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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9. 묵상글 ( 연중 19주간 화요일. - 양 한 마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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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9. 연중 19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양 한 마리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오늘 비유에서 양 한 마리가 주인공입니다.
물론 길 잃은 양을 찾아 헤매시는 주님께서 주인공이지만
주인공인 주님께서 찾아 헤매시는 양이니 양이 주인공입니다.
그것도 아흔아홉 마리를 남겨 두고까지 찾는 양이니 진정 주인공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주인공 삼으시니
우리도 우리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중자애自重自愛하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진정 자중자애해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중요하게 여김으로써
하찮은 것에는 나를 내주지 말고 중요한 일에만 자신을 허용해야 합니다.
아무나 따라감으로써 길 잃은 양 되지 말고 오직 주님만 따라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다 사랑하시지만, 도매금으로 사랑치 않으시고
하나하나를 따로 사랑하시고 소매금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이웃을 참으로 사랑치 않습니다.
이 말은 한 사람을 참으로 사랑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아무도 제대로 사랑치 않고,
저 사람도 사랑한다면서 이 사람을 최선으로 사랑치 않고
이 사람을 사랑한다면서 저 사람은 사랑치 않고는 합니다.
이는 마치 자기 아내를 사랑하면서
딴 여자에게도 눈길을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바람을 피우는 것이고, 정결하지 않은 것이며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면서
한 사람도 제대로 사랑치 않는 핑계와 구실을 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흔아홉을 남겨 두고 한 마리를 찾으신다는 것은
아흔아홉을 버려둔다거나 내버리겠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 사랑하시겠다는 말씀이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실하시고 정결한 사랑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를 사랑하되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사랑할 것이며,
모두를 사랑하되 사랑할 때는 그 사람 하나만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고,
한 사람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되 모두를 염두에 두고 사랑할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랑이 아닌 다른 모든 사랑은
포기한 사랑이 아니라 남겨 둔 사랑입니다.
남겨 둔 사랑은 남겨뒀다가 꼭 사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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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9. 연중 19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오늘 <복음>인 마태오복음 13장은 마태오복음사가에 의한 네 번째 설교 집성문인 교회설교 혹은 공동체설교라 불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리래야 지역에서 유다지역으로 가시기 직전에 교회공동체가 나아가야할 방향과 목표를 다루십니다. 곧 교회공동체 안에서 차지하는 작은 이들의 가치(1-14절)와 공동체 안에서의 형제애(15-35절)를 다룹니다.
오늘 <복음>은 그 전반부로서,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에 세 가지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는 우선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먼저 밝히십니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야 그곳에서 큰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어린이’란 열두 살이 되기 이전의 아이를 가리는데, 고대인들은 ‘어린이’는 오늘날 우리가 여기고 있는 것과는 달리, 천진무구하다고 여기지 않고, 손이 많이 가고 책임감도 없고, 늘 어른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하찮은 존재요, 율법을 모르는 죄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된’ 사람이란, 어린이가 어른에게 의지하고 지시에 따르듯이, 어린이처럼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지시에 잘 따르는 겸손한 태도를 취할 뿐 아니라, 회개한 죄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곧 어른처럼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력함을 받아들이고, 주인께 신뢰로 의탁하는 죄인을 말합니다. 이를 산상설교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마태 5,3)고 선언하셨습니다.
<둘째>는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인지’를 밝히십니다. 곧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에서는 명예나 권력을 가진 이가 아니라, 결국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이가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주님을 예배하는 이가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가장 작은 계명이라도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마태 5,19)이라고 제시하셨습니다.
<셋째>는 ‘누가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곧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 그것은 무력하고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일이요 죄인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은 회개한 죄인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미천하고 무력한 이들을 당신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시며,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되찾은 양의 비유”(12-14절)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마태 18,1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해줍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하찮고 비천한 이일수록 더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주님!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게 하소서.
아기가 어머니께 소중한 것처럼,
제가 당신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아기가 어머니께 속해 있듯,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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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9. 연중 19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장 큰 사람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18,4).하시고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18,1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어린이를 중심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결국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과 순수한 마음을 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미아발생으로 부모의 애간장을 태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보면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아이가 길을 잃고 헤맵니다. 그러니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많이 소유한 것이 위대하게 보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 없는 사람, 자신을 낮추어 비우는 사람이 위대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애당초부터 가진 것이 없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요.
“어리석은 사람은 자꾸만 더해서 많이 갖고, 현명한 사람은 자꾸만 덜어서 많이 갖습니다”(이규경). 노자도 “성인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밝고, 자기를 옳다고 하지 않으므로 빛나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이 있고 자기를 뽐내지 않으므로 윗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루카18,17).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할 때 우리는 하늘 앞에서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지니고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사랑이 담긴 일을 보시고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한 일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1고린14,20).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천국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큰 사람은 키가 커서 큰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커서 큰 사람입니다. 하루를 허물로 누벼놓았어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주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비를 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시는 주님 품에 안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큰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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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9. 연중 19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북미주 엠이 모임엘 다녀왔습니다. 첫날은 ‘사제의 날’이었습니다. 사제들만의 모임인 줄 알았는데 많은 교우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우들이 없는 사제의 날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제의 날은 미사로 시작되었습니다. 주례 사제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성가도 영어와 스페인어로 불렀습니다. 모임에 참석한 사제와 교우들 중에는 스페인어가 편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영어도, 스페인어도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영어가 조금은 귀에 익었습니다. 발표자들은 이민자들의 고충과 가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 고충과 가난을 극복하고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의 대화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새는 두 개의 날개로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듯이 교회는 성직자와 교우들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하늘나라를 향해 여정을 떠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도 많은 고충과 가난이 있었습니다.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자렛 성가정이 고충과 가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사라지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용기와 인내를 주시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정확하게 입력하지 않으면 아무리 운전을 잘해도, 교통법규를 잘 지켜도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가장 큰 것, 가장 좋은 것, 가장 비싼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공, 명예, 권력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하늘나라에서도 당연히 세상의 기준이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이렇게 부탁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저는 주님의 오른 편에, 동생은 주님의 왼편에 있게 해 주십시오.” 역시 세상의 기준으로 하느님나라를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기준을 새롭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우리에 있는 건강한 양 99마리도 중요하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어린 양,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한다면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서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가 생각납니다.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가을 추수를 마치고 형제는 서로 생각합니다. 형님은 이제 막 신혼살림을 차린 동생에게 필요한 것이 많으리라 생각하고 자신의 논에서 볏단을 동생의 논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동생도 형님은 아이들도 많아서 필요한 것이 많으리라 생각하고 형님의 논으로 볏단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렇게 하던 어느 달 밝은 밤에 형과 동생은 함께 만나게 됩니다. 서로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확인한 형제는 서로 깊은 포옹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깁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배려하고, 나의 것을 챙기기 전에 남의 것을 신경 써 주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알고, 신학적인 지식을 쌓아야만 신앙심이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부끄러움을 알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성공했을 때 좀 더 겸손해지며, 옳고 그른 것을 가릴 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양심에 넣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잘 가꾸는 사람은 신앙심이 깊어질 것입니다. 물질, 경제, 자본, 성공, 과학이라는 잣대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시와 문학, 음악과 미술, 철학과 신학, 신화와 문화가 있습니다. 감성 없는 이성은 너무나 삭막할 것입니다. 영혼 없는 육체는 사랑이 없는 집과 같습니다.
요즘, 원망과 미움이 생기는지요? 아니면 분노와 질투가 생기는지요? 그렇다면 내가 세상을 내 욕심과 세상의 잣대로 바라보기 때문은 아닐까요? 지금 내 마음에 감사와 찬미가 가득하다면 우리는 이미 신앙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내 앞에 놓인 십자가가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여겨진다면 나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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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9. 연중 19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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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9. 연중 19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아가기-
답은 회개뿐임을, 강력하고 항구한 “더불어(together)” 회개의 여정뿐임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회개와 관련되지 않은 일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결국은 사람이 문제입니다. 무지의 사람에 대한 답은 부단한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는 길뿐입니다. 이렇게 지난 저녁부터 지금까지 단 시간에 물폭탄이 떨어지기는 난생 처음입니다. 사납게 흐르는 불암산 계곡물 소리를 들어보기도 처음입니다. 뉴스를 보니 80년만의 대폭우라 하는데 기후위기 현상을 통해 중병이 든 지구의 실상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용서하고, 사람은 때때로 용서하지만, 자연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스페인 격언이 생각납니다. 제아무리 제4차 첨단문명을 자랑한다해도 지구를 배려하지 않은 무지하고 무분별한 발전이라면 지구의 수명을 단축시킬뿐 사상누각, 모래위의 집같은 참 허망한 헛수고의 발전일 것입니다.
사람의 인식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이 또한 참된 회개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돌아가신 고모님 가족을 문상차 강남의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으로 확신하고 도착하여 확인하니 그런분이 없다는 것이며, 인터넷을 확인해준 결과 서울은평성모병원이었습니다. 카톡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고 제가 “은평”을 못봤던 것입니다. 다시 즉시 3호선을 타고 은평성모병원에 도착하니 1시간이상 지체되어 있었지만 이만해도 다행이었습니다. 분명한 약속 시간이었다 하면 참 낭패였을 것입니다.
이어 조문 화환중 유난히 “침례교회” 명칭이 많기에 아차 싶어 목사인 사촌 형님께 물으니 고모님과 가족은 성결교회가 아니라 침례교회라 했습니다. 오랫동안 교류해왔으면서도 제 부주의로 성결교회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잘 보고, 잘 듣는 것이 참된 회개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참 깊이 깨달은 날입니다.
젊음은, 어린이같은 마음의 순수는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마음에, 정신에, 영혼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고모님 영정사진도 고왔고 그 앞에 70대 후반부터 90대 초반까지 필사했다는 신구약 15권의 대학노트의 글씨도 어린이 글씨처럼 정성과 더불어 한결같고 반듯했습니다. 평생 꼿꼿이 반듯하게 순수와 열정을 사셨던 영원한 하느님의 어린이같은 고모님이셨습니다. 영정사진 밑에는 성구대신 ‘안수집사 이순임’고모님에 대한 자녀들의 마음이 담긴 말마디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당신의 고귀한 삶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새삼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에 대한 답은 강력하고 끊임없는, 한결같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 되찾은 양의 비유인데 모두 회개와 관련됩니다.
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부단히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겸손하고 순수하고 지혜로운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회개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가 영성생활의 성패에 결정적 요소임을 깨닫습니다.
2.“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하나도 생략할 수 없는 참 엄중한 말씀입니다. 자포자기의 절망과 더불어 이웃을 업신여겨 무시하고 차별하는 일이 대죄입니다. 절망의 끝은 자살이요, 무시의 끝은 타살입니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를 사랑했던 부모가 있고, 또 한 가정의 자녀들을 책임진 부모라면 도저히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하나 그들을 지키는 수호천사들은 동시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합니다. 이런 수호천사 신심도 부단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3.“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는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기뻐한다.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2천년전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작은 이들 하나하나가 하느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또 존재감 없어 보이는 잃은 양 하나를 찾았을 때의 하느님의 기쁨을 생각한다면 정말 하나하나 하느님을 대하듯 귀히 대할 것입니다. 이런 사실 또한 우리의 진정한 회개를 촉구합니다.
답은 끊임없는, 한결같은 회개의 실행입니다. 이런 항구한 회개의 여정을 통해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의 치유에 회개와 더불어 말씀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제1독서의 ‘말씀의 사람’ 에제키엘 예언자입니다. 거듭 4회 반복되는 “너 사람의 아들아!”라는 호칭이 참 정답게 들립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같습니다.
1.“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그리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 먹어라.”
2.“사람의 아들아, 네가 보는 것을 받아 먹어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여라.”
3.“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그리하여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4.“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에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저에겐 매일 이른 새벽 말씀을 묵상 정리하여 강론을 쓰는 시간이 말씀의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우는 시간이요, 그리하여 배고픔도 잊게 됩니다. 세상맛이나 돈맛이 아닌 말씀맛, 하느님맛으로 살아가는 이탈의 초연한 삶이면 좋겠습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의 빛입니다. 오늘 시편 119장중 다음 화답송 말씀이 그대로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온갖 재산 다 얻은 듯, 당신 법의 길 걸으며 기뻐하나이다.”(14)
“당신 입에서 나온 가르침, 수천 냥 금은보다 제게는 값지옵니다.”(72)
“당신 말씀 제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103)
“당신 계명을 열망하기에, 저는 입을 벌리고 헐떡이나이다.”(131).
말씀의 사랑이, 열망이, 기쁨이, 달콤함이 영혼 건강의 비결입니다. 영혼의 밥을 먹듯이 말씀을 먹고 책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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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9. 연중 19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제게 “할아버지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손자가 있습니다. 조카의 큰아들입니다. 이 손주 생일이라서 장난감을 사서, 선물이라며 주니 너무나 좋아합니다. 밥도 먹지 않고 장난감 가지고 놀 생각만 합니다. 솔직히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면 별로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난감끼리 부딪치는 데도 너무나도 재미있어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장난감끼리 부딪치는 것뿐인데 뭐가 재미있을까요? 이 장난감 자체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집중하는 것에는 재미와 흥미를 느끼게 됩니다. 집중하지 못할 때, 지루하게 생각하면서 하기 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많은 이가 기도를 지루해하고 또 시간 낭비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중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기도 안에서 큰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집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쓸데없는 집중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세상일에 몰입하면서 행복하지 않은 자신에 관한 불평불만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하늘 나라에서의 서열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어린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고는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어린이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취급하여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긴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어른들의 말참견을 할 수 없었고, “조그만 게 까불어”라는 말을 듣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이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가 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린이가 보여주는 순수한 집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 순수한 집중이 성 이냐시오의 해석대로 순진, 순박, 겸손의 모형이 됩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집중을 갖출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뜻이 담긴 사랑의 실천에 집중해서 그 안에서 크게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 너무나도 좋아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우리를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절대로 손해 보는 우리의 행동이 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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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을 진정으로 잊는다는 건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지난 일과 화해하는 것이다(한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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