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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월 7일은 존 로스(John Ross·羅約翰[라약한], 1842~1915) 목사가 타계한 지 100주기가 되는 날이다. 시작과 끝이 만나듯이 한국 개신교사의 첫 장에 등장하는 로스의 삶과 사역과 신학이, 굽이치는 카이로스의 한 전환점을 돌아가는 오늘 한국교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로스에게는 네 가지 면이 있다. 첫째, 만주선교와 한국선교를 개척한 열정적인 목회 선교사였다. 둘째, 선교 방법론, 타종교 신학, 한국어, 한국사, 중국사 관련 저서만 7권 이상을 출판한 대학자였다. 셋째, 첫 한글 신약전서를 완역한 성서 번역의 천재였다. 그리고 넷째, 한국에서도 널리 사용된 여러 권의 주석서를 쓴 성서 신학자였다. 로스의 이런 다양한 모습을 한국교회와 관련하여 살펴보자.
‘개척 선교사’ 로스
로스는 1872년부터 1910년까지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 해외선교부 만주선교회의 첫 선교사로서 38년 간 봉사했다. 한국에는 1회 1887년 9월에 서울을 방문했지만 한국 개신교의 출발과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를 처음 본격적으로 연구한 그레이슨(김정현) 교수는 로스를 만주의 첫 선교사일 뿐 아니라 ‘한국의 첫 선교사’로 지칭했다. 미국 선교사들이 1884~1885년 서울에 오기 전 고려문에서 의주 상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한글 복음서를 번역하여, 첫 한국인 세례자들과 최초의 ‘자생적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로스는 영국장로교회의 번즈(W. C. Burns, 1815~1868)가 1867년 가을 우장(牛庄 Newchwang: 도시는 영구[營口])에서 만주 선교를 개척하다가 이듬해 4월 4일에 병사하자, 1872년 10월 영구에 파송되었다. 내지 개척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의 영적 스승이었던 번즈는 녹슬어서 못 쓰게 된 칼날이 아니라 너무 많이 써서 없어진 칼날의 생애를 살았다. 로스는 성자 번즈의 제자로 영구장로교회(1872)에 이어 심양동광장로교회(1889)를 세웠다.
로스는 또한 1866년 8월 말 평양에서 제너럴셔먼 호 사건으로 사망한 토마스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중국지부 총무인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韋廉臣[위렴신], 1829~1890) 목사로부터 듣고 그 열망을 실천하기로 작정했다. 1874년 10월 조선과 국경무역이 허락된 책문인 고려문을 처음 방문하고 한국 정보를 수집했다. 이때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고려문에 온 50대 남자에게 한문 신약전서와 번즈가 번역한 《正道啓蒙》(정도계몽)을 주었다. 이 책들을 읽은 그 아들 백홍준이 몇 년 뒤 개종하고 세례를 받고 의주의 첫 전도인이 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봄에 두 번째 고려문을 방문하고 어학교사로 이응찬을 고용했다. 그와 함께 한국어 교본 《Corean Primer》(1877)를 출판하고, 한문 소책자와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1879년 한국인 4명이 처음으로 영구장로교회에서 로스의 동역자이자 매제인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馬勤泰[마근태], 1837~1905)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김양선 목사는 이들이 김진기,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라고 밝혔으나, 1차 자료로 확인되는 이름은 백홍준과 이응찬이다. 1880년에 영구에 예수교를 배우는 한인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안식년 휴가로 본국에 가 있던 로스는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매킨타이어는 글을 아는 4명의 한국인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놀라운 추수를 약속하는 첫 열매들이다. 비록 지금 한국은 서양 국가들과의 접촉을 철저히 막고 있지만 쇄국은 곧 무너질 것이다. 또 한국인은 중국인보다 천성적으로 꾸미지 않고 종교성이 많으므로,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신속하게 퍼질 것이다. … 작년에 글을 아는 4명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았고, 기독교의 본질과 교리를 탐구하는 11명이 더 있으며, 동일한 수의 다른 사람들이 자기 민족을 위해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준비하는 문서사업을 위해 7~8일이 걸리는 우리 선교지부까지 올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 기독교회를 향해 열려 있는 새 민족, 새 나라, 새 언어가 있다.”((John Ross, "Manchuria Mission," United Presbyterian Mission Report [Oct. 1, 1880]: 333-334.)
변경도시 의주에서 압록강과 고려문은 새 진리를 수용하려면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문지방을 건너자 쇄국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끄트머리 백두산의 신화가 유유히 흐르다가 의주 부근에서 자유의 머리카락처럼 갈라지는 압록강은 새 종교와 문명을 연결하는 역사의 강이었다. 1780년 연암 박지원이 그 강을 건너며 천주교와 유학의 만남을 묵상했지만, 백 년 후 장돌뱅이 백홍준과 서상륜은 개신교를 수용했다. 한국의 갈릴리 지방 의주에서 자라 서울 양반들로부터 천대받던 상인들은 이미 국경무역을 통해 ‘자립적인 신흥 중산층’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서양 문화에 개방적이었으므로 하나님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복음을 자발적으로 수용했다. 그들은 국법이나 목숨보다 성경에서 발견한 속죄 구원의 진리가 더 소중했기에 영구까지 천 리 길을 걸어가 신앙을 고백했다.
그리고 마침내 1887년 9월 27일 서북 출신 세례교인 13명(백홍준, 서상륜,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 등)과 서울의 노춘경으로 언더우드 목사가 한국의 첫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조직할 때, 로스는 서울을 방문해서 자신이 번역한 성서의 열매를 감격스럽게 바라보았다. 백홍준은 1893년 12월 폐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의주에서 첫 전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견디며 복음을 전했다. 1890년 처음으로 세 명의 조사를 임명했을 때 평안도 지역은 백홍준, 황해도는 최명오, 경기도는 서상륜이 맡았는데 모두 로스의 제자였다.
그동안 한국교회사에서 선교사에 의한 복음의 ‘전래’보다 한국인의 자발적인 복음의 ‘수용’을 지나치게 강조한 민족(주의) 교회론이 있었다. 이제 민족사관과 선교사관을 통합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로스로 인해 개종한 의주와 소래에 있던 한국인 수세자들과 미국 선교사들이 서울에서 만나 첫 장로교회(새문안교회)를 조직한 1887년 9월 27일, 첫 감리교회(정동제일교회)가 시작된 1887년 10월 9일 한국 개신교가 공식 출발했다. 로스와 백홍준과 서상륜과 언더우드와 스크랜턴과 아펜젤러를 함께 공부할 때이다.
‘선교 학자’ 로스
19세기 후반에 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한 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동아시아에 파송되면서 선교의 기초가 되는 동아시아의 언어·문화·역사·종교를 연구하는 학자 선교사들이 등장했다. 이들의 문헌 연구와 선교인류학적 현지 조사 연구가 오늘날 중국학·일본학·한국학의 기초가 되었다. 로스는 중국과 한국의 언어와 역사와 종교를 깊이 연구하여 여러 저술을 남겼다. 어학에서는 《Corean Primer》(1877, 2판 1878), 역사에서는 청 왕조의 역사인 《The Manchus》(1891)와 만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한국사인 《History of Corea》(1879)를 출판했으며(이 두 저서로 1894년 3월 글래스고우대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후에 《The Origin of the Chinese People》(1916)이 간행되었다. 선교학에서는 《Old Wang: The First Chinese Evangelist in Manchuria》(1899)에 이어 그의 주저인 《Mission Methods in Manchuria》(1903, 2판 1906)을 저술했고, 종교학 분야에서는 《The Original Religion of China》(1909)를 저술하여 원시 중국 종교에 유일신론이 있음을 주장했다.
로스의 《History of Corea》(1879)는 영어로 된 최초의 한국사 통사였다. 그는 만주나 한국을 야만 지역으로 보는 중화사상에 반대하고, 만주나 한국을 고유문화를 지닌 인종이 거주하고 중국사에 큰 영향을 준 중요한 세력으로 보았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수 백 권의 한문 서적을 조사했으며 사마광의 《자치통감》 등을 기초 자료로 활용했고, 조선 정부에서 발행된 서적들과 달레의 《한국교회사》(1874) 등 프랑스에서 발행된 책을 이용했다. 역사를 다룬 9개 장에서 고대사를 6개 장에 걸쳐 서술하면서 만주족의 영향을 강조했다. 10~14장은 한국의 풍습·종교·정부·언어·지리 등을 소개했는데, 미래 선교사를 위한 정보 제공 차원이었다. 로스의 한국사는 그리피스의 《Corea the Hermit Nation》(1882)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피스의 책은 이후 1911년까지 9판까지 보완되면서 한국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영어 입문서가 되었고 선교사들의 교과서가 되었으나, 일본과 한국을 하나로 보는 일본 식민사관을 수용한 편견을 지녔다. 반면 로스의 한국사는 만주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강조한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만주 고토에 관심과 만주족과의 상호 관계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Mission Methods in Manchuria》(1903)는 로스 박사의 대표작으로 1874년 3명의 겨자씨 같은 신자로 출발한 만주장로교회가 30년 후 3만 명의 큰 나무로 성장한 만주의 사도행전 이야기이다. 1903년은 반기독교운동인 의화단사건으로 교회가 핍박을 받고 지하교회까지 생기던 위기 시점이었다. 민족주의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만주교회의 활로를 모색해야 했고, 로스는 그 시대적 과제에 진지하게 응답했다.
이 책은 한국 선교에도 수용된 로스의 선교 방법을 설명한다. 그것은 토착교회 설립을 위한 3자 정책(자급·자전·자치)인 ‘네비어스 방법’을 만주 현지에 적용한 ‘로스 방법’이었다. 로스는 네비어스를 존경하고 1887년 9월 서울을 방문하고 새문안교회 조직을 목격한 후 돌아가는 길에 산동의 치푸에서 네비어스를 만나 그의 선교방법론을 배웠다. 1890년 네비어스 부부가 서울에 와서 일주일 동안 네비어스 방법을 강의했다. 그때 참석했던 마페트는 1891년 게일과 함께 선양(瀋陽)의 로스를 방문하고 로스 방법으로 성장하는 만주 교회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이를 평양과 원산에 적용했다. 따라서 1891년 한국장로교회가 공식적으로 채택된 토착교회 방법론은 “네비어스-로스 방법”이었다.
로스 방법은 다음과 같은 목표와 특징이 있다.
1)중국을 근대화(서구화)하려는 기독교 문명론을 배제하지 않았지만 중국적인 토착 교회를 세운다. 2)선교사는 교구 담당 목사와 달리 대도시에 거점을 두고 넓은 지역 교회들을 순회하며 감독한다. 3)선교의 목표는 자급·자전·자치하는 토착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4)신생 교회에는 십자가의 도, 회개, 중생의 복음이 중요하므로 성서비평이나 신학적 논쟁점은 소개하지 않는다. 5)토착인 전도인과 목회자 선별 기준은 지적 수준보다 열정과 영성을 중시한다. 6)전도 대상은 민중이 우선이나 교육받은 중산층도 중요하므로 유·불·선(유교·불교·도교)에 대한 이해를 중시한다. 7)선교 초기에는 교육보다 전도에 치중한다. 8)효과적인 전도 방법은 대중 설교이며 회중과의 토론을 설교에 활용한다. 9)성경 말씀에 능력이 있으므로 성경 번역과 반포가 중요하다. 10)타종교에 대해 성취론적 태도를 취한다. 공격적·배타적인 태도 대신 타종교의 진리와 계시의 흔적을 접촉점으로 수용한다. 전족, 일부다처, 제사 등도 일방적 비판보다 그 긍정성을 옹호하는 열린 자세를 유지한다. 특히 제사는 조상 ‘숭배’가 아닌 ‘추모’로 보며, 일부다처자의 세례도 용인한다. (그러나 1890년 상해선교사대회가 제사 금지와 일부다처자 세례 반대를 결정하자 그 정책을 따랐다.) 11)타교회와의 협력과 일치를 추구한다. 로스는 서간도와 압록강 주변에 있는 한국인 개종자들을 1892년 한국에 있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에 넘겨주었다. 만주 지역은 스코틀랜드장로교회와 아일랜드장로교회가 양분하고 협력한 결과 급성장했다.
로스는 1906년 이 책의 증보판에서 제16장 “교회를 시험하다”를 추가했다. 1세기 초대교회 박해의 역사를 배운 만주교회가 1900년 의화단의 핍박 속에서도 지하교회로 존재하며 신앙을 지키고 1905년 이후 급성장과 부흥의 시대를 맞이했다. 한국도 평양을 중심으로 로스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급성장했다. 1907년 대부흥을 맞이한 후에 핍박기인 1910년대를 맞이한 면에서는 만주 교회와 달랐으나, 두 교회 모두 아시아에서 유래가 없는 성장을 기록한 점에서 네비어스-로스 방법의 정당성이 증명되었다. 네비어스-로스 방법은 롤런드 알렌의 방법과 더불어 오늘 선교 현장에서 토착적인 교회를 설립하는 방법으로 계속 연구되고 있다.
‘성서 번역자’ 로스
성서 사업은 번역·출판·반포를 통해 성경을 읽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비록 반포가 최종 단계이지만,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어려운 단계가 번역이다. 당시엔 한글 활판소가 없었기에 로스는 활자 주조부터 잉크 구입과 인쇄까지 모두 마련하고 가르쳐야 했다. 성경 번역팀을 이끄는 학자요, 출판사 사장이자, 권서를 파송하는 공회 직원으로서 로스는 어떤 방식으로 일했을까.
조선 정부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한반도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전도할 수 없었던 로스는 한글 신약전서를 번역하여 1887년에 완간하고 한국인 권서를 통해 반포함으로써 미래의 선교 사역을 준비하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만주에 장사하러 오는 한국인 상인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한문에 능한 자들을 고용하여 번역하고, 선양에 활판소인 문광서원을 설치하여 상하이와 요코하마에서 주조한 한글 자모로 인쇄하고 출판한 후, 책을 파는 권서를 통해 직접 한국인들에게 전도하도록 했다. 본토 말로 번역된 성경 자체의 능력과 토착인에 의한 자전(字典)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번역 과정은 4기로 나눌 수 있다. 준비기인 제1기는 1876~1877년으로, 이 시기 로스는 이응찬과 함께 《Corean Primer》를 만들었다. 제2기는 1877년부터 로스가 첫 안식년 휴가를 떠난 1879년 4월 10일까지로, 이응찬과 서상륜, 백홍준 등이 한문 문리본 신약전서를 저본으로 마태복음부터 로마서까지를 초역했다. 로스는 이 원고를 들고 스코틀랜드성서공회에 찾아가 복음서 출판 지원을 얻었다. 제3기인 1879년 4월부터 1881년 8월까지는 로스가 본국에 있을 때로, 중국 영구의 매킨타이어가 신약 번역 초고를 완성했다. 매킨타이어는 《Corean Grammar》와 《Analysis of Sentence》 등 한국어 교재를 만들었다. 그는 이응찬 등에게 그리스어 본문의 뜻을 풀이해 주면서 토론을 통해 본문을 수정했다. 또한 《韓佛字典》(한불자전, 1880)과 유학 경전의 언해본을 참고하여 평안도 사투리를 서울말로 수정하고 《2,500단어 어휘집》도 만들었다.
제4기는 로스가 돌아와 선양에 문광서원을 설치한 1881년 9월부터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서》를 완역하는 1886년 가을까지로, 매킨타이어의 복음서 초고를 재수정하면서 출판하고 번역을 진행했다. 번역 원칙은 1)1881년에 출판된 옥스퍼드판 그리스어 신약전서와 영어 개역본(RV)를 저본으로 한다는 것, 2)직역과 의역의 조화, 3)순 한글과 쉬운 민중어의 사용, 4)생소한 용어는 음역한다는 것이었다. 번역 방법은 1)한국인 제1번역자가 한문 문리본에서 초역, 2)로스가 그리스어 성경을 참고하면서 이응찬과 2차 번역, 3)제1번역자가 정서, 4) 로스와 이응찬 수정, 5)로스가 그리스어 신약·성구사전·메이어의 주석을 참고하면서 어휘를 대조·통일하여 최종 원고를 작성한 뒤, 식자공에서 넘겨 인쇄했다.
▲ 로스 역본 요한복음 첫페이지. '하느님' 앞에 빈 칸을 두었다. (사진: 옥성득 제공)
1881년 신약을 소개하는 전도지 《예수셩교요령》과 세례신청자를 위한 《예수셩교문답》(1892년 서울에서 《셩경문답》으로 출판됨)을 실험적으로 출간한 후, 1882년 3월과 5월에 첫 복음서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 요안내복음젼서》 각 3,000부를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지원으로 출판했다. 이 쪽복음은 곧바로 서간도 한인촌과 의주에 반포되었다. 이 로스 역본의 번역 특징을 요한복음 1장 1절로 살펴보자.
“처음에도가이스되도가 하느님과함게ㅎ•니도는곳 하느님이라.”(처음에 도가 있으되 도가 하느님과 함께하니 도는 곧 하느님이라)
아직 띄어쓰기, 가로쓰기, 구두점은 없었으나, 대두법(擡頭法)을 채용하여 ‘하느님’ 앞에 빈 칸을 둠으로써 새로운 예배 대상인 하느님을 소개했다. 로스는 서울에서 출판된 유교 경전의 한글 번역을 참고하는 등 철자법 표준화에 고심했는데, 사라진 음가인 아래아(•)의 표기를 줄인 것도 그 노력의 하나였다. 그 결과 ‘하ㄴ•님’을 ‘하느님’으로 표기했다.
현행 개역개정판과 비교해 보면 처음-태초, 도(道)-말씀, 하느님-하나님 등이 다르게 번역되어 있다. 첫 단어 ‘처음’은 文理本(문리본, 1855)의 ‘元始’(원시)나 구역본(1911)과 개역본(1937)의 ‘태초’와 달리 순 우리말이다. 성경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민중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로스의 번역 원칙 때문이었다. 로스는 의주 상인들에게 번역 원고를 읽어보게 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계속 수정했다.
‘말씀’을 도(道)로 번역했다. 만물의 처음에 도가 있었다는 메시지는 유불선 삼교가 추구해 온 도를 구약 히브리어의 다바르(행동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와 신약 그리스어의 로고스(우주를 통치하는 신적 이성)와 동일시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피조물을 통해 드러나지만 동시에 숨어 계신다. 인간 이성을 초월하는 이 현묘한 도와의 신비한 합일을 추구한 도교와 달리 요한복음은 그 “도가 육신을 이루어”(1:14) 우리 가운데 거하며 그가 길[道]이신 예수(14:6)요 그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3:16)고 선언한다.
로스는 한국 종교의 하느님이 성경의 엘로힘과 동일하다는 열린 타종교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교의 새로운 ‘God’를 한국인이 섬겨온 고유의 하느님으로 번역함으로써 한국 영성사에 대전환점을 찍는다. 한국인의 하느님이 히브리인의 엘로힘, 그리스인의 테오스, 영미인의 ‘God’와 연속성을 지닌다는 이 과격한 주장은 하느님이 선교사의 가방에 들려 한반도에 수입된 것이 아니라 수천 년간 한국인과 함께 계시고 한국사 속에서 일하셨다는 감격적인 고백이다. 로스는 ‘하늘에 계신 주’로서의 하느님이 도교의 조화옹인 상제나 천로야와 원시 유교의 주재자요 유일신인 상제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첫째, 순 한글이므로, 둘째, 경전에 있는 죽은 신이 아니라 민중의 현재 삶에 살아있는 신이므로 더 나은 용어로 보았다.
로스가 ‘상제’나 ‘천주’나 ‘신’ 대신 ‘하느님’을 채택함으로써 이후 한국 개신교는 용어 논쟁을 거친 후 (로스의 유일신 흔적 주장, 게일의 어원적 재해석을 통한 ‘하늘에 계신 크신 유일신’ 주장, 헐버트의 단군신화 재해석을 통한 원시유일신앙 존재 증명, 그리고 언더우드의 이 세 가지 수용을 통한 새 용어로 재탄생된) 하ㄴ•님을 공인 용어로 사용하게 된다. 천주교의 프랑스 신부들은 민간 신앙의 하ㄴ•ㄹ님을 알고 있었지만 보수적인 신학 때문에 이를 미신적인 기도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로스는 스코틀랜드장로교회의 진보적 복음주의와 19세기 말에 발전하던 성취론을 이용하여 동아시아 종교의 부분적인 계시와 진리를 수용했다. 그는 한문 성경에서는 유교와 도교의 원시 유일신 ‘上帝’(상제)를 지지했으며, 동일한 성취론 입장에서 한글 성경에서는 하느님/하나님을 채택했다. 로스는 1883년부터 철자법 변화에 따라 하나님으로 표기를 고정했는데 ‘하날에 하나님’ 표기에서 보듯이 의미 변화는 없었다.
로스 역본은 첫 번역본이었으므로 약점도 있었다. 그 결과 1887~1890년 서울에서 상임번역자위원회 안에서 로스 역본 개정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고, 로스 역본을 개정하는 대신 새 번역본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로스 역본의 약점은 평안도 사투리, 맞춤법 오류, 어려운 한자어투 등이었다. 결국 서울 선교사들의 한국어 실력이 늘면서 새 번역본 출간을 결정한 것이었다.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샤머니즘에 대한 오해나 멸시도 있었다. 예를 들면 계시록 21장 8절의 둘째 사망에 처해질 죄인의 목록에서 살인자, 음행자, 우상숭배자와 함께 ‘무당질’하는 자를 넣었는데, 이는 후대에 술객(한글개역), 마술쟁이(공동번역), 점술가(개역개정), 마술쟁이(새번역)로 번역되었다.
로스는 옥스퍼드대학교 중국학 교수 레그(James Legge)와 교류하고, 최신 사본학과 성서 비평을 반영한 그리스어 개정 신약전서(1881, 옥스퍼드판)를 번역 저본으로 채택하고, 표준 본문의 흠정역(KJV)을 개역한 영어 개역본(RV, 1881)을 참고했다. 로스는 한글 번역본이 최신 원문과 영어 개역본의 첫 번역본인 점을 자부하면서 그 정확한 번역에 심혈을 기울였고, 동시에 그 비평적 사본 읽기를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면 1882년판 <요한복음>은 영어 개역본처럼 7장 53절~8장 11절의 간음한 여인 사건을 생략하고 번역하지 않았는데, 그 본문이 “진정성에 대한 증거가 없지 않지만 신빙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즉 그 본문이 마가복음 16장 8절 이후 부분처럼 초기 사본에는 없고 후대 사본에 첨가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1883년부터 로스 역본이 영국성서공회 지원으로 출판되면서 공회가 전통적인 표준 본문을 존중할 것을 요구하였으므로, 1883년판 <요한복음>과 1887년에 완성된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에는 간음한 여인 사건이 들어가게 된다. 그 결과 1882년판 <요한복음>은 한글 성경 역사상 8장 앞부분의 간음한 여인 사건이 없는 유일한 책이 되었다.
로스의 예상대로 첫 한글 복음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선양의 문광서원에서 식자공 김청송은 목판에 글자를 식자하면서 그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 한국 개신교의 다섯 번째 세례교인이 되었다. 그는 이 첫 복음서를 들고 서간도 한인촌에 첫 전도인으로 파송되었으며, 그가 전도한 결과 1884~1885년에 100명이 로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서상륜은 1883년 봄에 여섯 번째 개종자로 선양(봉천)에서 로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가을에 영국성서공회 첫 권서로 한국에 파송되어 의주를 거쳐 서울까지 걸어서 전도한 결과 1884년에 수십 명의 구도자를 얻었고, 소래에서는 동생 서경조와 함께 첫 교회(소래교회)를 세우고 정기적인 주일예배를 드렸다. 또한 백홍준 등은 의주에서 전도하면서 1884년에 설교당을 열었다. 이처럼 외국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김청송, 백홍준, 이성하, 서상륜 등의 의주 청년들의 봇짐을 통해 복음서가 한국인의 손에 들어갔고 첫 신앙공동체들이 세워졌다.
과거 선양은 대륙 군대들이 발진한 곳이었다. 당(한족), 금(여진족), 원(몽고족), 청(만주족, 1636년의 병자호란)의 침략군이 모두 선양에서 출발해 고려문을 넘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를 따라 내려왔다. 군대가 물러가면 사대의 사신 행렬이 그 길을 따라 선양으로 북경으로 갔다. 그러나 이제 그 군사로는 천주교에 이어 개신교가 들어오는 종교로가 되었다.
기독교는 번역의 종교이다. 회교가 아랍어를 거룩한 언어로 여기고 코란의 번역을 반역으로 보고 엄격히 금지하는 근본주의를 고수하는 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한 지역의 본토말로 번역되는 번역성, 곧 성육신을 선교의 제1원리로 삼는다. 예수는 한 지역의 말과 문화로 번역되면서 그들의 살과 피가 되는 동시에, 인간의 죄악성에 도전하는 거룩한 언어와 대안 문화를 창출한다. 다양한 문화의 옷을 입은 ‘번역된 예수’의 모습들이 모여 종말의 우주적 그리스도는 완성되어 간다.
‘성서 주석가’ 로스
로스의 번역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그가 쓴 성경 주석서이다. 초대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읽은 주석서는 그가 참여한 중국선교대회 주석서로 1898~1899년에 출판된 신약 중 마태복음과 서신서 4권, 그리고 1903~1906년에 발간된 구약 주석 중 이사야서와 호세아서가 그의 주석서였다. 이 한문 주석서들은 1920년대까지 한국 목회자들이 읽고 참고하고 설교하면서 한국교회의 성서 해석과 이해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연구가 없기 때문에 서지 정보를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1890년 제2차 상해선교대회에서 1904년에 열릴 선교백주년대회를 기념하여 성경주석(The Conference Commentary) 시리즈를 완간하기로 결의하고, 주석자에 드 보스, 뮈어헤드, 매켄지, 파커, 노이에즈를 임명했으며 이후 로스, 잭슨, 로이드 등을 추가했다. 출판은 1898~1899년 미국성교서회 지원으로 상하이의 중국성교서회가 맡았다. 로스는 파커와 공동으로 <마태복음>을, <디도서> <빌레몬서> <야고보서> <유다서>를 단독으로 집필했다. 1887년까지 한글 신약전서를 완역하면서 철저한 본문 연구를 했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초판 5,000부가 매진되고 약 3년마다 새로운 판이 출간되었다. 그만큼 중국 교인들의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다. 이 신약주석은 한국에 그대로 수입되어 사용되었다. 한편 1911년 민준호가 설립한 동양서원은 첫 과업으로 이 주석 시리즈를 번역하여 3년간 전 21권을 출판했는데, 이원긍이 《마태복음주셕》을, 민준호, 신석구, 백남석 등이 서신서 주석들을 번역하고, 한석진이 교열하여 출판했다. 로스의 주석서는 1910~20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선교 2세기의 문을 연 구약 주석은 1903년 창세기부터 출간하여 1906년 2월 소선지서를 출판함으로써 완성되었다. 로스는 욥기 주석인 《舊約約百註解》(구약약백주해)와 이사야서 주석인 《舊約以賽亞註釋》(구약이새아주석)을 집필했다. 구약 주석서들은 1911년 한글 《셩경젼셔》가 완간되면서 널리 쓰였는데, 1910년대에 이를 이용했던 사용자가 1판부터 4판까지 장신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한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1922년부터 클라크, 밀러, 데밍이 번역하여 조선야소교서회가 출간한 신구약 주석서들도 바로 이 한문 주석 시리즈를 새로 번역한 것이다. 결국 한국교회는 해방 이전에 중국 선교대회 주석서들을 읽었고, 그 가운데 로스의 주석서들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주석서가 구체적으로 설교나 저술에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참고로 선교사들은 1900년대에 주로 《카일 델리취 주석》을 참고했다.
맺는 말
1915년 로스 목사의 사망 소식이 만주에 전해지자 선양의 동광교회 교인들은 강단 후벽에 기념비문을 새겼다. 그 일부분을 보자.
“爲道捨身 遠離祖國 三十八春
(도를 전하기 위해 몸을 던져 멀리 조국을 떠나 38년 세월을 보내셨다.)
播道遙瀋 宣布救恩 四方風動
(요양과 심양에 도를 전파하고 구원의 은혜를 선포하니 사방에서 바람이 일어났다.)
跋涉艱辛 勤艱桓忍 關東一人
(산 넘고 물 건너는 매서운 고난을 근면으로 항상 인내하니 관동 최고의 인물이셨다.) ”
▲ 선양의 동광교회, 1900년. (사진:옥성득 제공) |
38년간 만주 일대에 성령의 바람을 일으킨 당대 최고의 선생이 로스 박사였다. 로스는 만주와 조선의 영혼을 사랑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38년을 인내하며 전도자의 아름다운 발을 가진 개척 선교사로서 한국 개신교회의 첫 신자들을 배출했다. 그는 중국과 조선의 언어, 역사, 풍속, 문화를 깊이 연구한 선교학자였다. 그는 서구 기독교를 이식하는 문화 제국주의 대신, 전통 종교 문화의 선한 요소를 기독교의 접촉점으로 수용하는 성취론을 지지했다. 비록 전통 종교들이 아벨 골짜기의 해골처럼 말랐으나 성령의 바람이 불면 살아날 것을 믿었다. 비록 중국인과 한국인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과거에 여러 종교들을 섬겼으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배에서 생수가 흐를 것을 소망했다. 한 겨리의 소가 함께 밭을 갈듯이, 그는 유교와 기독교가 동아시아인의 도덕성과 영성의 밭을 가는 동역자라고 믿었다. 그는 무엇보다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번역하고 성경을 주석한 성서의 사람이었다.
우리 앞에는 미지의 길이 열려 있다. 이미 그 길을 달리고 승리한 교회에 들어간 믿음의 조상들은 우리가 전투하며 나아가는 길에 방향을 지시하는 나침반과 같다. 선교 개척자, 선교학자, 성서 번역자, 성서 해석자로 산 로스 박사의 삶의 중심에는 토착인과 성경과 연구서가 있었고, 말씀으로 사람을 바꾸고 키워서 역사의 현장으로 보내는 사건들이 있었다. 은퇴하던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사대회에 참석한 그는 “선교사의 극소화와 토착인의 극대화”가 세계 선교의 해답이라고 제시했다. 나는 쇠하고 그리스도는 흥하고, 목사는 사그라지고 신도는 기를 펴고, 교회는 내려가고 이웃은 높아지는 하나님의 나라, 그 가치 역전의 역설적 복음이 열병을 앓고 있는 한국교회에 시원한 하늬바람으로 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