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der & Reader 이문열, 시대를 쓰다
이문열 세번째 사랑 못밝힌다…대학 때 꽤 알려진 그 여인
카드 발행 일시2024.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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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이문열, 시대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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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내 연애 소설은 왜 실패했나
실패한 사랑 이야기를 할 때 이문열의 낭만주의가 가장 소담스럽다고 말한 이는 역시 평론가 유종호 선생이었다. 내 초기 단편 ‘폐원(廢苑)’을 거론하면서다. 1980년 소설집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에 붙인 ‘출발의 작가’라는 해설에서, 선생은 소설집에 실린 ‘폐원’이 잃어버리거나 금지돼서 더욱 치열한, 낭만주의 가운데서도 가장 낭만적인 모티브를 갖추고 있다고 했다. 세상의 지도로는 돌아갈 수 없어 강렬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고향처럼, 금단(禁斷) 앞에서 더욱 격렬해지는 정념(情念)이 ‘지금 여기’의 황폐한 삶에서 ‘잃어버린 낙원’을 동경하는 낭만주의를 부른다는 뜻이었다.
문학은 어쩌면 삶을 속속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자가 꿈꾸는, 이제까지의 삶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꿈인지도 모른다. 당신에게도 그런 낭만적인 사랑이 있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답해야 한다. 다만 내 경우 때로는 토니오 크뢰거와 같은 무기력한 사랑이었다. 토마스 만의 소설 『토니오 크뢰거』에 나오는 혼혈 주인공 토니오 크뢰거처럼 금발의 잉에, 잉에보르크 홀름을 홀린 듯한 눈으로 바라볼 뿐 끝내 다가가지 못하는 소심한 사랑 말이다.
세 번째 사랑 상대 못 밝혀
낭만적 사랑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다. 소설가 이문열씨도 연애 소설을 썼다. 이천 작업실 모습. 사진 이재유
첫사랑은 역시 짝사랑이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대학 1학년까지 갔다. 끝내 고백해 보지 못했다. 두 번째도 짝사랑. 부산에서 건달처럼 지내던 시절 마주친 인형 같은 처녀였다. 여러 밤을 새워가며 숱하게 편지를 썼지만 문장만 늘었달까, 하나도 부치지는 못했다. 세 번째는 대학 시절 꽤 알려진 일이어서 조금만 사연을 밝히면 상대가 누구인지 금방 드러나기 때문에 아직도 언급하기 곤란하다.
아내가 어떻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나도 불 꺼진 사랑의 제단 안의 하얀 재를 되살려서라도 필생의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폭풍의 언덕』이나 『좁은 문』의 사랑처럼 강렬하면서도 묵직하게 가슴 아픈 이야기, 섹스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를 사로잡는 참사랑이라고 할까, 그런 향기가 느껴지는 소설 말이다. 쉰 무렵까지 비슷한 걸 몇 개 쓰긴 했지만 흡족하지 않았다. 연애가 시원찮았으니 여자를 제대로 이해했을 리 없다. 그래서 내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은 세계문학에서 한 번쯤 본 듯한 여자이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새하곡’이나 『사람의 아들』에 나오는 어떤 여자들은 메리메의 소설 『카르멘』에 나오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빌린 것이었다. 중편 ‘들소’에 나오는 ‘초원의 꽃’에서 영화배우 스칼렛 오하라를 떠올렸던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50대 이후로는 나이로나, 시대 상황으로나 내가 쓰고 싶은 사랑 이야기가 잘 맞지 않게 된 것 같다고 느꼈다. 다시 소설을 쓰게 된다면 새 사랑 이야기를 쓰기보다 『영웅시대』나 『변경』 같은 기존 작품들의 아쉬운 부분을 먼저 손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문열씨의 소설을 원작으로 1987년 만들어져 개봉한 영화 '레테의 연가'의 한 장면. 왼쪽이 윤석화씨, 오른쪽이 강신성일씨. 90년 역시 이문열 원작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만든 장길수 감독이 이 영화도 만들었다. 중앙포토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83년 장편 『레테의 연가』와 88년 장편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공교롭게도 가장 바쁠 때 써야 했던 사랑 소설들이었다. 이미 연재하는 소설들이 있었기 때문에 급하게 쓸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다른 소설 못지않게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레테의 연가』는 예전에 밝혔던 대로 문예중앙 연재 장편 『황제를 위하여』의 출판권을 덜컥 다른 출판사에 주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중앙일보사에 써줘야 했다. 당시 나는 『영웅시대』를 계간 세계의문학에, 백제의 중국땅 요서 경략설을 다룬 역사소설 『그 찬란한 여명』을 중앙일보에 일일 연재하고 있었다. 역사소설이 아니라면 소설은 내 삶과의 직접적인 관련이나 전해 들은 삶의 모델 없이는 쓰기 어렵다. 사랑 소설도 마찬가지다.
나는 방향을 바꿔 당시 젊은 여성들이 고민하던 성(性)과 사랑, 결혼과 윤리, 그리고 교양에 관한 내 평소 생각을 남김없이 털어놓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미 그 방면의 메모를 원고지 300매가량 써둔 상태였고, 훗날 책으로 출간된 형태의 구체적인 이야기도 갖고 있었다.
소설은 스물일곱의 잡지사 여기자 이희원이 결혼식 하루 전날, 열 살 연상의 유부남 화가 민승우와의 ‘금지된 사랑’을 회상하는 일기 형식이다. 사랑에 빠졌다는 자각과 그에 대한 부정과 반발, 이후 모험 충동에 몸을 맡기며 두 사람은 사랑을 키우지만 끝내 인습과 윤리의 벽을 넘지 못한다. 사랑과 성을 동일시하는 행태야말로 시대의 미신이라고 믿는 민승우는 예술을 예술답게 만드는 조건에 도덕적 요소도 포함된다며 육체의 사랑을 거부한다. 여자에게 결혼은 '망각의 강' 레테다. 누구든지 눈물과 탄식 속에 그 강을 건너는 사람은 강 이편의 사랑을 잊어야 한다.
“이문열이 불지른 최초의 본격 여성소설!”
나는 연재를 앞두고 소설의 사랑이 비록 허구이지만 선정적인 시대에 예외적인 사례로 주목받게 되리라는 확신까지 품었다. 지나치게 노성(老成)한 설교 혹은 남자의 독선으로 치부되더라도 독자의 호의를 구걸하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런 생각에 가슴이 설렐 정도였다.
83년 여성중앙 1월호의 소설 연재 예고는 요란했다.
이문열이 자신 있게 불 지른 최초의 본격 여성소설!!
내 첫 연애소설이긴 했다. 이런 문구도 있었다.
이 시대 마지막 ‘사람의 아들’ 이문열이 비밀스러운 여자의 문을 열었습니다.
써뒀던 메모 덕분에 연재는 메워나갈 수 있었지만 갈수록 수렁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너무 낡은 얘기가 아닐까 걱정됐다. 작품 목록에서 빼버리려고 한 적도 있다.
회당 300매씩, 여성중앙에 넉 달 연재 끝에 세상에 나온 소설책은 뜻밖에 잘나갔다. 당시 문예중앙 권영빈(2021년 별세) 주간이 훗날 “중앙일보 출판 사상 처음으로 1년 내 단행본 10만 부 발매 기록을 세웠다”며 좋아했다.
아마 이념화(理念化)에 신경썼던 덕분인지 모르겠다. 사랑과 결혼에 관한 잠언 투의 문장을 곳곳에 집어넣었다. 결혼은 한 삶이 다른 삶에 개입하는 것인 만큼 엇비슷한 두 원의 만남보다 서로의 장단점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형태가 더 단단할 것이라는 식의 글 말이다. 사랑은 자동차 운전 같아서 빠지기 전엔 조심스럽지만 빠지고 나면 모든 것을 잊는다는 미국 여성학자 사라 러딕의 비유, 격정적인 마음을 차갑게 식혀 주는 스위스 작가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의 『아미엘의 일기』, “단자(單子) 간에는 창(窓)이 없다”고 주장한 라이프니츠의 철학도 소개했다.
추락하는 모든 이는 날개를 가진다.
오스트리아의 시인 겸 소설가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시 ‘유희는 끝났다’의 저 구절을 여성 주인공 희원으로 하여금 되뇌게 한 것은 그 강렬함 때문이었다. 나는 원래 소설보다 시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곧 내가 시의 사람이 아니라고 느끼게 됐다. 글이 자꾸 설명적이 되다 보니 압축이 어려웠고, 상징의 의미를 잘 깨치지 못했다. 그래서 소설로 전향했다.
독자의 꾸준한 호응에 결국 이 소설의 가치를 뒤늦게 인정하게 됐다. 2001년 소설의 중간(重刊)에 동의한 이유다. 그에 앞서 87년에는 강신성일과 윤석화가 출연한 장길수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졌고, 91년에는 한진희와 김청이 나오는 TV 드라마로도 제작됐다. 2000년에는 김광진이라는 가수가 같은 제목의 노래도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1987년 6월 7일 일요뉴스 창간호에 실린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연재 예고 기사. 강대철 화백이 삽화를 그렸다. 왼쪽이 강대철 화백. 사진 일요신문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내가 무얼 써도 베스트셀러가 되던 시기에 쓴 소설이다. 『사람의 아들』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레테의 연가』에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까지, 87년 가을 소설부문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내 소설은 무려 다섯 권이나 포함돼 있었다. 다섯 작품의 주제가 모두 제각각이다 보니 “이문열은 12가지 색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는 얘기가 나올 만했다. 사람들이 이문열 봐주려고 책 사보지는 않았을 텐데, 운도 좋았던 것 같다. 실감이 잘 나지 않았고, 나는 나대로, 시장은 시장대로 뭔가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버린 자식 같은 작품
그해 나는 한국일보에 『변경』, 경향신문에 『평역 삼국지』를 연재하고 있었다. 두 작품 모두 방대한 데다 일일 연재였기 때문에 도저히 여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6월에 창간된 주간 일요뉴스에 결국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연재하게 됐다. 일요뉴스는 학생 교양지 ‘학원’으로 유명한 학원사의 김영수 대표가 창간한 일요판 신문이었다. 학원사 창업자 김익달 선생의 장남이었던 김 대표는 6·10 항쟁 이후 언론기본법이 폐지되면서 새 매체들이 앞다퉈 생겨나는 시기에 일요뉴스를 창간했다. 89년 일간지 민주일보로의 전환이 실패하며 몰락했지만, 그전까지 일요뉴스는 과감한 폭로성 기사와 잡지 스타일 편집으로 인기를 끌었다. 독특하게 신문 1면에 발행 부수를 공개했는데, 87년 6월 7일 창간호 발행 부수가 25만 부였다.
90년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의 한 장면. 왼쪽이 손창민씨, 오른쪽이 강수연씨. 사진 영레이디
거기에 나를 끌어들인 사람은 여성중앙 주간을 지내 그전부터 알고 지내던 문학평론가 백승철씨였다. 일요뉴스 편집국장을 맡고 있던 그의 청탁이 부담스러웠던 것도 있고 조건도 나쁘지 않아 연재하기로 했지만 썩 내키지는 않았다. 한 회 연재 원고 30매 중 절반가량을 원고 받으러 온 기자를 옆에 앉혀 두고 구술해 준 적도 있다. 일요뉴스에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만큼 급하게 쓴 소설이었다. 평소 추고(推敲)를 많이 하는 편인데, 바쁘게 써주다 보니 추고 없이 넘기곤 했다. 8개월가량 연재 후에 88년 말 책으로 출간됐지만 다시 읽어보지 않았다. 내게는 버린 자식 같은 작품이었다.
물론 연재 전에 계산은 있었다. 외국인들이 자주 찾는 유흥가에서 젊은 한국 여성들을 만난 게 계기가 됐다. 그들의 불확실한 신데렐라의 꿈을 그려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카르멘 같은 팜므 파탈로 인해 자신의 삶을 탕진하는 남자의 이야기로 꾸밀 경우 자칫 순애보나 치정극(癡情劇)처럼 돼버릴 수도 있지만 한 번쯤 도전해 보고 싶었다. 주간지 성격의 지면인 만큼 문학성에 부담이 되더라도 우선 재미있게 읽히게 쓸 생각이었다. 잡다하게 실패한 연애담은 주변에 많았다. 말 못 할 사정도 있었다. 소설은 외교관이 된 대학 동창의 실제 사연을 주제로 삼은 것이었다. 그 친구는 소설과 비슷하게 옛 애인을 쫓아 외국까지 따라갔다. 소설의 서윤주와 임형빈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배경으로 오스트리아의 휴양 도시 그라츠를 추천해 준 것도 당시 빈에 외교관으로 나가 있던 그 친구였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도 예상과 반대로 움직였다. 100만 부가량 팔렸다. 결국 형빈이 윤주를 쏴 죽이는 치정극 비슷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90년 강수연과 손창민이 출연한 장길수 감독의 영화 역시 관객이 100만 명가량 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끼리는 ‘쌍백만’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대중은 열광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영국의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이 생전 자신의 작품을 두 가지로 분류한 다음 한쪽에는 문학적 면책을 호소했다는 이야기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의 ‘작가의 말’에 소개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지만 『레테의 연가』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현재 절판 상태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겠지만, 훗날 사람들이 필요해 두 소설책을 살리면 모를까, 내가 다시 내자고 할 생각은 없다.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아픈 손가락이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에디터
이문열
관심
작가
3377@hanmail.net
1948년 서울 출생.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새하곡’, 제3회 오늘의작가상 중편 ‘사람의 아들’로 등단. 『사람의 아들』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변경』 등 3000만 부 이상 판매. 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동리문학상, 은관문화훈장 등 수상.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66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