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유적인 상서장에서 출발해서 남산 토성을 거쳐 남산신성의 유적, 중창지, 우창지, 좌창지를 다 다녀왔습니다. (같이 왔더라면 좋았을텐데.... 하고 좀 아쉬웠습니다만^^)
이 곳도 지금 한창 중수 중이었습니다.(요즘 때 아닌 문중 세우기가?...)
상서장은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린 곳이라는 설도 있고 왕건에게 송악의 창성함을 예언하는 글을 올린 곳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런데 최치원이 살던 집이라는 것에는 무리가 있답니다. 육두품이 왕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남산 중턱에 집을 짓고 살기에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또 비석의 받침이 신라시대 석등의 받침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터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합니다.
상서장 뒷쪽으로 남산을 올라가면 바로 뒷쪽이 깎은 듯한 절벽입니다. 그것이 남산토성의 흔적이랍니다. 남산에는 네군데의 성 유적이 있는데, 가장 높은 곳인 고위산의 고위산성, 남산신성, 남산토성, 그리고 원래는 붙어 있었지만 산업도로를 내는 바람에 잘려나간 도당산의 도당토성이 그것입니다. 남산토성과 도당토성은 원래는 하나로 붙어서 긴 방위선을 구축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 토성은 원삼국시대나 초기 삼국시대 부터 서쪽의 방어선 역활을 했을 것이랍니다.
남산신성의 유적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데 특히 긴 돌못이 눈에 뛰었습니다. 돌못은 진평왕대의 남산신성에서 나타나는 공법으로 감은사지의 축대에도 그 흔적이 나타나고, 불국사의 기단석에도 보이는 것입니다. 가장 절정으로는 석굴암의 천정 궁륭에 박힌 못을 들더군요.
남산신성에 가기 전에 장창골 삼존미륵이 있었던 곳에도 들렀습니다. 황수영박사의 논문 때문에 지금 학계에서는 그곳을 삼화령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곳은 '령'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낮은 곳입니다. 그러나 고위산의 연좌대가 있는 곳도 삼화령이라고 부르기에는 석연찮다고 김구석 선생님은 말씀하십디다.
신성의 중창지에는 혜공왕때 불탄 탄화미가 아직도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도 답사간 회원들이 줏어오기도 했는데 길이 80m에 달하는 건물이라니.... 쌀이 얼마나 쌓여 있었으면 아직까지도 나오는지..(1300년 가까이 지났는데) 우창지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시렁을 걸어두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었습니다.
남산신성을 쌓았던 돌이나 장창의 유적을 이용해서 최근의 민묘들이 상석을 깔아놓고 무덤을 단장해 놓았더군요. 가장 웃기는 것은 장창골 미륵불을 발견한 바로 그 장소에 묘를 쓴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천년이 넘도록 버텨온 유적이건만... 이러더가 언젠가는 모두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이번에 저도 신라의 산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서울의 사대문이 나성의 구실을 한다고 들었는데, 경주는 계획된 도시가 아니고 자연발생적인 도시라 동쪽의 명활산성, 서쪽의 서형산성, 남쪽의 남산신성, 북쪽의 북형산성이 자연스럽게 나성의 구실을 한다고 합니다.
전에 한 번 답사를 했던 곳이지만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둘러보니 깨우치게 되는 것이 더 많더군요. 언제 다시 한 번 같이 답사를 할 수 있는 날이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첫댓글 아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네요. 다음 번에 기회를 마련해서 남산신성과 명활산성, 단석사 신선사마애불, 금척고분군, 무장사터와 기림사 등 이번에 못 간 곳 위주로 다시 답사를 해보고 싶습니다. 남산신성에 대한 정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