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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피아노
기타하라에게 편지를 띄운 지 사흘이 지났다. 요코는 밖에서 눈을 치우고 있었다. 기타하라가 자신의 편지를 읽었는지 불안했다. 찢어 버려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요코는 힘찬 손놀림으로 눈을 치웠다.
요코는 지금 비로소 자기 편지를 애타게 기다렸을 기타하라가 얼마나 쓸슬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속달입니다!”
돌아보니 우체부가 요코에게 봉투를 건네주었다. 기타하라가 보낸 편지였다. 요코는 현관에 걸터앉았다. 다리가 떨려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답장을 보내왔어!’
그러나 봉투를 뜯기가 두려웠다.
“방금 우체부가 왔었지?”
나쓰에가 외출복 차림으로 현관에 나타났다.
“네.”
“어디서 왔니?”
“저한테 왔어요.”
나쓰에는 현관에 걸터앉아 새파랗게 질린 요코를 바라보았다. 요코는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나쓰에가 보더라도 마음이 아플 만큼 애처로운 미소였다.
“다쓰코 아줌마 집에 가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해. 아버지도 오늘은 늦게 들어오신다고 했어. 저녁은 너 혼자서 먹어야겠구나.”
요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신발장에서 나쓰에의 방한화를 꺼내 가지런히 놓았다.
“기운 내. 올 때 크리스마스 케이크 사다 줄께.”
나쓰에는 요코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 온 것이라고 혼자 단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힘없는 요코의 얼굴을 보자 자신까지도 약해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녀오세요.”
나쓰에의 따스한 배려가 감수성이 강한 요코의 가슴에 깊이 와 닿았다.
“버스타고 가세요?”
현관을 나선 나쓰에에게 요코가 물었다.
“큰길까지 걸어가서 농협에 들렸다가 차를 탈 거야.”
나쓰에의 검은 아스트라한 모피 코트 아래로 보이는 엷은 푸른색 수단 옷이 아름다웠다. 요코는 겆실 난로 옆에 앉아 가위로 기타하라에게서 온 편지 겉봉을 잘랐다. 지금까지 봉투도 뜯어보지 않고 불태워 버린 것이 또다시 후회가 되었다. 요코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편지를 폈다.
편지를 받아 보았어요. 언젠가는 내가 오해했는데 이번에는 요코 씨가 오해했군요. 일대일로 비겼어요.
어젯밤에 몇십 분 한 시간 가까이나 눈을 맞으며 밖에 서 있었다니 정말 무모한 아가씨로군요. 감기에 걸리지 않았는지 걱정하고 있어요.
크리스마스 이브날 여섯 시에 집으로 찾아가겠어요. 정정당당히 찾아가지 않은 내가 나빴어요. 여동생이 당신에게 안부 전해 달래요.
기타하라 구니오
‘크리스마스 이브라면 오늘밤이야.’
요코는 편지를 들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기타하라의 편지에 요코는 감탄했다. 원망이라고는 한 마디도 적혀 있지 않았다. 기타하라는 오히려 찾아오지 않은 자기가 나빴다고 적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기차에 흔들리며 아사히가와까지 와 주겠다고 한 걸 생각하니 요코는 기타하라라는 인간의 크기와 성실성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날이 저물자 요코는 괜히 집안을 서성거리기도 하고 몇 번이나 시계를 쳐다보기도 하면서 들떠 잇었다. 자신이 무척 어리석은 여자로 여겨졌다. 문득 요코는 인간 속에는 어리석은 면이 없으면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 차가 멎는 소리가 들렸다. 요코는 당황하여 시계를 쳐다보았다. 아직 다섯 시 반밖에 안 되었다. 바삐 달려가 현관문을 열었더니,
“잘 있었어?”
하고 말하며 문밖 외등 아래 싱글벙글 웃고 서 있는 사람은 도오루였다.
“어머, 오빠.”
요코는 기타하라가 아니라 약간 실망했다.
“놀랐지? 말일까지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도오루는 요코의 놀라는 표정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잘 왔어. 엄마가 깜짝 놀라겠네.”
역시 요코에게는 도오루는 하나밖에 없는 오빠였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니 반가웠다.
“어머니는 어디 가셨어?”
도오루는 코트를 벗으면서 물었다.
“다쓰코 아줌마 댁에 갔어. 전화할까?”
“괜찮아. 돌아오셔서 갑자기 얼굴을 마주 보는 편이 더 반가울 테니까. 아버지는 늦게 오셔?”
“그런가봐. 오빠, 저녁 식사 어떡했어?”
“기차 안에서 대충 때웠어.”
도오루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서둘러 여행 가방을 열었다.
“요코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 왔어.”
도오루는 기쁜 표정이었다. 불빛을 받아 도오루의 그림자가 방바닥 위에 흔들렸다.
“어머, 고마워. 뭐야?”
요코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기타하라의 방문이 마음에 걸렸다.
“뭔지 알아맞혀 봐.”
“글쎄, 뭘까?”
‘응접실 난로엔 불이 지펴져 있었다. 차와 과자도 준비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요코는 침착할 수가 없었다.
도오루에게 기타하라가 올 것이라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도오루는 혼자 즐거운 듯이 여행 가방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 거라고 생각해?”
다시 도오루가 물었다.
“무슨 액세서리 아니야?”
도오루가 지금까지 요코에게 사 준 선물은 대부분 브로치나 머플러 또는 장갑 등이었다.
“응, 맞아, 액세서리야.”
도오루는 진지한 표정을 보이고 나서 싱글벙글 웃었다. 굉장히 기쁜 모양이엇다. 요코는 지금까지 받은 선물과는 다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도오루의 기뻐하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오루는 요코와 기타하라의 교제는 이미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기타하라만 멀리하면 요코는 반드시 자신에게 마음을 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빠라고 생각하지 말아 주면 안 되겠어?”
여름방학에 돌아왔을 때 도오루는 요코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그 말이 분명 요코 안에서 어떤 형태로든 자라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남매로서 사이가 좋았던 만큼 자신의 희망대로 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기대가 그로 하여금 요코에게 오팔 반지를 선물할 용기가 나게 했던 것이다.
‘여동생이니까 어떤 걸 사 줘도 우습지 않겠지.’
사실 도오루는 약혼 반지로 간주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말을 꺼내기에는 아직 때가 이른 것 같았다.
“액세서리라고 해도 범위가 넓어.”
좀처럼 알아맞히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도오루는 무척 기뻤다.
“그럼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나누어 말하면 그건 상반신에 사용하는 거지?”
“응, 맞아.”
“그럼 머리와 가슴으로 구분하면 머리에 사용하는 거지?”
“아니.”
“그럼 가슴이네.”
요코는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여섯 시가 가까왔다.
“아냐.”
“설마 팔찌나 반지는 아닐 테지......”
그때 현관벨이 울렸다.
“어머, 기타하라 씨야.”
요코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더니 급히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반지야.”
하고 말하려고 즐거운 마음으로 벼르고 있던 도오루는 갑자기 입안이 몹시 씁쓰레한 느낌이 들었다.
‘그랬구나. 오늘밤에 기타하라가 오기로 되어 있었구나.’
요코가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은 기타하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도오루는 자기 자신을 비웃고 싶었다.
‘역시 내 역할은 오빠라는 것뿐인가?’
도오루는 자신이 사 온 오팔 반지를 손바닥에 놓았다. 전등불 아래서 연한 녹색과 핑크색이 미묘하게 반짝거리는 것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남매로서 자란 자신을 요코가 오빠로밖에 느끼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도오루는 반지를 여행 가방 속에 도로 넣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요코를 여동생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난로불이 활활 소리를 내며 타고 있는 것까지도 도오루에게는 쓸쓸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이에요.”
기타하라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줍은 웃음을 머금고 현관에 서 있었다.
“미안해요. 저.......”
요코는 눈물이 글썽했다.
“눈 속에 서 있어서 감기라도 걸리지 않았어요?”
기타하라의 말에 요코는 금세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다.
“올라가게 해주세요. 현관에 세워 두니 힘들어 죽겠군요.”
기타하라는 웃으면서 구두를 벗었다. 요코도 덩달아 웃으면서,
“어머, 미안해요. 어서 올라오세요.......”
하고 응접실 문을 열었다.
“어머니는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늘은 늦으실 거예요. 하지만 오빠가 와 있어요.”
“아, 쓰지구치가 와 있어요? 아르바이트 때문에 말일쯤에나 돌아오겠다고 하더니.”
“방금 왔어요.”
기타하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요코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미안해요. 뭐라고 사과해야 할지......”
“피차 마찬가지죠. 저번에는 나, 이번에는 당신. 젊다는 증거겠지요. 그런 일로 정말 화를 내기도 하고 오해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점점 현명해지는 게 아닐까요?”
두 사람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현명해지는 게 아닐까요?’
두 사람은 말없이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이윽고 요코는 차를 끓이려고 자리를 떴다.
“아, 잠깐. 그 전에 물어 보고 싶은 말이 있어요.”
기타하라는 새삼스럽게 어조를 바꾸었다.
“뭔데요?”
요코는 되돌아왔다.
“물어도 좋을지 어떨지 모르지만.....역시 물어 보고 싶어요.”
“어머, 뭔데요?”
요코는 불안한 얼굴을 했다.
“실은 쓰지구치한테서 들은 말인데, 당신과 쓰지구치는 피가 섞여 있지 않다고.......”
“네, 저는 태어나자마자 바로 이 집으로 왔대요.”
요코는 기죽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말햇다.
“.....그래서 쓰지구치가 약간 마음에 걸려요.”
“마음에 걸리다니요? 뭐가요?”
“쓰지구치는 당신을 단지 여동생으로서만 귀여워한다고 생각할 수 없어요. 쓰지구치의 마음을 알고 있겠지요?”
“우린 남매예요. 전 오빠를 좋아해요. 무척 좋아해요. 하지만 그건 오빠로서 좋아할 뿐이에요. 이것으로 됐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요코는 이렇게 말하면서 선물을 사 가지고 와서 그것을 자신에게 알아맞히게 하려고 싱글벙글하던 도오루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자 문득 혼자 외톨이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아서 가엾게 생각되었다.
거실에 가보니 도오루는 여행 가방에 손을 얹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기타하라 씨가 왔어, 오빠. 오빠도 응접실로 와.”
요코는 도오루의 옆에 앉아서 말햇다.
“응, 갈게.”
도오루는 요코를 흘끔 바라보았다.
요코는 코코아와 귤을 쟁반에 얹어서 들고 일어났다.
“오빠 것도 갖다 놓을게.”
“응, 잠깐 쉬었다 갈게.”
도오루는 벌렁 드러누웠다. 거실을 나서려던 요코가 돌아보니 도오루는 가슴이 뜨끔할 정도로 쓸쓸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요코는 차마 나갈 수가 없었다.
“곧 갈테니 먼저 가 있어.”
응접실에 온 후에도 요코는 도오루의 쓸쓸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오빠는 잠깐 쉬었다 온대요.“
”그래요? 아르바이트로 무척 피곤한 모양이군요.“
기타하라는 코코아 스푼으로 저었다.
‘단순히 피곤한 얼굴일까?’
요코에게는 도오루가 피곤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요코 씨!”
“네?”
“지금 3학년이지요? 어느 학교로 진학할 생각이에요?”
“전 진학하지 않아요.”
“왜요?”
기타하라는 놀란 듯이 코코아를 젓던 손을 멈췄다. 요코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요? 그렇게 결정했나요?”
기타하라는 뭔가 눈치챈 것 같았다.
“기타하라 씨는 대학원에 가실 거예요?”
“가려고 해요. 그래서 앞으로 나도 요코 씨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될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아직 고등학생이고 전 앞으로 대학원에 가게 되면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아직 긴 세월이 남아 있으니까요. 서로 오해하거나 해서는 안 되겠지요.”
기타하라는 진지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이제 오해 같은 건 하지 않겠어요.”
“아니, 나도 쓰지구치와 당신이 남남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서는 어쩐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
기타하라는 약간 우울한 듯했다.
“싫어요, 그런 말씀하시면.”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란 변하기 쉽거든요.”
“전 변하지 않아요.”
요코는 약간 화가 난 듯이 말햇다.
“요코 씨,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인간이란 내일 당장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요.”
“어머, 그럼 기타하라 씨는 변할 건가요?”
“변할지 변하지 않을지 단언할 수 없어요. 지금은 한평생 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에요. 이건 어디까지나 생각이에요. 하지만 입밖에 내어 영원히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전 결혼 약속도 하지 않겠어요.”
요코는 기타하라의 말에서 성실성을 느꼈다. 그러나 약간 섭섭했다.
‘영원을 맹세하지 않겠다’는 기타하라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요코는 역시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다. 요코의 얼굴을 바라보고 기타하라는 웃었다.
“불만에에요, 요코 씨? 하지만 지금도 수많은 남녀가 영원히 변하지 않겠다거나 결혼하겠다고 맹세해 놓고도 얼마나 많이 그것을 어기고 있는지 몰라요. 모두 저마다 자기들만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맹세했을 테지만요.”
요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코 씨는 내 소유물이 아니고 나도 요코 씨의 소유물이 아니에요. 따라서 요코 씨가 기타하라 구니오 이외의 딴 사람과 결혼하게 되어도 할 수 없는 거예요.”
“어머, 싫어요. 그건......”
“물론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 건 아녜요. 하지만 서로가 자유거든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말해 주세요. 내가 바라는 건 날마다 성실하게 살고 싶다는 거예요. 그 성실한 생활의 결과가 이별이 되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요코는 기타하라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기타하라는 아마도 마음이 변하지 않을 사람 같았다.
“알겠어요. 그럼 오빠를 불러올게요.”
요코는 거실 미닫이를 열었다. 도오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행 가방도 외투도 없었다. 이층 자기 방에 갔나 해서 요코는 계단을 올라갔다. 도오루의 방은 캄캄했다. 요코는 불안하여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다시 거실에 가 보았다. 역시 도오루는 없었다. 문득 찬장 위를 보니 접힌 편지가 있었다. 요코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눌렀다.
‘갑자기 눈이 내리지 않는 설날을 맞고 싶어졌어요. 치가사키의 할아버지 댁에 갑니다. 즐거운 설날 보내세요.’
수신인의 이름은 씌어 있지 않았다. 요코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조금 전의 숨막힏는 듯하던 도오루의 쓸쓸한 표정을 그리고 있었다.
요코는 기타하라에게 도오루가 없어졌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오자마자 갑자기 치가사키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도오루의 외로움을 누구에게도 숨겨 두고 싶었다.
요코는 차를 타러 가서 기타하라에게 가져왔다.
“미안해요. 오빠는 피곤해서 잠들었나 봐요.”
기타하라는 요코를 빤히 바라보았다. 도오루가 얼굴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기타하라는 말없이 피아노 옆으로 다가갔다.
“이건 당신이 치는 건가요?”
“아뇨, 아무도 치지 않아요.”
“장식용인가요?”
“어머니가 어렸을 때부터 치던 피아노래요. 하지만 지금은 어머니도 치지 않아요. 열쇠를 잊어버렸대요.”
요코는 이 피아노가 열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피아노는 언제나 그냥 그 자리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 피아노는 이상한 존재였다.
“그럼 여러분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
기타하라는 악수도 청하지 않고 현관을 나섰다.
“또 오세요.”
“1월 2일에 올게요.”
그때 갑자기 차의 헤드라이트가 눈길을 확 비쳤다.
“어머, 아버지 아니면 어머니일 거예요.”
차가 문 앞에 멈춰 서고 현관 등이 켜졌다. 나쓰에였다. 차에서 내린 나쓰에는 기타하라를 보자 표정이 굳어졌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안 계신데 폐를 끼쳤습니다.”
기타하라는 쾌활하고 명랑한 태도를 취했다.
“어머, 오랜만이네요. 벌써 돌아가세요?”
나쓰에는 웃는 얼굴로 기타하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쓰에는 삿포로의 다방에서 갑자기 “실례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린 기타하라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기타라라가 사라지자 나쓰에는 요코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요코, 아무도 없을 때에는 남자를 집에 들여놓지 않도록 해.”
나쓰에는 이렇게 말하고 크리스마스 케이크 상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죄송해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하지만 어머니, 기타하라 씨가 찾아왔을 때는 오빠가 돌아와 있었어요.”
“뭐, 도오루가 돌아왔어?”
나쓰에는 거실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네, 하지만......”
요코는 도오루가 써 놓은 편지를 나쓰에 앞에 내놓았다. 나쓰에는 이상한 듯이 집어 들고 읽어 내려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쓰에는 얼굴색을 바꾸고 요코를 빤히 바라보았다. 요코는 그 이유를 알 듯 말 듯했다.
“무엇 때문에 오늘밤에 왔다가 오늘밤에 꼭 떠나야 했을까? 넌 왜 말리지 않았니?”
나쓰에가 이렇게 말하는 건 아주 당연했다.
‘몰랐다’는 말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바로 차를 타고 쫒차갔으면 도오루가 기차를 타는 것을 막을 수 도 있었을 것이라고 요코는 생각했다.
“죄송해요.”
요코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다니, 도오루와 싸우기라도 한 거야?”
나쓰에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뇨.”
“싸움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부모도 만나지 않고 가 버리다니.....”
기타하라의 방문이 도오루에게 그토록 큰 충격을 주었으리라고는 나쓰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요코, 너는 도오루가 없는데도 태평스럽게 기타하라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구나.”
나쓰에는 도오루가 이 집에서 요코에게 쫓겨나 멀리 여행길에 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했다.
“죄송해요.”
요코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게이조가 돌아왔다. 현관으로 마중 나온 나쓰에의 표정을 보자 게이조는 찔끔했다. 나쓰에는 노가쿠(일본의 대표적인 가면 음악극)에 사용하는 가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이조가 거실에 들어서니 요코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자 그는,
‘말해 버렸나!’
하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나쓰에를 돌아보았다.
절대로 요코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나쓰에가 입밖에 낸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나쓰에는 말없이 도오루가 쓴 편지를 게이조 앞에 내놓았다. 게이조는 편지를 얼른 읽어보았다.
“아니, 도오루가 돌아왔소?”
게이조는 요코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자 일단 마음이 놓였다.
“오자마자 곧 집을 나가 버리다니,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나쓰에는 요코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어떻게 되다니? 이렇게 편지를 써놓은 것을 보면 도오루는 몰래 집을 나갔군 그래. 요코는 집에 있었니?”
게이조는 상냥하게 물었다.
“기타하라 씨와 응접실에 있었어요. 오빠가 잠시 쉬었다가 오갰다고 하길래 기다리고 있었는데.....거실에 와 보니 벌써 나가고 없었어요.”
요코는 도오루의 쓸쓸한 얼굴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그럼 할 수 없군.”
게이조는 달래듯이 요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다뇨? 여보, 여기는 도오루의 집이에요. 굳이 몰래 집을 뛰쳐나갈 건 없지 않아요.”
“뭐 집을 뛰쳐나간 게 아니잖소? 갑자기 도쿄에라도 가고 싶었던 모양이지. 젊었을 때에는 충동적으로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요코가 그걸 알아차렸다면 바로 정거장으로 뒤쫓아갔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나쓰에는 어디까지나 요코를 탓하고 싶었다.
“기타하라 군이 있는데 허겁지겁 집을 나설 수도 없지 않았겠소. 어린애라면 모를가, 도오루는 요코보다 어른이오. 도오루는 치가사키 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나 아프리카에라도 혼자서 갈 수 있는 나이란 말이오. 게다가 누가 나가라고 한 것도 아니잖소. 부모에게도 얼굴을 보이지 않고 나간 것은 도오루 자신이오. 그러니 요코가 책임을 질 일이 아니잖소.”
게이조는 요코가 기가 죽은 것을 보니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나쓰에는 게이조의 말을 드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쓰에는 도오루가 갑자기 떠나버린 것은 기타하라와 요코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제서야 겨우 알아차렸다. 나쓰에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도오루가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요코의 부모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도 도오루는 그토록 요코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자 나쓰에는 두려워졌다.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기타하라와 요코가 맺어지는 것은 도오루에게는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쓰에는 기타하라와 요코의 관계를 기뻐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기타하라에게서 받은 굴욕감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요코를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