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영향력을 끼쳐라2(마태복음 5:13-16)23.02.26.주일낮설교
영국의 BBC에서 은퇴자 129명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실험했습니다.
한 그룹은 주 3회 봉사활동을 하도록 하고
다른 그룹은 같은 기간 취미활동을 하도록 한 뒤,
그들의 신체적 변화를 추적했습니다.
검사 결과 취미활동을 한 그룹보다 봉사활동을 한 그룹의 뇌 활동량이 증가하면서 행복감을 더 크게 느꼈습니다.
봉사하며 살 때 행복한 것이고,
봉사하며 살 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생각으로 그 말씀을 하셨을까요?
소금이라는 정체성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소금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짠 맛’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더 이상 소금의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소금은 절대로 제 맛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1. 소금의 정체성은 맛을 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두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했습니다.
소금이 ‘되라’고 하신 게 아니라 ‘소금’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금처럼 맛을 내며 살아야한다는 뜻입니다.
소금은 조미료입니다. 음식 속에 들어가면 음식 맛이 나게 합니다.
소금이 떡에 들어가면 떡 맛을 내고, 고기에 들어가면 고기 맛을 내고,
김치에 들어가면 김치 맛이 나게 합니다.
소금을 쳐서 맛을 내듯이 우리 마음에 소금을 쳐서 부드러운 말로 다른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곳에든지 맛을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더러운 말을 입에서 쏟아내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헬라 말에서 더럽다는 sapros인데 이 단어는 부패하다, 썩었다, 추하다, 온전치 못하다, 상했다, 맛이 갔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과일이나 채소나 생선이 썩어 냄새가 나고 부패하여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나중에는 부메랑이 되어 자기 뒤통수를 때립니다.
대화가 막히면 오해가 생깁니다. 대화에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볼링식 대화를 합니다. 공을 굴려서 핀을 모두 쓰러뜨리듯,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말로 상대방의 마음의 핀을 쓰러뜨립니다. 이런 사람은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매사에 상대방을 자극하는 대화를 퍼붓는 사람은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 합니다.
혼자만 따따따 닥.... 안됩니다. 다툼을 일으킵니다.
우리에겐 탁구식 대화가 필요합니다. 상대와 공을 계속 주고받듯,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런 대화는 신뢰와 정을 싹트게 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이 원활한 대화의 방법입니다.
다툼의 말이 아닌 서로간의 사랑의 말로 대화를 해야 합니다.
말이 많은 사람은 말싸움에 빠집니다. 말싸움하면 나 자신의 신앙에도 유익이 없고,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유익이 없습니다.
말싸움이 성도들을 영적으로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떠나게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도 배울 만큼 배웠고, 신앙생활 할 만큼 했다면서 같이 대결한다면 유익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탄만 좋아합니다.
말은 줄이고 행동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기쁘고 은혜가 있습니다.
말 보다는 행동이 앞설 때, 은혜롭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찬 언어는 “사랑합니다.”입니다.
그 다음에는 “감사합니다.”입니다.
우리들은 소금입니다.
소금의 정체성은 맛을 내는 것입니다.
1. 소금의 정체성은 맛을 내는 것입니다.
2. 소금의 정체성은 희생입니다.
소금은 녹아야 합니다. 소금이 자기 역할을 하려고 하면 녹아 없어져야 합니다. 소금이 덩어리로 있으면 모양은 소금이지만 맛이 없습니다.
소금이 자기 모양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자기 구실을 못합니다.
아주 녹아 없어져야 소금이 소금 노릇하게 됩니다.
녹아 없어진다는 말은 자기 존재를 희생시킨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죽이고 포기하고 다른 존재 속에 스며드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죽고, 내 고집이 죽고, 내 교만이 죽고, 내 자존심이 죽고, 자기가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내가 살고, 내 고집이 살고, 내 교만이 살고, 내 자존심이 살고, 내 명예를 살리고 있다면 소금은 맛을 내지 못합니다.
소금은 생선이나 고기가 상하는 걸 막아주는 방부제이자
음식에 맛을 가미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말씀은 선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소금과 비슷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금처럼 살아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소금은 보통 음식물에 녹아들어 짠맛을 냅니다.
그러면서 음식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게 소금입니다.
소금은 ‘사라져 버리면서까지 희생’을 하며 사는 물질입니다.
세상은 소금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양보하고 희생하며 무언가를
사랑으로 섬기는 삶, 즉 소금 같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주님의 영광도 나타납니다.
소금이 녹아야 맛을 내는 것처럼 크리스천이라면 희생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른 식구들에게, 이웃과 친구들에게 져 주는 삶을 살아야
사회의 밀알이 될 수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이 녹아 없어져 다른 사람들이 삶의 맛을 느낀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소명인 것입니다.
‘희생’에 대하여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속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생명을 내 준 대가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산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우리는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사랑 안에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너무나 인색합니다.
그래서 찬송가 311장에서는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주었는데,
너는 나에게 무엇을 주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저는 이 찬양을 너무 좋아 합니다.
1.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 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나를 짓눌러 나를 곤고케 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2.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남을 위하여 당신들의 온 몸을 온전히 버리셨던 것처럼
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 값없이 그저 주는 사랑
그러나 나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 더욱 좋아하니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필리핀 선교보고
코피노 사역 - 선교사님의 희생
자전거- 울고 또 울고
‘나눔의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을 위해 봉사활동이나 선한 일을 직접 하면 인체 면역기능이 크게 향상되는 현상입니다.
진정한 성공은 성취한 것을 이웃과 나누는 데 있습니다.
움켜쥐고만 있는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면 선한 영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은 참으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짠맛을 내면서 자신의 맛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길바닥에 버려져 오가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며, 먼지처럼 덧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너희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기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여 살라.” 아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는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입으로의 사랑이 아니라, 삶으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웃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창녀와 세리, 원수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선한 영향력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