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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10월 17일 토요일
[(홍)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이냐시오 성인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 튀르키예의 안타키아)에서 태어나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요한 사도의 제자였다고도 하는 그는 초대 교회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던 안티오키아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107년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로마로 압송되는 도중에 들르는 곳마다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리스도와 교회의 구조 그리고 그리스도인 생활에 대하여 슬기롭고 심오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 편지들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초대 교회의 신앙생활에 관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만물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그분의 몸인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1,15-23
형제 여러분,
15 나는 주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전해 듣고,
16 기도 중에 여러분을 기억하며
여러분 때문에 끊임없이 감사를 드립니다.
17 그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18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19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20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21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22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8-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9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10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11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12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필리 3,17─4,1)와 복음(요한 12,24-26)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식사할 때마다 식사 전후 기도를 잘 바치나요? 군 식당에서 식사할 일이 이따금 있는데, 그럴 때면 저는 주변에 신자가 있는지 슬쩍 살핍니다. 그러다가 아는 신자를 보게 되면(중요한 것은 제가 보고 있음을 들키지 않는 것입니다.) 식사 전후 기도를 하는지 눈여겨봅니다. 대부분은 잘 바치지만, 가끔 묵념으로 대체하는 이도 있고 마치 신자가 아닌 듯 자연스럽게 수저를 뜨는 이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미사 때 복음 봉독을 듣기에 앞서 “주님, 영광받으소서.” 하면서 엄지로 작은 십자 표시를 하듯, 허벅지에 작게 십자 표시를 하고 밥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습니다. 천주교 신자로 살아가면서 때에 맞게 기도를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건만 십자 성호를 긋고 당당하게 기도하는 것은 왜 쑥스럽게 느껴질까요? 어떤 까닭이 숨어 있는 것일까요?
그럴 때 오늘 복음 말씀을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나는 그분을 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언은 곧 삶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증언은 곧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십자 성호를 긋는 데에 망설임이 생기는 것은 이 부분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천주교 신자로 살아가지만 천주교 신자답지 못한 부분도 있음을 아는 겸손이 망설임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럴 때는 순서를 조금 바꾸어 보면 좋겠습니다. 신자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를 못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먼저 신자임을 드러내고 그에 맞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자 기도하는 것이라고요. 이러한 작아 보이지만 당당한 결심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질 때 우리의 신앙은 더 단단해질 것입니다.(김영송 알베르토 신부)
성령께서 다 해주실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목자로 살아가면서, 아무런 원고도 없이, 너무 멋지게 술술 강의나 강론을 하시는 신부님들을 만납니다. 참으로 부럽습니다. 한마디 하려면 꼭 적어서 하는 습관이 생겨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끔 예기치 않게 한 말씀하게 될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면 깜빡 하고 원고를 집에 두고 강단에 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방법이 없습니다.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성령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바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 말미에 나오는 구절을 기억합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 11-12)
그리고 강의를 시작하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실수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신기하게도 말이 술술 잘 풀립니다. 내 안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이라 확신합니다.
살다보면 걱정에 발목이 잡혀 인생이 괴로운 분들 많이 계십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네 인생, 그 안에서 쓸데없는 걱정으로 허비하는 시간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연구조사에 따르면 우리의 걱정 가운데 96%는 쓸 데 없는 것이랍니다. 내게 해당되지도 않을 걱정, 괜한 걱정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찬찬히 짚어보니 우리는 참으로 많은 걱정들의 틈바구니 속에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돈 걱정, 건강 걱정, 자식 걱정, 미래 걱정, 자동차 사고 걱정, 시험 걱정, 취직 걱정...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걱정하지 마라. 성령께서 계시지 않느냐?”
우리가 비록 나약하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강건합니다. 우리가 비록 무지하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지혜롭습니다. 우리가 비록 죄인이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성스럽습니다. 우리가 비록 죽음을 향해 걸어가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우리를 파견하시지만, 절대로 홀로 보내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든든한 동반자, 강력한 협조자, 하느님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의식, 내 뒤에 그분께서 받쳐주고 계신다는 생각, 그분께서 지속적으로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이야말로 복음 선포자가 지녀야 할 최우선적인 마음 자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이독경(牛耳讀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의 귀에 경전을 읽어 준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얼마 전 인공지능과 사람의 관계, 인공지능 시대의 보편적 기본소득, 그리고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흥미롭고 의미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별로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속으로 ‘소귀에 경 읽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생각해 보니 오히려 제가 그분들에게 ‘우이독경’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내가 아파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까지 온 사람에게 인공지능의 미래가 얼마나 중요했겠습니까? 집의 기초가 흔들려 벽에 금이 간 사람에게 미래 사회의 기본소득이 얼마나 귀에 들어왔겠습니까? 아파트 누수 때문에 큰 공사비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제 이야기가 얼마나 마음에 와닿았겠습니까? 저는 말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아픔은 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세상의 권력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용서를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누가 더 죄인인지를 따졌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희생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지를 다투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들을 먹이셨지만, 사람들은 빵만 보았고, 그 표징 속에 담긴 하느님의 사랑은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제자들은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귀에 들어갔지만, 마음으로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를 돌보아라. 고아와 과부를 외면하지 마라. 정의를 실천하여라. 우상을 섬기지 마라.” 그러나 백성은 듣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가 나라가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해도 듣지 않았고, 아모스가 가난한 사람을 짓밟지 말라고 외쳐도 듣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계속 선포되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닫혀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완고함은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도 자신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듣는다’라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 때문에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우이독경’은 많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말하지만, 자녀의 힘든 마음은 듣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부는 서로 자신의 옳음을 말하지만, 상대방의 외로움은 듣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업무와 성과를 이야기하면서 동료가 겪는 어려움은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좋은 신앙 이야기와 성경 말씀을 많이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눈물은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기도하면 됩니다.”라고 너무 쉽게 말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에게 “믿음을 가지십시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아픔을 먼저 듣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말도 ‘우이독경’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 눈먼 이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으셨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실망과 슬픔을 먼저 들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박해를 받아 로마로 끌려가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히 귀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삶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그는 자신의 생명으로 응답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로마로 끌려가는 길에 여러 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신자들에게 일치와 사랑, 믿음을 당부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고통보다 교회의 신앙을 걱정했습니다. 그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장 깊이 알아들은 사람이었습니다. 들었기 때문에 변했고, 들었기 때문에 사랑했고, 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많이 듣습니다. 미사에서 듣고, 성경에서 듣고, 기도 안에서 듣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정말 알아듣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의 말도 들어야 합니다. 말의 내용만 듣지 말고 그 말속에 담긴 걱정과 눈물과 외로움까지 들어야 합니다. 어쩌면 신앙은 말을 잘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잘 듣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성 이냐시오처럼 주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듣고, 예수님처럼 이웃의 아픔을 가슴으로 들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우이독경’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살리는 복음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 알려 주실 것이다.”
<나 당신을 알기 때문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 12,8)
모두
당신과
갈라설지라도
나
당신과
함께하는 까닭은
나
당신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두
당신을
거스를지라도
나
당신을
믿는 까닭은
나
당신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두
당신을
내칠지라도
나
당신을
바라는 까닭은
나
당신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두
당신을
미워할지라도
나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은
나
당신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두
당신을
억누를지라도
나
당신을
섬기는 까닭은
나
당신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두
당신을
없앨지라도
나
당신을
살리는 까닭은
나
당신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두
당신을
떠날지라도
나
당신을
따르는 까닭은
나
당신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이냐시오(Ignatius)
신분 : 주교, 순교자, 교부
활동지역 : 안티오키아(Antiochia)
활동연도 : 35?-107년
같은이름 : 이그나티오,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우스
초창기의 교부이자 순교자로 일명 ‘테오포로스’(Theophoros, bearer of God)라고도 불리는 성 이냐시오의 생애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아마도 그는 시리아 출신인 듯하며, 사도 성 요한(Joannes, 12월 27일)의 제자였음이 분명하고 개종자이다. 그는 사도 베드로(Petrus)에 의하여 안티오키아 교회의 제2대 혹은 제3대 주교로 임명되어 축성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성 이냐시오는 40년 동안 교회를 다스리다가 트라야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체포되어 로마(Roma)로 이송되었다. 그를 호송하던 배는 소아시아 연안을 거쳐 그리스를 통과하여 마침내 로마에 당도하였다. 그의 배가 정박하는 곳마다 그리스도인들의 환영을 받았으나 호송 책임자는 그를 아주 잔인하게 대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 당시 어느 공식 경기의 마지막 날인 12월 20일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어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그는 로마로 끌려오는 동안에 여러 통의 편지를 썼고, 스미르나(Smyrna, 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 Izmir)에 잠시 머무는 동안에서 성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2월 23일)에게도 서한을 보내어 그리스도교 신앙을 보전하라고 권고하였다. 또 교회, 결혼, 삼위일체, 강생, 구속 그리고 성체성사에 관한 그의 교육적인 편지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저서 가운데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역사적 문헌들이다.
성 리카르도 그윈(Richard Gwyn)
활동년도 : 1537-1584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영국(UK)
같은 이름 :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웨일스(Wales)의 란니들로에스 태생인 성 리카르두스 그윈(Richardus Gwyn, 또는 리카르도 그윈)는 프로테스탄트로 성장하였고, 옥스퍼드에서 잠시 공부한 뒤에 케임브리지의 성 요한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1562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오버톤에 학교를 세우고 결혼도 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가 우연히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부터 오버톤을 떠났으나 1579년에 체포되었다. 다행히 그가 탈옥하였으나 재차 체포되어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에서 순교한 첫 번째 성인이다. 그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England)와 웨일스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복자 발타사르 (Balthasar)
활동년도 : +1492년
신분 : 수사
지역 : 치아바리(Chiavari)
같은 이름 : 발타살
발타사르는 1420년경에 이탈리아 제노바(Genova)의 치아바리에서 태어났고,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서원하고 서품을 받았다. 그는 펠트르(Feltre)의 성 베르나르디누스(Bernardinus)와 친구이자 동료 설교자였다. 베르나르디누스와의 선교여행은 거의 항상 성공하였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오래 지속하지는 못하였다.
그가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에는 주로 고해신부로 일하였고, 열심히 미사를 봉헌하여 큰 감명을 주었다. 또한 그는 자주 숲 속으로 들어가서 오랫동안 명상에 잠기거나 독서에 열중하였으며, 종종 성모의 환시를 보았고, 폭설이 쏟아질 때 기적적으로 피난처를 구하기도 하였다고 전해온다. 발타사르는 1492년 10월 7일에 운명하였고, 1930년에 그에 대한 공경이 승인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