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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8 #레위인
여호와께서 몸에 장애등의 흠결이 있는 레위인들에게는 성소봉사를 못하게 하신것은 내생각에 그들의 육신자체가 여호와 보시기에 불결해서라기 보다는 그들의 육신의 장애로 인해 성소봉사중 죄를 범해서 여호와께로부터 재앙을 받아 죽을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에 그들을 살리시고자 금하신것 같다.
#자녀
자기자녀를 세속적인 부귀영화에 내어주는 부모는 자기자녀를 몰렉에게 죽여바치는 것과 다를바없다.
#20190218 [#설교묵상 , 마 13:1-9]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막 4:1-9; 눅 8:4-8)
이 비유 말씀을 읽을 때 견지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선택과 유기라는 하나님의 예정의 관점과, 선택하신 자들의 구원의 서정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즉, 예정의 관점으로는 네 가지 땅을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백성들(좋은 밭)과 구원하지 않고 버리시기로 하신 자들(길가, 돌밭, 가시덤불밭)로 볼 수 있고, 신자의 구원의 서정 관점으로는 신자의 중생 전후의 신앙 상태(길가->돌밭/가시덤불밭->좋은 밭)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땅에 뿌려진 씨앗은 천국 백성이 아니라 천국 복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만약 씨앗을 신자로 해석하게 되면 옥토를 제외한 땅에서는 신자들이 멸망을 당한다는 잘못된 결론이 도출된다. 따라서 이 네 가지 땅의 비유에서는 씨앗을 천국 복음으로 한정해야 한다.
셋째는, 이 비유에서는 인간 또는 신자의 의지를 도출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복음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빌미로, 신자는 아무 것도 안해도 된다는 식의 죄악된 합리화를 적용해서는 안된다.
넷째는, 씨뿌리는 자가 왜 옥토 뿐만 아니라 길가, 돌밭, 가시밭 등의 쓸모없는 땅에도 낭비하듯이 씨를 뿌렸는가를 생각함으로써 교회의 의무와 신자의 의무를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통상적으로는 오늘날 신자들에게 직접, 소위 직통 계시로 자신의 복음을 선포하시거나 가르치시지 않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와 설교자를 통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복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가르치신다. 따라서 교회 또는 설교자는 옥토 뿐만 아니라 쓸모없는 땅에도 씨를 뿌린 농부의 태도를 본받아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또한 설교에 다른 잡다한 사설이 섞이지 않도록,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순수한 복음만을 전해야 한다. 모세오경 율법서 어딘가에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동일한 밭에 두 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씨앗을 뿌리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이를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접목해본다면, 교회가 복음과 다른 사설들을 섞어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두 가지 이상의 씨앗을 섞어 뿌리는 죄와 같다. 사람의 지혜로는 두 가지를 섞으면 두 배의 수확을 맺을 것 같지만, 하나님의 지혜로는 아무런 복음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어리석고 죄악된 설교인 것이다.
교회와 설교자가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비단 복음을 설교하고 전파하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교회와 설교자는 마땅히 가르치고 전파하는 그 천국 복음을 따라 행함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임을 보임으로써 교인들이나 비교인들이나 상관없이 복음을 증거해야만 한다. 만약에 교회나 설교자가 자기들이 전하는 복음대로 행하지 않고, 자기들을 불가침 영역이나 치외법권 쯤으로 생각해서 복음과 상관없이 행한다면, 설령 그 전하는 복음이 참되다 하더라도 그들의 악행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에게 거부를 당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율법보다 더 광범위하고 고차원적인 만큼, 그리스도의 교회와 설교자를 자처한다면 마땅히 세상의 윤리/도덕/상식 기준보다 더 광범위하고 고차원적이어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비상식적인 행보가 교회 내에서 횡행한다면, 그리고 이를 주님의 뜻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이는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다.
교회 설교자 이외의 신자들이라고 해서 씨뿌리는 자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신자들은 각자의 일상에서 네 가지 땅과 같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부지기수로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우리가 설교자들처럼 천국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신자들은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을 행함으로써, 자기들의 언행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고 맛과 향기를 내는 것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1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씨를 뿌리는 자는 궁극적으로는 복음의 원천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통상적으로 사람을 명하셔서 자신의 복음을 전하신다. 따라서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해서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과 레위인 등의 종교 지도자들, 신약의 사도 및 제자들과 오늘날 설교자 등의, 주님의 명을 따라 성경을 가르치고 전하는 모든 이들을 통칭한다.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예정의 관점에서 길 가와 같은 자들은 구원에서 배제된 자들로서, 천국 복음을 철저히 거부하고 혐오하며 무관심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악한 의지대로 복음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므로, 그들의 멸망은 전적으로 자기들의 책임인 것이다.
구원의 서정 관점에서 길 가와 같은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는 창세 전에 예정 되었으나 그들 각자의 시공간 안에서는 아직 때가 차지 아니하여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들과 방불하기 때문에, 중생의 때가 차기 전에는 그들의 마음은 복음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길 가와 같다.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 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예정의 관점에서 돌밭/가시덤불밭과 같은 자들은 길 가와 마찬가지로 창세로부터 구원에서 배제된 버림받은 자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한 때, 일시적으로, 심지어 삶의 대부분을 복음을 받아들인 것처럼 반응을 하더라도, 그 복음으로 인해 환난이나 박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닥치면 그 받았던 복음을 버리는 자들이다. 그들이 복음을 저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들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이런 자들은 복음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서도 그 복음을 가지고 도리어 그리스도를 대적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를 두고 성령을 모독하였다고 하신 것이다. 이런 자들은 또한 한 번 성령의 빛을 받아 그 선하심을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자기들의 세상적인 만족과 안위를 위해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복음을 쓰레기처럼 내어 버리고 짓밟는다. 사도들은 이런 자들이 성령을 훼방하였으며 절대로 다시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없다고 확증한다.
혹자들은 이렇게 잠시 복음을 받아들였다가 저버린 자들에게 연민을 품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너무 하신 것은 아니냐고까지 의문을 품기도 한다. 이런 경향은 거의 평생을 복음을 위해 살아온 것 같은 사람이, 삶의 거의 마지막 때에 그 복음을 저버린 경우를 보면 더욱 심해지곤 한다. 심지어 그렇게 복음을 저버린 자들을 보면 과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절대적이지 않고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한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절대 선이신 하나님의 섭리를 그저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교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성경에 박식하다는 아우구스티누스 선생 조차도, 그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는 너무나 아득해서 자기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다. 아울러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불변한 예정과 섭리를 의심하지 말고, 그런 저주받은 자가 되지 않도록 날마다 간구하는 것이 신자들의 의무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시적으로 받아들였다가 저버리는 것은 비단 개개인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교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 및 목회자들 조차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성령모독죄와 성령훼방죄를 저지를 수 있다. 개인에 대한 성령모독/훼방죄가 어느 정도의 시간에 걸쳐 서서히 발생하듯이, 교회나 설교자의 성령모독/훼방죄도 긴 시간 동안 서서히 어느 새 발생하게 된다. 이를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가? 어떤 특정한 때나 사건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시간을 두고 그 교회나 목회자의 행보의 추이를 조심스럽게 살펴야 가능하다. 어떤 교회나 목회자가 수 년 동안 복음으로 거룩해가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복음에 역행하는 추이를 보이고 지금까지 그러하다면, 그 교회나 목회자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성령모독/훼방죄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깊은 회개를 하여야 한다. 그러지 않고 지속적으로 복음에 역행한다면, 종국에는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를 자신의 소유로 인정하지 않으시고 멸망의 가증한 것에 내어주실 것이고 그 목회자를 ‘주여 주여..’ 하는 자로 아시고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으실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였다가 저버리는 자/교회/목회자들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 대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뻔한 존재들이며, 사도가 어디에선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에 대해 말씀한 바와 같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불쌍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아예 복음을 처음부터 거부했던 길 가와 같은 자들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노력하고 그 결과를 누리기라도 했으나, 복음을 중간에 저버린 자/교회/목회자들은 한 동안 세상의 것을 절제하고 신앙을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어도 그것이 자기들의 구원에 전혀 쓸모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고백하는 자/교회/목회자들은 자기들의 그 복음이 헛되지 않도록 날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소서..’라는 주님의 기도를 실천하고 복음대로 살아가는데 힘써야 한다.
구원의 서정 관점에서 봤을 때, 이 두 땅의 상태는 중생한 신자가 거룩해가는 성화의 과정을 겪는 것과 같다. 길 가와 같은 굳은 마음을 성령 하나님께서 부수어 부드러운 밭으로 기경하셔서 택하신 자들을 중생 시키셨을지라도, 신자들은 여전히 복음의 열매를 맺는 것보다 타락하고 부패한 원죄의 영향을 더 받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복음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거나 세상이 염려와 유혹을 받을 때, 쉽게 복음을 망각하곤 한다. 이러한 고민과 유혹은 신자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완전히 없앨 수 없고 조금씩 범위를 줄여갈 뿐이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역은 변함 없이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므로, 우리는 때때로 복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어야 한다. 또한 이와 더불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의 단단한 돌들과 복음을 가로막는 가시떨기들을 제거해 달라고 끊임없이 간구해야 한다. 이는 마찬가지로 비단 신자 개개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목회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교회와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역을 이루어야 하고 모든 신자들보다 신앙에서 모범을 보여 앞서가야 하므로, 더욱 엄격하게 스스로를 복음으로 다스려야 한다.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 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예정의 관점에서 좋은 땅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와 목회자들이다. 이들은 각자의 재능과 여건대로 자기의 삶 가운데서 복음의 선한 열매들을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구원의 서정 관점에서 좋은 땅은 중생한 신자 또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목회자들이 맺는 복음의 선한 열매를 맺는 과정이다. 이 땅에서 맺는 복음의 열매는 비록 제한적이고 완전하지 못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때에는 완전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모든 서신의 말미에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햐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다. 이 들을 귀는 육신의 귀가 아니라, 성령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허락하신 살과 같이 부드러운 심령이며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밭과 같은 심령이다. 성령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들을 귀는 반드시 선행을 수반하는 들음이다. 복음을 듣고 참으로 그러하다 하면서도 정작 복음대로 행하지 않는 것은 살아있는 들을 귀를 가진 것이 아니라, 죽은 귀를 가진 것이다. 왜냐하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비유를 설명하시다(막 4:10-20; 눅 8:9-15)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인류는 천국 복음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천국 복음의 무한한 가치도 그 의미도 전혀 알지 못하고 아예 관심조차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자들에 대해서는 각자의 적절한 시공간에서 복음을 허락하셨다. 우리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보편적으로 선포되는 복음을 접하게 되면, 우리 안에 계신 보혜사 성령께서 그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복음을 믿게 하시고 복음에 순종하게 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허락된 천국의 비밀인 것이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자원하는 마음으로 삶에서 복음의 선한 열매를 맺고자 하게 된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더욱 그에 따른 은사를 허락하셔서 우리로 넉넉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과 의인들은 복음이신 그리스도를 직접 보지 못하였고 단지 앞으로 오실 것이라는 예언만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미한 예언 만으로도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였다. 이로 인해 선지자들과 의인들은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야만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원 사역을 이루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지금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복음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을 듣고 믿어 순종하는데 힘쓰지 않는다면,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할까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서 도리어 복음을 외면한다면, 희미한 예언으로도 철저히 순종했던 구약의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무어라 할까? 구약에서는 그 희미한 예언을 저버리고도 그렇게 끔찍한 징계 또는 심판을 받았는데, 오늘날 명백하고 더욱 풍성한 복음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만약 복음을 저버린다면 이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은 얼마나 더욱 두려운 것일지 모든 신자와 교회와 목회자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숙고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기로 창세 전부터 버리신 자/교회/목회자들은 여전히 복음에 무지하고 무관심한 상태에 빠져있다. 설령 일시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복음으로 인한 고난과 세상 염려와 유혹을 당하게 되면 그 복음을 저버리게 된다. 이는 패역하고 완악한 자/교회/목회자들에게 복음을 허락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의 근원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내어 버리게 된 것은 그들 스스로의 죄악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