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단절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10년쯤? 생각보다 육아가 길어져서 생긴 일이죠. 아이가 어릴 때 많이 아팠거든요. 그 덕에 딸 하나이지만 애 다섯쯤은 키운 것 같다고 저는 농을 치곤 합니다. 아이가 건강해졌으니 웃으며 할 수 있는 말이지만요. 그래서였겠죠. 저에게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은 먼저 경력단절 여성의 이야기로 다가왔어요. 천재 건축가로 촉망받던 버나뎃(케이트 블란쳇)이 20년 동굴 생활을 겪은 후 밖으로 나와 꿈을 되찾는 여정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그뿐만은 아닙니다. 영화는 ‘단절’이라 여겼던 시간이 어떻게, 왜, ‘지속’이었는지, 분리되고 흩어진 인생의 경험들이 어떻게 하나로 꿰어지는지 이야기합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에 이르기까지 젊을 때 만난 두 연인의 조각난 세월을 하나로 이어 붙였듯이, 〈보이후드〉에서는 아예 한 소년의 성장기를 12년 동안 진득하게 따라갔듯이,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제각각인 사건들에 흐름을 만드는 일에 탁월한 감각을 보여왔습니다. 그리고 케이트 블란쳇! 마치 〈블루 재스민〉에서의 그를 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가 아니었다면 미쳤다는 말을 들을 만큼 예민한 괴짜 천재를 이렇게 사랑스럽게 연기할 배우가 또 있었을까요. 〈어디갔어, 버나뎃〉은 마리아 셈플이 쓴 동명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편지와 공식 문서와 1인칭 서술의 파편들로 이루어진 소설을 하나의 서사로 이어낸 점도 링클레이터 영화의 큰 공적이네요.
이하 사진: 〈어디갔어, 버나뎃〉 스틸컷
사라진 엄마
전 과목 슈퍼A 학점인 딸의 중학교 졸업 선물로 남극 가족 여행을 약속한 엄마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워낙 여행도 사람도 싫어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어렵게 맘먹고 낚시 조끼와 멀미약 준비까지 마쳐서, 이제 곧 떠나기만 하면 되었는데 말이죠. 게일러 스트리트 학교에 다니는 비 브랜치(엠마 넬슨)와 엄마 버나뎃 폭스, 마이크로소프트사 인공지능 로봇 개발 책임자인 아빠 엘진 브랜치(빌리 크루덥)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얼핏 버나뎃은 도망친 것처럼 보였습니다. 궁지에 몰려있어서요. 그가 ‘각다귀’라 부르는 이웃 학부모 오드리(크리스틴 위그)와의 불화가 극에 달했고, 대낮에 약국에서 널브러져 자다가 동네 망신을 샀는가 하면, 그가 고용한 델리의 가상 도우미 ‘만줄라’가 러시아 범죄조직과 연관돼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죠. 헛똑똑이 버나뎃이 신용 정보를 모두 넘겨준 바람에 마피아가 이 가족의 재산을 모조리 차지하려고 시애틀로 날아오고 있습니다. 그간 처방받은 수면 유도제들을 한데 모아두었던 사실도 남편에게 들켰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엘진은 커츠 박사(주디 그리어)에게 의뢰해서 버나뎃을 정신병원에 보낼 생각을 하게 됐죠. 마피아로부터 그를 보호해야 한다며 FBI 요원도 적극 동의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버나뎃이 상담 도중 화장실로 몸을 피했다가 돌연 사라진 거였어요.
그가 현실로부터 도망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어요. 20년 전 버나뎃과 엘진은 갑자기 LA를 떠나 시애틀에 정착했습니다. 당시 버나뎃은 남성뿐인 건축계에서 프린스턴 출신 여성 건축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천재들만 받는 맥아더상을 최연소로 수상하면서 승승장구하던 중이었어요. 하지만 3년 동안 모든 것을 쏟아부은 건축물 ‘20마일 하우스’가 하루아침에 폭파되면서 버나뎃은 활동을 일체 중단하고 잠적했습니다. 시애틀에서는 아무도 그녀의 과거를 모를 뿐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친구도 없었어요. 버나뎃은 진짜 남극대륙과 드레이크 해협이 두렵고 정신병원이 무서워서 또다시 도망간 걸까요?
꿈을 담은 이름, 성녀 버나뎃과 아기 크리슈나
커츠 박사는 이런 버나뎃에게 적응장애와 극심한 우울증이 있다는 진단을 내렸어요. 엘진도 동의합니다. 모든 정황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비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엄마가 약을 모아둔 이유는 자아를 잃어버리기 싫어서였고, 비를 다시 못 볼 행동을 할 사람은 절대로 아니라고 믿었죠. 쉽게 흥분하지만 큰일 앞에서는 누구보다 침착하고 당당하다는 점, 사람들을 싫어하지만 엄마의 철벽이 아주 엉뚱한 순간에(예컨대 귀여운 것 앞에서) 아이처럼 허물어진다는 점을 비는 알고 있었어요. 비에게 버나뎃은 다정하고 유쾌한 최고의 친구였습니다.
동료였던 폴 젤리네크(로렌스 피시번)에게 버나뎃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면 남다른 이 모녀 관계를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저로서는 생과 사를 단둘이 건너온 동지애 같은 것이 느껴졌는데요. 시애틀에 와서 버나뎃은 수년 동안 네 번 유산한 끝에 비를 품에 안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선천성 심장 질환으로 여섯 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어요. 엘진이 열심히 일해 마이크로소프트의 중책에 오르는 동안 비와 버나뎃은 5년을 종합병원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온몸에 전선과 튜브를 매달고 있는 새파란 아기를 보자마자, 버나뎃은 바라크리슈나(아기로 환신한 크리슈나)를 떠올리며 외쳤다고 해요. “이 아기는 죽지 않아. 창조와 파괴의 신, 아기 크리슈나잖아!” 비의 본명은 얼떨결에 ‘바라크리슈나 브랜치’가 됐어요. 곧 생명이 꺼질 것 같은 아기에게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난다는 신의 이름을 지어주며 이 엄마는 얼마나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까요.
실제로 버나뎃은 자신과 이름이 같은 성녀의 목걸이를 앞에 두고 서원을 했습니다. 맥아더상을 수상한 직후 엘진으로부터 선물받은 목걸이였어요. 성녀 버나뎃은 루르드의 성모 발현을 목격한 인물로, 18번의 계시와 기적을 체험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엘진은 목걸이를 주며 “첫 번째는 ‘비버 바이포컬’(버나뎃이 친환경 건축으로 리모델링한 그들의 첫 보금자리), 두 번째 기적은 ‘20마일 하우스’, 나머지 열여섯은 이제부터야”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버나뎃은 병원에서 나머지 열여섯 개의 기적과 비의 생명을 바꾸겠다고 맹세한 거죠. 버나뎃의 잠적을 실패로 인한 좌절로만 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버나뎃은 인생의 남은 모든 기적을 하나로 모아 딸의 생명을 소원했고 그 기도는 응답되었으며, 버나뎃은 고통과 불안을 감내하며 스스로 신 앞에서 약속을 지키고 있던 거라고 말이지요.
이야기를 잠잠히 듣던 폴은 버나뎃에게 우울증 치료 대신 다른 처방을 내려줍니다. 다시 창작하라는 거였어요. “너 같은 예술가는 창작(창조)을 하지 않으면 사회에 위협(파괴)이 되지.” 바라크리슈나가 창조와 파괴의 신이라는 점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군요. 저는 영화가 이 대목에서 커츠와 폴의 진단을 나란히 편집한 방식을 참 좋아합니다. 과학자인 엘진이 정신과 의사 커츠를 만나 버나뎃의 문제를 상담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각, 버나뎃은 폴을 만나 자기 이야기를 쏟아놓고 있습니다. 과학이 버나뎃을 두고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달아난 사람이며 환자라고 말할 때, 예술은 그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인 사람이며, 기적을 믿었고 생명의 편에 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어서 그 생명력을 파괴 대신 창조하는 일에 쓰라고 말이지요.
다음 기적은 ‘당신의 탈출’
“예술가들은 작업을 하지 않는 고통이 작업의 고통을 넘어서야만 비로소 작업에 임하는 법”이라고, 미국의 도예가 스테판 디 스테블러가 말했다는군요.1) 버나뎃이 화장실을 탈출해서 홀로 남극에 이를 즈음 바로 이런 상태가 아니었을까요. 네, 버나뎃이 어디에 갔느냐면요, 바로 남극이랍니다. 영화의 오프닝이 이미 스포일러니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밤하늘인지 우주인지 모를 까만 화면에 흰 점이 총총한 영상으로 도입부를 삼은 것은 아주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영상 아래쪽에 곧 빨갛고 노란 여덟 척의 배가 나타나 이곳이 바다라고 알려주는데요. 그중 한 척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제 갈 길을 갑니다. 버나뎃의 카약이었어요. 어두운 밤이고 막막한 우주인 줄 알았는데 생명이 존재하는 바다였고, “밤도 없는 유령의 땅에서 유령선을 탄 유령같이” 홀로 떠돌고 있다고 느꼈는데 거기서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고, 휴대폰 같은 첨단 기술이나 건축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곳으로 도망치듯 떠났는데 버나뎃은 그곳에서 예술가로 다시 태어나 심장이 쿵쾅거리는 경험을 하게 되죠.
팔머 연구기지에서 책임자 엘런(케이트 버튼)이 남극점의 겨울에 대해 엄포를 놓는 장면은 특히 비상하고 유쾌합니다. 거기서는 반사회적 성향을 지닌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어서 홀로 많은 시간을 견뎌야 하고 운동과 외출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샤워도 아주 가끔 할 수 있을 뿐이라고 엘런이 겁을 주는데요. 그 말을 듣는 버나뎃의 눈빛이 얼마나 총총거리던지요. “지난 20년 동안, 제가 그걸 위해 훈련해온 것 같아요!” 그리고 버나뎃은 곧 껑충껑충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뛰어갑니다. 버나뎃은 그야말로 지구의 끝에서, 단절이 곧 지속이 된 인생의 역설을 경험하고 파괴자에서 창조자로 다시 태어났어요.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었을까요. “아, 그 모든 것이 오늘을 위한 연습이었어!”라는 깨달음이라니요.
다시 뭉친 이 가족은 함께 ‘기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엘진이 버나뎃 앞에 성녀의 목걸이를 내미는데, 비와 엘진은 차례로 “내가 나머지 기적을 다 차지할 순 없어” “맞아, 우리에겐 아직 많은 기적이 남아있어”라고 말했어요. 원작에서는 이 장면에서 엘진의 카드가 등장합니다. 기적의 네 번째 자리에 그는 “당신의 탈출. 앞으로 열네 개의 기적이 남았어”라고 썼어요. 화장실에서 탈출한 버나뎃이 남극 여행에 성공하고 마침내 긴 은둔 생활로부터도 탈출하게 되었다는 의미였겠지요. 이 과정에서 ‘각다귀’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것도 이 네 번째 기적의 일부입니다.
건축자재가 귀한 남극에서 이제 버나뎃은 한때 이름을 날렸다가 비웃음을 샀던 ‘친환경 건축 선구자’의 진면목도 증명하게 되겠지요. 단절의 시기에도 그가 블랙베리 여린 덩굴이 햇빛을 볼 수 있도록 방바닥의 카펫을 주저 없이 잘라내는 생명 감수성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요컨대 죽어가던 아기가 되살아나는 엄청난 사건뿐 아니라, 불가해한 세상이 이해되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실패와 고통이 해석되고, 성가시기만 했던 ‘각다귀’와 친구가 되고, 절망 중에도 작은 생명이 눈에 들어오는 일이야말로 진짜 기적이라고 〈어디갔어, 버나뎃〉은 말합니다. 한 방의 큰 기적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삶의 자잘한 기적들을 모두 잠식할 수는 없다고 말이지요. 생각할수록 기적 자체인 영혼의 거듭남도, 딸의 생존도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아직 계시와 기적이 열네 개쯤 남아있을까요.
■ 주
1) 데이비드 베일즈·테드 올랜드, 임경아 옮김,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루비박스), 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