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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88
11월28일[연중 제3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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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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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7V1a2ZXxkoI
[서울대교구 한승진 베드로 신부님 집전(청소년국 학교사목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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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혹독한 고통은 영원한 나라를 보다 적극적으로 준비하라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아직까지도 교회 교도권에 대한 철저한 불순명과 황당무계한 교리, 유치찬란하면서도 이상야릇한 현상을 강조하며, 점점 더 보편 교회와 멀어져가고 있는 한 단체를, 공동체 형제들과 함께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외치는 것이 치유요 기적이더군요. 모든 가르침이나 간증의 전개 방식은 대동소이했습니다.
중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였다. 절망과 두려움 속에 오늘내일하던 중, 은혜롭게도 그분을 만나 뵙게 되었다. 그분의 말씀을 듣던 중, 강렬한 한 줄기 치유의 빛이 내게 다가왔다.
갑자기 끔찍했던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박수와 함께 아멘!) 들어올 때 타고 왔던 휠체어는 필요 없게 되어 내 발로 걷어 차버렸다! (아멘!)
제대로 걷지도 못했었는데 덩실덩실 춤을 추며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 가서 검사했었는데, 주치의 선생님께서 깜짝 놀라시며 하시는 말씀! 암세포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함성과 함께 아멘!)
나약한 한 사람을 철저하게도 신격화시키고 우상화시키며 교회 분열을 획책하고, 교묘한 방법을 총동원해서 선량한 교우들을 현혹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경고 말씀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복음 21장 8절)
물론 매일같이 여기저기 쑤시고 아픈 사람들, 불치병이나 병이 깊어감에 따라 백약이 무효인 사람들에게 있어 치유라는 것, 너무나 달콤하고 큰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여기저기 나대고 있는 사이비 교주들은 이런 우리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심각한 병고로 인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혹독한 고통, 기도빨이 센 누군가를 만나 순식간에 치유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경우는 로또 맞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갑작스레 찾아온 병고 앞에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노력을 하는 게 정답입니다.
첨단 의학의 도움을 받아, 빨리 원인을 찾아야겠습니다. 병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파악해야겠습니다. 전문성을 지닌 의료진들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고, 적극적인 치료와 함께 슬기로운 투병생활을 시작해야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치료 과정에서 신앙은 큰 도움을 줍니다. 난데없이 찾아온 병고를 수용하지 못하고 억울해하며 밤낮없이 울부짖고 있으면, 병세는 더 깊어질 것입니다.
병상에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모든 것을 주님 손에 의탁하고 마음 편히 지낼 때, 반드시 좋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을 크게, 낙관적으로 먹고, 이왕 다가온 병고를 친구처럼 맞아들이며, 어떻게 하면 잘 다스릴까 고민하고, 의료진들의 권고에 따라 최선을 다해 성실히 환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노력이 곧 치유의 기적을 불러올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전후로 수많은 사람이 메시아임을 자처하고 등장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마지막 예언자라고 외쳤습니다. 기원후 44~45년경 로마 총독 시대에는 테우다스라는 사람이 나타나 한바탕 난리를 쳤습니다.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을 때 사백 명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사도행전 5장 36절)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한번 당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워낙 교묘하고 달콤해서 진의를 식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그럴듯하게 자신을 포장합니다.
따라서 어딘가를 갔는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고 애매할 때는 즉시 사목자들의 의견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에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 묵시 문학은 세상 끝날을 꽤 무시무시하게 표현합니다. 전쟁과 반란, 파괴와 질병 등 참담한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 그와 유사한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한 가지! 전쟁과 반란, 파괴와 질병 같은 대참사들도 크신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겪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질병이 곧 종말의 징조는 아닙니다. 참혹하고 끔찍한 일이지만 이 또한 다 지나갑니다. 그런 혹독한 고통은 다가올 영원한 나라를 보다 적극적으로 준비하라는 하느님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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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보다 영원한 성전, 보다 진실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건립합시다!>
한 몇 년 동안 저희 수도회 창립자 발자취를 따라가는 기획 순례 담당자로 일할 때였습니다. 원 없이 명품 성당들을 셀 수도 없이 순례했습니다. 나중에는 질릴 정도였습니다.
엄청난 대성당의 규모를 바라보며, 고색창연하고 화려한 모습을 바라보며, 성당 내부에 가득 찬 역사적이고 찬란한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지어졌던 예루살렘의 대성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성전이 값비싼 돌과 진귀한 보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습니다. 얼마나 장중하고 화려했으면 당시 관광의 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외형이나 허례허식, 겉치레를 누구보다도 싫어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외적인 화려함보다는 항구함, 영속성, 진실함을 추구하시던 분, 본질과 핵심을 꿰뚫어 보시던 분이셨습니다.
지금 비록 당신 눈앞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대성전이지만, 세월의 흐름 앞에 서서히 허물어질 건물, 언젠가 수명을 다해 사라질, 별 것 아닌 인간의 업적임을 잘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를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항구함입니다.
영속성입니다.
불변함입니다.
언제나 거기 계심입니다.
반대로 인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가변성입니다.
변화무쌍함입니다.
유한성입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성입니다.
이런 불완전한 인간이 짓는 인간의 성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성전이라 할지라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50년, 100년, 200년이 흐르면 서서히 허물어집니다.
마침내 수명을 다해 보수작업이 필수입니다. 리모델링을 해야 하며 마침내 완전히 허물고 재건축을 해야 합니다.
반대로 진정한 성전인 하느님의 집은 어떠합니까? 그 집의 특징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아름다운 대성전들이 하나하나 허물어 사라질지라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하느님의 집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 각자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 각자의 영혼입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거룩함을 추구하는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세월이 흘러 시대가 바뀌고 사람도 바뀌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영성이 언제나 지속되는 우리 교회입니다.
정말이지 세월 앞에 장사 없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모든 것이 변합니다. 영원할 것 같던 우리의 인생이 지나가고, 꿈결 같던 파릇파릇한 청춘도 가고, 꽃 같던 아름다움도 세파에 떨어지고, 한때 대단해 보였던 모든 것들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만 갑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린 사랑입니다.
외형적인 성전 건립도 중요합니다. 웅장하고 화려한 문화재 성전의 유지 보수도 중요합니다. 성인들의 피와 땀이 서린 성지 계발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작업이 하나 있습니다. 참된 성전인 예수님, 그분의 사랑 정신과 영성으로 충만한 제대로 된 나, 그리고 우리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몇백 년 세월이 흘러가면 수명을 다해 어쩔 수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런 성전이 아닌, 보다 영원한 성전, 보다 진실하고 아름다운 성전인 우리 공동체를 건립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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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2GZqzmR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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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보이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왜 조심해야 할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허물어질 때가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그 일이 벌어질 때의 표징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속이게 될 것이고, 전쟁과 반란, 그리고 큰 지진과 기근이나 전염병, 심지어 하늘에도 무서운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성전이 힘을 발휘한다면 감히 거짓 예언자들이 설치지 못하고 세상에 평화와 번영이 깃들이게 할 것이란 뜻도 됩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몸이 약해집니다. 몸이 약해진다는 말은 이제 세상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세상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건축물이 세워지지 않으면 무너집니다.
교회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은 에너지입니다. 에너지가 충만하면 세상에 영향을 줍니다. 선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그러나 그 힘이 떨어지면 무질서와 파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영향을 주거나 영향을 받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전에 군대에 가서 귀신을 본다는 청년의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이 친구는 악령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것 자체가 허물어져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허물어지고 있다는 말은 성령께서 함께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저는 그에게 귀신이 자꾸 말을 걸어도 못 들은 척하라고 했습니다. 자꾸 반응하면 그것에 영향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당에 나가서 다시 성체를 영하라고도 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귀신은 ‘흥 재미없어!’하고 가버렸습니다.
한 사람이나 성당, 교회 전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표징은 내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세상의 영향을 받을 때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죽이고 교회를 박해하고 멸망하기 직전 로마에 포위되었습니다. 이는 법칙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이를 살리고 악령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한 영향력을 스스로 거부하니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세상에 영향을 주던지, 아니면 세상에 영향을 받으며 세상 탓을 하며 살던지. 절대 귀신이 보이거나 소리를 듣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무너지고 있다는 표징입니다.
유튜브 채널 ‘돈키호테 박서홍’을 운영하는 60대 몸짱이 있습니다. 60대이지만, 신체 나이는 30대와 같습니다. 이분은 10년 동안 감기를 앓아본 적도 없었고 그래서 병원에도 가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쳤던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젊었을 때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하면서 흥청망청 살 때가 있었습니다. 투자도 잘 못하고 동업하는 과정에서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이때 우울증도 오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삶을 포기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여기고 새벽마다 운동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운동만큼 기도와 비슷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육체를 괴롭히며 성령께서 들어오십니다.
이분은 사업엔 재능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노동으로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으려 했고 지금은 거의 되찾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용접 일을 하는데 몸을 많이 써야 합니다. 그래서 체력이 필요했고 이 때문에 몸을 단련하였습니다. 그때가 50대 초반이었습니다.
살기 위해서 술 담배를 끊고 시작했던 기술을 배움과 체력을 단련하였습니다. 지금은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영향을 주거나 영향을 받거나 둘밖에 없습니다. 영향을 받기만 한다면 죽어가는 것입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애벌레 때는 영향을 받는 삶을 삽니다. 경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비가 되면 영향을 주는 삶을 삽니다. 나비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애벌레로만 사는 동료들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는 이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는 나비로 새로 태어난 이들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렇게 그의 주위에는 생명력이 넘치고 좋은 일만 일어납니다. 성령으로 사는 삶이 이런 삶입니다. 짓거나 허물어지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영향을 줍니다. 죽어가는 것은 영향을 받습니다. 인간이 허물어지는 이유는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죄는 믿음이 없음에서 비롯됩니다. 구마 영화에 보면 마귀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먼저 사제들이 서로 고해성사를 보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도 악한 영향을 받지 않으려면 선한 영향을 미쳐야 하는데 그러면 믿음으로 죄를 이기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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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담아낸 ‘영상다큐’를 볼 때가 있습니다. 제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1970년대와 80년대의 영상을 보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겨울이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길가에 수북이 쌓여있는 다 타버린 하얀색의 ‘연탄’이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종종 들려오는 뉴스 중에는 ‘연탄가스’가 있습니다. 저의 집에도 연탄가스가 있어서 자칫 큰일 날 뻔했습니다. 겨우내 먹을 김치를 담그는 ‘김장’이 있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이 함께 김장을 하였고, 맛있는 김치 속에 돼지고기를 삶아서 먹는 호사도 있었습니다. 동네 개울에서 타던 ‘썰매’가 있습니다. 손재주가 좋았던 큰 형은 멋진 썰매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호빵’도 있습니다. 달디단 ‘군고구마’도 있습니다. 50년이 지난 지금 서울의 겨울은 그때와는 많이 다릅니다. 다닥다닥 붙어있던 달동네는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아파트’로 변했습니다. 겨울을 따뜻하게 해 주었던 연탄은 언제나 따뜻한 물이 나오게 해 주는 가스보일러에게 자리를 내 주었습니다. 맞벌이 부부와 핵가족은 더 이상 김장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마트에서 종갓집 김치를 간편하게 사서 먹습니다. 동네 개울에서 타던 썰매는 보이지 않고 많은 젊은이들은 스키와 스노보드를 타고 있습니다. 먹을거리도 많이 변했습니다. 피자, 햄버거를 먹습니다. 배달의 민족답게 원하는 것들은 배달시켜서 먹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온 시절은 아니지만 40년대와 50년대의 영상을 볼 때도 있습니다. 산업화 이전의 대한민국입니다.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대한민국은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그 가난한 나라가 이념의 대립으로 둘로 나뉘었습니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나라는 비극의 3년 전쟁을 겪어야 했습니다. 전쟁의 결과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겼습니다. 전쟁의 결과 많은 사람이 부상하고 죽었습니다. 전쟁의 결과 그나마 있었던 산업기반 시설들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모 세대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놀라운 경제성장의 기적을 일구어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누나는 가발공장에서 일하였고, 버스 차장으로 일하였고, 좁고 어두운 방에서 미싱을 돌렸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형들은 인력거를 몰았고,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밤을 새우면 일하였습니다. 공장에서 기계를 돌렸습니다. 삼촌은 서독의 탄공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고모는 서독의 병원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아저씨들은 사막의 나라 중동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제가 자라면서 보아왔던 생생한 기억들입니다. 그리고 2023년 대한민국은 경제력으로 부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문화적으로 ‘한류’를 보여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Made in Korea'는 부끄러운 제품이 아니라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는 자랑스러운 제품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자원이 풍족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강한 ’정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죽었고, 제자들은 모두 무서워서 숨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땅에서도 새싹은 올라오듯이 죽음을 넘어, 시대를 넘어 부활의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교회는 갈릴래아라는 좁을 울타리를 넘어 세상 끝까지 세워졌습니다. 239년 전에 세워진 조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해의 모진 광풍이 불었습니다. 수많은 신앙인들이 순교하였습니다. 239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쳤던 곳은 ‘성지’가 되었습니다. 원조를 받던 교회는 이제 원조를 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어두웠던 시대에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매10년마다 100만 명씩 신자가 늘어나는 놀라운 모습을 저는 직접 보았습니다. 신앙은 혼자 뛰는 마라톤이 아닙니다. 신앙은 함께 뛰는 이어달리기입니다. 오늘 나의 ‘삶’이 뒤에 오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도록 열정과 헌신으로 복음을 살면 좋겠습니다.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꿈은 확실하고 그 뜻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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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11월28일 [연중 제34주 화요일]
복음: 루카 21,5-11: 예루살렘의 멸망 예고
오늘 복음에서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감탄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그 성전이 돌 위에 돌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성전이 언제 무너질 것이며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어떤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냐는 질문에, 주님께서는 그 표징들에 대해 일러 주시며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이 오류에 빠져 참된 믿음을 버리고 떠나갈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주님의 날이 올 것이다. 주님께서 첫 번째 오심은 속죄를 위해서였고 두 번째 오심은 더 많은 이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시며 그들에게 경계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8절).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비밀리에 오시지 않고 무시무시하고 화려하게 오실 것이다.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기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려오실 것이다.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다. 우리는 모든 말씀을 읽고 들었다. 우리는 언제 종말이 오는지 우리 모두 들었다. 그때에는 전쟁과 지진과 환난과 기근이 일어날 것이다(마르 13,7-8). 마지막 날에 민족과 민족이 맞서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다. 너희가 전쟁과 지진과 기근을 보게 되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일어날 표징들을 알려주신다.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신다.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셨고 당신 백성들과 만나신 유서 깊은 곳이다. 그런데 그토록 파멸했다. 예루살렘처럼 회개하지 아니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하느님을 따른다고 할 때, 이러한 파멸을 우리 자신도 당하게 될 것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신다. 벌주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뜻을 거부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그 길을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언제나 주님의 뜻에 귀 기울이고 그분 안에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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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전례력의 한 해를 마무리하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과 사랑을 돌아봅니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과 율법을 주시며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우상 숭배와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많은 임금과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그들이 뉘우치고 당신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선택하지 않고 그릇된 길을 걷습니다. 구약의 백성은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나 있던 동안 비로소 하느님 사랑을 깨닫습니다.
제1독서에서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 솔로몬이 건설한 예루살렘 제1성전을 파괴한 것은 하느님께서 이방인 임금을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제2성전을 가리키시며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소, 거룩한 곳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스스로 거부하고 파기하였기 때문이며, 결과적으로 옛 계약이 새 계약으로 상대화되며 완성된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과 사랑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일상에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소한 것들, 예를 들어 신앙, 생명, 건강, 가족 같은 것들에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작은 노력을 기울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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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6)
여기서 ‘몇몇 사람’은 ‘제자들’입니다.(마태 24,1; 마르 13,1) “그것이(성전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라는 말은, 성전이 대단히 아름답고 장엄하다고 감탄했다는 뜻입니다.(마르 13,1) 열왕기 하권을 보면,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 때에 바빌론의 친위대장인 ‘느부자르아단’이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과 성벽과 모든 집을 파괴했습니다.(2열왕 25,8-10) 그랬는데, 성전은 페르시아 임금 ‘다리우스’ 때에(기원전 515년) 복구되었고(에즈 6,14-15), 성벽은 기원전 445년, 페르시아 임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때에 복구되었습니다.(느헤 6,15) 그 뒤에, 헤로데 임금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했는데, 46년이나 걸린 큰 공사였습니다.(요한 2,20) 헤로데가 재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은 규모도 컸고, 보석을 많이 사용해서, 대단히 화려하고 장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지만 로마제국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 때에(서기 70년) 로마군대에 의해 성전과 성벽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오늘날까지 복구되지 않은 채로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일을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짓고 나서 하느님께 봉헌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나에게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계명과 규정을 따르지 않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예배하면, 나는 내가 준 땅에서 이스라엘을 잘라 버리고,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별한 이 집을 내 앞에서 내버리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속담거리와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 집은 폐허가 되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몹시 놀라고 휘파람을 불어 대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찌하여 주님이 이 땅과 이 집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러면 사람들이 대답할 것이다. ‘자기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 그들의 하느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끌어들여 그 신들을 예배하고 섬겼기 때문이지.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모든 재앙을 그들 위에 내리셨다네.’”(1열왕 9,6-9)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는 일을 두 번이나 겪은 이스라엘은 회개했을까? 하느님께서는 오늘날의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시면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성전 파괴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회개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면, 성전을 파괴한 바빌론 임금과 로마 황제는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그 벌을 집행한 것일까?” 그것은 아닙니다. 성전 파괴가 정말로 ‘하느님의 벌’이라 하더라도, 감히 하느님의 집을 파괴한 바빌론 임금과 로마 황제는 하느님을 모독한 대역죄인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뜻에 의한 일이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은 ‘살인죄’를 지은 죄인들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는, “너희는 지금 성전 건물의 화려함과 장엄함만 보면서 감탄하지만”입니다.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면, 영원한 것은 없다.”입니다. 성전을 잘 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자들이 보면서 감탄한 그 건물은, 사실 헤로데가 자기의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서 세운 건물이었습니다. 성전이긴 했지만,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으로(신앙심으로) 세운 건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실 때,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강도들의 소굴’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강도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 앞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뿐만 아니라 전체 인류의 모든 활동에 다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이 자랑하는 업적들, 학문이든 예술이든 다른 무엇이든지 간에, 하느님 뜻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면, 하느님 나라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고, 모두 먼지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영원하기를 바란다면, 영원하신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어야 합니다. 지금 인간들은, 허무하게 사라질 먼지만 쌓으면서 너무 오만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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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님]
<하느님께서 세우실 나라는 영원하리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우리를 읽습니다.” 어느 교부가 남긴 이 격언의 뜻은, 성령의 감도를 받아 쓰여진 성경은 하느님의 눈으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본 기록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 먼저 우리도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게 되고, 그 다음 세상 현실도 하느님의 눈으로 관찰하게 되며, 나중에는 지나간 역사와 다가올 미래도 하느님의 눈으로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담긴 하느님의 지혜를 알고 있던 다니엘은 네부카드네자르 바빌론 임금의 꿈을 풀이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 꿈의 내용은 주로, 바빌론 왕국 이후에 일어날 나라들의 운명과 궁극적인 전망에 대한 것이었는데, 여러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리라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그 흥망성쇠의 역사란 지중해 세계의 국제 정세를 반영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하느님 나라는 온 누리에 세워지리라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으로서 이스라엘 나라에 오시어 로마 식민통치를 몸소 겪으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의 주류인 사두가이, 바리사이 그리고 이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군중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였습니다.(요한 1,10-11)
하지만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아보고 믿게 된 소수의 아나빔들이 그분을 메시아로 맞아들였고 그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메시아 백성이 되어 교회를 이루었는데, 이 교회가 하느님 나라를 위한 밀알이 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선포할 메시아 백성과 이들이 모인 교회는 악인과 죄인들이 선을 거부하고 악을 선택한 대가로 치르는 시련 속에서 복음을 선포하게 되는 운명이기는 했지만 이 시련을 겪으면서 가까스로 이스라엘을 벗어났고 로마를 거쳐 서양, 다시 아시아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일러주는 대로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들의 영혼을 비추어주시는 성령의 감도를 받아 살면서 그 정체성이 분명한 작은 공동체들을 세워나가게 되었고, 이러한 영혼과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온 누리에 세우실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그 나라가 나 자신의 영혼과 우리들의 관계로 이룩된 공동체를 통해서 살아나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여기에 다가온 하느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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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깨어 준비하면 걱정할 것이 없다>
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진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 왕 때 건축되었고,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 당하고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어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 하였으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경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로마의 헤로데 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하였고 이 성전이 다시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하셨는데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 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회개하지 않았고 하느님을 외면하였으며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깨어 준비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약속한 미래를 희망할 뿐입니다. 희망하는 만큼 지금에 충실합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 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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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교수이자 심리학자인 로버트 에먼스는 사람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10주 동안 매주 1번씩 기록을 하게 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에는 감사한 일들을, 두 번째 그룹에는 스트레스를 느끼게 했던 일들을, 세 번째 그룹에는 일주일 동안 일어난 일들을 그저 객관적으로 적게 했습니다.
연구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감사할 일들을 적었던 첫 번째 그룹만 현실의 삶에 더 만족하고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운동을 더 자주 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건강이 증진되었다고 합니다.
이 연구 결과만을 보면 무조건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하기 어렵다고 느낄 때, 더욱 감사해야 할 때임을 깨닫습니다. 우울증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고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더 상황이 안 좋아집니다. 마찬가지로 감사할 일이 없다며 자기 스트레스만 바라보고 있으면 분명히 더 안 좋아지고 맙니다.
사실 우리 뇌는 가상의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상 현실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 안에서 VR 안경만 써도, 롤러코스터를 타야 경험할 수 있는 짜릿한 긴장감이나 공포를 거의 비슷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뇌는 실제 경험과 상상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본인의 생각하는 대로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계속 가지면 실제로 감사하면서 얻는 만족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스트레스만 계속 나열하게 되면 불만족 속에서 힘든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과 글,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아름다운 돌과 자연 예물로 꾸며졌다면서 성전 건물과 봉헌 예물을 보고 감탄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이 무너지고 부서지리라고 예언하십니다. 실제로 성전은 기원후 70년경에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것은 성전의 파괴만을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에는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슬퍼하고 절망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하늘의 무서운 징조가 일어난다고 해도 바로 끝이 아님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인이 말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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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끝은 아니다>
루카 21,5-11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재난의 시작)
그때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끝은 아니다>
“그러한 일들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9)
내가 가는 벅찬 이 길에서
스스로 멈추지 않는 한
끝은 아니다
내 앞에 놓인 장벽 너머로
애써 한걸음 딛는 한
끝은 아니다
내 몸의 한걸음 불가능해도
마음의 한걸음 품는 한
끝은 아니다
나의 님 늘 그렇게 앞서가시니
내가 닿은 곳 그 어디도
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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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종말이 와도>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파멸이 날이 닥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 주님께서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속지 마라.
-따라가지 마라.
첫째로 전쟁이 나고 지진과 전염병과 기근이 생겨도 이 정도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답답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말고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누군들 두려워하고 싶습니까?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지요.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 말씀이 공허한 말이 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말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그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사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긴말의 준말입니다.
제자들끼리 호수를 건너다 풍랑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가시며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이 풍랑 앞에 너희만 있고 이 고통 앞에 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늘 너와 함께 있고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씀이지요.
둘째는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시는데 이 말은 속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왜 속는 사람이 많고, 누구에게 속고 무엇에 속는다는 말입니까?
속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속이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오늘 주님은 아무리 속이는 사람이 많아도 속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속을 때 보면 두려움과 욕심 때문에 속습니다. 우선 돈 욕심이 있는 사람에게 고수익을 약속하며 속이듯 속이는 사람이 인간의 욕심을 이용할 때 쉽게 속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두려움 때문에 속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건강한 편인 저는 웬만한 건강식품 선전에 관심이 없지만 여기저기 중병이 있는 사람은 아무렇게도 저보다 관심이 많고, 돌팔이들이 내가 치유자라거나 이 약이 좋다고 할 때 잘 속겠지요.
그래서 오늘 주님도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일이 언제 일어나겠냐는 질문에 내가 그리스도라거나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하는 자에게 속지 말라 하십니다.
우리는 종말과 관련하여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종말이건 세상의 종말이건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는 믿음 말입니다. 주님도 그날과 시간은 당신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리스도인 주님께서도 그때를 모르시고 때의 주인이신 하느님만 아신다고 했으니 자기가 그리스도이고 그래서 그때를 안다고 하면 그 자체로 사기꾼이 되는 겁니다.
셋째로 주님께서는 이들을 따라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들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긴 해도 그렇다고 이들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 대수는 아니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므로 우리에겐 한눈팔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면 된다는 확신이 필요하고
종말이 와도 두려워 않고 속지 않고 따라가지 않을 수 있는 확신이 필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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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파거불행(破車不行), 노인불수(老人不修)-
오늘 지금 여기를 살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갑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신라의 고승 원효는 발심수행장에서 이릅니다.
“파거불행破車不行), 부서진 수레는 갈 수 없듯이 망가지고 무너진 몸은 더 이상 쓸 수가 없고, 노인불수(老人不修), 늙은 사람은 닦을 수가 없습니다.”
좀더 젊고 건강하고 힘있을 때 힘껏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새삼 오늘 지금 여기 주님과 함께 살아 수행하는 제자리, 꽃자리가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선물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 묵상 중 두루 떠오른 내용입니다. 우선 떠오른 시편 성구입니다.
1.“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시편90,10)
이어 중세기 스페인의 신비가이자 성녀인 아빌라의 대 데레사가 노래한, 후대인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으며 널리 불리는 기도문입니다. 시간되면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2. “아무것도 너를 어지럽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놀라게 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가
모든 것을 얻게 하리니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오직 하느님만으로 넉넉하도다”
불교 스님의 다음 말씀도 주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3. “나이가 들게 되면 몸뚱이도 문제지만 마음이 더 문제입니다.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 아상(我相), 이런 게 가득 찹니다. 남의 말을 잘 안 듣게 되어있어요. 수행이라는 것이 아상을 녹이는 건데, 나이가 들수록 아상이 공고해지기 때문에 수행이 어려운 것입니다. 아상을 녹이는 수행이요,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을 비우는 수행입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법정이 소개하는 효봉스님 말년의 묘사입니다.
“스님의 성격은 천진한 어린애처럼 풀려 시봉들과 장난도 곧 잘 했다. 육신의 노쇠에는 어쩔 수 없는 것, 무상하다는 말은 육신의 노쇠를 두고 하는 말인가. 스님은 가끔 ‘파거불행(破車不行)이야.’라고 독백을 하였다.”
4. 또 부처님께서는 “설사 백 년을 산다 해도, 여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수행하지 않는 사람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말씀하시며, 자경문에는 “3일간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이고, 백년을 탐하여 모은 재산은 하루아침에 먼지가 된다.” 이릅니다. 새삼 하루하루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생명과 빛의 진리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5. 이사야서 다음 말씀도 우리 마음을 더욱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40,6-8)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의 말씀뿐입니다. 말씀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오늘 제1독서 다니엘 예언서에서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깨우치는 현자 다니엘이 참 통쾌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꼭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의 예표처럼 생각되는 다니엘입니다.
기원전 6-2세기 중동 제국들의 흥망사를 보면서 역시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은 사라져간다는 진리를 확인합니다. 금으로 상징하는 바빌론, 은으로 상징되는 메디아, 청동으로 상징되는 페르시아, 그리고 그리스제국이 사라져갔습니다. 모든 제국이 사라진 뒤 영원한 나라가 예시되고 있습니다.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앞의 모든 나라를 부수어 멸망시키고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
그대로 2000년 이상 계속되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예언처럼 들립니다. 그리스제국에 이어 로마제국도 사라졌고 그 후로도 얼마나 많은 제국들이 생겨났다 사라져갔는지요! 미제국도 언젠가는 사라져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을 모시고 있는 가톨릭교회는 건재합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의 원조인,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왕 역시 건재하며 당신 나라를 대표하는 교회를 이끄십니다. 다음 복음에서 약속하신 그대로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다 사라져도 주님 교회 안에 정주하는 우리는 영원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성전 외관의 화려함에 놀라며 집착하는 이들에게 이 또한 사라질 것을 예언하시며 보이는 것 넘어 당신 안에 굳건히 자리 잡을 것을 은연중 당부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0년대 로마제국의 군대에 의해 초토화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러니 그동안 사라져간 위대하고 화려했던 건물의 성전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아무리 현실이 어렵고 혼란스럽다 해도 끝은 아니니 정신 바짝 차리고 제자리, 꽃자리에서 깨어 제 역할에 충실할 것을 권하는 주님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를 따라가지 마라.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이 아니다.”
주님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 꽃자리에서 결코 부끄럽게 경거망동하거나 부화뇌동하지 말고 깨어 당신과 함께 묵묵히, 충실히 살라 말씀하십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지극한 인내로 정주의 제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찬미와 감사중에 기쁘게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돕습니다. 역시 나누고 싶은 제 좌우명 기도 마지막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께서 불러주신
정주의 이 꽃자리에서
자신을 버리고 제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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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들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21,6)
<회개의 때(Kairos)>
오늘 복음(루카 21,5-11)은 '예수님께서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 아름다운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 파괴가 임박했을 때, '적그리스도(가짜 그리스도)'가 나타나더라도 '그들을 따라가지 마라.'고 이르십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21,10-11)
하지만 그러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끝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는 말씀에서 언급되고 있는 '전쟁, 반란, 큰 지진, 기근과 전염병' 등은 지금 우리 시대 안에서 일어나고 일들이 아닌지요? 그렇다면 구원과 멸망의 때인 하느님의 때(Kairos)도 가까이 다가왔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지금 이 결정적인 시기에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더 가지려고 하고, 더 높아지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 우리가 죽지 않고 사는 일을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9b)
'우리의 시간, 우리의 물리적인 시간(크로노스.Chronos)'도, 그 '죽음의 때'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죽지 않고 살기를, 그것도 영원히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에게 '하느님의 때인, 회개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하느님의 시간이요 회개의 때'입니다. '회개를 자꾸만 뒤로 미루지 맙시다! '날마다 오늘 회개하려고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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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XxGtYxsJT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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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 6)
허물어지고
바스러지는
낙엽이다.
허물어지기에
사람이다.
허물어지기에
겸손을 배운다.
허물어지는
우리자신을
주님께서
껴안아 주신다.
허물어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우리들 삶이다.
허물어지는
여정도 기꺼이
받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허물어진
우리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이시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자비이다.
새로워져야 할
우리들 삶이다.
부질없이
허물어지는
것들안에서
영원한 것을
다시 갈망한다.
우리에게는
어김없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 계신다.
인간의 욕심은
이와같이
허물어지지만
주님의 사랑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허물어지는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가
가득하길
기도드린다.
세상에서
깃들이던
육신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될
것임을 진심으로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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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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