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 진주간 고속도로에서 한적한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 전북 장수군 장계면으로 들어서면 '성관사'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성관사가 보금자리를 튼 곳은 장계면의 넓은 평야가 시원스레 내려다 보이는 산자락. 성관사의 주변 지형은 백학이 나는 형국으로, 남덕유산 지맥인 깃대봉에서 수많은 학 떼가 날아와 모이를 쪼아먹는 곳에 절이 들어서 있다고 한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일주문을 따라 꽤 가파른 산길을 구불구불 올라가니 귀에 익은 목탁소리가 필자를 반긴다. 경내에는 아직 마무리 불사의 흔적들이 남아있었지만 고즈넉한 산사의 청정한 분위기는 오랜만에 헐레벌떡 달려온 나그네의 심장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산문 밖에서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숨은 도인으로 존경받고 있는 월성스님(성관사 대각선원장)은 한국 염불선을 중흥시킨 청화스님의 맏상좌이다. 40여년을 장좌불와(長坐不臥: 밤에도 눕지 않고 앉아서 참선하는 수행)하며 용맹정진한 스승에 못지 않게 엄청난 고행으로 염불삼매를 성취한 후 다시 이뭣고 화두를 타파한 선지식으로 알려져 있다.
청화스님이 오로지 나무아미타불, 자성염불(自性念佛)만을 강조한 반면, 월성 스님은 염불과 화두 공부를 병행해야 한다는데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계행을 철저히 지키고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철저히 수행해야 함을 역설한 것은 두 선지식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반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월성 스님의 구도의 역정과 그 수행의 성과는 어떤 것일까.
월성 스님은 21세부터 25년간, 초인과도 같은 원력으로 매일 1만 2천배 기도를 성취했다. 염불삼매를 체험한 뒤 49세에 본격적으로 참선을 시작해 통도사 극락암 경봉 스님 회상에서 한 달 하루 만에 ??이뭣고??? 화두를 타파했다고 한다.
월성스님이 계행을 철저히하며 절과 염불수행에 매진하게 된 기연은 이렇다. 스님이 21세 때 해인사에 놀러 갔을 적 이야기다. 그 곳 원주 스님이 자꾸만 계를 받으라고 하는 바람에 60여 신도와 함께 얼떨결에 계를 받았는데 ?계를 지키겠느냐? 예!하는 문답이 그 뒤로도 귓가에 쟁쟁했고, 그 때 절하는 것을 배운 후로 계속 절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18세에 입대해서는 93일간 졸음을 참는 심한 극기훈련을 받은 덕분에 그 후로는 잠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1만 2천배 기도를 할 때에는 하루에 보릿가루 1컵만을 물에 타서 마시면서 『천수경』 121편, 『반야심경』 221편, 자신을 위한 참회의 절 3천 배, 신도를 위한 4천 배기도 등을 하셨는데 24시간 중 1분도 남는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31세에 전강 선사로부터 '이뭣고?' 화두를 받았지만 본격적인 화두참구는 36세에 성륜사 조실 청화 스님을 은사로 모신 뒤 염불삼매를 얻어 득력한 후에 비로소 본격화되었다. 그동안 잠도 안 자고 용맹정진한 덕분에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 힘도 들이지 않고 화두가 24시간 여여하게 들렸다. 한소식 쿵!하고 열리기를 세 번 경험하고 그 많은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세계가 한 생각에 열리고 나니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망상 피우는 인간의 삶이 너무나 가식적이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고 한다.
삼천대천(三千大天) 세계가 하나라는 자체도 없이 다 공함을 체득해 더불어 사는 세계가 열리게 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데, 그 맛도 못 보고 서로 막행막식하며 사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는 것이다.
월성스님은 보릿가루 한 컵만으로 24시간 염불 및 절수행을 할 때는 불ㆍ보살과 조사ㆍ신장들의 가피력으로 한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며 겸손해 하신다. 그리고 스님이 만약 막행막식(莫行莫食) 했더라면 그 분들이 외호(外護)해 주지 않았을 것이라며, 견성 전이나 깨달은 뒤의 보임(保任)과정에서도 청정한 계행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월성 스님은 젊을 때는 몸을 조복받고 업장을 소멸하며 중생제도에 나설 수 있는 여러 가지 방편을 두루 섭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망상과 분별심이 쉬어진 후에 마지막으로 화두를 들면 금방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화두를 타파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학인 때는 경을 부지런히 보고 여러 수행을 열심히 하더라도 참선에 들어갈 때에는 티끌도 남기지 말고 모두 버려야 한다고 법문한다. 배울 때는 열심히 하되 비울 때는 비울 줄만 알면 된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다.
다음은 월성 스님과 산길을 포행하며 나눈 일문일답이다.
- 참선하기 전에 보조수행으로 절ㆍ염불 수행을 하면 어떤 점이 유익한지요.
망상 덩어리를 없애는 데는 절만큼 좋은 게 없어요. 한창 1만 2천 배 정진을 할 때는 절하는 도중에 용광로 같은 불덩이가 세 번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어요. 엄청난 불덩이에 내 몸이 온데 간데 없이 다 타버리겠다고 한 생각 일으킨 사이에 어느새 그것이 지나가 버리고 나니, 몸뚱이만 사람이지 용심(用心)도 끊어지고 진심(嗔心)ㆍ음심(淫心)ㆍ사심(邪心)이 모두 끊어졌습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심해져서 늘 있는 그 자리, 생활 자체가 바로 공부가 되더군요. 절 하기와 염불을 통해 스스로 망상을 정리한 후 화두를 잡으면 7일이면 화두가 타파된다고 확신합니다. 만약 스스로 준비 되어 있지 않다면 세월만 낭비할 뿐 화두 타파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절 하기와 염불 정진을 잡초, 즉 번뇌와 업장을 녹이는 김 매기에 비유할 수 있겠군요.
배추 씨앗을 밭에 뿌려 놓되 김을 매주지 않으면 잡초만이 무성하고 배추가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반면, 배추 밭에 잡초가 없다면 배추는 잘 자라게 됩니다. 이 때 배추 씨앗은 자성불(自性佛)에 해당됩니다. 다생의 윤회를 통해 자란 잡초들을 정리하지 못한다면 용맹정진을 해도 어렵습니다. 수많은 전생의 수행을 통해 득력(得力)한 상태가 아니라면, 몸과 마음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득력해야 합니다. 득력이 되면 자성불은 저절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 때 화두는 자연스럽게 타파됩니다. 참선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하는 것이죠. 그렇지 않을 경우 스스로 지치고, 가르침도 받기 힘듭니다.
-절ㆍ염불ㆍ참선과 같은 구체적인 공부에 앞서 계행(戒行)을 비롯한 올바른 행을 중요시 한 까닭이 무엇인지요.
젊을 때는 인간 몸뚱이가 소중하다고 여기지만 행을 하면서 공부를 해 보니 우리 몸뚱이가 결코 소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육신을 갖고 있어서 탐욕, 성냄, 어리석은 마음을 내기 때문에 병이 생기는 것이지 한 생각에 삼독심(三毒心)을 버리기만 하면 불ㆍ보살도 곁에서 옹호하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 불ㆍ보살의 외호 역시 살불살조(殺佛殺祖) 하는 선 공부의 입장에서는 장애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나도 서너 번 보살님들이 주는 약과 감로수와 법공양도 받았지만 거기에 계속 집착하여 당연하게 받아먹으면 외도로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적당히 절제할 줄 알아야 해요. 어느 땐가 한 번은 내가 먹고 두 번은 옆의 스님을 주라고 동자에게 말했더니 "그 스님은 평소에 행을 안하면서 밥도 많이 먹고 수마(水魔)에 빠져 있는지라 못 먹습니다." 하는 거예요. 불성(佛性)이 없는 사람이 없는데 왜 못 먹느냐고 주라고 하니 관세음보살님이 동자를 인솔하여 그 스님한테 갖다 주었지요. 그런데 그 스님은 그게 있는지도 모르는 겁니다. 법에 눈을 못 뜨니까 밥을 가져 왔는지 공양을 가져 왔는지 전혀 모르는거죠. 그래서 호흡할 때 들어가도록 입에다 갖다 대주라고 했는데 입에 대자마자 재채기를 해서 밥을 다 흩어 버리고 두서너 알만 들어가는 게 보이더군요. 그러고 나니 그 수좌가 공부를 그렇게 잘할 수가 없었는데, 해제할 무렵 산에 올라가 비린 것을 먹고 나더니 도로 제자리로 돌아가더군요. 그 때 알게 되었지요. 행이 올바르지 않으면 공부가 제대로 될 수 없다고. 요즘 수좌들은 법문해 줘도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취해서 자기 유리한 대로 해석하고 방일(放逸)하게 살아가는 이가 적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 계행 가운데서도 음식을 가리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행이 없으면 법이 없고, 법을 지키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 없어요. 누린 것, 비린 것, 계란 등의 음식물이 들어가면 그것이 망상으로 변하거든요. 서로 싸우고 원한 맺으며 죽은 짐승들의 고기가 우리 몸에 와서 칼로리로 변해서 영양분은 될지 몰라도, 그 수행자가 어찌 인욕바라밀을 행하며 평등한 삶을 살겠어요. 상추나 오이, 쌀이 성내는 것을 보셨어요? 그런 음식을 먹으면 성질도 안 나고 자연적으로 육바라밀이 행해져요. 청정한 공양이 저절로 되니까 싫은 사람도 없고 좋은 사람도 없고 늘 너그러운 마음으로 웃으면서 상대방을 대하게 돼요. 세상이 살기 좋고 시대가 변한다고 해서 공부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요. 편하게 살려고만 하면 공부는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수좌들에게 오신채는 물론 초콜릿, 우유, 빵 같은 음식들을 절대 못 먹게 하는 거죠. 이렇게 3년만 음식을 절제하면 많은 악습이 떨어지고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몸과 마음을 조복받아 업장을 소멸하면,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라는 아집과 소유욕도 동시에 소멸되는 것입니까.
그렇지요. 나는 아집과 교만을 부리다 비구니로 아홉 생, 비구로 아홉 생, 모두 18생을 출가자로 태어났습니다. 아홉 번 비구 몸을 받았을 때 의상 대사로 태어난 적도 있지만, 교만한 마음이 있어 퇴보한 것입니다. 3생을 출가자로 태어나기가 어렵지만 비구니로 아홉 생을 사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못난 사람, 못 배운 사람, 키 작은 사람을 무시하다가 그런 과보를 받은 것입니다. 내가 있다는 아상(我相), 내가 잘 났다는 교만, 즉 한 생각이 이런 결과를 불러오곤 합니다. 아상과 아집이 강한 사람은 심지어 바위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돌부리 하나도 인연 없이 생긴 것이 없어요. 이런 일을 안다면 교만을 부릴 사람이 없지요.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차별하는 일없이 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 염불수행과 참선은 가장 중요한 양대 수행법인데, 이 두 방편의 장ㆍ단점을 말씀해 주십시오.
절과 염불로 삼매를 얻어 무아의 경지를 체득하고 망상을 조복 받으면 화두는 저절로 타파되지요. 절삼매로는 무아(無我)의 세계를, 염불삼매로는 『화엄경』과 『법화경』에 나오는 불ㆍ보살의 세계와 33대천세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두가 타파되고 나면 필설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우주와 하나 되는 절대세계를 경험하게 되지요. 염불삼매의 경지도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탐ㆍ진ㆍ치가 멸한 화두삼매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지요.
- 염불과 참선의 차이점을 공부 경험담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염불삼매로 가피를 입고 업장소멸을 이룬다면 화두참선은 단박에 공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물론 염불삼매로 몸을 조복받아 중생제도의 길을 열 수도 있어요. 염불삼매에 들면 온 세상이 부처로 꽉 차게 되며, 세상 일을 다 알게 됩니다. 염불은 반야용선에 해당되는데, 극락에 들어가면 거기서 끝까지 공부하며 회향해야 합니다. 수천만 번을 점검받으며 공부하는 곳이 극락입니다.
내가 염불삼매를 체험한 뒤 선방에 앉아서 화두를 들기 시작하니 곁에서 외호해 주던 조사ㆍ국사ㆍ신장님들이 자연스럽게 물러나며 도와주던 수천만의 금강역사들이 떠나더군요. 그때부터는 자연스럽게 타력(他力)은 떠나고 자력(自力)만으로 공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염불 및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간화선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요.
100일 동안 염불삼매에 들어 있었다 해도 깨달음은 아닙니다. 고요적적하고 법열이 있기에, 그 상태가 최고라고 생각하기 쉽지요. 하지만 역대의 선사들이 일념에 든 상태에서 화두를 든 까닭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모두 바보가 아니지요. 자나 깨나 화두가 한결같이 들리는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된 상태에서 화두를 챙기면 금방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의정에 들어 주ㆍ객이 멸한 오매일여가 되면 1주일이면 깨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화두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공안 참구가 불교 공부가 아니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도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이 바로 이뭣고 화두였습니다. 1700공안이 모두 ??이뭣고??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연기실상의 근원을 참구하여 견명성(見明星) 오도(悟道)하게 된 것은 조사선의 관점과 다를 바 없습니다.
- 견성 이후의 보임공부 과정에서는 어떻게 지어가야 합니까.
견성 후에도 업장소멸이 안 되면 보임을 잘 할 수 없습니다. 육신을 조복하지 못하면 경계를 대함에 여여부동(如如不動)하지 못해서 음심을 일으켜 음행을 하기도 합니다. 도인들은 보임을 하면서 경계에 끄달리는 지의 여부를 막행막식을 통해 점검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업장소멸이 잘 되지 않았을 경우, 식(識)이 혼탁해져 퇴전(退轉)하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공부할 때나 대상에 작용할 때나 성성적적(惺惺寂寂)해야 하는데, 끄달리고 마는 것이죠. 계행을 철저히 하지 않는 것은 마치 비단 천에 똥칠, 먹칠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견성 이후에도 계행을 철저히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유도 하나의 본보기를 보여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후학들이 대도인과 같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서 막행막식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지요. 마음과 행이 경계에 끄달린 모습은 아무리 숨겨도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거짓말로는 안 되는 거죠. 그릇이 안 되면 거기에 무엇을 담을 수 없는 이치지요. 부처님께서 500생 동안 보살로 거듭 나고 죽으며 보살행을 닦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성문ㆍ연각 역시 전생의 공부가 바탕이 되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한번 열면(견성하면) 깨지는 일은 없습니다. 우주가 깨질 때는 너도 나도 없습니다. 깨침의 상태에서는 먼지 하나도 없습니다. 말을 갖다 붙일 곳이 없지요.
◇“절 하기와 염불 등 기초수행을 통해 득력하면 화두 참구가 훨씬 빠르다”는 월성스님은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이 뭣고’ 화두를 놓는 법이 없다.
◇점심 공양을 마친 후 상좌인 성진스님과 함께 포행에 나선 월성스님(왼쪽). 사제지간의 애틋한 정이 엿보인다.
전북 장수군 장계면 금덕리 산 32-2번지. 장계면의 넓은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늑한 산자락에 성관사는 서 있었다.
원래 성관사 주변에는 금덕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주지가 여러차례 바뀌면서 관리 부실로 8·15 해방을 전후해 폐사가 되었는데, 1993년 월성 스님과 제자 삼진스님이 현 사찰 건물을 새로 짓고 이름을 성관사라 한 것이다.
성관사의 주변 지형은 백학이 나는 형국으로, 남덕유산 지맥인 깃대봉에서 수많은 학 떼가 날아와 모이를 쪼아먹는 곳에 성관사가 들어서 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헤치고 도착한 성관사는 후원채와 일주문 건립불사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수백 미터 윗쪽에 자리잡은 대각선원은 지난해 요사채와 함께 완공되어, 이미 30명의 수좌들이 하안거 정진에 들어간 상태였다.
공양간에서 점심공양을 한 후 대각선원장 월성스님의 상좌인 주지 성진스님을 기다렸다. 마침 신도를 위한 재(齋)가 있어 주지 스님은 목청껏 청아한 염불을 정성껏 외운 후 공양을 마치고 기자를 만났다.
“큰스님 께서는
‘염불은 남의 염불, 내 염불이 따로 없다. 나를 위한 것도,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중생제도와 상구보리를 위해 스스로 신심을 내는 것이다. 스님들이 신도를 위해 재를 지낼 때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시죠.”
성진스님에 따르면 월성 스님은 석가모니 정근을 할 때면 목이 갈라질 정도로 열심히 하신다고 한다. 그래서 오래 기도하기 위해서는 천수경 등은 크게 소리 내기 보다는 자신이 알아들을 정도면 된다고 한다.
성진 스님은 염불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참선과 연결시켰다.
“큰스님은 절하기와 염불을 통해 스스로 망상을 정리한 후 화두를 잡으면 7일이면 화두가 타파된다고 하세요. 만약 스스로 준비 되어 있지 않다면 세월만 낭비할 뿐 화두 타파는 쉽지 않다고 하십니다.
”배추 씨앗을 밭에 뿌려 놓되 김을 매주지 않으면 잡초만이 무성하고 배추가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란다.
절하기와 염불정진을 잡초 즉, 번뇌와 업장을 녹이는 김매기에 비유한 것이다.
배추 밭에 잡초가 없다면 배추는 잘 자라게 된다. 이 때 배추 씨앗은 자성불(自性佛)이다. 다겁의 윤회를 통해 자란 잡초들을 정리하지 못한다면 힘든 고행도 소용이 없다. 수많은 전생의 수행을 통해 득력(得力)한 상태가 아니라면, 몸과 마음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득력해야 한다. 득력이 되면 자성불은 저절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 때 화두는 타파된다. 참선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스스로 지치고, 가르침도 받을 수 없다.
물론 염불정진으로 나타나는 경지인 염불삼매는 참선정진으로 드러나는 화두삼매와는 비교가 안된다는 것이 월성 스님의 설명이다.
3천대천 세계를 체험하고 화신불 응신불 법신불을 친견할 수 있는 염불삼매는 탐진치가 멸한 선정삼매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염불삼매는 이른바 팔지보살의 세계이다. 이와 같은 선정삼매의 경지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세계이니, 말로써 설명할 수 있다면 어찌 대도의 경지이겠는가.
대각선원에서는 결제에 들어가면 수좌들은 산문 밖을 나가지 못하며, 가까운 산으로의 등산조차 금지될 정도로 계율이 엄격하다.
초콜릿, 우유, 빵도 함부로 먹을 수 없다. 불살생계를 지키기 위해 채식을 함은 물론 정진에 필요한, 칼로리가 적은 음식으로만 공양을 한다. 지나친 음식은 음욕을 생기게 하고, 이것이 폭력의 형태로 발산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음식에서 나오는 인연법도 수행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된다며 규제할 정도로 대각선원의 청규는 서릿발 같다. 그래서 대각선원에서 3년만 공부하면 많은 악습이 떨어지고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된다.
“스님네들이 한평생 공부하고서 얻은 바가 없다면 도둑놈이나 진배가 없다. 수행하면서 남의 살 먹고(육식하고) 욕망을 짊어지고 몸뚱이 위주로 살다 보면, 자기 자신을 불태우면서도 타는 줄 모르고 산다. 인욕하고 화합하면서 한 점 부끄럼 없는 수행자가 돼야 한다”는 평소 월성 스님의 가르침 덕택이다.
주지 스님과의 대화가 끝난 후 중화당에서 휴식을 취하시던 월성스님이 직접 주지실로 나오셨다.
스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목숨을 내건 정진을 강조하셨다.
“옛날에는 조계 가풍에서도 염불은 기초수행에 들어갔습니다. 업연(業緣) 많은 중생은 머리를 깎아도 망상이 많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죠. 스스로의 아만심이 수행을 방해하기에, 잠 줄이며, 절하고 참회하면서 계행을 철저히 닦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근기를 갖추어 나가야 합니다.”
스님의 경험에 따르면 절은 망상을 제어하기에 좋다. 수천배를 하다보면 힘이 들어 망상이 들어올 여지가 없고, 저절로 하심(下心)이 된다. 월성 스님은 잠 안자기 위해 절을 했다고 할 정도로 수면욕을 굴복시키는데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잠만 들면 음욕이 발동하기 때문에 늘 깨어있으려는 마음에서 수마를 극복하고자 했다.
월성 스님이 19세 때에 수마(睡魔)를 조복시킨 인연담은 이러했다.
6·25 한국전쟁이 끝난 얼마 뒤, 18세의 나이에 군에 입대한 월성스님은 당시 훈련소에서 야간 근무때 잠을 안 재우던 것이 습이 돼 잠을 자지 않게 되었다.
잠을 자면 북한군이 몰래 쳐들어와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긴박한 상황이었다. 참을 수 없이 졸음이 와 눈을 감을라치면 교관들이 입에 개구리를 물려 개구리가 오줌을 싸는 기합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93일간 훈련을 받으니 잠이 저절로 사라졌다고 한다.
“내가 3천배를 처음 시작할 때는 그래도 상(相)이 남아 못된 스님의 도포자락만 보아도 싫을 때가 있었지만, 1만2,000배 정진에 들어갔을 때는 무아지경에서 업장이 녹아내리는 걸 느꼈습니다.
눈은 아래를 보고 있어도, 등 뒤에서 엄청난 용광로와도 같은 불덩어리가 내 몸을 관통하더군요. 이 불구덩이가 지나갈 때 탐·진·치 삼독과 일체의 번뇌가 사라지고 평온한 마음이 찾아드는 걸 체험합니다.
여기서 혜안(慧眼)과 식(識)이 열리는 것이지요.”
1만2000배 기도는 5∼6년씩 3번에 걸쳐 했다. 100일씩 나눠 300일씩 하는 1만2000배 기도를 통해 망상을 제거하고 참회를 통해 업장을 소멸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1만2,000배 기도는 반야심경 222편, 천수경 121편 독송, 참회의 절 3천배, 신도를 위한 절 3천배로 진행되었다. 이 때 죽을 것처럼 수행하던 모습을 지켜본 신도들도 따라 열심히 수행했다 한다. 지금은 노인이 다 된 성관사의 신심 깊은 우바새·우바이들이다.
진리의 말씀을 믿고 행하며 깨닫는 참된 ‘기도’는 그대로 스스로를 정화시키고, 주변환경을 진리공덕으로 장엄하게 한다. 즉 제불보살에게 구하여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원만구족한 불·보살님의 마음으로 회복시키는 수행방편이다.
스님들이 용맹정진에 들기 전에 기한을 정해 기도에 드는 것도 이런 간절한 서원을 담고 있다. 재가자들도 매 순간 기도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무슨 일인들 못 이루랴.
월성 스님은 요즘도 깊은 잠에 들지 않는다. 20여분씩 잠깐 귀잠을 잘 뿐이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은 물론 누워서도 숨소리를 들으며, 화두를 놓지 않는다. 이른바 보임의 과정이다.
옛 스님네들은 견성 이후에도 수행을 늦추지 않았다. 오랫동안 중생으로 살아온 습이 한 순간에 떨어져 나가긴 힘들기 때문이리라.
스님은 산사에 주석하면서 수좌들이 더많이 찾아와 배우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결국 배우는 일은 스스로 하는 것이기에, 애써 세간에 나서길 원치 않는다.
원력을 배워가는 것도 인연법이요, 스쳐가는 것도 인연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님에겐 동국대 불교학과 출신 10명 등 촉망받는 상좌들이 23명이나 있다. 스님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고 흐뭇해 하신다.
하지만 전생에 닦은 그러한 공덕으로 인해 행여 게으른 마음을 품을까 노심초사하고, 옛날 당신이 하신 것처럼 목숨을 내놓고 정진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스님은 최근 몇 년전까지 벌어진 조계종 분규와 스님들의 비리에 대해서 의외로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하셨다.
“조선조 500년의 암흑기를 지나 온 불교는 사회적으로 다시 걸음마 단계의 과도기를 겪고 있다. 그러나 끊임없는 법난과 종단 분규가 있었어도 한 생각 일으켜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도인들의 서원이 이어지고 있다.
아직 겉으로 잘 드러나진 않지만, 땅에서 받은 각자 인연법에 맞게 중생제도를 하고 있다. 이제는 출가하는 스님네들이 사회에서 대학교육까지 받고 들어오기 때문에 사회화는 앞으로 더욱 활발할 것이다.
지금 젊은 스님들이 중진급이 되는 10년후면 불교의 미래는 더욱 밝을 것이며, 종교간의 벽도 허물어질 것이다.”
스님은 불교를 제대로 알지 못하던 어릴 때부터 이웃을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요즘도 제자들에게 기도후에 세계평화와 인류평화, 조국평화통일, 국가재난 소멸, 국가 안녕과 태평, 육도중생의 성불을 발원할 것을 꼭 당부하고 있다.
평소 ‘중은 공인(公人)이다’고 강조해 온, 그 이유 때문이다.
남을 위한 기도는 결국 자신을 위한 기도요 수행이다.
이런 발원이 쌓여야만 보다 큰 그릇이 될 뿐만 아니라, 성취도 빠르다.
생전에 조국의 평화통일을 보는 것이 월성 스님의 서원이다.
“큰 공부 하느냐, 못하느냐 그건 자기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한 생을 던져서 해도 될까말까 한데 말입니다. 명예욕이 가장 큰 장애입니다. 자신 위해 살면 인간 마음 못 벗어납니다.
세계평화와 조국통일, 7,500만명이 삼세업장을 소멸하고 왕생극락하길 발원하는 것은 큰 공부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 하나를 위해 산다면 나라는 누가 건집니까. 나를 위해 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요. 불자들만이라도 남을 위해 살고 아상을 극복하도록 노력해 줬으면 해요.”
이는 철저히 윤회를 꿰뚫은 데서 나오는 말이다. 선정삼매에 들면 ‘나’라는 것을 찾을 길이 없다. 우주를 꿸 수 있는 능력이 나온다.
법제자가 나오길 바라는 큰스님의 마음은 그래서 더욱 간절하다.
50세에 월성스님은 통도사 극락선원에서 화두정진에 들었다.
이때 선방에 든지 1주일만에 첫 소식을, 한 달 하루만에 화두가 완전 타파된 것이다.
21세부터 해인사로부터 통도사 봉암사 백양사 등 제방의 선원에서 정진한 후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 지 30년만에 얻은 감격적인 소식이었다.
월성 스님은 오랫동안 용맹정진을 한 이유를 땅에 말뚝을 박는 데 비유했다.
“말뚝을 땅에 박을 때 계속해서 크게 해머질을 할 수는 없습니다. 몇 번은 살살 두드리고 다시 힘을 모아서 크게 내려칠 때 말뚝은 땅 속으로 깊이 박히게 됩니다. 화두참구도 이와 같아서 평소의 정진에 의해서 얻어진 힘의 바탕 위에 용맹정진을 통하여 선정의 힘이 크게 증장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말뚝 박듯이 온 정성과 힘을 기울인다면 안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후 월성스님은 제방의 선지식들을 찾아가 깨달음의 경지를 나누었다.
후학들을 위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은 자애로운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이렇게 당부하셨다.
“세상은 같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남을 위한 미덕을 쌓고 각계각층이 화합하며 살아가되, 양심을 지키며 살면 됩니다.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있습니까. 어떤 때 법문을 할 때 보면 지옥으로 끌려가는 중생들이 눈에 보여 눈시울이 뜨거울 때가 있습니다. 죄 짓지 말고, 자성을 밝히는 공부하며 사는것이 인생을 가장 값지게 사는 일입니다.”
1935년 충북 보은군 회북면에서 출생한 월성 스님은 53년 성운 노사를 은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오랜 기간의 염불선 정진을 기초로, 화두선 수행을 멋지게 마무리 한 선사이면서도 일반 신도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스님이다.
신도들에게는 자상하기만 한 할아버지 같은 월성스님은 24세부터 45세까지 매일 3천배 기도·염불 및 절하기로 용맹정진해 ‘득력하면 화두는 일주일만에 타파된다’는 수좌계의 정설을 몸으로 입증했다.
스님은 젊은 시절 전강 대선사로부터 ‘이 뭣고’ 화두를 받았지만, 본격적인 화두 참구는 염불선으로 득력한 후인 46세부터 본격화됐다. 스님의 ‘이 뭣고’ 화두 참구는 51세 때 통도사 극락선원에서 큰 결실을 맺었다. 이후 스님은 제자 양성을 위한 도량 건립 불사에 운력을 마다않고 정진하면서도, 잠시도 화두를 놓지 않고 있다.
현재는 서울, 남양주, 평택, 장수 등에 창건한 같은 이름의 사찰 ‘성관사’ 네 곳과 정중선원, 대각선원에서 수좌들을 지도하고 있다. 23명의 상좌가 있으며, 이중 10명이 동국대 불교학과 출신이다.
전북 장수 성관사 대각선원장인 월성 스님은 상상을 초월하는 절수행-염불정근-화두선 정진으로 그 경계를 낱낱이 밝히고 있는 숨은 도인입니다. 무작정 화두부터 들고 보는 간화선 수행으로는 오히려 기나긴 시간을 허송세월하는 수행자들이 많은 상황이고 보면, 월성 스님의 수행과정을 살펴보시는 것이 훌륭한 지름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는 밝히길 꺼려하시지만, 월성 스님은 의상 대사의 後身으로서 중생교화를 위해 보이지 않는 원력을 펼치고 계십니다. 한국에서는 전생을 본다는 것이 미신인 것처럼 오도되고 있지만, 티베트 불교를 비롯한 남방불교에서는 아라한의 증거로서 무수한 전생을 보았는가, 까르마의 법칙을 보았는가를 중요시 한다고 합니다. 물론 여래는 육신통 가운데 누진통을 얻어야 가능하다고 합니다만, 수행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육신통(육신통을 얻기 위한 수행은 큰 잘못입니다만)을 무조건 경시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상정등정각과 육신통을 갖춘 도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깨침을 얻고도 신통이 자재하지 못하다면 구경각을 이룬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매순간 숨쉬고 살아가는 것이 ‘신통의 나툼’ 아님이 없겠지만, 경전상의 누진통은 아라한의 증거라는 것이 분명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대도인이라고 한다면 부처님과 같은 위신력을 보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월성스님은?
"절 하기와 염불, 독경 등 기초수행을 통해 득력(得力)하면 화두 참구가 훨씬 빠르다."
20 여년간의 절 수행과 '나무 석가모니불' 염불정근을 기초로, 화두선 수행을 멋지게 마무리 한 선사이면서도 일반 신도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월성 스님. 1935년 충북 보은군 회북면에서 출생한 스님은 21세 때 성운 노사를 은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스님은 처음 '절 수행'을 통해 업장을 소멸하고 인욕바라밀을 닦았는데, '10년 동안 절을 해서 부처님 세계를 보지 못하면 스스로 떠나겠다'고 다짐했다.
월성 스님은 45세가 되기 전까지 하루 1만2000배 기도를 5∼6년씩 3번에 걸쳐 하는 등 하루 평균 3천배의 절을 하며 염불-독경하는 고행을 해 신도들을 놀라게 했다. 스님은 31세에 인천 용화사 조실 전강 선사로부터 '이 뭐꼬' 화두를 받았지만, 본격적인 화두 참구는 36세에 성륜사 조실 청화 스님을 은사로 모신 뒤 염불선으로 득력한 후인 46세부터 본격화됐다.
이윽고 스님의 화두 참구는 49세에 경봉 스님 회상인 통도사 극락선원에서 큰 결실을 맺었다.
이후 스님은 제자 양성을 위한 도량 건립 불사에 운력을 마다않고 정진하면서도, 잠시도 화두를 놓지 않고 있다. 현재는 서울 상계동, 남양주, 송탄에 창건한 같은 이름의 사찰 '성관사' 네 곳과 대각선원에서 수좌들을 지도하고 있다. 25명의 출가상좌가 있으며, 이중 14명이 동국대 출신이다.
■투철한 참회·계행으로 수행근기 갖춰야
전북 장수군 장계면 금덕리 산 32-2번지. 장계면의 넓은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늑한 산자락에 자리잡은 성관사. 주변 지형은 백학이 나는 형국으로, 남덕유산 지맥인 깃대봉에서 수많은 학이 날아와 모이를 쪼아먹는 곳에 성관사가 들어서 있다.
15 일 구불구불한 산길을 헤치고 도착한 성관사에서는 설법전과 수련관 건립 등의 건립불사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수백 미터 위쪽에 자리잡은 대각선원은 19일 동안거 결제를 며칠 앞두고 이미 23명의 수좌들이 정진에 들어간 상태였다.종무소에서 대각선원장 월성 스님을 친견하기에 앞서, 상좌인 주지 성진 스님을 만나 큰스님에 대한 이모저모를 여쭈었다.
"큰스님은 절 하기와 염불, 독경을 통해 망상을 정리하고 삼매를 체험한 후 화두를 잡으면 7일이면 화두가 타파된다고 하세요. 만약 스스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세월만 낭비할 뿐 화두 타파는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대각선원에서는 결제 동안 가까운 산으로 등산조차 금지될 정도로 계율이 엄격하다고 한다. 오신채는 물론 초콜릿, 우유, 빵도 함부로 먹을 수 없다. 사사로운 음식에서 나오는 인연법도 허투루 여기지 않을 정도로 선원의 청규는 서릿발 같다.
이렇게 3년만 공부하면 많은 악습이 떨어지고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 성진 스님의 말이다.
주지 스님과의 대화가 끝난 후 중화당에서 월성 스님을 친견했다. 온화한 미소가 시골 할아버지 같은 월성 스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목숨을 내건 정진을 강조하신다.
"옛날에는 조계 가풍에서도 염불은 기초수행에 들어갔습니다. 업연(業緣) 많은 중생은 머리를 깎아도 망상이 많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죠. 아만심이 수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절을 통해 참회하고, 계행을 철저히 닦아 수행의 근기를 갖추어 나가야 합니다."
스님의 경험에 따르면 절은 망상을 제어하기에 가장 좋은 방편이다. 수천 배를 하다보면 망상이 들어올 여지가 없어지고, 저절로 하심(下心)이 된다. 그래서 월성 스님은 절 하기와 염불 정근을 잡초 즉, 번뇌와 업장을 녹이는 '배추밭 김매기'에 자주 비유한다.
배추밭에 잡초가 없다면 배추는 잘 자라게 된다. 이 때 배추 씨앗은 자성불(自性佛)이다. 다겁의 윤회를 통해 자란 잡초들을 정리하지 못한다면 힘든 고행도 소용이 없다. 수많은 전생의 수행을 통해 득력(得力)한 상태가 아니라면, 몸과 마음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득력해야 한다. 득력이 되면 자성불은 저절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 때 화두는 타파된다. 참선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스스로 지치고, 가르침도 받을 수 없다.
스님은 45세가 되기 전까지 20여년간 하루 1만2천배 기도를 5∼6년씩 3회에 걸쳐 실시하는 등 거의 매일 3천배 절하기를 한 초인적인 원력을 보여주었다. 100일씩 나눠 300일씩 하는 1만2000배 기도를 통해 망상을 제거하고 참회를 통해 업장을 소멸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 1만2천배 기도는 반야심경 221편, 천수경 121편 독송, 참회의 절 3천배, 신도를 위한 절 3천배 등으로 진행되었다. 스님은 보리를 한 말 빻아놓고 보릿가루 한 컵을 마시며 24시간을 견뎠다. 한 말이면 100일을 먹을 수 있었는데, 소변과 대변은 열흘에 한번만 보아도 몸에 이상이 없었다.
그때 스님은 '절 삼매'에 빠져 하루 종일 1만2천배를 해도 1분을 했는지, 한 시간을 했는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신도들이 공양을 들라고 해도 며칠째 모르기도 했다. 스님이 계속 '석가모니불'만 부르며 절하다가 비틀거리며 걸어나오면 신도들이 '스님 돌아가신다'며 펑펑 울기도 했다. 이 때 돌아가실 것처럼 정진하던 모습을 지켜본 신도들도 따라서 열심히 수행했다 한다. 지금은 노인이 다 된 성관사의 신심 깊은 우바새, 우바이들이다.
"내가 3천배를 처음 시작할 때는 그래도 상(相)이 남아 못된 스님의 가사자락만 보아도 싫을 때가 있었지만, 1만2천배 정진에 들어갔을 때는 무아지경에서 업장이 녹아내리는 걸 느꼈습니다. 눈은 아래를 보고 있어도, 등 뒤에서 엄청난 용광로와도 같은 불덩어리가 내 몸을 관통하더군요. 이 불구덩이가 지나갈 때 탐진치 삼독과 일체의 번뇌가 사라지고 평온한 마음이 찾아드는 걸 체험했습니다. 여기서 혜안(慧眼)과 식(識)이 열리는 것이지요."
진리의 말씀을 믿고 행하며 깨닫는 참된 '기도'는 그대로 스스로를 정화시키고, 주변환경을 진리공덕으로 장엄하게 한다. 즉 '절 수행'은 제불보살에게 구하여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원만구족한 불보살님의 마음으로 회복시키는 수행방편이었다.
엄청난 절 수행과 염불, 독경으로 수행력을 얻게 된 스님은 어느 절에 가도 조실 스님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특히 송광사 방장 구산 스님은 스님을 꼭 끌어안고 옆에 앉히시면서 상좌들에게 말씀하기도 하셨다.
"이 눈깔 먼 놈들아, 절해라."
30 대 중반 무렵, 하안거 결제를 하고 일주일쯤 접어들었을 때 구산 스님이 같이 살자고 말씀하셨다.
"결제 중에 어찌 그런 말씀이십니까?"
"자네는 결제가 필요없는 사람이야. 여기 나하고 같이 한 방에서 사세."
"저질러 놓은 일도 있고 업이 많습니다. 스님,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한번 뵙겠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정진은 절, 염불, 독경에 머물수 없었다. 절 수행과 염불정진으로 나타나는 경지인 '절 삼매'와 '염불 삼매'는 참선정진으로 드러나는 '화두 삼매'와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절 삼매로는 무아(無我)의 세계를, 염불 삼매로는 화엄경과 법화경에 나오는 불보살의 세계와 33천 대천세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두를 타파하면 필설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우주와 하나가 되는 절대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스님은 3천대천 세계를 체험하고 화신불 응신불 법신불을 친견할 수 있는 '절 삼매'와 '염불 삼매'는 탐진치가 멸한 '화두 삼매'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염불 삼매는 이른바 팔지보살의 세계이며, 화두 삼매의 경지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절대세계로써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설명이다. 물론 스님은 환희심을 불러일으키는 염불 삼매의 경지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절과 염불로 삼매를 얻어 무아의 경지를 체득하고 망상을 조복받으면 화두는 저절로 타파되기 때문이다.
월성 스님의 화두 참구는 31세에 인천 용화사 조실 전강 스님을 친견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월성 스님이 전강 스님을 찾아갈 당시 용화사에는 담도 없어서, 2천여명 정도가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월성 스님이 들어갈 수 가 없어 대문 쪽에 그냥 서 있는데, 법상에 앉아 계시던 전강스님이 손짓으로 불렀다.
사람들이 길을 터주어 가까이 다가가니 전강 스님이 말씀하셨다.
"귀 좀 줘."
"칼을 가져오지 않아 귀를 잘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귀를 이리 좀 대봐."
그러시더니 전강 스님이 월성 스님의 귀를 잡아당기며, 소곤소곤 말하는 것이었다.
"얼굴을 보니까, 여기 2천명이 앉아 있어도 너밖에 공부할 놈이 없어. 그래서 내가 불렀어. 언제 기회가 되어서 화두를 공부하면 '이뭐꼬'를 챙겨라."
그러나 본격적인 화두 참구는 36세에 성륜사 조실 청화 스님을 은사로 모신 뒤 염불선으로 득력한 후인 46세부터 본격화됐다. 결국 스님의 화두 참구는 49세에 경봉 스님 회상인 통도사 극락선원에서 큰 결실을 맺는다.
극락암에서 엿새가 되는 날부터는 화두를 한번 챙기면 하루 종일 끝도 없었다. 그 때는 길을 가다가도 의심만 챙겨지면 알지 못하는 선정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한달 하루 동안의 선정체험을 통해 '나'라는 것을 찾을 길이 없으며, 우주와 하나됨을 알게 됐다. 21세부터 해인사, 통도사, 봉암사, 백양사 등 제방의 선원에서 정진한 후 30여년만에 얻은 실로 감격적인 소식이었다.
월성 스님은 화두 참구에 앞서 절 수행과 염불, 독경 등의 정진이 필요한 이유를 땅에 말뚝을 박는 데 비유했다.
"말뚝을 땅에 박을 때 계속해서 크게 해머질을 할 수는 없습니다. 몇 번은 살살 두드리고 다시 힘을 모아서 크게 내려칠 때 말뚝은 땅 속으로 깊이 박히게 됩니다. 화두 참구도 이와 같아서 평소의 정진에 의해서 얻어진 힘의 바탕 위에 용맹정진을 통하여 선정의 힘이 크게 증장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말뚝 박듯이 온 정성과 힘을 기울인다면 안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목숨을 건 스님의 용맹정진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스님은 28세에 삼각산 법화사 옆, 호랑이 굴에서 31세까지 토굴 정진을 했다. 당시 이 곳에는 호랑이 들이 많아 사람들이 얼씬도 못하는 곳이었지만, 스님은 호랑이와 몇 번이나 마주치면서도 '도를 닦는다는 사람이면 자기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각오로 위험을 무릎쓰고 동굴에서 정진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한 겨울 호랑이 두 마리와 맞닥뜨려 죽을 지경에 처했다. 호랑이가 혀로 스님의 얼굴을 거칠게 핥는 위기일발의 순간에 스님은 "내가 전생에 업을 많이 지어서 너희들에게 내가 잔인하게 굴었다면 내 목숨을 줄 것이며, 내가 너희를 도와줬다면 너희들도 나를 돕고 갈 것"이라며 태연하게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삼매에 들자 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월성 스님은 요즘도 깊은 잠에 들지 않는다. 20여분씩 잠깐 귀잠을 잘 뿐이다. 좌선할 때나 포행할 때는 물론 잠을 자면서도 숨소리를 들으며, 화두를 놓지 않는다. 이른바 보림의 과정이다. 옛 스님네들은 견성 이후의 수행 즉 '불행(佛行)'을 늦추지 않았다. 오랫동안 중생으로 살아온 습이 한 순간에 떨어져 나가긴 힘들기 때문이리라.
스님은 불교를 제대로 알지 못하던 어릴 때부터 이웃을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평소 '중은 공인(公人)이다'고 강조해 온 스님은 요즘도 제자들에게 기도후 세계평화와 인류평화, 조국평화통일, 국가재난 소멸, 국가 안녕과 태평, 육도중생의 성불을 발원할 것을 꼭 당부한다. 남을 위한 기도는 결국 자신을 위한 기도요 수행이며, 이런 발원이 쌓여야만 보다 큰 그릇이 될 뿐만 아니라 성취도 빠르기 때문이다.
"얼마나 큰 공부를 하고 큰 성과를 얻느냐는 얼마나 큰 발원을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세계평화와 조국통일, 온 국민이 삼세업장을 소멸하고 왕생극락하길 발원하는 것은 큰 공부를 짓기 위한 것입니다. 진정 확철대오를 원한다면 남을 위해 살고 아상을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첫댓글"조선조 500년의 암흑기를 지나 온 불교는 사회적으로 다시 걸음마 단계의 과도기를 겪고 있다. 그러나 끊임없는 법난과 종단 분규가 있었어도 한 생각 일으켜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도인들의 서원이 이어지고 있다. 아직 겉으로 잘 드러나진 않지만, 땅에서 받은 각자 인연법에 맞게 중생제도를 하고 있다. 이제는 출가하는 스님네들이 사회에서 대학교육까지 받고 들어오기 때문에 사회화는 앞으로 더욱 활발할 것이다. 지금 젊은 스님들이 중진급이 되는 10년후면 불교의 미래는 더욱 밝을 것이며, 종교간의 벽도 허물어질 것이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첫댓글 "조선조 500년의 암흑기를 지나 온 불교는 사회적으로 다시 걸음마 단계의 과도기를 겪고 있다. 그러나 끊임없는 법난과 종단 분규가 있었어도 한 생각 일으켜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도인들의 서원이 이어지고 있다. 아직 겉으로 잘 드러나진 않지만, 땅에서 받은 각자 인연법에 맞게 중생제도를 하고 있다. 이제는 출가하는 스님네들이 사회에서 대학교육까지 받고 들어오기 때문에 사회화는 앞으로 더욱 활발할 것이다. 지금 젊은 스님들이 중진급이 되는 10년후면 불교의 미래는 더욱 밝을 것이며, 종교간의 벽도 허물어질 것이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엄청난 수행 정진력이시네여...()...
"어떤 때 법문을 할 때 보면 지옥으로 끌려가는 중생들이 눈에 보여 눈시울이 뜨거울 때가 있습니다".....으흐흐 무섭습니다. 착하게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마하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