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괄호 속에 넣어라
지금까지 논의를 보면 한 가지 피할 수 없는 의문이 든다. 의식의 지향성에 따라서 대상의 의미가 결정된다는 주장은 결국 어떤 지향성을 갖느냐에 따라 제각기 다른 세계를 살 수 있다는 뜻이므로, 현상학이란 상대주의의 또 다른 포장술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공이 어떤 사람에게는 놀이의 도구로, 다른 사람에게는 장식의 수단으로 현상한다면 결국 공의 보편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후설의 대답은 당연히 ‘아니다’이다. 그는 이러한 공의 다양한 쓰임새나 의미들과 상관없이 공은 공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의식에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주장하고 그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어떤 대상 혹은 현상은 그것이 다양한 맥락으로 이해되기 전에 보편적인 의미의 차원을 지닌다. 예컨대 공을 놀이 도구로 보든 장식물로 보든, 공 자체의 근원적인 차원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공 자체, 혹은 사상 자체를 위해서는 그 근원적인 차원의 진정한 모습(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의식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보았다.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에는 그러한 진정한 모습, 순수한 현상을 방해하는 무수한 요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사례 하나만 들어보자. 밤에 산길을 걷던 어떤 사람이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옷을 잡고 놔주지 않는 것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니 웬 귀신이 자신의 옷을 붙잡고 있었다. 그는 옷이 찢어지는 줄도 모른 채 줄행랑을 쳤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해서 다음 날 낮 그곳에 가보니 나뭇가지에 찢어진 그의 옷 쪼가리가 걸려 있었다. 어제 저녁 그의 의식에는 나뭇가지가 귀신으로 현상되었던 것이다. 왜일까? 두려움과 공포라는 우리 의식의 나약한 태도 때문이다.
후설은 우리가 우리 의식에 떠오르는 순수한 현상, 즉 대상의 보편적인 실재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이러한 적합하지 않는 우리 의식의 태도를 벗어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순수한 현상을 발견하고자 하는 과정을 ‘현상학적 환원(phänomenologische Reduktion)’이라고 부른다. 현상학적 환원이란 한마디로 대상의 본래적인 모습, 즉 순수한 현상의 모습에 도달하기 위해 의식의 불순한 태도를 제거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환원은 우리 의식의 태도 변경이라고 할 수도 있다.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 즉 순수한 현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태도를 ‘자연적 태도(natürliche Einstellung)’라고 부르며 이를 ‘현상학적 태도(phänomenologische Einstellung)’와 구분한다.
후설이 현상학적 환원을 위해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한다고 본 자연적 태도란 우리의 가장 일상적인 의식의 관행과 관련이 있다. 우리의 일상 의식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이미 주어진 것들이며 객관적으로 그러한 것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우리 앞에 있는 세계가 우리의 의식과 상관없이 이미 주어진(vorausgegeben)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자연적 태도이다. 후설이 보기에 이러한 자연적 태도야말로 허위의식의 근원이다. 가령 중세인들은 태양이 움직이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자연의 질서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은 과학자들에 의해서 부정되었다.
미술이론가 노먼 브라이슨(Norman Bryson, 1949~)은 회화에서 이러한 자연적 태도가 회화의 역사를 얼마나 왜곡하였는지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다음의 두 그림을 보자.
하나는 중세시대의 그림(두초, 〈성모자 상〉)이며 다른 하나는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레오나르도 다 빈치, 〈리타의 성모〉)이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이 두 그림은 성모 마리아와 예수라는 동일한 대상을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미술평론가나 사학자들의 관심은 동일한 대상을 어떻게 재현하는가에 관심을 둔다. 중세 화가는 조형적으로 볼 때 다소 조야한 방식으로 대상을 재현한다면 르네상스 화가의 재현 방식은 조형적으로 매우 세련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상식적 구분이 자연적 태도와 연결된 것이라고 브라이슨은 비난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두 그림이 묘사하는 것은 동일한 대상이 아니라 그들의 지향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두초, 〈성모자 상〉 Madonna and child
레오나르도 다 빈치, 〈리타의 성모〉 The litta modonna, 1490년 경
중세시대 화가 두초의 〈성모자 상〉이 인물 자체를 표현하여 관객들에게 종교적 느낌을 주려했던 데 반해, 르네상스 시대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리타의 성모〉는 인물과 다른 소품들을 정확히 묘사하고 원근법을 통해 공간적 위치도 재현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중세의 그림은 실제로 마리아와 예수라는 인물 자체를 재현하는데는 관심이 없으며 이들 인물이 관객들에게 줄 수 있는 광채나 종교적 느낌만을 표현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에 반해서 르네상스의 화가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 인물들이나 다른 소품들을 정확하게 묘사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원근법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인물들 간의 배치 혹은 사물들의 공간적 위치를 엄격하게 재현하려 한 것이다. 브라이슨이 보기에 결국 두 그림은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아니다. 이 두 개의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다른 두 가지 태도, 아니 화가가 사물을 파악하는 두 가지 태도를 묘사하는 것이다.
다시 후설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을 위해서 자연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곧 우리가 일상적으로 믿고 있는 모든 믿음이나 지식을 괄호 속에 넣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중세인들이 순수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사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움직인다는 사실을 괄호 속에 넣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후설은 이 ‘괄호 속에 넣음’의 행위를 달리 ‘에포케(epoche)’라고 부른다. 에포케라는 말은 ‘판단중지’라는 뜻을 지니는데 이는 자연적 태도에서 비롯된 우리의 모든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지식이나 믿음에 대해서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괄호 속에 넣어라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