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백제는
고구려시조인 주몽의 아들 온조가 형 비류와 함께 지금의 서울(당시 위례성)에 건설한 나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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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전후한 시기에 마한 50여 개 소국 중의 하나로 출발해 한반도 중부와 남서부를 차지하고
고구려시대 한반도지역을 신라와 분할하고 있다가,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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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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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삼국사기〉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BC 18년에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그의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해 위례성(慰禮城:지금의 서울)에 건국한 나라로써 백두산제국이란 뜻으로 나라이름을 백제라고 지었다( 연사) 이 미루어 백제의 토착민은 모두 주신의 유민으로 볼수있고 고구려와 동족으로써, 현재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풍납동 일대를 비롯한 한강 하류지역에 산재한 백제 초기의 적석총이 고구려의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지역의 무덤양식과 동일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주신(고조선)때부터 이지역은 이미 자치적인체제와 경제시스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정치제도가 형성되어있었기때문에 온조는 같은 민족으로써
그 토착민집단체제의 우두머리로 정치 지배권을 장악할수 있었으며 후대에 백제 왕실에 의해 혈연적·관념적인 시조로 인식될수 있었다. 즉 백제는 주신시대부터 같은 국가와 민족이념이었기에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마한의 한 세력으로 자체 성장하던 정치체가 모체가 되고, 그후부터 중국,일본등에 세력을 형성하여 왜국등 영지를 건설하였고 당,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할때까지 고구려의 동맹관계로써의 국가체제로써 성립,존재했던 국가이다. (연사 참고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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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ankorea |
-------------------------------- 이하 현행국사내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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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계 국가를 형성한 이후 백제는 위례성 주변의 여러 집단들을 통합하기 시작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 기록에 등장하는 북부의 진씨(眞氏), 동부의 흘씨(屹氏) 등은 온조집단과 결합한 이 지역 토착세력이거나 초기에 통합된 주요 정치세력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는 온조 당시에 이미 동쪽으로 춘천, 서쪽으로 서해, 북쪽으로 예성강, 남쪽으로 안성 일대까지 영역이 확장되었고, 충청남도 북부 일원의 마한세력도 통합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3세기 전반의 한반도 중남부 상황을 전하는 중국측 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백제는 마한 50여 개 소국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오히려 목지국(目支國)이 마한연맹체를 주도해간 것으로 나오고 있다. 당시 백제는 마한의 유력한 소국의 하나였지만, 마한 전체를 통합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다만 3세기 전반까지 백제의 주변 소국에 대한 통합이 상당한 정도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특히 인천의 미추홀(彌鄒忽) 세력에 대한 통합은 이 시기에 이미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미추국(彌鄒國)이라는 개별 국명이 〈삼국지〉 단계에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미추홀세력은 비류를 시조로 하는 자체의 시조설화를 온조설화와 함께 후대까지 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통합 후에도 백제 지배층의 최상층부에 포함되었던 큰 세력으로 보인다. 미추홀 세력의 통합은 백제를 한반도 중부의 신흥 강국으로 부상시켰을 것이다. 이는 풍부한 해산자원의 획득이 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한반도 남부의 마한 소국들이 행하는 중국 군현과의 무역을 통제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의 확보가 미복속 소국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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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3세기 전반 고이왕대에는 중국 군현과 대항하는 한(韓) 세력의 구심으로 등장했다. 자체 생산력의 발전과 주변지역의 통합을 통해 성장했던 경제력을 바탕으로 더욱 세력을 팽창해 3세기 후반에는 마한의 맹주노릇을 해오던 목지국까지 정복하고 한반도 중부를 석권했다. 이때쯤에는 대외 팽창과 함께 대내적 지배체제의 확립도 이루어졌다. 고이왕대에는 관등제의 골격이 대략 잡히고, 국왕을 정점으로 한 일원적인 집권체제가 정비되었다. 4세기 중반 근초고왕대에는 전라남도 해안 일대의 마한 잔여세력까지 완전히 복속시키고 북쪽으로 대방고지(帶方故地)를 놓고 고구려와 다툼으로써 명실상부한 한반도 중남부의 패자로 등장했다. 371년(근초고왕 26)에는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진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국력성장의 기반 위에 이 시기부터 중국의 남조 및 왜 등과 해상교류를 통해 백제문화는 보다 세련된 국제성을 띠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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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말부터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직면하면서 백제의 대외팽창은 침체되었다. 특히 아신왕대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침공을 받아 58성(城) 700여 촌(村)을 빼앗기는 치명적 손실을 입기도 했다. 이 와중에서 지배층의 동요가 일어나 아신왕이 죽은 뒤 귀족세력간의 대결이 벌어지고 왕족과 함께 실권을 쥐고 있었던 왕비족이 진씨에서 해씨(解氏)로 교체되었다. 이후 계속되는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백제는 자신들이 건설한 왜국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비유왕대(毗有王代)에는 신라와 공수동맹을 맺기도 했으나 개로왕대에 이르러 다시 고구려 장수왕의 대규모 침략을 받아 수도인 한성(漢城:지금의 서울 강동구)이 함락당하고 개로왕마저 살해당하는 최대의 수난을 겪었다. 왕위를 이은 문주왕은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고 재기를 모색했으나, 초기에는 귀족들간의 알력으로 왕이 살해당하는 등 정치정세가 매우 불안했다. 동성왕대를 거치면서 차츰 국가체제가 재정비되었고, 뒤이은 무령왕대에 호남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개발을 추진하면서 개로왕대에 당한 한강유역의 상실로 입은 경제손실을 어느 정도 만회했다. 동성왕과 무령왕대에 이룩한 정치체제와 경제기반의 회복을 바탕으로 성왕은 전반적인 제도개혁에 착수하여 다시금 중흥을 꿈꾸었다. 수도를 사비(泗
:지금의 부여)로 천도하면서 중앙관제와 지방제도를 정비했고, 이를 통해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 또 신라와 가야의 군대와 연합해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하류 지역의 회복을 시도해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에게 한강 하류 지역을 다시 탈취당한 뒤 이를 보복하기 위해 군사를 보내어 신라를 쳤으나 관산성(管山城:지금의 옥천)전투에서 대패하고 성왕이 전사함으로써 백제의 정치체제는 또다시 동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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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이 죽고 즉위한 위덕왕대에는 이른바 대성8족(大姓八族)으로 불리는 귀족들이 대두하여 왕권이 위축되었다. 그러나 7세기에 들어와 무왕대에는 신라를 공격해 성공을 거두는 등 국력을 서서히 회복했고, 그 아들인 의자왕대에는 강력한 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의자왕은 즉위초부터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해 신라를 크게 압박했으며, 안으로는 왕자 41명을 좌평에 임명하고 식읍(食邑)을 하사하는 등 왕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지나친 공격전은 국력의 소모를 가져왔고, 귀족세력의 이탈과 함께 민심의 이반을 초래하는 결과를 빚었다. 결국 당과 연합한 신라의 공격을 받아 항복함으로써 660년(의자왕 20)에 멸망했고, 그후 약 3년간 치열한 저항운동을 벌였으나 663년에 완전히 진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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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에 따라 변천을 거듭했으나, 사료 부족으로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 어렵다. 초기에는 왕을 보좌하는 최고 관직으로 우보(右補)와 좌보가 있었고 고이왕대에 이르러 좌평을 비롯한 중앙관제와 관등제의 골격이 잡힌 것으로 보인다. 사비시대에 들어와서는 6좌평· 16관등· 22관부제(官部制)로 정비되었다. 6좌평은 수석좌평으로 왕명의 출납을 관장한 내신좌평(內臣佐平)과 재정담당의 내두좌평(內頭佐平), 의례·교육 등을 맡은 내법좌평(內法佐平), 숙위(宿衛)·병마(兵馬) 담당의 위사좌평(衛士佐平), 형옥(刑獄)을 담당한 조정좌평(朝政佐平), 내외병마사를 관장한 병관좌평(兵官佐平)을 말한다. 이는 품계 1품으로 최고 귀족회의의 구성원이었다. 좌평 이하의 16관등은 복색(服色)·관대(冠帶)의 색깔로 구분했으며, 좌평·달솔을 비롯한 솔계(率系)의 고위 관등은 은화(銀花)로 관(冠)을 장식했다. 22부는 궁중사무를 관장하는 내관(內官) 12부와 일반국무를 다루는 외관 10부로 이루어졌는데, 업무별로 상당히 정비된 모습을 보여준다.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백제의 관등 도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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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제도는 주변 소국의 통합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정비되었다. 웅진시대까지는 모든 지역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고 주로 복속된 지역의 수장층을 통해 공납을 수취하는 등의 간접적인 지배방식을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담로(擔魯)라 불렸던 일부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에는 중앙의 왕족을 파견해 직접 지배를 시행했다. 사비시대에 이르러 전반적인 제도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다수의 지방관이 파견되어 직접 중앙의 통제력을 관철시키는 체제를 갖추었고, 이를 방(方)-군(郡)-성(城)체제에 의한 지방지배라 일컬었다. 수도의 행정구역도 후기에는 5부(部)와 5항(巷)으로 이루어진 상당히 정비된 형태였다. 한편 수도의 5부에는 달솔 관등을 지닌 자가 거느린 각 500명씩의 군사가 있었고, 지방의 5방에는 각각 700~1,200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했다. 5방의 장관인 방령(方領)에는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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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에 부과하는 것과 인두(人頭)에 부과하는 것의 2종류가 있었다. 수취대상물로는 포(布)·견(絹)·사(絲)·마(麻)·미(米)가 주종이었다. 세액은 알 수 없으나 매년 풍흉의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어 수취했다고 한다. 한편 15세 이상의 장정(壯丁)은 노동력 징발의 주된 대상으로 성곽의 축조와 같은 토목공사에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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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사회는 왕족과 귀족을 포함하는 지배 신분층과, 그들의 지배를 받는 일반민, 그 아래의 집단예민, 노예 등을 포함한 피지배 신분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짐작된다. 특히 왕족은 최고 신분층으로서 지방 22담로의 장관직을 독점하고 있었고, 귀족으로는 대성8족이라 불리는 성씨집단들이 있었다.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계층관계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겠지만, 그역시 신분제에 의해 규정되는 면이 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골품제와 같은 지배신분층 내부의 신분제가 따로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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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384년(침류왕 1)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해 동진(東晋)에서 전래된 것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다. 침류왕은 그를 궁궐에 머물게 하면서 다음해에는 사원을 지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했다. 불교는 전래 초기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상·장려되었다. 심지어 599년(법왕 1)에는 국왕의 명으로 생물을 죽이지 못하게 하고, 민간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며, 어로와 사냥도구들을 불태운 적도 있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찰을 건립한 경우도 많았는데, 특히 600년(법왕 2)에 착공해 634년(무왕 35)에 완성된 왕흥사(王興寺)는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백제불교는 계율의 연구가 활발했던 것이 특징인데, 겸익(謙益)이 대표적인 계율종(戒律宗) 승려였다. 한편 도가사상도 일찍이 전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배층 사이에는 신선사상(神仙思想)이 널리 퍼져 있었던 듯하다. 산경문전(山景紋塼)이나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에도 도교사상의 영향이 발견된다. 또 백제는 낙랑·대방의 한인(漢人)과 접하면서 일찍부터 한문과 유교를 접했다. 그리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대에 역사서인 〈서기 書記〉가 편찬되기도 했고,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둘 정도로 유교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했는데, 별도의 교육기관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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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전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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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수리사지출토금동보살입상(백제), 보물 제330호, 높이 11.2cm | 동성왕 때의 임류각(臨流閣), 의자왕 때의 태자궁(太子宮)·망해정(望海亭) 등을 비롯해 많은 사찰이 건축된 기록이 있으나 현존하지 않고 익산의 미륵사지를 비롯한 절터와 석탑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부여의 정림사지5층석탑, 익산의 미륵사지석탑 등이 유명하다. 불교와 관련된 조각품으로 석불과 금동불, 납석제(蠟石製) 불상 등이 현존한다. 고분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일대와 공주·부여 일원에 많이 있는데,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는 것도 있다. 후기에는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전축분(塼築墳)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무령왕릉에서는 양(梁)과의 활발한 교류를 반영하는 국제적으로 세련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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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양을 비롯한 중국 남조의 각국과 활발하게 문화를 교류했다. 양나라에는 사신을 보내어 열반(涅槃) 등의 경의(經義)와 모시박사(毛詩博士)·공장(工匠)·화사(畵師)를 청하는 등 문화수용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백제의 사상과 문화는 이웃 왜에 전파되어 그들의 고대문화를 꽃피우는 데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일본사). 일찍이 한성시대에 아직기·왕인 등이 왜에 한학과 유교를 전했는데, 특히 왕인은 〈천자문〉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오경박사가 교대로 왜국에 파견되었으며 기술자인 봉녀(縫女)·야공(冶工)·양주인(釀酒人)을 비롯해 와박사(瓦博士)·조사공(造寺工) 등의 건축기술자도 파견되었다. 백제문화는 일본 고대문화에 큰 영향을 미쳐 아스카[飛鳥] 문화를 꽃피우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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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의 변동과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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