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있을 직무교육장소가 중곡동이라는 공문을 본 후로 내 의식은 불현듯 30년 저쪽으로 날아가게 되었다. 그동안 서울에 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중곡동엔 30년만에 처음인 것 같이 괜히 가슴이 아렸다.
'중곡동 정신병원"
그때만해도 정신병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서 "중곡동 정신병원이라면 무시무시한 정신병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것 같아서 더 머리에 각인 되어 있지만 그보다는 풋풋한 대학생때의 어떤 한 때의 기억이 있어서 더 아릿해졌다.
첫날,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고 나니 아직 20분밖에 되지 않아서 시간이 아직 많이 남게 되었다.
"얘, 우리 길건너 국립병원에 가보지 않을래?"
같이 교육 온 후배에게 말하니 후배도 혼쾌히 좋다고 대답하고 같이 밖으로 나갔다. 금방 인도를 건너서 국립병원에 들어간다. 건물은 거의 그대로 인 것 같았다. 아마 새로이 증축하자면 주민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아서 겉의 건물은 만지지를 못하고 내부만 리모델링해서 쓰는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이 곳은 주위에 아무 건물도 없는 곳에 정신병원 하나만 달랑 있었으나 지금은 앞 뒤 옆으로 큰 동네가 형성돼있어서 옛날 75년도의 그 변두리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였다.
널다란 운동장이 있어서 점심때면 환자들과 포크댄스도 했는데 지금은 온통 주차장이 되어 있다. 그때만해도 차가 많지 않아서 주차장이 필요없었지만 어디를 가도 이제 운동장은 보이지 않고 주차장으로 변해있다. 풋풋한 대학생이 삼십년 만에 중년여인이 되어 이 곳을 둘러보니 감회가 새롭다. 라일락 향기 흩날리는 벤치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니 옛날 우리와 같은 실습 대학생들이 한쪽에 앉아서 병아리처럼 재잘대고 있다.
" 참 오랫만이다, 한 30년 됐나보다, 여기에 온지................."
" 그래요? 저는 몇년 전에 여기에서 교육과정이 있어서 한번 왔었어요"
우리는 간호대학의 선후배 사이이고 우리 간호대학은 매년 이 국립정신병원에서 한달 동안 실습을 했으니, 대학때 이곳에 온 기억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가장 추운 2학년 겨울방학 한달동안 이곳에서 실습을 했으니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다. 물론 난방이 잘되는 기숙사가 있기는 하지만 남들 한가하게 쉬는 겨울방학동안 실습을 한다는 것은 한참 혈기왕성하고 새침한 여대생들은 참 어려웠던 것 같다.
그 해 겨울, 아마 75년도 아니었을까? 시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연말 가수왕 발표시간이 있었고,
"쨍 하고 해뜰 날"을 부른 송대관이 가수왕으로 선발되었다. 얼른 병원 기숙사에 돌아와 텔레비젼을 보니 그 가수가
"쨍하고 해 뜰날 돌아 온단다.................." 하면서 연신 주먹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는 것을 보면서 같이 눈물 흘렸던 기억이 있다. 전라도 어디 면단위 시골에서 이발소에서 손님들 면도해 주던 그가 동네마다 하던 콩쿠르에서 상을 휩쓸면서 사람들의 기대와 부추김을 받으며 서울로 올라왔으나, 어설픈 동네 가수왕이 서울에 와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짐작이 간다. 마침내 그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쨍하고 해뜰날..." 이 돌아 왔으니 그 노래는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노래였다. 더구나 그때는 어려운 칠십년대였다. 지금 트롯트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중년의 가수 송대관은 그렇게 탄생했다.
몇몇 기억에 남는 환자들을 생각해본다. K는 고려대학을 다니던 학생으로서 일찍이 부모를 모두 여의고 형님밑에서 컸다고 한다. 그를 정신병으로 몰고 간것은 죽음보다 더한 외로움때문이었을 것이다. 순한 얼굴에 외로움이 짙게 배인 모습이 생각난다. 오래 지난 후에 그를 모델로 한 소설을 습작으로 써서 어디에 응모했으나 여엉 무소식이었던 기억이 있다. 서울대학을 다닌 L은 제주도 한라산에 올라 갔다가 바위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친 후 간질을 앓게 되어, 정신병이 된 환자로 우리가 올때 창살너머로 손을 한껏 뻗어서 흔들던 생각이 난다. 얼마나 정신병원 창살 밖으로 나오고 싶었을까............
실습 나온 첫날 원장님이 학생들에게 너무 깊게 환자들에게 몰입하지 말라고 주의 주었던 생각이 난다. 환자가 아닌 사람으로서만 대하다 보면 그의 말이 진짜인 것 같아서 학생이 그 사람을 대변하려고 애쓰고, 정말 병도 없는데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변호하려고 한단다. 실제로 당시는 유신독재가 한창이어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탄압을 받을 때였다. Y는 서울대학을 다니다가 온 환자로서 자기는 정치적인 이유로 여기에 구금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마침 당시 보건복지부장관이 시찰나와서 병동에 들렀다가
" 나는 억울하다! 대통령한테 연락좀 해주세요! "고 뛰어 가는 바람에 장관이 혼비백산해서 얼른 나가기도 했다.
당시 원장님은 난장이 장애를 갖고 있었다. 그래도 장애인이 훌륭히 사회에서 일을 하고 계셔서 인상깊었다. 그때 처음으로 정신병 환자에 "싸이코 세라피" 라고 연극을 통한 치료를 주관하던 정신과 의사가 그후에 원장이 되었다는 것을 신문 기사에서 보았다. 환자와 실습학생들이 같이 연극을 하는데, 환자들이 연극도중 자기의 상황을 재현하며, 자기를 정신병으로 끌고 간 평소에 가슴에 맺혔던 말을 토해 내는 것을 보고 놀라곤 했다. 역시 가슴에 맺힌 것이 많으면 그것이 정신병이 되는 것 같다. 그 때의 환자들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정신병의 특성상 아직도 이 병원을 들락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이쁜 대학생에서 이제는 벌써 퇴직을 준비해야하는 중년이 되어 젊은 날 한때 보냈던 이 곳을 기웃거리자니, 정말 인생은 일장춘몽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목숨 걸을 일도, 무언가를 이루려고 싸우며 살 일 아무것 도 없는데, 나는 너무 투쟁하듯이 살아 온 것은 아닐까? 이제 다 내려놓고 조용히, 관조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댓글제기동 시댁을 가다 보면 그 정신병원을 지납니다 아이들 아빤 갈때 마다 그러지요 저것이 그 유명한 정신병원이다. 그땐 무서웠지요 대학시절 실습 하던 때를 기억하며 잔잔하게 내리쓴 수필을 같은 시대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75년, 나는 그때 무엇을 했던가 하고 그때를 생각하게 합니다
첫댓글 제기동 시댁을 가다 보면 그 정신병원을 지납니다 아이들 아빤 갈때 마다 그러지요 저것이 그 유명한 정신병원이다. 그땐 무서웠지요 대학시절 실습 하던 때를 기억하며 잔잔하게 내리쓴 수필을 같은 시대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75년, 나는 그때 무엇을 했던가 하고 그때를 생각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