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한 ‘5인이상 집합금지’로 인하여 정기산행이 잠정 휴행된지 3개월이 되었다.
산꾼이 산에 못가면 안달이 나는 법.
“뒷산에라도 가면 될 일이지, 뭐가 그리 대수냐?” 할 것이지만 그래갖고는 성에 차지 않는 법.
그래서 이리저리 꾼들을 모아 소규모 그룹산행을 한다.
나는 오늘 처음 참가하여 자세한 일정이나 코스도 모른 채 안내를 따랐다.
처음 오르는 갈미봉(224.4m)은 상정리 서쪽 뒷산으로 생김새가 갓 위에 덮어쓰는 갈모와 닮았다고 붙은 이름.
그러나 옛 지명어에서 ‘갈미’는 ‘높은 산’을 뜻하므로 ‘갈미봉’도 ‘높은 산’이란 뜻이다.
그렇지만 그 능선 나란한 네 봉 중에서 셋째 봉으로 제일 높은 봉은 아니었다.
둘째 봉인 남산(南山 157.5m)은 내가 가진 지형도엔 보이지 않는 이름이지만 다음카카오 지도에 보인다.
와룡리 버드실마을에서 보았을 때 남쪽에 있는 산이라서 남산인 것.
100m중반의 나즈막한 산에서 펼쳐지는 조망은 오늘 산행 중 압권이었다.
대방산 또한 내 지형도에 보이지 않는 이름이지만 ‘등네미’와 ‘길~~’님의 지형도엔 나오는 이름이란다.
대곡면 대곡리 대방마을 뒷산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면 그보다 더 높고 가까운 330봉이나 303.7봉이 타당할 것이지만 봉이랄 것도 없는 어수룩한 봉우리가 대방산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방산(大坊山 241.5m)이라고 쓴 표지기를 높이와 함께 급조하여 걸었다.
자료를 찾을 수 없는 한문이름은 ‘마을 방(坊)’자를 적어넣어 감히 ‘큰 마을’이란 의미를 불어 넣었다.
마침 상정리가 고향인 일행이 있어 “우리 어렸을 땐 ‘대뱅이’라고 불렀어.”하니 그렇게 부르면 ‘대빵’이 될 것이다.
원점회귀를 이루는 상정리(上井里)는 예로부터 우물의 수질이 좋았기 때문에 ‘상정(上井)’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고향이 상정리인 일행은 옛날에도 집집마다 샘이 있었다고 하니 말그대로 ‘웃새미’가 있는 마을이었던 것.
1789년의 <호구총수>에 ‘상정리(上井里)’가 나타났다고 하니 ‘상정(上井)’의 유래는 18세기 이전으로 올라간다.
금동(琴洞)은 상정리(上井里)의 행정마을로 전래 지명은 ‘거문골’이다.
거문고 금(琴)자를 써서 표기한 ‘금동(琴洞)’은 ‘거문골’의 차자표기(借字表記)이지만 거문고와는 아무 관련 없는 지명.
거문골은 크다·높다라는 뜻의 옛말인 ‘가마’이고, 가매, 거무, 거문 등 다양한 이형(異形)이 있는데 거문골의 ‘거문’도 이에 해당하는 것.
가마나 가매는 가마(駕馬)나 큰 솥을 가리키는 가마(釜)로 풀이하곤 하지만 대부분 높다(高)라는 뜻을 가진 옛말이다.
금동(琴洞)도 마을 뒤의 갈미봉과 관련하여 ‘높은 산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볼 수 있다.
갈미봉이 높은 산이란 뜻이니.
귀가시 답사한 지석묘(支石墓)는 고인돌 또는 돌멘(Dolmen)으로 부르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우리나라 지석묘는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上石)을 올려놓은 탁자식(北方式)으로 구분된다.
이곳 지석묘는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주민들은 칠성 지석묘라 부르지만 공식 이름은 ‘의령상정리지석묘군(경남기념물 제193호)’이다.
산행코스: 금동교-△232.2m-갈미봉-임도-자릿대재-남산(157.5m 왕복)-△258.2m--303.7m-대방산(241.5)-금동교.
* 차량이동 후 '의령상정리지석묘군' 답사
산행궤적.<이 코스는 진양기맥의 천황산(345m)에 맥이 닿아있고, 모두 남강에서 몸을 푸니 ㅇㅇ단맥으로 불릴 수도 있겠다.>
산행궤적
10km가 조금 되지 않는 산길을 5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고도표
<산길샘>
승합차는 '의령 금동교(의령군 화정면 상정리 774-4)' 앞에 도착하였다.
금동교 앞엔 정자가 있고, 남강으로 흘러드는 상정천 가엔 이미 봄햇살이 따스하게 내려 앉았다.
다리(금동교) 건너로 나중에 우리가 내려올 능선이 상정천이 남강에 합수되는 곳에 솟아있다.
금동교를 건너면 도로가 우로 휘어지는 곳에서...
능선이 내려앉은 우측 산자락으로 올라선다.
산판길 수준의 산길은 묘소로 통하는 길.
잘 가꿔진 묘가 있는가하면 잊혀져 가는 묘소도 있다.
창산 조씨와 전주 이씨 쌍분.
석물로 봉분을 보호했지만 못된 맷돼지놈들.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으니 ㅉㅉ.
이건 무슨 석물이고?
자연으로 돌아간...
정선 전씨묘.
칡덩쿨 가시덤뿔이 진로를 가로막아 이리저리 휘돌아...
진달래 꽃망울 머금은 능선으로 올라선다.
좌측 잡목사이로 뽕긋한 봉우리는 우리가 진행할 능선.
제법 가파른 낙엽쌓인 오름길은 미끄러지기 일쑤.
다시 좌측으로 뽕긋뽕긋 나아갈 능선이 원을 그리고 있다.
갈미봉 직전에서 도드라진 바위가 있지만 잡목으로 조망은 만족스럽지는 않아. 앞의 봉우리는 첫봉인 232.2봉.
그곳에서의 조망.
그렇게 갈미봉에 올라 서명한 표지기를 걸었다.
솔밭길을 걷다...
작은 봉우리를 오르내렸더니...
임도에 닿는다. 이제 좌측 임도를 따른다.
그런뒤 걸어왔던 자취를 뒤돌아보니 뽈록뽈록 네 봉이 솟아있다.우측 첫봉(232.2m)이 제일 높았고, 갈미봉은 우에서 세 번째봉.
임도가 아스팔트에 닿기전 양지바른 '남평 문씨 묘'에서 식당을 차렸다.
아스팔트 도로는 '자릿대재'이고, 화정면과 대곡면의 경계이다.
진행할 능선은 낙석방지 휀스 틈새이지만 다음카카오의 남산을 다녀오기 위해선 그냥 임도를 따르는 게 수월할 것.
자릿대재 유래비.
유래비 뒷면에는 내력이 빽빽이 적혀있다.
도로가 나기전엔 산적들이 이 고개에서 넘나드는 양민들을 도적질하였다 하고, 호랑이도 있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호랑이 담비피던 이야기.
앞에 보이는 묏등같은 봉우리가 남산(157.5)이고, 진입로는 정면에 보이는 임도.
그런 뒤 진로를 이어가는 길은 남산을 되내려와서 좌측 능선의 화살표를 따라야 한다.
내가 낙석방지의 틈새로 오른 건 남산을 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지만 나중엔 틈새 위 능선에서 남산을 다녀왔다.
남평문씨 양지바른 묘지에서 매실주를 곁들인 점심을 먹었다.
컵에 붙은 작은 무당벌레.
식사 후 낙석방지 틈새로 뒤따라 올라온 강기남 씨를 두고 결국 마주보이는 남산으로 일행들을 뛰따랐다.
봄꽃이 반기는 좋은 산길.
산정희열을 누렸던 일행들은 벌써 내려오는데, 나는 쌕쌕 거꾸로 올라간다.
남산을 빼먹으려고 했다가 다음카카오에서 그 이름을 확인하고 뒤따라 갔던 것.
남산엔 무덤 몇 기가 있고, 다음에 우리가 좌측으로 한 바퀴 휘돌며 이어갈 능선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맨 우측에 솟은 봉우리는 삼각점봉(258.2m)인 듯. '준·희' 님 표시판엔 257.9m라고 적혀 있었다.
매직을 꺼내 '南山 157.5'라 쓴 뒤 서명을 하곤 '수요만남' 옆에 걸었다. '수요만남'은 '길~~'님이 소속된 산악회였지만 지금은 停會되었다.
남산에서의 조망.
다시 되내려온 삼거리. 좌측 내리막길이 일행들이 임도를 따라 올라왔던 길이고, 직진 능선길이 아까 내가 왔던 길.
송이지역인가?
능선을 고수하며...
솔밭길을 따르니...
남산에서 딱 한 시간 만에 삼각점봉에 닿는다.
삼각점 안내판엔 높이가 286.6m로 나와 있으나...
준·희 님의 표시판엔 257.9m로 표시되어 있다. 내가 가진 지형도엔 258.2m인데 작은 글체로 257.9m라 적혀있다.
잘 빠진 헌칠한 능선길. 마치 백마의 등에라도 올라 탄 듯.
이제 능선은 좌로 휘어지고, 잡목사이로 솟은 봉은 303.7봉인 듯.
어느 방향인진 확실치 않으나 잡목사이로 보이는 건 남강인 듯.
오늘 산행중 최고로 높은 듯한 봉우리에 '330m'라 적은 표지기를 걸었다.
높이가 나오지 않는 봉우리라 등고선을 확인한 대강의 높이다.
다시 20여분 만에 지형도에 높이가 나오는 '303.7m' 봉우리에 서명한 표지기를 걸었다.
잡목 덤불 사이의 연두색 여린 생명체는 생강나무 꽃봉우리인가?
다지목(多枝木)이 있는 두루뭉실한 봉우리가...
대방산이란다. 내 손에 든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잘 믿지 않지만 그대로 표지기를 걸었다.
'大坊山 241.5'라 썼지만 이름이나 높이를 내 손에서 확인할 수 없었으니 산행기를 쓰는 지금도 꺼림칙하기는 마찬가지다.
표지기는 오늘 매단 '수요만남'과 단 두 개뿐. '대뱅이산'이 어딘지 모른 채 (?)모두 그냥 지나쳤다는 이야기.
이제 등로는 상정천이 남강에 흡수되는 합수지점으로 하강한다.
잡목으로 다소 거친 능선을...
조금 내려서면...
소나무 공동묘지.
비석이 있어 확인하니...
대한민국 예술명인 故 송철수 명인과 예술명창 평산신씨옥계지묘다.
故 송철수(1922~ 1984) 명인은 '의령집돌금농악'을 계승발전시켰다고 한다.
'의령집돌금농악'은 의령 지역의 농악과 지신밟기로 한해를 시작하는 정초에 나쁜 일은 물리치고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 집집마다 방문해 제액초복 또는 벽사진경을 기원했던 풍물굿이다.
지금은 전문유랑예인집단인 ‘남사당패’, ‘솟대쟁이패’에서 다양한 기예로 전국을 누볐던 의령출신 故송철수 명인의 손자인 송진호가 그 맥을 잇고있다 한다.
흐드러진 매화.
볼록거울이 있는 곡각지점 포장도로에 내려서니 남강변이다.
차가 있는 금동교로 회귀하며...
강건너 멀리 방어산을 바라본다.
강건너 가까운 저곳은 안계나루터.'안계(雁ㅇ)'란 기러기가 많이 내려앉는 마을이라고 하여 예부터 갱상도 버전으로 '앵기'라 불렀단다.
예전 안계나루터는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와 진주시 지수면 용봉리 안계마을을 잇는 교통수단으로 ‘조선지형도’에 실렸다.
나루터 주위엔 '앵기뻔덕' 장이 섰다.
장사꾼들과 노름꾼들로 북적였던 장은 진주에서 기생들이 모여들 정도로 한때 번창했다고 한다.
당시 위로는 진주, 아래로는 의령 정암나루까지 뱃길이 이어졌지만 지금은 그 자리에 세워진 유래비만이 당시를 말해주고 있다.
신록 우거진 계절의 사진을 '김천령의 바람흔적'에서 빌려왔다.
강가 안계나루터와 뱃길로 이어주던 곳에 허물어지고 있는 집 한 채는 당시 나루터에 있었던 주막인 듯하다.
나루터를 이용하며 오가던 술취한 장꾼들의 육자배기가 들리는 듯하다.
안계나루터에서 건너다 본 주막집. <김천령의 바람흔적>
금동교로 회귀하며...
큰길가에 나오면 산방마을 표석이 있고...
금동교가 있다.
금동교 30여m 후방 곡각지점에 아까 올랐던 갈미봉 들머리가 보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참가한 나는 푸짐하게 차려놓는 뒷풀이에 아연해졌다.
한재미나리 부침이에 칼국수까지 곁들였으니 그만 포식포음(飽食飽飮)이 되었다.
그런 뒤 가까이 화정면 소재지에 있는 '의령 상정리 지석묘군'으로 잠깐 이동을 한다.
지석묘는 커다란 돌덩이 몇 개가 흩어져 있는 모습(?)으로...
길가에 있어 안내판이 없고, 또 유심히 살피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치기 쉬울 것.
1~4호묘는 동쪽 도로 옆 논에 있다하고, 5~7호묘는 북쪽 도로 옆 밭에 있다고 한다.무슨 말이고? 그럼 이 건?
안내판.
지석묘가 있는 길건너에 '의령 화정복합문화센터'가 보인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다.
우리는 정의(正義)와 불의(不義)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들고, 매 순간마다 판단을 강요당한다.
판사를 ‘judge’라고 한다.
어원을 살펴보면 '정의'와 '말하다'의 의미가 합쳐져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 된다.
정의를 ‘자스티스(justice)’라고 한다.
대법관을 지칭하는 말이고(영미법 국가), 판사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니 사법 정의와 인권수호를 대변하는 말이다.
정의(正義)가 살아있는 우리나라!
정말 요원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