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위 → 전동순교성지 → 치명자산성지 → 되재성당지
0.6Km 2.1Km 40.4Km
12. 전동 순교 성지
89년 봄, 전동 성당 초대 주임신부로
파리외방전교회 보두네신부가 임명되고 본당이 설립되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치명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지
100주년이 되던 1891년 봄에야 현재의 자리에 본당의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전동성당의 유래
전동성당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권상연 야고보가 1791년 12월 8일에
참수되어 순교한 곳으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첫순교터이다.
1801년 10월 24일에는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
유관검이 이곳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했고,
이어 김유산 토마스와 이우집은 참수로 순교하였다.
1889년 봄인 5월 성당이 설립되어 프랑스인 보두네 신부가 첫 본당신부로 부임하였고,
1891년 이곳의 집과 터를 매입하여 본격적인 전주지역 사목활동을 펼쳤다.
1892년에는 성인 새 영세자 19명을 배출하는 등 다양한 복음화가 이루어졌다.
1908년 보두네 신부는 이곳에 성전건립을 시작하였는데,
성전의 설계는 서울 명동성당의 건축 경험이 있었던 프와넬 신부가 하였다.
성전을 짓는 과정에서 재정난을 비롯해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1914년에 성전건축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성전 내부의 전례에 필요한 시설과 성물 등의 설치가 다 이루어 지지 못해
축성식은 갖지 못하고, 축복식만 진행하였다 (이후 축성식은 1931년 6월 18일에 진행).
1915년 8월 24일에는 종 축성식을 가졌다.
성전의 주춧돌로는 전주성의 성벽 돌이 사용되었는데,
일부 돌은 참수된 순교자들의 머리가 성벽에 매달렸을 때
피가 스며든 돌인 것으로 추정된다.
보두네 신부는 당시 당국에서 신작로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성벽을 허물면서 버리던 돌을 구입하였다.
성전 건축에 사용된 목재는 주로 치명자산(승암산)의 나무들이고,
벽돌은 공사를 담당한 중국인 기술자 100여명이 직접 구워 만든 것이다.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전동성당은 한국천주교회의 공식적인 첫 순교자들인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터 위에 세워진 성당으로,
대한민국 순교의 역사적인 기념터이자 뿌리깊은 신앙의 성지이다.
윤지충(바오로)와 권상연(야고보)은 지체높은 양반가의 자제들로,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였으나,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된 후,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자신들이 찾고자 했던 진리에 대한 해답을 얻고,
3년 뒤 윤지충은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권상연은 그로부터 천주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러던중 1790년경 북경의 구베아 주교로부터 제사 금지령이 전달되었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조선의 양반들이 충격을 받고 신앙을 버리게 되지만,
윤지충과 권상연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1791년 여름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여, 권상연과 함께
어머니의 유언대로 유교식 예를 쓰지 않고 신주를 불살라 버렸는데,
이 소식이 조정까지 전해진다.
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에 피신해 있던 그들을 대신해 숙부를 감금하자,
이들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고, 전라 감영에 압송되어
온갖 문초와 배교하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천주를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라는 말로
자신들의 믿음을 당당히 드러내었다.
시대와 배경을 고려해 볼 때 이는 놀라운 신앙 고백이자 선언이었고,
이에 그들에게는 군문효수형이 언도되었다.
그렇게 순교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한 윤지충의 나이는 33세,
권상연의 나이는 41세였다.
그렇게 1791년 한국 교회의 최초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현장,
또 1801년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동료 순교자들의 능지처참과 참수의 현장 위에,
성인들의 순교를 지켜본 성곽의 돌로 성당이 지어짐으로써,
이곳이 순교지일뿐 아니라 ‘신앙의 증거‘, 신앙의 요람’임을 드러냈다.
공사기간동안 전주 시내 신자들은 물론 진안, 장성 등지의 교우들이 밥을 지어먹을
솥과 양식을 짊어지고 와, 손에 굳은 살이 어깨에는 혹이 생기도록 자원 부역을 했다.
그러한 노력 끝에 공사를 시작한지 7년 만인 1914년 외부공사를 마쳤는데,
이듬해 초대 주임 보두네 신부는 성당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56세의 나이로 선종한다.
그 뒤를 이어 받은 제2대본당 주임인 라크루 신부의 주도로,
17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내부공사를 진행하여 마침내 1931년,
착공한지 23년만에 성당을 완성한다.
건축양식
전동성당의 성전은 호남 지방에 최초로 건립된 서양식 건물로서
그 종교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적 차원에서도 매우 귀중한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먼저 성당 정면 아치를 보면, 벽돌로 장식한 부분이 보이는데,
이것을 아키볼트(장식 창도리)라 한다.
정면 중앙에는 높이 솟아 있는 고탑과 좌우 계단탑이 있는데,
고탑 밑에는 종탑이 있고, 종탑 밑에는 미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장미창이 있다.
그리고 보통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은 성당을 받치던 아치가
바닥까지 내려오거나 기둥머리까지 내려오는데,
전동성당의 아치는 채광창이 있는 벽에서 멈추고 색깔을 바꾸어
붉은 벽돌로 기둥머리까지 오도록 하여,
전반적인 따뜻함과 포근함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내부를 보면, 붉은 벽돌 띠가 제대의 뒷벽을 포함해 모든 곳을 감싸고 있는데,
이 역시 내부 공간 전체에 따뜻함을 주면서 동시에
내부의 수직성과 수평성을 균형있게 잡아주고 있다.
참으로 탁월한 조형이며 미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오늘 전동성당에서는 행사가 있어서 차량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는데,
제주도에서 왔다고 사정을 하여 30분 시간을 얻었다.
근처는 전주한옥마을로 주차를 할 수 없었기에 특혜를 받은 것이지요.
특히 주말을 맞아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활보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성탄 구유만들 때 사용할 한지구입과
상점을 아이쇼핑한다고 하여 한옥마을에서 내리고
혼자서 치명자산으로 향했습니다.
아내는 여러 번 치명자산 성지를 다녀왔기에
다음 코스에서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13. 치명자산성지
이 산은 옛부터 승암산(중바위산)이라 불렸는데
산정에 천주교 순교자들이 묻힌 이후로는 치명자산
혹은 루갈다산으로 더많이 불려지고 있다.
지방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돼 있는 치명자산 유항검 일가 합장묘에는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였던 유항검과 그의 부인 신희(申喜),
두 아들 유문석·유중성, 제수 이육희의 유해
그리고 동정 부부 순교자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등
7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원래 치명한 후 김제군 재남리(현 용지면 남정리)에 가매장됐다가
전동 본당 초대 신부인 보두네 신부를 비롯한 신자들이
1914년 4월 19일에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
1993년 11월 29일에 이 묘소를 개장, 유해 확인 작업을 벌인 결과,
이 가족 묘소에는 7개의 옹기에 각각 유해가 담겨져 있었으며,
백사발에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고, 숯을 담은 채 옹기를 막아 놓아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이분들 가운데 다섯 분이 2014년 8월 16일 복자의 품위에 오르셨다.
선인들이 해발 300미터의 산정에 님들을 모신 뜻은
세계교회가 ‘진주중의 진주’라고 찬탄하는 동정부부 순교자의
순결한 신심과 고매한 덕행, 그리고 숭고한 순교정신을 높이 기리고
그 님들이 전주를 수호해 주기를 기원함이었다.
순교자 묘 바로 밑에는 님들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4년 5월 9일 건립된 기념 성당이 있고, 그 아래 왼편에는 가파른 산길을 걸으며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십자가의 길이 있다.
오른편에는 전주교구 성직자 묘지가 조성되어있다.
순교신앙을 가슴에 품고 있는 이 산은 진리의 뜻을 세운 사람과
순교자들을 흠모하는 순례자들에게는 믿음의 고향이며,
기도 공원으로 사랑 받는 한국의 몽마르뜨르(순교자 산)이다.
이분들은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 때, 9월부터 4개월 여에 걸쳐
전주 남문밖(현 전동성당), 전주옥, 숲정이에서 처형되어 멸족되었다.
살아 남은 노복과 친지들이 은밀하게 시체를 거두었으나
고향인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땅에 묻히지 못하고
들 건너 재남리 바위백이에 가매장 되었다.
그 후 1914년 4월 19일 전동 성당 보두네 신부와 신도들이 이 산정에 모셨다.
보두네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7구의 순교자 유해를
작은 항아리에 각각 담고 이름을 써서 달았다.
그런 다음 전동 성당을 지을 때 재목을 구하기 위해 사두었던
성당 동쪽 기린봉(306m) 자락에 있는 '치명자산'(전주시 대성동 산 11번지)에
이들 일곱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장하였으니,
그때가 1914년 4월 19일이었다.
이어 1949년에는 전동 성당 신자들이 치명자산에
십자가 기념비를 건립하고 교구장 김현배 신부의 집전으로 제막식을 가졌으며,
1984년에는 이 지역이 지방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전주교구에서는 이를 계기로 치명자산 개발 계획을 세운 뒤
1988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95년 기념 성당을 완공하였다.
14. 되재성당지(升峙聖堂址, 승치성당터)
되재성당은 1895년에 세워진 최초의 한옥 성당으로
4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서울 약현동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성당이다.
초기 성당의 모습은 제8대 조선 대목구장이었던
뮈텔 주교(Gustave Charles Marie Mutel, 閔德孝)의 일기에 그려진 도면과
제1대 대구 대목구장 드망즈 주교(Fiorian Demange, 安世華)가 찍은
사진 자료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바실리카 교회 건축양식을 한식 목구조에 적용한 한옥 성당이었다.
단층 한식 목구조 건물로 기와를 얹은 팔작집이었으며,
평면은 정방형인데 제단과 출입구를 나란히 배치하여
제단을 향하는 공간의 깊이를 확보하였다.
또한 남녀를 구분하는 당시 풍습에 따라 출입문을 따로 내고
내부 중앙에 가림막을 설치하였다.
성당의 부재는 논산 쌍계사의 부재를 사용하였다.
이처럼 되재성당은 서양 문화가 한국에 들어와
정착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념물이다.
그러나 초기 성당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고, 그 자리에
1954년 공소 건물을 새로 세웠다가 2006년 복원사업을 통해 일부 복원되었다.
성당 구내에는 성당 외에 사제관과 기술학교인 태극계명학교 등이 있었고,
성당 뒤편에는 전라도에서 활동했던
두 명의 프랑스 선교사(조스 신부, 라푸르카트 신부) 묘가 있다.
'되재'라는 말은 고개가 되다(=매우 힘들다)라는 뜻이라는 설과
고개가 꼭 됫박을 엎어 놓은 것 같다는 데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성당 문고리에 숟가락으로 끼워놓아 그냥 지나치는 순례객이 많음.
우리도 순례도장을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관할본당인 고산성당에 전화했으나
전화를 받지않아(점심시간이라 사무장 부재) 직접성당을 방문(16.8km)
마침 여성교우 한 분이 성체조배하고 있어 되재성당지에 순례도장이 없다고 말하자,
문고리에 끼워진 숟가락을 빼고 열면 안에 있다고 해서 다시 방문함.
1시간 지체했지만 고산성당(지도 1번 경유지)을 방문할 수 있었다.
고산성당은 1958년에 성모영보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설립되었으며
1894~1895년에 걸쳐 설립된 되재성당(화산면 승치리)을 그 모태로 한다.
고산 본당은 2014년 11월 1일 본당 설립 120주년 기념미사에서
되재 성당에 있던 낡은 십자가와 신자들이 정성껏 쓴 성경필사본을 봉헌하였다.
본당 설립 120주년 기념교육관을 건립하는 등
본당의 120년 신앙 역사를 이어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고산 본당은 2016년 현재 1900여명의 신자와 관할 공소인 되재공소, 수청공소,
넓은바위공소, 비봉공소, 우월공소, 미남공소 등 13개의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