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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재소자가 느릿느릿 구치소 접견실(3.3㎡·1평)에 걸어들어왔다. 그는 미심쩍은 얼굴로 유리벽 너머 기자를 흘깃 보더니, 마이크에 입을 바짝 대고 물었다. "누구신지…."
8일 낮 12시 40분, 서울 송파구 성동구치소. 유리벽 저편의 중년 남자가 회사 공금 1898억원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된 박모(48)씨였다. 그는 서울의 명문 상고를 졸업한 뒤 고졸 공채로 동아건설에 입사했고, 자금부장으로 근무하며 2004년부터 올 6월까지 5년간 2000억원 가까운 돈을 회사 통장에서 빼냈다.
그 돈으로 박씨는 두 개의 인생을 살았다. 주중과 낮에는 두 자녀를 둔 연봉 5000여만원의 '박 부장'이었다. 주말과 밤에는 하룻밤에 수억원을 날리고도 씩 웃는 '박 회장'으로 변했다. 그는 지난 7월 잠적했다. "박 부장이 수상하다"는 소문이 회사 안팎에 막 돌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는 도피 생활 석 달 만에 경찰에 붙잡혀 성동구치소 '26○○'번 재소자가 됐다.
이날 그는 하늘색 수의(囚衣)를 입고, 맨발에 흰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그는 약간 핼쑥했지만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건강한 인상을 풍겼다.
박씨는 접견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 잠깐 놀란 것 같았지만 이내 표정을 풀었다. 누군가와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누는 게 오랜만이라는 듯, 가끔씩 웃어가며 찬찬히 대답했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들렀다. 불편한 점은 없느냐"는 질문에 "검찰 조사받으며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잠깐 입을 다물더니 "모든 게 다 저 혼자 저지른 짓"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솔직히 구치소에서 나가기도 싫습니다. 이 안에 들어와 있으니 너무 좋습니다. 마음이 편하니까요. 15년, 20년이 아니라 아예 여기서 푹 썩고 싶습니다. 나가면 아는 사람들 만날 것이고…. 무슨 면목으로 그분들을 뵙겠습니까?"
그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저도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대화는 물 흐르듯 술술 풀려나갔다.
박씨는 올 초까지 강원랜드를 5년간 90여 차례 찾았다. 그는 벤츠나 BMW 같은 고급 외제차를 몰았다. 다른 단골들 눈에 비친 박씨는 통큰 재력가였다. 판돈을 날린 이에게 선뜻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종업원에게 ‘팁’으로 1000만원어치 칩을 건네기도 했다. 경기도 하남시와 양평군에 각각 16억원짜리 별장(661㎡·200평)과 6억원대 별장도 샀다. 이 부동산은 모두 동아건설에 가압류된 상태다.
그는 도피 석달 만인 지난 10월 2일, 경기도 하남시 미사동의 한 식당에서 부인 송모(46)씨와 몰래 만나다가 잠복 중이던 광진경찰서 형사들에게 붙잡혔다. “최소한 10년 이상 교도소에서 지내야 할 텐데 괜찮냐”고 묻자 박씨는 소리 없이 웃었다. “도박할 때도, 들통나서 도피하는 동안에도 매일같이 ‘잡히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떨었습니다. 밤이면 불안해서 술을 마셔도 잠을 잘 이룰 수 없었어요. 하루 2~3시간도 제대로 못 잤지요.”
그는 “마음이 편해지니 밥맛도 좋다”고 했다. 검찰·경찰 관계자들은 그가 실제로 하루 세끼 꼬박꼬박 잘 먹고 있다고 전했다.
경찰 조사에서 박씨는 “1998년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간 뒤 충성심을 잃었다”고 했다. 주식과 도박으로 거액을 날린 뒤 2004년 9월 회사 돈 4억원을 빼돌린 게 첫 단추였다. 횡령액은 곧 눈덩이처럼 불었다. 그는 1898억원 중 924억원을 다시 회사에 입금했다. 나중에 빼돌린 돈으로 앞서 빼돌린 돈을 채워넣는 ‘돌려막기’였다.
박씨는 검찰 조사에서 “나머지 974억원을 내가 썼고, 대부분 도박과 주식으로 탕진해 남은 돈이 없다”고 했다. 검찰 관계자는 “분명히 숨긴 돈이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방대한 수표·계좌 추적 작업을 벌였는데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도록 구체적인 증거가 안 나와 고민”이라고 했다.
구치소에서 박씨는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잠든다. 그는 “짬이 나면 성경과 금강경(金剛經)을 읽는다”고 했다.
“사회에 있을 때는 종교를 믿지 않았는데 여기 들어와서 큰 위안을 얻고 있어요. 남들이 보면 5년이 긴 시간일지 몰라도 제가 느끼기엔 5개월처럼 짧게 느껴져요. 잃어버린 시간, 꿈 같은 시간입니다. 바보짓 했죠.”
부인 송씨도 같은 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횡령한 돈으로 남편과 나란히 도박을 즐긴 혐의다. 검찰 수사관은 “순순히 혐의를 인정하는 박씨와 달리 송씨는 ‘전부 남편이 한 일인데 왜 나까지 구속하냐’며 억울해한다”고 했다.
시종 느긋하던 박씨가 단 한 가지 화제에서 표정이 굳었다. 함께 도피했던 회사 여직원 A(32)씨 얘기였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현재 서울 강남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며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박씨는 “(A씨가) 아프다고 들었는데, 좀 어떠냐”고 몇번이나 안부를 물었다. A씨는 범인 도피를 도운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공범 신분이라 박씨를 면회올 수 없는 처지다.
박씨는 “모든 사람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겸손하게 고개를 떨구다가도 “정말 숨겨둔 돈이 없냐”는 질문엔 단호하게 “없다”고 했다. 박씨 부부는 최근 국내 유수의 로펌을 변호인으로 선임했다. “숨긴 돈이 없으면 변호사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냐”고 묻자 “허허, 그런 건 지금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라고 했다.
성실하게 살아온 동아건설 직원들에게 박씨의 범행은 엄청난 무력감을 안겼다. 동아건설 관계자는 무거운 한숨을 삼키며 “힘을 내고 있다”고만 말했다. 박씨는 “그동안 동아건설 분들이 몇 번 면회를 왔는데 면목이 없어 모두 거절했다”고 했다.
그는 과연 어떤 심리로 동료들을 배반하고 그 많은 돈을 흥청망청 써버렸을까. “삶이 무료했냐”는 질문에 그는 잠깐 침묵했다. 지그시 웃더니 마이크에 입을 바짝 대고 좀전보다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건 나중에 지인들하고나 나눌 수 있는 얘기지요. 이런 데서 말하는 건 좀….”
면회시간이 다 되자, 그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섰다. 웃는 낯이었다.
첫댓글 박부장이 어떻게 동아건설이 입사 했는지 입사경위를 밝혀라 항간에 떠도는 소문은 이휘호 친인척이라는 소문이 있다.
은닉된돈 찾아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