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길옥윤씨가 1995년 3월 17일 0시 22분 지병인 암으로 별세했다. 1년 가까이 암 투병 끝에 68세를 일기로 타계한 작곡가 길옥윤씨는 평북 영변에서 태어나 1949년 경성치과전문대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작곡 및 연주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음악생활 50여년 동안 ‘사랑하는 마리아’ ‘이별’ ‘빛과 그림자’ ‘4월이 가면’ 등 3천여곡이라는 많은 곡을 만든 그는 탄탄한 실력과 뛰어난 감수성으로 명실공히 국내가요의 차원을 한단계 높인 공로자로 평가받는다. 또 서울올림픽폐회식음악과 마샬 아일랜드공화국의 국가를 작곡하는 등 그의 활동범위는 대중가요에 한정되지 않았다. 또 그의 인생은 음악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1966년 초 패티김과 인생의 반려자이자 노래의 단짝을 만나 음악인생의 절정을 누리다가 1972년 5월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한다"는 명언을 남기고 이혼했다. 그 후 여가수 혜은이를 발굴해 두번째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카페경영에 실패,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는 등 굴곡 많은 예술가의 삶을 살았다. 빈소에는 패티김씨 외에도 방송, 가요 관계자 수백명이 줄지어 조문, 고인의 음악적 발자취를 기렸고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장례식은 3월 21일 연예협회장으로 치러졌다./조선
[1972년] 한국최초 전기기관차 첫선
1960년대 말 고속도로의 확대에 따라 다각적 교통시대로 접어들면서 철도의 독점적 수송지위가 점차 상실되었으며, 철도의 속도향상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어 동력차의 변혁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72년 6월 처음으로 전기기관차를 도입, 비교적 구배가 심하고 곡선이 큰 중앙선 ·태백선 ·영동선을 운행하는 디젤기관차를 전기기관차로 대체하였다.
[1970년] 고급요정 선운각 마담 정인숙 피살
← 서울 마포구 합정동 강변로에서 발견된 코로나 승용차와 피살된 정인숙씨
눈발이 날리던 1970년 3월 17일 밤 11시쯤, 코로나 승용차에서 미모의 26세 여인이 목과 가슴에 두 발의 총알을 맞고 숨진 채 서울 강변대로에서 발견됐다.
단순한 치정살인으로 여겨졌던 이 사건이 갑자기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그녀가 고급요정 선운각의 얼굴마담인 데다 수첩에 정·재계 거물 26명의 이름이 적혀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였다. 게다가 여권발행이 힘들었던 시절에 불법발급된 복수여권까지 소지하고 있었다. 여인은 빼어난 몸매와 뛰어난 화술로 한창 주가가 높았던 요정마담 정인숙이었고 그녀에게는 세살배기 아들이 있었다.
검찰은 정 여인의 오빠가 여동생의 문란한 사생활에 분노해 살해했다고 발표했지만, 사람들은 곧이 곧대로 믿지않았다. 오히려 어린 아들의 아버지가 현직 국무총리라는 소문만이 난무했다. 범행에 사용된 권총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사건현장이 2시간 만에 돌연 치워지고 현장검증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간첩을 수사하는 공안검사가 이 사건을 지휘하는 등 많은 의문점이 제기됐다. 결국 중앙정보부는 보도통제를 시작, 27일 이후부터는 신문 지면에서 정 여인의 이름이 사라졌다.
정부는 김지하 시인이 재벌·국회의원 등 고위층의 부정과 부패를 신랄하게 풍자한 시 ‘오적(五賊)’을 발표하면서 “사회정화닷. 정인숙을 철두철미 본밧아랏…”이라는 내용을 게재하자 김지하를 구속하고 사상계를 폐간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조선.
[1969년] 골다 메이어(Golda Meir) 여사, 이스라엘 수상에 피선
←이스라엘 수상 골다 메이어 여사. 그녀는 세계에서 3번째에 해당하는 여성 수상이다.
1969년 3월 17일 이스라엘에 건국 이래 최초로 여성을 수상으로 하는 내각이 발족했다. 에시콜 수상이 급사함에 따라 이스라엘 의회가 전 외무장관인 70세의 골다 메이어 여사가 영도하는 신내각을 84대 12(기권1)의 압도적인 다수표로 승인한 것이다. 그 당시 여성수상의 탄생은 스리랑카의 반다라나이케 전 수상, 인도의 간디 수상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메이어 여사는 1898년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되던 해 미국으로 이주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았다. 평소 자신이 유대인임을 잊지 않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그녀는 곧 시오니즘에 적극적으로 참여, 세계유대인회의의 대표가 됐다. 이후 이스라엘 독립(1948)과 더불어 국회의원ㆍ노동장관ㆍ외무장관 등을 지내다 1969년 오늘 총리에 취임했다.
같은 해 가을, 메이어 여사는 중동분쟁 논의 차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미국 언론들은 그녀의 곱슬곱슬한 금발머리와 작은 체구, 온화한 용모로 “할머니가 장바구니를 들고 왔다.”고 크게 보도했고, 그녀는 가는 곳마다 열렬한 ‘메이어 선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메이어 여사는 정작 그 ‘장 바구니’에 팬텀 전투기 25대와 스카이호크 공격기 85대, 닉슨 대통령으로부터의 장기경제원조를 넣고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제 3 차 중동전쟁 승리의 여파를 타고 정치적으로 크게 안정된 시기에 정국을 이끌어 1973년 말의 총선거에서도 노동당을 다수당으로 이끌었으나 제 4 차 중동전쟁 전망에서의 실패와 정부 및 여당내의 내분으로 인해 1974년 결국 4개 총리직에서 해임됐다./조선
[1957년] 막사이사이 필리핀 대통령 비행기사고로 사망
← 막사이사이 필리핀 대통령
1957년 3월 17일 필리핀의 반공지도자 막사이사이 대통령이 남부 필리핀 세부섬에서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많은 수행관리들과 함께 사망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막사이사이는 1932년 필리핀대학을 졸업하고 태평양전쟁 직전까지 민간회사에 근무했다. 1945년에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명령으로 그의 고향인 잠바레스 주의 군정장관으로 임명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946년에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1950년에는 국방장관으로 임명됐다.
당시 필리핀은 세계2차대전이 끝나고 독립한 후에도 부흥이 늦어진 데 따른 경제 위기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항일 게릴라 조직이 모태가 된 후크단(후크발라하프)의 반란 때문에 정치 불안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1953년 10월 11일 막사이사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그의 노력으로 경제성장이 궤도에 오르자 반란은 평정됐다./조선
[1950년] 한국-스페인 국교 수립
에스파냐는 남한 단독수교국이다. 1950년 3월 17일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였으며 현재 양국간에는 상주 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한국의 에스파냐 수출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70년 1월 주(駐)에스파냐 상주대사관이 개설된 데 이어 1972년 초 마드리드에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무역관이 개설되면서부터이다.
1973년 2월에는 양국 민간경제인의 상호협정을 통한 양국간 경제·무역 협력의 확대를 위하여 한국·에스파냐 경제협력위원회가 발족되었으며, 1975년 6월 마드리드에서 제1차 합동회의가 개최되었다.
[1938년] 소련 무용가 누레예프(Nureyev, Rudolf Hametovich) 출생
← 누레예프와 마곳 폰테인
1938. 3. 17 소련 이르쿠츠크~1993. 1. 6 프랑스 파리.
그의 도약이나 빠른 회전은 종종 니진스키의 전설적인 재능에 비견된다. 타타르족 출신으로 11세에 발레 공부를 시작하여 15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발레로 생계를 이어갔다. 17세에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 학교에 들어가 두각을 나타냈지만, 콤소몰(공산당청년조직) 가입을 거부하고 외출금지 규정을 어기며 몰래 영어를 배우는 등 반항적이었다.
1958년 학교를 졸업한 뒤, 순회무용단인 레닌그라드 키로프 발레단의 독무연기자가 되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961년 6월 키로프 발레단과 함께 파리에 갔을 때 공항에서 소련 보안요원의 감시를 피해 프랑스에 망명을 요청했다. 나중에 그는 소련 발레단에서는 조직운영이 엄격하여 춤출 수 있는 기회도 자주 얻지 못하고 다양한 연기를 맡는 데도 제한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망명 뒤 '그랑 발레 뒤 마르키 드 퀴에바'와 협연했고, 1962년에는 미국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루스 페이지의 시카고 오페라 발레단과 함께 공연하여 미국 무대에 데뷔했다. 그해 후반에는 런던 로열 발레단의 상임 객원연기자로 입단했다.
그는 마고 폰테인과 가장 호흡이 잘 맞는 상대로 유명했는데, 그가 한 상대역으로는 〈지젤 Giselle〉의 알브레히트 역, 〈마르그리트와 아르망 Marguerite and Armand〉의 아르망 역, 〈백조의 호수 Swan Lake〉의 지그프리트 왕자 역 등이 있다. 그는 전세계의 크고 작은 여러 발레단에서 인기있는 객원연기자였다. 안무가로도 활동한 그는 〈백조의 호수〉(빈, 1964)를 남자 무용수 중심으로 개작했다. 그가 각색한 프로코피에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1977)을 런던페스티벌 발레단이 공연했고, 〈만프레드 Manfred〉(1979)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이 공연했다. 1980년에는 베를린 발레단을 위해 〈호두까기 인형 The Nutcracker〉을 무대에 올렸고, 1981년에는 이탈리아 무용계의 부활에 힘입어 자신이 각색한 〈로미오와 줄리엣〉을 라스칼라 극장에서 마곳 폰테인(줄리엣 역)과 함께 공연했다. 그는 현대적인 작품에서도 기량을 발휘하여 마사 그레이엄, 머레이 루이스, 폴 테일러 등의 작품도 공연했다. 마사 그레이엄은 그를 위해 〈루시퍼 Lucifer〉(1975)를 창작했으며, 1978년에는 머레이 루이스가 그를 위해 안무한 〈Canarsie Venus〉 및 〈비바체 Vivace〉의 미국 초연에 출연했다.
그의 자서전 〈누레예프 Nureyev〉가 1962년에 출판되었다. 1973년에는 로버트 헬프만과 함께 감독한 발레 영화 〈돈키호테 Don Qujxote〉에서 주연을 맡았고, 1977년에는 영화 〈발렌티노 Valentino〉에서 배우로 데뷔했다. 2번째 영화 〈Exposed〉(1983)에서는 주연을 맡아 연기하면서 춤은 전혀 추지 않았다. 1983년에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을 맡아 첫 공연을 가졌다. 1982년 오스트리아 시민이 되었다.
[1930년] 엠파이어 스테이트(Empire State Building) 빌딩 착공
←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931년부터 1972년까지 세계 최고층 건물이었음.
뉴욕시 맨해튼 34번가에 자리잡은 초고층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Empire State Building)은 슈립·람하먼(Shreve, Lamb and Harmon)이 설계, 1931년에 완공되었는데, 엠파이어 스테이트는 뉴욕시의 별명이다. 102층에 높이 약 381m인 이 빌딩은 1971년 세계무역센터가 생길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 지금도 뉴욕시의 명소로 되어 있다.
마천루(摩天樓)의 대표적인 예로서 수용인원 약 1만 8000명이며 65대의 엘리베이터가 각 층을 연결한다. 주로 임대 사무실용으로 되어 있는데, 86층과 102층에는 전망대가 있어 시내와 근교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1951년에는 꼭대기에 약 67m 높이의 텔레비전 안테나 기둥이 설치되었다. 건축적으로는 1910~1920년대에 걸쳐 유행한 울워스 고딕 양식을 취하고 있다.
[1919년] 미국의 음악가 콜(Nat King Cole) 출생
← Nat King Cole과 딸 Natalie Cole
"당신이 배우게 될 가장 위대한 것은 바로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 답례로 사랑받는 것이다. " - 냇 킹 콜, 중에서
1919년 3월 17일 태어남 / 1965년 2월 15일 죽음
콜은 재즈 피아니스트, 발라드 가수로 활동한 미국의 음악가이다. 1937년 로스앤젤레스의 재즈 클럽에서 연주활동을 시작했다. 1939년 기타 연주자인 오스카 무어와 베이스 연주자인 웨슬리 프린스와 함께 '킹 콜 트리오'라는 재즈 그룹을 결성해 대중음악계에 데뷔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다가 솔로로 독립했다. 이후 따뜻하고 편안한 발라드로 큰 인기를 누렸다. 그는 백인에게서도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최초의 흑인 아티스트로 꼽힌다. 큰 딸 나탈리 콜도 가수이다. 히트곡으로는 <몸을 펴고 날아라 Straighten Up and Fly Right>, , <투 영 Too Young>, <모나 리자 Mona Lisa>,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917년] 전 법무부장관 홍진기(洪璡基) 출생
1917년 3월 17일 ~ 1986년 7월 13일
아호 유민(維民). 서울 출생이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고, 그 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1942년 경성지법 사법관 시보를 시작으로 일제 때 판사 생활을 했다.
해방 이후에는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4.19 혁명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 1964년 중앙라디오방송주식회사 사장, 1968년 중앙일보사 대표이사 사장, 1971년 주식회사 동양방송 대표이사, 1974년 중앙일보·동양방송주식회사 사장, 1980년 중앙일보사 회장을 지냈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에 선정되었다. 이 명단에는 장인인 은행가 김신석도 함께 들어 있다. 가족 관계
첫째 딸 홍라희(洪羅喜) 이건희의 아내,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첫째 아들 홍석현(洪錫炫) 전 중앙일보 회장, 전 주미 대사
둘째 아들 홍석조(洪錫肇) 전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
셋째 아들 홍석준(洪錫埈) 삼성 SDI 부사장
넷째 아들 홍석규(洪錫珪) (주) 보광 대표이사
둘째 딸 홍라영(洪羅玲) 삼성문화재단 상무, 노철수(노신영의 아들)의 아내
[1899년] 한국 독립운동가 민양기(閔良基) 출생
1899. 3. 17 황해 해주~1922. 2. 25.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다가 만주로 망명했다. 1920년 항일무장 독립군인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해 군자금 모금과 독립단원 모집에 많은 활약을 했다. 1920년 5월 11일 군자금 모집과 황해도에서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친일파 암살의 명령을 받고 이명서(李明瑞)·이근영(李根永)·박기수(朴基洙)·주의환(朱義煥)·이지표(李芝杓)·원사현(元士賢) 등과 함께 평안북도 삭주 부근에 잠입했다. 6월 19일 평안북도 박천에서 박중서(朴重緖)·변춘식(邊春植)을 일행에 가입시키고 20일 박천을 떠나 진남포로 가는 도중, 대동군 용산면에서 대동경찰서 원장주재소에 근무하던 일경을 사살하고 진남포 쪽으로 피신했다. 28일 은율군 장연면 서부리 황윤상(黃潤相) 집에서 동지들과 회합하여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친일파 은율군수 최병혁(崔炳赫)과 군참사 고학륜(高學倫)을 처단하기로 결정했다. 8월 15일 밤 모두 3대로 나누어 이지표는 최병혁의 집으로, 그는 은율경찰서로, 고두환(高斗煥)은 김영섭(金榮燮)의 안내로 읍내에 있는 고학륜의 집으로 출발했다. 이지표는 최병혁을 사살했으나, 고두환은 고학륜이 도망가 실패했다. 한편 그는 경찰서 뒷문에서 부근을 감시하던 일경을 저격했으나,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9월 10일 신천군 초리면 도명리 노성우(盧聖祐)의 집에 은신중 황해도 경찰부 경찰대에 포위되어 치열한 격전 끝에 일경 히라자와[平澤政治]에게 중상을 입혔으나 이명서·박기수·주의환·원사현·이지표 등은 전사하고 그를 비롯하여 고두환·변춘식·박중서·김정욱 등은 일경에 붙잡혔다. 1921년 8월 1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이듬해 24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81년] 한국 독립운동가 유창순(庾昌淳) 출생
1881. 3. 17 충남 천원~1944. 9. 10.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사원(四源), 호는 송은(松隱). 1910년 한일합병 뒤 망국의 비분을 갚기 위해 구국운동에 신명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채기중(蔡基中)·강순필(姜順必)·유장렬(柳璋烈)·한훈(韓焄)·김병렬(金炳烈)·정만교(鄭萬敎)·정운홍(鄭雲洪) 등과 함께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구입과 군자금 모집을 위해 풍기광복단을 결성했다. 1915년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해 대한광복회를 조직할 때 이에 참가해 친일부호 처단에 앞장섰다. 대한광복회는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강령 아래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해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과 친일부호 처단 등을 추진했다. 그는 경상도 지방의 친일부호를 조사해 명단을 작성하는 한편 그들에게 보내는 광복회 명의의 포고문을 발송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17년 11월 채기중·강순필·임봉주(林鳳柱) 등과 함께 칠곡의 친일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했다. 이 일로 대한광복회 조직이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1918년 1월 박상진(朴尙鎭)·임세규(林世圭)·김한종(金韓鍾) 등과 함께 체포되어 10여 년의 옥고를 치른 뒤 출옥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71년] 프랑스 사회주의자 블랑키(Blanqui, Louis-Auguste) 체포
← 블랑키, Menut Alophe가 제작한 석판(1849)
1871년 3월 17일 프랑스의 사회주의 혁명가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가 체포되었다. 블랑키는 1830년 7월혁명으로 루이 필리프 왕조가 옹립되자 크게 실망하고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급진적 사회주의자 필리포 부오나로티의 영향을 받아 인민정부를 세우기 위한 비밀결사 결성을 주장했다. 1839년 비밀결사 '계절회'의 기습봉기로 체포된 블랑키는 노르망디의 몽생미셸 섬에 수감되었다가 1848년 풀려났다. 파리로 돌아온 후에는 중앙공화당회를 창립하고 대중봉기와 비밀결사 조직 등을 꾀했다. 1870년 파리에서 무혈혁명이 일어나 제3공화국이 수립되자 블랑키는 추종자들(블랑키스트)과 함께 정부 전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혁명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다. 파리 코뮌의 대중봉기에서 블랑키스트들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블랑키는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브리태니커
[1846년] 영국 삽화가 그리너웨이(Greenaway, Kate) 출생
1846. 3. 17 런던~1901. 11. 6 런던.독창적이며 예쁘장한 어린이책들을 만들어냈다. 도안가이자 목조 세공인인 존 그리너웨이의 딸인 그녀는 노팅엄셔의 농장을 비롯한 여러 곳을 이주하며 자랐다.
1868년부터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했으며 〈리틀 폭스 Little Folks〉와 같은 잡지에 처음으로 삽화를 발표했다. 1879년 〈창 아래에서 Under the Window〉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후 〈생일 책 The Birthday Book〉(1880)·〈엄마거위 Mother Goose〉(1881)·〈꼬마 앤 Little Ann〉(1883) 등 여러 책들을 펴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비록 아동서적이기는 해도 몇몇 작품은 삽화에 혁명을 일으켜 존 러스킨, 아르센 알렉산드르, 독일의 리하르트 무터 등 세계의 으뜸가는 예술비평가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그리너웨이가 〈Marigold Garden〉에 그린 삽화 〈할머니와 함께 외출〉(1855)
1890년 그리너웨이는 왕립수채화가협회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891년, 1894년, 1898년에 미술협회 화랑에서 삽화와 수채화를 전시했다. 1902년 이 미술협회는 그녀의 대표작을 뽑아 전시했다. 19세기초에 사용한 예스럽고 멋있는 의상은 꿈 같은 이야기에 분위기를 더해주었고 대중의 기호를 사로잡아 "케이트 그리너웨이는 두 대륙의 아이들에게 옷을 입혔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1883~97년중 1896년 1년을 제외하는 〈케이트 그리너웨이의 달력 Kate Greenway’s Almanacs〉을 내기도 했다. 그녀는 〈하멜린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비롯한 다른 사람 작품의 삽화도 그렸지만 자신이 직접 쓴 이야기에 그려 넣는 것을 더 좋아했다. 대단히 매력있는 여성이었지만, 대중 앞에서는 매우 수줍어했다.
[1844년] 강력한 소수 림스키코르사코프((Rimskii-Korsakov, Nikolai A.) 출생
러시아 레닌그라드주 티흐빈에서 태어난 림스키코르사코프(1844.3.18~1908)는 타고난 음악적 자질의 소유자였다.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적은 없으나 해군사관시절 발라키레프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지도를 받으며 무소륵스키 등과 더불어 '모구차야 쿠치카(강력한 소수 : 훗날 평론가에 의해 붙여진 이름)'라는 5인조 작곡가 모임을 결성 러시아 민족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이 결성한 5인조의 활동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186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된 ‘세르비아 주제에 의한 환상곡 (Fantasy on Serbian Themes)’의 성공적인 연주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왔으며 성공적인 5인조의 데뷔와 함께 림스키코르사 코프 자신에게는 작곡가로서의 순탄한 앞날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5인조의 활동은 모스크바를 기점으로 활동하던 차이코프스키 같은 보수적인 작곡가들과 대립하였지만 근본적으로 상호 발전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후 러시아 민족음악의 기틀을 정립 발전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하였다. 1781년 페테르부르크음악원 교수, 해군군악대의 지휘자, 궁정성가대 지휘자 등을 지내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단순 명쾌한 이해하기 쉬운 형태의 작품을 다수 남겼다. 또한 러시아의 오페라, 표제교향시, 가곡 분야 등 다방면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근대 작곡가들 역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 많이 있다.
[1754년] 프랑스 혁명기의 여걸 롤랑 부인(Madame Roland, 1754~1793) 출생
← Portrait of Madame Roland by Adelaide Labille-Guiard (1787)
본명 마농 필리퐁(Manon Philipon Roland de la Platière). 결혼 전 성은 필리퐁(Phlipon)이며, 별칭은 마농 필리퐁(Manon Phlipon)이다. 파리의 부유한 상인의 딸로 재색(才色)을 겸비하였으며, 1780년 리옹의 산업검찰관(産業檢察官) 장 마리(Jean Marie Roland de la Platière)와 결혼하였다. 남편의 일에 협력하였고, 남편을 귀족으로 승격시키는 데에도 힘썼다.
혁명 후 정치운동에 참가하여 1791년 이래 푀양파(派)의 살롱에 대항하여 지롱드파의 명사들에게 자기집을 개방하였다. 1792년 3월 남편은 내무장관이 되었으나, 1793년 1월 루이 16세의 처형과 동시에 부부가 다 같이 반산악파(反山岳派) 입장을 표명하였다. 부인은 6월에 체포되어 11월에 처형되었다. 그녀가 마지막 남긴 말 “오, 자유여, 너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범죄가 저질러졌는가”는 유명하다.
[1686년] 프랑스의 로코코 화가 우드리(Oudry, Jean-Baptiste, 1686~1755) 출생
18세기 최대의 동물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1719년에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된 이후에는 동물화와 태피스트리 도안, 그리고 책의 삽화를 주로 그렸다.
우드리는 1734년에 보베 태피스트리 제작소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가 도안한 〈전원유희 Country Amusements〉(1730)·〈몰리에르의 희극 Moliere's Comedies〉(1732)·〈라 퐁텐의 우화 The Fables of La Fontaine〉(1736) 등의 태피스트리 연작들로 그 제작소는 유명해졌다. 이 가운데 마지막 연작을 위한 도안은 4권짜리 〈우화집 Fables〉에 그린 277편의 삽화와 연관된 것이다. 그밖에 〈돈 키호테 Don Quixote〉·〈희극 이야기 Le Roman comique〉의 책에 그린 삽화들이 있었다. 1736년에는 고블랭 태피스트리 제작소의 총감독이 되어 루이 15세의 사냥장면을 묘사한 태피스트리 연작을 도안했다(1736~49). 또한 왕과 그 주변 인물들이 데리고 다니는 사냥개들의 그림을 주문받았으며 왕실의 사냥놀이를 그리는 공식화가로 임명되었다. 그림과 마찬가지로 그의 태피스트리는 섬세한 색조와 생생한 자연의 묘사로 좋은 평판을 얻었다. 그의 후기 정물화 중 잘 알려진 〈하얀 오리 White Duck〉(1753)는 정확한 소묘와 미묘한 백색의 색조 처리를 보여준다. 그는 루이 15세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 스웨덴의 여왕,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제후에게서도 그림을 주문받았다.
그밖에
2009년 북한, 미국 여기자 2명 억류
2009년 송도 호텔 공사장서 불..3천만원 피해
2004년 1973년 중앙정보부 조사받다 의문사한 최종길 교수 ‘타살 인정’ 법정증언
2003년 부시 미국 대통령 이라크 후세인에 최후통첩, 사실상 선전포고
2003년 독립기념관, 조선일보 윤전기 철거 결정
2003년 미국ㆍ영국 UN 안보리 동의 없이 이라크공격 결정
2002년 ‘생의 한가운데’ 작가 루이제 린저 사망
2001년 애니카 소렌스탐, 미 LPGA 사상 최저타인 59타 기록
2000년 우간다 카눈구에 있는 사교집단 `신의 십계명 부활`교 교단본부 화재로 330명 사망
1998년 중국 새 총리에 주룽지 부총리 선출
1997년 미국 대법원, "흡연환자 치료비 담배회사가 부담" 판결.
1996년 영화감독 르네 클레망 사망
1988년 이라크군, 쿠르드 난민에 독가스 사용(4000명 사망)
1988년 일본 도쿄돔 야구장 개장
1981년 울산화력발전소 4-5-6기 준공
1981년 소련, 위성파괴무기 개발 성공
1979년 백두진 제10대 국회의장 피선
1978년 미국의 대형 유조선이 프랑스 브리타니 해안에서 좌초, 대형 기름유출 사고
1969년 영국 정부, 런던 금시장 3월중 폐쇄키로 결정
1967년 조선일보사 청룡봉사상 제1회 시상식, 봉사정신을 지닌 경찰관과 일반인들 매년 표창
1965년 비운의 이집트 국왕 파룩1세 사망
1964년 미국, 베트남에 게릴라 군대 창설 발표
1963년 프랑스, 사하라사막서 지하핵실험
1963년 인도네시아 발리섬 아궁화산 폭발로 1,900여명 사망
1958년 미국해군, 위성발사 성공
1958년 CBS 최초의 DJ프로그램(노래에 얘기싣고) 신설
1956년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무장관 내한
1955년 동아일보 誤植사건으로 정간
1953년 서부전선서 중공군 4개대대 섬멸
1949년 국방신문 창간
1949년 원한경(언더우드)박사 부인, 남로당 하수인에 피살
1948년 브뤼셀서 서유럽 5개국 연맹조약 승인
1942년 명륜전문학교 (현 성균관대학교) 설립인가
1938년 중등학교에서 조선어과목 폐지
1937년 총독부, 일본어 강제사용 시달
1889년 미국, 존 홀랜드 잠수함 첫 개발
1861년 이탈리아, 분열 1400년 만에 통일
1846년 별의 위치를 측정한 독일의 천문학자 베셀 사망
1834년 자동차의 아버지 독일 공학자 고틀리브 다이믈러 출생
1680년 프랑스 모럴리스트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 사망
1328년 스코틀랜드, 영국으로부터 독립
180년 로마의 황제(161~180 재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망 - `명상록`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