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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거불안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주거취약계층의 눈물을 닦아주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법무법인 태평양·재단법인 동천이 공동편집한 《주거공익법제연구》의 에필로그에 실린 마지막 문장이다. 법률 서적에서 성경 말씀(계 21:4)이 연상되는 문장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글쓴이는 올해 (재)동천의 7대 이사장이 된 유욱 변호사이다. 복상의 역사를 짚는 기사나 통일운동 취재에서 그의 이름이 몇 번 언급된 것을 기억하고 있던 차에, 복상 초창기 기자로 활동한 방성우 방선생웃음밥상 대표의 소개로 연이 닿았다. 〈법률신문〉 등에 실린 유욱 변호사의 이전 인터뷰를 살펴보니, 비기독교 매체에서도 신앙 동기를 당당하게 밝히고 있어 더 호기심이 일었다. 곧바로 인터뷰를 청했다.
인터뷰는 7월 24일 방선생웃음밥상(서울 종로구)에서 진행했으며, (재)동천의 김윤진 변호사가 동석해 설명을 도왔다. 주거 문제, 장애인 권리 관련 공익법 활동에 대해 물었고, 청년 시절 꿈꾸던 한반도 평화에 관한 비전을 계속 갖고 있는지 확인했다. 커버스토리 주제와 연결 지어, 복상의 태동기에 청년 때를 보내며 신앙과 사회 변동을 크게 겪은 이의 중년 영성 이야기로 들어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 올해 법무법인 태평양의 공익재단법인인 동천의 7대 이사장이 되셨습니다. 동천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요?
동천은 지난 15년 동안 공익법률지원과 사회공헌활동을 해왔습니다. 우리나라 로펌 가운데 최초로 설립된 공익재단법인이죠. 난민, 탈북민, 장애인, 여성/청소년 등 7개 영역을 중심으로 법률서비스 사각지대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지원합니다. 2016년에는 NPO(비영리조직)를 지원하는 동천NPO법센터를 설립했고, 지난해 3월에는 동천주거공익법센터를 세웠습니다. 동천과 함께 태평양 공익활동위원회 240여 명 전문가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 태평양은 ‘3대 로펌’으로 꼽히는데요. 일찍이 공익재단법인을 설립한 이유가 있을까요?
태평양 설립자인 김인섭 변호사가 로펌은 돈 버는 집단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고 대표하는 집단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었죠. 동천은 김인섭 변호사님 아호로, 동쪽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몇몇 변호사들과 함께 2001년 공익활동위원회를 구성해 공익활동을 시작했습니다.
- 예전 언론 보도를 보니, 공익활동위원회 구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더라고요. 비기독교 언론과의 인터뷰였지만, 신앙적 동기를 전면으로 말씀하셔서 좀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잖아요. 지극히 작은 자에게 보화를 숨겨 놓으셨다고요. 일을 할수록 이 말씀의 의미를 더 깊게 깨닫습니다. 많은 ‘작은 자’들이 있지만, 저는 북한/탈북민 분야를 중심으로 일을 해왔습니다.
-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 탈북민취업지원센터(함께하는재단) 설립 과정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아직도 참여와 지원을 하고 계시고요. 어떤 인연이었던 건가요?
로펌에 발을 들여놓은 지 10년 정도 지났을 때, 시대적 과제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남북관계가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로 여겨졌어요. 홍정길 목사님께서 대북 지원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께 배우려고 1999년부터 남서울은혜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2001년도에 교회에서 광고를 하기에 탈북민 모임 시작하니까 관심 있는 사람들 모이라고 해서 갔더니 10명 정도 앉아계셨어요. 제가 제일 젊더라고요. 변호사라고 제 소개를 하니까 모임의 총무를 하라고 해서 그때부터 몇몇 탈북민 가정이랑 지지고 볶고 시작했어요. 1년 정도 지내보니까 이분들에게 최우선으로 필요한 것이 교육과 취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레 여명학교와 탈북민지원센터를 세우는 데 참여하게 된 거죠. 중간중간 쉽지 않은 과정이 있었지만, 지금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 그 외에도 통일부, 법제처, 법무부 등 북한 관련 연구를 지속적으로 해오셨는데요. 특별히 통일부에 ‘개성법률자문회의’를 만들자고 제안도 하셨고, 10년 넘게 활동하며 위원장도 맡으셨어요. 당시 인터뷰 기사를 보며, 개성공단을 향한 큰 애정을 확인했어요. 불행하게도 지금은 남북관계가 매우 안 좋은데요. 통일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희망과 절망의 큰 낙차를 어떻게 견디시는지 궁금해요.
이제는 나의 소관이 아니로구나 느껴요.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주권이구나 깨닫죠. 역사를 봐도 그렇잖아요.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을 실감합니다. 비관하기보다는 지금 나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고, 행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물론 답답하죠. 최근 대북 인도적 지원 NGO 소송을 준비하면서, 특히 답답함을 많이 느꼈는데요. 그럴 때면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는 시편 말씀이 계속 떠올라서 찾아봤어요. 시편에 하나님을 향해 “일어나소서” “깨어나소서”라고 말하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나만 답답한 게 아니었구나, 시편 기자의 답답함은 훨씬 더 했구나 생각하며 가끔 같은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공의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께서 일어나 보여주시라고!
- 요즘이야 기업이나 로펌의 사회적 책임이 당연한 듯 여겨지지만, 약 20년 전에는 그런 개념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거대 로펌에서요. 안팎의 시선이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내부의 시선이 훨씬 매서웠어요. 그런 일 하려면 NGO에 가면 되지, 왜 로펌에 들어와서 하려느냐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 사람들 보기에는 저 같은 사람은 놀면서 월급을 받아가는 사람처럼 보였겠죠. 2006년에는 갑상선암 수술을 받기도 했고, 저의 재정 지원에 많이 의지하는 단체가 있었기 때문에 부담도 컸어요. 당시에 제가 북한법 관련 논문을 30편 넘게 썼는데, 로펌 변호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당연히 로펌에서의 역할이나 입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죠. 상처를 입으면서도 생존하기 위해서 이 길을 걸어갈 믿음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며 버텼습니다.
- 대학 때는 기독교문화연구회(기문연)에서 활동을 하셨어요. 복상 창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단체이기도 한데요. 신앙 고민도 깊었을 시기 같습니다.
대학생 때 여름방학 수련회를 예수원으로 두 차례 갔었어요. 그때 방언의 은사도 받았고, 대천덕 신부님께 희년에 대해 처음 들었습니다. 당시 희년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농지개혁에 관한 얘기를 막 하시니까 깜짝 놀랐죠. 당시 제가 운동권에 있으면서, 마르크스주의와 보수 신앙이 분열된 상태였어요. 교회에 가서 얘기를 들으면 그게 맞는 것 같고, 운동권 가서 들으면 또 이 얘기가 맞아요. 두 개가 다 맞는데 중간에서 화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그러던 중에 대천덕 신부님이 성경의 희년 제도에 대해 말씀하시는 데 그 간격을 다소 좁힐 수 있었어요.
기문연에서도 공부를 꽤 했습니다. 프랜시스 쉐퍼의 책이 막 소개되기 시작한 때였고요. 제가 사법연수원 들어가는 것을 1년 미루고 대학원에 있으면서, 사회과학 공부도 하고 신학 공부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때도 제가 성경에 이렇게 썼었어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 섬김의 명령 가운데서 나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는데, 한쪽으로 몰아서 무리하게 정리하지 않고 오픈해둔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쭉 해왔습니다. 나이가 들고, 자녀를 낳고 살아가면서 조금씩 간격이 좁혀졌죠.
- 거대 로펌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있었을까요?
1990년도에 사법연수원을 마쳤고, 그때만 해도 저는 스스로 노동 분야 ‘운동권 변호사’가 될 거라고 확신했어요. 다른 길로 가리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죠. 그런데 법무관 시절 사회주의가 붕괴되는 등 세계사적 대전환이 있는 것을 보고는 생각의 전환이 있었고, 더 넓고 다양한 세상을 경험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태평양 쪽에서 오라고 제안하기도 했고요.
- ‘법률지원’이 실질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합니다.
지원 형태는 정말 다양합니다. 가장 최근에는 쪽방촌 고시원 건물주가 건물 노후화를 이유로 철거를 결정하면서 거주민들에게 강제 퇴거를 요구한 적이 있었는데요. 퇴거 불응 시 단전·단수는 물론 주민등록 말소 조치까지 하겠다고 통보했다는 거예요. 이에 동천과 ‘홈리스행동’을 비롯한 16개 단체가 2024홈리스주거팀을 구성해 대응했습니다. 동천과 태평양은 법률적인 검토를 했어요. 건물주가 예고한 단전·단수는 형법상 권리행사방해죄에 해당하는 명백한 불법행위라고 지적했죠. 동천의 젊은 변호사들이 현장에 가서 기자회견도 하고, 태평양 공익활동위원회 변호사들에게 협조를 구하며 아주 적극적으로 움직였어요. 그 쪽방이 서울시 지정 쪽방이었기 때문에 서울시 정무부시장하고도 면담을 했고요. 저희가 거주민들의 담당 변호사라고 하면서 건물주에게 태평양 명의로 내용증명도 보냈고요.
결론적으로, 거주민 1인당 400만 원씩 받고 3개월 더 살면서 이사할 곳을 찾을 수 있도록 합의를 이끌어냈어요. 이 정도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고시원 건물주가 거주민들을 함부로 쫓아낼 수는 없다는 사례를 만들어낸 것 같아요. 이외에도 난민, 이주민이나 탈북민 등을 법률적으로 도운 사례는 많습니다.
2024홈리스주거팀이 6월 20일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동천 김윤진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재단법인 동천 제공)
- 요즘은 물밑 대화나 합의보다는 극단적인 대립이 더 증가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가 사라졌다고 할까요?
정치인들이 그런 것을 해줘야 하는데 안 하니까요. 장애인들이 지하철에서 위험하게 시위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참 안 좋았어요. 출근 시간에 하는 시위여서 시민들 지지를 받기도 어려운, 여러 가지로 안 좋은 여론이 생길 수 있는 시위 형태이죠. 찬반이 극렬하게 나뉘는 구조가 되고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제대로 역할을 못 해서 이렇게 해결이 어려워졌구나 반성을 참 많이 했어요.
장애인 입법에 대해서 로드맵을 짜고, 그분들이 원하는 법을 만들어야 하는데요. 올해 6월에 낸 열 번째 공익법총서 《장애인의 권리에 관한 연구》에 각론을 중심으로 입법 과제를 도출했어요. 그 과제를 시작으로 1년, 3년, 5년 내 해야 할 일들을 준비하는 거죠. 지금처럼 동천의 몇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물론 아니에요. 장애 유형에 따라 다 다를 것이고, 사회복지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나서서 정밀한 접근을 해야죠. 주거 문제도 마찬가지죠. 공익법정책 영역에서 정책 담론을 만들어내는 싱크탱크가 필요해요. 동천의 목표는 이런 싱크탱크가 되는 것입니다.
- 동천에서 지난해 주거공익법센터를 세웠습니다. 재단 내 센터까지 설립된 것은 주거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걸까요?
주거공익법센터의 설립 목적은 우리 사회의 주거 문제를 공익과 복지 관점에서 법률지원을 하려는 데 있습니다. 우리 젊은 세대들이 결혼하고 아이 낳는 것이 두렵지 않은, 살벌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책임 있는 고민을 해야 하잖아요. 그러려면 주거 문제부터 해결해야겠다 싶어서 주거공익법센터를 만든 거예요. 일단 해결책을 한 번 찾아보자. 사실 맨땅에 헤딩하는 거죠. 선행 연구가 많이 없었거든요. 주거공익법제에 관한 법률 전문가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작년에 도시계획, 건축 및 사회주택 분야 전문가들과 법률가들이 함께 《주거공익법제연구》를 냈어요. 사실 책을 기획할 때만 해도 막연한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연구할수록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어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고 있어요. 이 책을 읽고 연구원 1인 인건비를 지원해준다는 기업인도 계셨고, 국회에서도 연락이 와서 함께 국회 주거공익법제포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재)동천이 법무법인 태평양과 함께 매년 펴내고 있는 공익법총서. 제9권 《주거공익법제연구》와 제10권 《장애인의 권리에 관한 연구》. ⓒ복음과상황 정민호
- 혹시 전세사기 관련한 대책도 과제로 여기고 계신지요?
물론이죠. 개별 구제에 대한 부분은 아니지만, 어떤 제도를 개선해야 하는지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관련 입법 문제에 고려할 사항이 참 많거든요. 지금 공개할 단계는 아니지만, 내년 정도에는 준비가 되리라 예상하고 있어요. 주거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매우 복잡한 문제여서 공동 작업을 통해 담론을 만들어가야 해요. 기존의 부동산학과, 건축학과, 도시계획학과 교수들만 관여해서는 안 되죠. 금융, 세법, 복지, 입법 등의 전문가들이 인스티튜셔널하게 종합적, 체계적, 지속적 정책 담론을 만들어야 해요.
지난 6월 주거 분야 전문가와 활동가 등을 대상으로 한 포럼을 공동 주최했다.
- 교회의 사회적 섬김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하셨겠어요.
일을 하다 보니까, 저희가 만나는 분들이 난민, 이주민, 탈북민, 장애인 분들이잖아요. 예수님이 사역하시면서 만난 사람들이죠. 예수님의 삶을 따른다고 한다면, 교회가 이런 분들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요? 이웃사랑을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난민, 이주민, 고아 등을 자기 이웃으로서 범주화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기본적으로 한국교회는 디아코니아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교회 안에도 여호와의 군대처럼 싱크탱크가 있어야 되는데요. 교회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고통스럽습니다.
디아코니아를 바탕으로 사회선교센터를 만들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한때 유명한 목사님들과 만나 디아코니아 중심 사회선교센터 설립을 제안한 적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다들 관심이 없으시더라고요. 결국 이 일은 내가 해야 하는구나 생각하게 되었어요.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어쨌든 그분이 길을 열어주시겠죠.
- 삶에서 신앙 동기가 매우 결정적으로 작동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확신이나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어떻게 생기는지요?
자기를 사로잡는 무엇이 있지 않아요? 그리스도인은 사실 어떤 삶의 순간에, 생애의 매듭마다 하나님의 관여가 있었음을 깨닫잖아요. 뒤를 돌아봤을 때, 아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드셨구나 하는. 환갑이 넘어서 동천의 이사장이 되고, 공익법률 쪽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요. 지금은 사실 젊은 세대에 대해서도 책임을 많이 느낍니다. 우리 젊은 세대가 결혼하고 자녀도 마음 놓고 낳을 수 있도록 해법을 찾고 싶어요.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하고, 이게 하나님의 뜻이면 그다음의 인도를 받아서 가는 거지요.
예전에 대천덕 신부님이 늘 강조하셨던 구절이 있어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중요한 것은 의지라고 봐요. 주거 문제에 대해 법률 연구가 안 된 이유가, 돈이 안 되니까 법률가들이 건드리지 않은 거예요. 그런 일을 이제 우리가 시작했는데, 어쨌든 인도해 주시겠죠. 여명학교 만들 때도 그랬고, 탈북민취업지원센터 만들 때도 그랬고요. 생각해보면 여명학교 준비할 때가 제 인생의 황금기였어요. 매일 밤늦게까지 일하고, 주일에도 종일 그 준비를 할 정도로 미쳐있었는데, 그때 30~40대의 그런 제 모습이 괜찮았다고 생각해요. 주거공익법센터 활동을 하면서도 당시의 마음으로 환기되고 있어요.
- 6년 전, 〈법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학교를 지어주는 일을 인생 프로젝트라 밝히셨어요. 아직도 유효한 건가요?
2006년도에 여명학교 일을 도울 때, 제 머릿속을 치고 간 하나님이 주신 비전입니다. 사실은 북한에 가서 학교를 세울 꿈을 꾸었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 퇴직할 때가 되었네요. 북한의 학교들이 많이 낙후되어 있잖아요. 북한 전역에 초·중·고등학교가 약 9,500개로 파악이 되는데요. 통일을 꿈꾸는 사람으로서 북한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에 대한 지원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절실하게 다가와요. 북한에 가지 않고도, 통일 전에도 북한 학교를 돕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고민하며 꽤 구체적인 로드맵을 갖고 있고, 때가 온다면 이 인생 프로젝트를 위해 제 삶을 아낌없이 쏟아부을 겁니다.
첫댓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내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