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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영화 〈바이킹〉
1958년도에 제작된 영화 〈바이킹〉은 미국의 에디슨 마셜의 원작 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액션 어드벤처 작품이다. 〈해저 2만 리〉, 〈바라바〉, 〈도라! 도라! 도라!〉 등의 대작을 만들었던 리처드 플레이셔가 메가폰을 잡았다. 그는 노르웨이의 하르당에르 피오르드에 있는 작은 마을 크빈헤라드의 현지 로케를 통해 바이킹 마을을 완벽히 재현했다.
거대한 성채, 실감나는 전투 장면, 다양한 의상과 역사적 생활상 등 당시의 모습을 리얼하게 살리면서 스펙터클한 현장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고전 史劇 중에서도 〈바이킹〉은 단연 압권으로 손꼽힌다. 바이킹 두목에게 겁탈당한 노섬브리아 왕국의 왕비가 몰래 낳은 아들이 주인공 에릭(토니 커티스 분)이다. 결국 자신의 친부 래그나(어네스트 보그나인 분)와 또 다른 이복형 아이나(커크 더글러스 분)까지 물리치고 사랑을 쟁취한다는 이야기다.
끊임없이 침범당하는 고대 영국이라는 나라와 바이킹족과의 관계와 음모, 흥미를 유발하는 출생의 비밀, 남성미 물씬 풍기는 모험 등을 흥미롭게 버무려 놓은 오락 사극이라 할 수 있다. 커크 더글러스가 이복동생인 토니 커티스에게 칼에 찔려 숨지기 전(이복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멈칫한 순간 찔리는 것이지만) 칼을 쥐고 죽게 해달라고 말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당시 모든 바이킹들의 가장 큰 소원은 칼을 손에 쥔 채 죽어서 발할라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바이킹들은 발할라에는 오딘 신이 모든 영웅들을 기다린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그의 시신을 실은 바이킹 배를 바다로 띄워 보내며 불화살들을 쏘아 배를 태우면서 장엄한 바이킹 장례식을 올리는 마지막 장면도 인상적이다. 당시 바이킹들은 죽음을 일종의 항해로 생각했기 때문에 시체를 배에 태우고 불태워 띄워 보내는 장례식이 유행했다. 커크 더글러스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에서 가끔씩 어려운 동작과 기술을 선보이곤 했다. 이 영화에서도 예외 없이 이런 장면들이 나온다. 특히 수평으로 펴진 바이킹 배의 노 위를 밟으면서 성큼성큼 뛰어 건너는 장면은 올드팬들에게는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다.
로케이션 장소가 워낙 추워서 커크 더글러스, 토니 커티스, 어네스트 보그나인 등 배우들은 물론 스태프들도 촬영 내내 감기를 달고 살았다. 커크 더글러스는 애꾸눈을 재현하기 위해 특수 처리된 콘택트렌즈를 착용했는데 워낙 고통스러워 몇 분 이상 연속 촬영이 불가능했다는 후문이 있다. 당시 기술로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 형제간의 마지막 혈투
II. 할리우드의 상남자, 커크 더글라스
커크 더글라스는 1916년 벨라루스(당시 제정러시아)에서 이민 온 유대계통의 부모로부터 뉴욕 주의 암스테르담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사를 돌보기 위해 신문 배달·노점상 등을 하며 지냈다. 이후 세인트로렌스 대학교를 다니면서도 접시 닦기·정원사·경비원 등의 알바를 했다. 남보다 운동 신경이 뛰어난 더글라스는 수준급의 레슬링 선수였다. 훗날 더글라스는 스턴트맨들도 꺼려하는 어려운 장면들을 직접 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프로 레슬러였던 더글라스는 배우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끼고 아카데미 드라마 아트 스쿨에서 연기를 배운 뒤 41년부터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해군에 입대해 복무 중 1944년에 부상으로 제대했다.
1945년 다시금 브로드웨이로 돌아와 여러 배역을 맡다가 할리우드로 진출한다. 1949년 영화 <챔피온>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면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이 영화는 <록키>·<성난 황소> 등과 함께 최고의 복싱영화로 회자된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더글라스는 할리우드에서 주목할 만한 배우로 이목을 모았다. 이후 <탐정이야기>·<율리시스>·<해저 2만리>·<영광의 길>·<바이킹>·<OK목장의 결투>·<열정의 랩소디> 등의 화제작에 출연하면서 할리우드의 대표배우로 자리를 잡았다. 이후 영화 제작에도 참여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더글라스 최고의 대표작인 <스팔타커스>에서 제작 및 주연을 맡으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그러나 감독인 스탠리 큐브릭은 영화 촬영 내내 영화제작에 대한 권한을 행사한 실질 오너인 더글러스와 심각한 갈등을 빚기도 했다. 영화가 끝나자 “다시는 이런 바지 감독은 안 하겠다.”라고 본인의 감독직에 대해 끔찍했음을 토로했다.
더글러스는 로맨스가 짙게 깔린 영웅의 일대기를 만들고 싶어 했고, 다소 냉소적인 큐브릭은 멜로 드라마적 감동을 자아내는 인위적인 설정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철저히 *작가주의적이고 나름대로 카리스마 있는 명장 큐브릭과 할리우드에서 거물급인 기세등등한 더글러스와의 만남은 영화 촬영 내내 이렇게 불화를 일으켰다. 다행히 영화는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 작가주의
영화에서 중심적인 인물은 감독이며 따라서 감독은 작가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의이다. 이는 영화제작이란 한편의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며 그 창조 행위의 주체는 감독에게 있다는 것이다.
한편 영화의 각색을 맡았던 달톤 트럼보는 매카시 선풍으로 영화계에서 쫓겨나 있었던 인물이었다. 더글러스는 당시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트럼보의 이름을 엔딩 크레디트에 올려놓으며 그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당시 트럼보는 가명으로 여러 영화의 각본을 몰래 쓰고 있던 처지였다.
그러나 더글러스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를 실명으로 공개했다. 다시 한 번 더글라스는 할리우드에서 용기와 의리로 뭉쳐진 진짜 상남자라는 말이 오고갔다. 그는 2011년 『뉴욕타임스』에 이 일과 관련하여 “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선택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 이 일화는 2015년도의 영화 <트럼보>에 소개되기도 했다. 아래 사진, <OK목장의 결투>에서 버트랭카스터와 함께
1991년에는 헬기 사고를 당하면서 척추수술을 받았고 1996년에는 뇌졸중을 앓으면서 언어 장애가 오기도 했다. 이후에도 종종 파티에 참석해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 2020년 10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아들이자 배우인 마이클 더글라스는 아버지에 대해 “영화의 황금기를 경험하고 인생의 황금기까지 보낸 배우이자 자신이 믿었던 대의에 헌신한 박애주의자”라고 애도를 표했다. 이어 “아버지는 좋은 인생을 살았고, 영화계에 많은 유산을 남겼으며, 평화와 대중을 위해 노력한 자선가로서도 역사를 남겼다”고 했다.
그는 세 번씩이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1987년도 5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들 마이클이 영화 <월스트리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함으로써 아쉬움을 달랬다. 더글라스는 1991년에는 미국영화연구소(AFI), 1996년에는 아카데미, 1999년에는 미국영화배우조합(SAG)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생전에 더글라스 재단을 설립해서 세계 분쟁 지역에 학교와 공원을 세우고 모교인 세인트로렌스 대학 등 여러 곳에 8천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사진> 생전에 아들 마이클 더글라스와 함께
III. 바이킹족의 등장과 활약
사람들은 바이킹들이 활약하던 시대에 스칸디나비아인들을 통틀어 바이킹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넓은 의미의 정확한 학술적 용어는 노르드인이다. 바이킹이란 뜻은 고대 노르드어로 灣을 뜻하는‘Vik’과 ‘~으로부터 온 사람’을 뜻하는 ‘ing’의 합성어로서 즉 “만에서 온 사람”이란 뜻이다. ‘바닷사람’을 의미한다. 8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 전역에 따뜻한 기후가 몰려왔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런 온난한 기후에 힘입어 인구가 유례없이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한정된 자원으로는 이 늘어나는 인구를 도저히 먹여 살릴 수가 없었다. 이에 새로운 식량 공급원을 찾거나 아예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조직적으로 전 유럽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난폭한 광전사 즉 바이킹이었다.
이들은 8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200여 년간 유럽 전역을 들쑤시고 다녔다. 당시 유럽 어느 나라도 바이킹 전사의 용맹을 당할 수 없었다. 이 200여 년간이야말로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던 바이킹의 전성시대였다. 당시 바이킹은 종족별로 데인인(덴마크인), 스웨덴인, 노르웨이인들로 나뉘어 있었고 자기네들 입맛대로 골라 여기저기 쳐들어갔다.
바이킹의 배 - 롱쉽
그들은 ‘롱쉽’이라 불린 22미터의 길이에 5미터 정도의 폭을 가진 빠르고 바닥이 평평한 배를 타고 40~50명 정도의 전사를 태운 후 전단을 형성했다. 그리고 유럽 각지의 강을 타고 내륙으로 깊숙이 쳐들어가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온갖 농탕질을 하고 다녔다. 다행히 이베리아반도(스페인)는 내륙에 흐르는 큰 강이 없어 바이킹의 약탈을 면했다.
바이킹은 단순한 침략자 이상의 존재였다. 유럽 각국의 역사에서 바이킹은 크고 작은 흔적을 남겼다. 영국과 유럽 내륙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각 지역 토착민과 융화됐고 특히 러시아와 잉글랜드, 프랑스 등의 국가가 세워지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바이킹족은 일반적으로 작은 무리를 지어 돛과 노를 쓴 작은 배를 타고 템스강, 센강, 르강, 드네프르강, 볼가강 등 하여튼 강만 있으면 어디든지 들어가 약탈을 일삼았다. 바이킹족의 침입에 대항해 서유럽인들은 城郭과 기병대에 의존해 싸웠으나 효과적인 대응책이 못되었다. 바이킹들은 해안가나 강변에 기지를 만들어 자신들의 조직을 구축해 나갔다.
바이킹 군대의 과감함과 용맹함에 대하여 당시 어떤 군대도 적수가 못되었다. 바이킹들의 또 하나의 놀라운 점은 기동성이었다. 그들의 배인 ‘롱쉽’은 속도가 엄청 빨랐고 얕은 흘수(배가 물에 잠겨 있는 부분)때문에 강의 상류까지 치고 올라가 어느 뭍에도 댈 수 있었다. 게다가 롱쉽은 메고 운반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웠다. 이런 롱쉽을 타기도 하고 메기도 하면서 바이킹들은 여러 마을을 휩쓴 다음에 적이 오기 전에 바로 내뺄 수 있는 혀를 내두를 정도의 기민함을 자랑했다. 지금도 노르웨이 오슬로에는 바이킹이 사용한 배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고크스타트가 남아 있다.
그것은 길이가 21미터이고 중량은 20톤이 넘는다. 떡갈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뱃전 위에서 용골까지는 1.8미터, 배 한가운데에는 약 12미터의 돛대가 있다. 바이킹들은 선박의 틈새로 바닷물이 새어드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타르’라는 방수재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그들은 연안뿐만 아니라 원거리 항해가 가능한 대규모 선단을 제작할 수 있었다. 항해 시에는 돛을, 공격 시에는 노를 사용했다. 노는 16쌍으로, 일부는 길이가 4.9미터이고 나머지는 그보다 길었으며, 각각의 노를 두 사람이 함께 저었다. 바이킹족은 나중에는 훨씬 더 큰 배를 만들어 200명까지 타고 하루에 240킬로미터를 항해하기도 했다.
바이킹의 전투
바이킹은 언제나 근해에서 해전을 치렀고 대개는 3단계 과정을 밟았다. 먼저 지휘관은 적정을 살피고 공격하기 좋은 위치를 골랐다. 그리고 그 장소로 은밀히 접근해 상대방 선박에 일제히 화살을 쏘아대면서 공격을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적 선박에 쇠갈퀴를 걸어 끌어당긴 다음 육박전으로 승부를 결판냈다. 상륙 후에는 하천을 따라 올라간 다음에 마을과 수도원 등을 약탈했다. 바이킹들은 활과 둥근 나무방패로 무장했다.
그들의 가장 위력적인 무기는 장검이었다. 그리고 도끼도 사용했다. 그들은 적 기병이 잘 싸울 수 없는 시냇가나 늪지대 또는 가파른 언덕에서 방패와 벽을 만들어 일단 수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육박전으로 전환했다. 그들은 체격이 크고 건장했다. 그들은 긴급히 출동된 적군을 향해서 마치 미치광이들처럼 난폭하게 무기를 휘두르며 성공 신화를 쌓아나갔다.
바이킹의 진출
바이킹은 세 갈래로 유럽 대륙에 진출했다. 8세기 말에서 11세기 초까지 약 200년간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은 주로 사납기 짝이 없는 덴마크계 바이킹이었다. 노르웨이계 바이킹은 탐험과 개척, 덴마크계 바이킹은 싸움질, 스웨덴계 바이킹은 교역을 주특기로 했다. 노르웨이계는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등 사람이 별로 살지 않은 땅을 주로 골라 침략했다.
이 밖에 영국 북부, 아일랜드도 노략질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작은 규모로 공격해 물자를 약탈하고 바로 빠져나오는 게릴라 수법을 사용했다. 덴마크계 바이킹들은 8세기 말에 잉글랜드로 쳐들어왔다. 바이킹들은 누구도 봐주는 경우가 없었다. 저항하는 수도사들이나 주민들을 참혹하게 난도질하고 다녔다.
이들이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는 시체들이 천지사방에 뒹굴고 있었다. 이후 분탕질에 재미를 붙이면서 점차 규모를 늘려 어떤 때는 300척의 대규모로 템스강까지 쑤시고 들어와 런던을 쑥대밭을 만들기도 했다. 이들 바이킹들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침략했다. 아래 사진, 바이킹족의 진출도
이들은 먼저 해변가를 공략하고 이어서 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 내륙 깊숙이 들어가 노략질을 했다. 강이 막히면 타고 온 배를 뭍으로 끌어 올려 통나무를 받침대로 삼아 어깨에 메고 으쌰으쌰하면서 이동했다. 그들이 이런 방법으로 프랑스의 론강이나 센강을 따라 올라와 분탕질을 계속하자 당시 프랑크 왕 샤를 3세는 바이킹의 두목인 롤로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프랑크 왕으로서는 도저히 이 사나운 바이킹들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으니 살살 달래야 했다. 그는 지도를 펴서 대서양에 면한 엄청나게 넓은 땅덩어리를 가리키며 이곳을 뚝 떼어 줄 테니 제발 자기네 땅에 얼씬거리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땅이 바로 센강 하구의 따뜻하고 비옥한 땅인 오늘날의 노르망디반도 일대였다. 이어서 샤를은 롤로를 노르망디공에 봉하자 이 땅은 노르망디공국이라는 실질적인 독립국이 되었다.
이후 많은 바이킹들이 몰려와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1066년에는 윌리엄공이 영국을 침략하여 노르만 왕가를 열었다. 한편, 스웨덴계의 바이킹은 영국과 프랑스를 설치고 다니던 그들의 사촌들과는 달리 방향을 틀어 발트해 건너에 펼쳐진 광대한 숲 지대에 눈을 돌렸다.
당시 이들은 슬라브인들로부터 ‘바랴그라’라고 불렸다. 이후 점차 약탈보다는 교역에 관심을 가졌다. 이들 바이킹은 발트해 연안의 핀족으로부터 루오치라고 불렸는데 점차 루스라고 와전되었다. 현재의 러시아 북부의 노브고로드 지역에 진출한 이 루스인의 수장 류리크가 그 지역의 슬라브인을 다스리면서 노브고로드 공국을 건설했다. 차츰 이곳 바이킹들이 슬라브화에 따라 이들은 ‘루시’란 이름으로 불렸다.
오늘날 러시아라는 명칭은 바로 이 루시에서 기원한다. 류리크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이고르는 수도를 드네프르강 중류의 키예프로 옮겨, 주변의 슬라브족을 복속시키고 키예프 공국을 건설한다. 이들 스웨덴계 바이킹족은 뛰어난 장사꾼 기질을 살려 러시아, 흑해, 비잔틴제국 등 동남쪽으로 점차 내려갔다. 이들은 볼가강이나 드네프르강을 타고 내려가 흑해에 이르고, 비잔틴제국뿐만 아니라 일부는 바그다드까지 진출해 아랍 사람들과 장사를 했다. 아래 사진, 영화 <바이킹>에서
노르웨이계의 바이킹은 일찍부터 스코틀랜드 북방의 여러 섬으로 이주하고 더 나아가 860년경에는 아이슬란드를 식민화했다. 9세기 말에는 여기서부터 그린란드로 건너가 식민지를 건설하고, 1000년경에는 더욱 남하해 북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당시 그린란드는 오늘날과는 달리 일부 지역에는 초원 지대가 있었다.
바이킹은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선 9세기경에 아메리카 대륙의 일부인 캐나다 뉴펀들랜드섬에 식민지를 세웠지만 오래 유지하진 못했다.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바이킹이 그린란드에서 뉴펀들랜드까지 다섯 번의 항해가 있었고, 이곳에서 짧은 기간 동안 머물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바이킹의 쇠퇴
12세기가 되면서 바이킹의 활동은 서서히 쇠퇴한다. 8세기 빙하가 녹으면서 온화해졌던 북구의 기후가 다시 추워지면서 바이킹 전사의 수가 줄어들었다. 또한 유럽 각국은 해안 경비를 강화하면서 바이킹의 침략에 철저하게 대비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것은 이 시기 바이킹들은 전통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로 많이 개종하면서, 같은 기독교 신자의 땅을 침략할 수는 없다는 도덕적인 명분까지 더해져 침략의 당위성이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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