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루에 걸터앉아 남강 위로 드리우는 아름다운 낙조를 바라보고 있으면 풍경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렇게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정자를 세우고 풍류를 즐겼던 선조들의 안목이 부럽기만 하다.
악양루를 나와 법수면에서 큰 들판 사잇길을 따라 옥렬교를 건너면 대산면과 연결되는 지방도로 1021번을 만난다. 대산면 방향으로 2km쯤 가면 운곡교가 있고, 운곡리 입구 200m 전방 오른쪽 산자락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82호 오비각(五備閣)이 있다.
오비각은 어계 조려 선생의 후손 조종영(趙宗榮)의 효행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각(旌閭閣)이다. 조종영은 학문과 행실이 두터웠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러한 효행이 널리 알려져 고종 29년(1892)에 효감유허비(孝感遺墟碑)를 세웠으며, 광무 9년(1905)에 조정의 명령을 받아 정려각을 세웠다.
규모는 앞면·옆면 모두 1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설치한 다포 양식인데, 거북이·연꽃모양 등 여러 장식이 있어 화려하다. 또한 몸체에 비해 큰 지붕을 지탱해 주고 있는 추녀의 네 모서리에는 활주(活柱: 추녀뿌리를 받친 가는 기둥. 원형과 팔각형 단면이 있음)로 보강되어 있다.
산인초등학교 뒤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산인면 내인 마을이다. 마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서면 문화재 자료 224호 어연, 함안이씨, 어변갑 묘를 나타내는 비석과 새로운 문화재 안내판이 재실(齋室)앞에 있다. 안내판 옆으로 난 길을 따라 100m쯤 오르면 폭이 343㎝, 길이 480㎝, 높이 70㎝ 인 방형 묘지 1기가 있다. 어변갑(1380∼1435)과 부인 창녕 성씨의 합장묘이다.
길을 안내 해준 어수천(64)씨에 의하면 수년 전에 묘지는 도굴되었으며, 부인 창녕 성씨는 서울 강동구에 있던 것을 88 올림픽 때 이전해 합장하였다고 한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어연(1345∼1429)선생과 부인 함안 이씨의 묘소는 북쪽으로 600m정도 떨어진 내인리 마을 뒤쪽 산 칠봉사(寺)근처에 있다. 폭 이 303㎝, 길이 440㎝, 높이 50㎝의 묘역에는 어연 선생과 부인 함안 이씨의 묘가 나란히 안장되어있다.
어연(魚淵)은 태종(太宗) 9년(1409)에 충주판관(忠州判官)이 되고, 이후 대구현령(大丘縣令)이 되었다. 3기의 묘역은 봉분 아랫부분에 직사각형 모양으로 돌을 둘러싼 보기 드문 형태로, 조선조(朝鮮朝) 초기에 설치된 희소(稀少)한 적석 장방형(積石長方形)묘(墓)이다.
아래쪽에 주인 없는 초라한 묘지1기가 풀숲에 쌓여있어 어수천(64)씨에게 물어보니,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어연 선생이 타고 다니던 말(馬)의 묘라고 했다. 내인리 마을 위쪽으로 펼쳐진 텅빈 들판에서는 지난 해 태풍 매미로 유실된 제방 공사를 하는 중장비의 소리가 한적한 농촌 마을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
마을 안쪽 내인리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 박진영 장군유품(朴震英將軍 遺品)을 소장하고 있는 불천묘(不遷廟)가 있다. 입구에는 주차장도 있고 안내판도 말끔히 정비되어있다. 불천묘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후손이 관리를 했으나, 병환으로 떠난 후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텅빈 재실에는 찬바람만 불고 사람의 손길이 끓어진 경내에는 잡초가 자라서 무 성하였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박진영(朴震英:1569∼1641)장군의 유물 231점이 유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유물 중에는 장군이 사용하였던 유품을 비롯하여, 명나라 제독이 사기진작을 위해 그에게 내린 글(상례폐문), 그가 죽은 뒤에 무숙공(武肅公) 이라는 시호(諡號: 죽은 자의 생전 행적에 대하여 임금이 내린 칭호)를 내린 교지(敎旨)등이 포함되어있다.
유물이 소장된 유물관에는 커다란 자물쇠와 도난 방지 장치가 있었지만, 석장승도 훔쳐 가는 세상이어서 떠나오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후손들과 상의하여 함안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는 것이 도난을 방지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