던 한국 영화계가 얼마나 게을렀는지를 깨닫게 만든다. 궁녀들의 잘못을 단속하고 궁궐의 소란을 막는 한편, 그 자신도 권력에 기대려는 욕망을 품은 감찰상궁은 ‘쥐불이글려’라는 궁녀들만의 입단속 행사를 주관하는 공포의 대상이다. 이미 <무인시대> <명성황후> <왕과 비> 등 수많은 사극에서 표독스러운 왕비를 주로 연기한 김성령은 <궁녀>의 감찰상궁을 주도면밀하면서도 위엄있는 궁녀로 묘사했다. <궁녀>의 개봉이 지금보다 더욱 빼곡한 스케줄을 만들어줄 거라 기대하고 있는 그녀는 조만간 두 아들에게도 엄마가 놓인 상황을 이해시킬 계획이다. “내가 지금 과도기에 놓여 있지 않나. 엄마가 왜 같이 못 놀아주는지, 엄마가 잘돼야 너희들도 잘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알아듣든 말든 일단은 해야 할 것 같다. 너무 오랜만에 영화를 해서, 지금은 내가 급한 상황이니까…. (웃음)”
-최근까지 바빴나보다. 아침드라마 <사랑하기 좋은 날>이랑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을 촬영하면서 <궁녀>도 함께 참여했다고 들었다.
=사실 내가 그렇게 바쁜 배우가 아니다. (웃음) 정말 우연하게 그렇게 됐다. 영화까지 겹쳤을 때는 거의 집에 들어갔다가 씻고만 나올 정도였으니까.
-필모그래피상으로 볼 때, <궁녀>는 15년 만의 영화다. 그동안 다른 작품에서 제의를 받았을 것 같은데.
=많은 제의는 아니고, <숲속의 방>을 끝내자 간간이 들어오긴 했었다. 하지만 그다지 마음에 든 배역이 없었다. 그런데 차차 그런 제의도 드물어지더니 TV드라마를 주로 하게 되면서 뚝 끊기더라. 사실 그때는 나도 특별히 영화에 미련이 있었던 게 아니고, 또 중간에 연기에 회의를 느껴 MC만 한 적도 있다. 나중에야 아주 뒤늦게 생각이 들더라. ‘아니, 내가 영화로 데뷔했는데… 너무 나를 안 찾는 거 아니야.’ (웃음)
-어떤 배역이었기에 마음에 안 들었나.
=주로 주인공 친구 역할이었다. 그래도 3년 전부터 시나리오가 들어오곤 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내가 오케이하면 엎어지더라고. (웃음) 사실은 방은진 감독한테도 <오로라공주> 전에 준비했던 <첼로>의 어머니 역할을 받은 적이 있었다. 엄마와 딸이 의붓아버지를 놓고 벌어지는 삼각관계 이야기였는데, 그때는 역할도 좋고 너무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약간 야한 장면이 있었다. 애들 아빠가 정말 마음이 아프다고 그러더라. (웃음) 나한테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매니저를 붙잡고는 어떻게든 너가 누나를 말려주면 안 되겠냐 그러고, 친정엄마도 너가 집안에 불화를 일으키면서까지 해야겠냐고 해서 내가 먼저 포기를 했다.
-이후에도 결혼한 여배우라는 점이 다소 걸림돌이었던 걸까.
=에이, 그렇지 않을 거다. 날 잊어버렸을 테고, 아무런 관심이 없었겠지. 그래서 나중에는 내가 스스로 기획사에 영화가 하고 싶다고 부탁도 했고, 알아보고 다녔다.
-그런 와중에 <궁녀>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어땠나. 그토록 원했지만, 막상 출연을 결심할 때는 부담도 있었을 텐데.
=나야 정말 감사했지. 처음에 나한테 먼저 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한테까지 왔으니까. 이거 내부적인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는 건 아닌가. (웃음) 찾아준 것에 대해서는 너무 고맙고. 나를 믿어준 게 정말 고마워서 어떻게 기대에 부응할수 있을까 싶어서 고민을 많이 했다. 감독과도 이야기를 많이 했고. 정말 나한테는 그런 대화를 통해 연구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머리가 나빠서 순발력이 없거든. (웃음)
-<궁녀> 이전에 많은 사극드라마에 출연했다. <무인시대> <명성황후> <왕과 비> <대왕의 길> <조광조> 등등.
=너무 많다. (웃음) 사실 상궁은 처음이다. 그동안에는 왕비만 했었으니까.
-사극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궁녀>는 그것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 사극이다. 연기하기가 쉬우면서도 어렵지 않았나.
=그래서 이준익 감독님이 고사를 지낼 때, 나한테 사극톤을 없애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게 정말 쉽지가 않더라. 그토록 많은 사극을 했는데, 사극이 정말 쉬워야 하는 배우 아닌가. 하지만 기존의 것을 벗어나면서도 사극은 사극이다보니까 연기 자체가 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전에 사극에서 맡았던 여성들은 주로 어떤 인물들이었나.
=사극에서 여성이 하는 역할이란 게 암투와 권력싸움이지 않나. 나도 대부분 표독한 인물을 연기했다. 어떻게 하면 임금을 잡아가지고, 내 아들을 왕위에 올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웃음) <조광조>에서는 <여인천하>에서 도지원씨가 했던 경빈 박씨를 했고, <왕과 비>에서는 폐비 윤씨를 독하게 연기했다. 사실은 미스코리아 출신이다보니 PD들도 내가 사극에 어울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조광조>에 출연했는데, 잘 어울려 보였는지 그 뒤로는 계속 사극이 물리더라고. 사실 <궁녀>가 개봉한 뒤에도 출연을 약속한 사극드라마들이 있다.
-어떤 작품들인가.
=하나는 SBS에서 만드는 <일지매>인데, 일지매의 어머니 역이다. 일지매랑 일지매를 평생 동안 추적하는 사람을 배다른 형제로 둔 어머니지. 정말 애절하고 슬플 수밖에 없는 역할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스토리가 마음에 들었다. 다른 하나는 KBS에서 하는 <대왕 세종>인데, 여기서는 역시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하는 후궁을 연기한다.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김성령이란 이름 앞에는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미스코리아라는 게 연기생활에서 준 득과 실이 있을 것 같다.
=사실은 득이 더 많겠지. 처음부터 최고점에서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또 실이기도 하다. 배우로서 밑바닥도 경험했어야 했는데, 나는 최고에서 시작하고는 그때부터 내려오기 시작했으니까. (웃음) 나는 왜 미스코리아라는 딱지가 떨어지지 않을까 궁금했다. 그냥 배우 김성령으로 불리고 싶은데…. 아직까지도 내가 미스코리아 같은가보다. 내가 그렇게 예쁜 척을 했나 싶기도 하고. (웃음) 그걸 정말 깨고 싶어서 시트콤도 하고 연극도 하면서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려 했었다.
-당시만 해도 미스코리아 진이라면 정말 엄청난 자리였다. 당시 가졌던 지위에 대한 느낌은 어떤 것이었나.
=난 정말 내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그때만 해도 나한테 들어오는 모든 섭외가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방송 개편 때마다 새로운 제의를 받곤 했으니까. 그럴 때면 또 나는 “제가 요즘 피부상태가 안 좋아서…” 이러면서 튕기고 그랬다. (웃음) 정말 내가 감사할 줄 몰랐던 거지. 그러다 어느 순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니, 정말 그때가 아쉽더라. 나도 모르게 픽 웃곤 했다. 사람이 내려오긴 쉬워도 올라가기는 어려운 거니까. 아무래도 이제야 철이 드는 것 같다. 마흔이 돼서야 철이 들다니….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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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에는 어떻게 지원한 건가. 흔히들 미스코리아는 미장원 원장님이 발굴한다고 알고 있다.
=나도 똑같다. 그때는 그렇게밖에 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아는 분이 미장원을 소개해주었는데, 원장님이 보자마자 하자고 하더라.
-미장원에서는 미스코리아가 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는 건가. 그분들이 워킹 같은 것도 전문적으로 가르쳐주는 건가.
=준비 기간 동안 매일 화장하고, 머리하고, 워킹 연습을 했다. 미장원은 그때마다 모두 돈을 받는다. 보통 드라이 한번에 만원이라고 하면 미스코리아를 준비하면서 하는 드라이는 3만원이고, 이런 식이다. 매일 화장을 시키는 이유는 당일날 가서 화장을 하면 잘 받지 않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 다음에는 특별한 게 없다. 많은 사람들이 로비를 하는 줄 아는데, 나는 그런 게 없었다. (웃음)
-그때는 미스코리아에서 바로 연예계로 진입하는 게 무척 자유로웠다. 그런 너무나 당연한 진로를 어떻게 보았나. 평소에도 연기에 대한 생각이 있었나.
=정말 많이 어색했다. 연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는 것보다 당시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그러면서 뭔가 달라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래도 미스코리아니까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웃음)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를 했을 때도 사실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때는 ‘한국영화? 까짓 거 우습지. 연기는 다 못하던데. 뭐…’ 이런 생각이었다. (웃음) 그랬는데, 그해에 신인연기자상도 받았으니, 내가 정말 잘하는 줄 알았던 거지. (웃음)
-어렸을 때는 연기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었나보다.
=영화 보는 걸 좋아한 정도였다. 그래도 유명한 배우들 이름을 외우고 다녔고, 초등학생 때는 연극도 많이 했다. 중학교를 다닐 때는 방송반 생활도 했었고. 그때는 아무래도 내 입으로는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하기가 두렵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게 너무 자연스럽지 않나. 우리 애기아빠도 큰애한테 항상 “너는 꼭 가수가 돼라”고 한다. 내가 못 뜨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 많이 안타까워 하고…. (웃음)
-연기에 회의를 느낀 건 언제였나.
=그러니까 그게 남들이 나를 잘 안 알아주니까. (웃음) 사실 알아주지 않았던 게 힘들었다기보다는 사람들과 부딪치는 게 힘들었고, 내가 원하는 만큼 일이 잘 안 풀리니까, 이게 내 일이 아닌가 싶었던 거다. 당시 내가 김희애, 하희라, 채시라 이런 친구들이랑 같이 활동했었다. 내가 볼 때 그 친구들은 정말 배우처럼 보이는 거다. 나는 연기하면 힘들어 죽겠는데, 어떻게 저애들은 연기를 하면 할수록 힘이 난다고 하는 걸까. (웃음) 그런데 어느 순간 나도 오기 같은 게 생기더라. 그래서 다시 연극영화과에 들어갔고, 연극도 했다. 마흔 먹도록 평생 안 하던 운동도 하고, 춤도 배웠다.
-연극 <아트>의 문구점 주인 경숙을 연기한 뒤로는 예전보다 더 밝은 역할들을 주로 했다. 아침드라마 <걱정하지마>의 조미연은 활발한 미혼모였고,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의 미희도 푼수기가 가득한 이혼녀였는데.
=사실 나는 아직도 내 이미지가 변했다고 보지 않는다. 다행히 다른 배우에 비해 사극과 현대물을 넘나들었다는 이점은 있는 것 같다. 요즘도 항상 매니저한테 “도대체 나는 뭐냐?”고 물을 때가 많다. 어떤 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사실 실제 성격은 미희 같은데, 사극을 하다보니까 미희도 그리 쉽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본래 내 이미지로 먹고 들어가는 게 나한테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궁녀>도 이미지로 먹고 들어간 게 있지 않을까? 사실 지금 생각해보니 더 시니컬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던 게 아닐까 싶다.
-모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마케팅을 전공하고 있다. 어떤 이유로 선택한 것인가.
=(웃음) 그러니까 배우는 그런 기회가 많다. 내가 처음부터 의도했다기보다는 제의가 왔다. 연극영화학과랑 마케팅학과에서 둘 다 대학원 제의가 왔는데, 배우지만 내 자신을 마케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번쯤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것을 공부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배우말고 제2의 인생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런 건 아니다. 지금은 공부 자체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논문까지 쓸 자신은 없는데, 생각해보려고 한다. 왜 영화나 CF에서는 한번 썼던 배우만 계속 붙잡고 쓰는지에 대해 써보는 건 어떨까 싶다. 많은 매니저들이 이야기하는 것 중 하나가 처음이 어렵지 한번만 뜨면 그 다음에는 쉽다고 그런다. 아무래도 내가 영화를 못해서 맺힌 게 많았나보다. (웃음)
-<궁녀>를 통해서 이제는 영화에서도 많은 제의를 받을 것 같다.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역할은 없나.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시간을 좀 비워둬야 하는데…. (웃음) 지금도 들어온 게… (매니저를 보며) 있었지. (웃음)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을 보고 코미디영화가 하나 들어왔다. 고민을 했지만, 또 다른 역할을 해보고 싶어서 거절했다. 만약 내가 맡는 인물만의 스토리를 가진 영화가 있다면 무조건 하고 싶다. 내년에는 연극도 한편 해볼 계획이다. 배우로서 나 자신이 좀더 멋있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