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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 ●청와대앞과 광화문에서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올리는 글 ~~~~~~~~~~~~~~~~ 1949년 6월23일 기독교인들의 방위대회 해방 후 1949년 6월 대한민국은 2019년 지금과 마찬가지로 큰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주한미군은 1949년 5월부터 6월30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철수를 완료하였습니다. 이런 안보 상황들을 보며 많은 국민들이 큰 염려를 하던 국가적 위기의 상황이었습니다. (駐韓美軍撤退時期(주한미군철퇴시기) 侵略對備策協約後決定(침략대비책협약후결정) 동아일보 | 1949.04.20) 이 때에 '혹시 대한민국이 망하지는 않을까'를 우려한 기독교인들이 대거 금식 구국기도회들을 갖고 광장으로 다 뛰쳐나와 큰 집회를 가지기 까지 합니다. 사실 당시의 이런 상황들은 6.25 라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런 심판의 과정을 국가의 위기로 느끼고 기독교인들이 기도하고 집회로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당시 집회는 그 위기를 부르는 원인인 신사참배 배교에 대해서 회개함은 없이 단순히 많이 모이는 것으로만 마치게 되어 한반도에 심판을 막지 못했습니다. 귀중한 집회가 기회를 잡지 못하고 허비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집회가 대체 어떻게 진행되었고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울과 인근(경기도)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모두 다 참여 할 정도로 아주 초대형(?) 집회였던 이 집회는 국회의장(대리인), 각종 장관들, 미국 대사(대리인) 등 세속의 권세자들까지도 축사를 하며 권위를 실어주던 아주 큰 기독교인들의 집회였습니다. 이 집회에 대한 실제 신문 기사 두개를 읽어 보면 당시 분위기가 어땠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 | 1949.06.24 기사 十萬基督敎徒(십만기독교도)가 蹶起(궐기) 熱誠(열성)의 防衛大會(방위대회) 祖國(조국)의 平和戰取(평화전취)를 絕叫(절규) 국제정세의 미묘한 동향과 국내의 망국도배의 춘동은 날로 격심한 요즈음 미군철퇴로 일층일반에 불안감을 주고 있는데 십만 기독교도는 조국의 국토방위를 위하여 지난 십칠일에는 구국금식기도회 열었고 이십삼일에는 시내 기독교도들의 뜨거운 열성의 방위대회가 열렸다. 이에 특기할 사실은 이번 대회에는 기독교의 구교와 신교가 합동되었다는 것은 일찍이 세계에 유례가 없는 기적적인 모임인데 이 합동 행사야 말로 모든 감정과 교리를 떠나 ‘하나님’의 이름 아래 한뎅이로 뭉치어 조국의 방위를 위하여 바친 민족적인 열성이라 하겠다. “조국이 있은 후 민족이 있고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한 종교의 신앙도 자유의 보장도 될 수 있다”라는 슬로건 아래 세계열강기독교 신도들에게 우리 한국의 방위책을 절규하는 이 대회야 말로 실로 구국일대 운동이다 삼일운동 이후 이번이 정치운동에 종교단체가 궐기한 것이 처음이니 만큼 그 의의 또한 큰 것이 있다. 특히 이 대회에는 서울근교 아니 서울 시내의 각교회 신도는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인 것이 또한 이채의 하나이었다. 이날 성동원두 서울운동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모여드는 각 교회신도들을 비롯하여 남여중등학교학생들까지 다수 참가한 가운데 약 삼만여명의 신도들은 정각보다 앞서 전원 집합한 가운데 굳은 신념 밑에 사는 표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식은 이 농림장관 안 문교장관 이 사회장관 및 무치오(무쵸) 미국대사를 대신하여 맥도날드 서기관과 그외 외국인들이 다수 참가한 가운데 식은 정각보다 반시간 늦게 십시반 항금천 목사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식은 순서에 따라 경전 취주악대의 주악에 이어 찬송가(십자가 군병을 따르라)를 소리도 웅장하게 전원봉창을 하고 김유순 목사의 기도와 최석모 목사의 성경낭독 후에 국기목례를 마치고 동대회회장 남궁혁 박사의 간곡한 개회사가 있은 다음 결의문 통과를 박수와 환호속에 통과를 시키고 곧 내빈축사에 들어가 국회의장을 대리하여 동사무총장 대리 이종선씨의 “우리 기독신도들의 열열한 애국열은 조국을 반드시 평화로운 지상천국을 이루고야 말것이라”는 의미심장한 축사가 있었고 미국대사 무치오(무쵸)씨를 대신하여 맥드날드 서기관의 “과거독립을 위하여 악전고투한 기독신도들의 열열한 투쟁사는 우리 미국민은 잘 알고 있으며 이땅에 예수의 정신을 뿌리 깊이 못박음으로서 자유와 정의를 위한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축사에 이어 “정부”와”미국대통령” “미국국회” “구제연합”에 보내는 멧세지를 낭독하고 이어서 찬송, 축도, 주악 등으로 식은 영시경 무난히 마친 후 곧 이어서 시가 행렬로 들어갔다. 경향신문 | 1949.06.24 기사(뉴스) 信仰(신앙)의 힘으로 國土防衛(국토방위)! 백만신도궐기구국대회성황 무기 대신 성서를 들고 국토방위에 나서고자 개최된 구국신도 총궐기 대회는 이십삼일 오전 십시사십분부터 서울 운동장에서 열리었다. 이날 신용산교회를 비롯하여 이백여단체로부터 약 오만명의 기독교 신자들이 참집하였는데 그중 배재중학, 이화 배화 여중생 외 시내 사립 중등학교에 있는 기독교 신자 학생도 합 약 오천여명이 참여를 하여 장내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식은 황금선 목사의 사회로 시작되어 경전취주악단의 주악 찬송가, 기도, 국기 게양, 애국가 제창이 있은 후 남궁혁 목사의 “우리는 신앙의 힘으로 대한민국을 방위해야 한다”는 개회사가 있자 박용희 목사가 “백만신자는 총궐기하여 조국 방위에 나서자”라는 결의문을 낭독하여 우뢰같은 박수로 통과시킨 다음 내빈축사로서 국회의장을 대리하여 국회 사무총장대리 이종선씨와 무치오(무쵸) 미국 대사를 대리하여 맥도날드 서기관이 각각 축사를 하였다. 그리고 정부와 국회에 보내는 서한, 미국 대통령, 유엔 한국 위원단, 세계교회연합회에 보내는 멧세지를 각각 통과 시킨 후에 십이시 지나서 폐회하였는데 식이 끝난 후 대회에 참석하였던 군중들은 동대문 종로를 거쳐 미국 대사관 앞 유엔 한위 본부 시청 앞을 지나 오후 이시경 중창청 앞에서 산회하였다. 1953년 통계에는 기독교인이 약 50만명이고 1954년에는 약 80만명으로 늘었을 정도로 기독교인 숫자는 급격한 성장이 있었지만 1949년에는 기독교인이 몇명이었는지 공식 통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1938년 신사참배 당시 약 20-25만명 추정) 하지만 위 집회에 서울과 그 근교(경기도)의 기독교인들은 학생과 아이들까지 모조리 모였고 5만에서 10만명으로 기록된 것을 보니 대한민국 전체 기독교인 숫자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숫자가 모인 것으로 보입니다. 기사에 쓰여 있는 대로 이 집회 전부터 기독교인들이 곳곳에서 나라를 위한 금식 구국기도회들을 가져 왔었습니다. 이 집회에는 천주교 카톨릭과 개신교가 교리의 차이를 접어두고 “조국이 있은 후 민족이 있고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한 종교의 신앙도 자유의 보장도 될 수 있다”는 슬로건 아래 한 몸으로 일치하여 함께 거리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국회의장, 장관들 및 미국 대사 같은 세상 정치인들 조차도 이 집회를 축하해주었고 집회 중 각 목사님들의 "우리 기독교인들이(신앙으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내용 등의 도전들과 ‘나라의 안전’을 약속하는 성경 말씀들의 선포가 있었고 기도가 있었습니다. 만약 저때 우리가 저 집회에 참여 했다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나라는 상황 상 분명히 위기이지만 이렇게 많은 숫자의 기독교인들이 거리에서 집회와 행진을 하며 좀처럼 하나 될 수 없었던 다른 종교(천주교)와도 대한민국 수호와 종교의 자유를 위해 한데 뭉쳤고 높아 보이던 세상 권세자들 조차 우리 기독교인들을 띄워주는 데다가 우리의 간절한 눈물의 기도 위에 긍정적인 성경 말씀들이 선포되니 나라의 위기를 느끼고 기도했던 많은 성도들은 이 집회를 통하여서 그 기도들이 응답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벅찬 감격과 눈물, 큰 기쁨, 큰 감동과 함께 크게 흥분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많은 수의 당시 기독교인들이 느끼고 확신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딱 1년 뒤 한반도에는 그들의 염려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6.25 라는 대재앙이 터졌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1949년 6월 나라에 안보 위기를 느끼고 혹시 재앙이 터질까 염려하여 기독교인 상당수가 거리로 나와 가졌던 그 눈물겨운 금식기도, 큰 감동의 집회는 어째서 6.25의 심판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일까요? 6.25가 발발하고 끔찍한 일들을 겪은 후에야 살아남은 목회자 분들이 부산에 모여서 성도들 앞에 체면상 하지 못했던 자신들의 간음을 비롯한 신사참배에 대한 통회자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반도에 쏟아지던 심판이 일시정지 집행유예로 유보된 원인들 중 하나입니다. 이 6.25는 당시 기독교인들이 인정하듯이 신사참배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1954년 4월23일 "이 무서운 죄값(신사참배)으로 환란(6.25) 온 줄 믿습니다" 39회 장로교 안동총회 성명서) 하지만 앞서 있었던 1949년 6월 기독교인들의 집회에서는 신사참배 배교에 대한 실제적인 회개가 없었습니다. 그 집회에 참여 했던 왠만한 교단들과 목사들이 행했던 그 배교에 대해서 회개는 없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실 그 당시 대한민국의 위기 상황은 교회의 배교에 대한 심판이 임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즉, 배교에 대한 회개가 절실한 상황이었는데 배교에 대한 회개함 없이 '그 상황을 열심히 해서 이기겠다'는 결의로 마쳤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주시는 그 상황을 자기들이 싸워 이기겠다는 집회가 된 것입니다. 심판을 대할 때는 먼저 그 심판을 부른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하는 것이지 그 죄를 품은 채 '심판' 자체를 대적하겠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1. 그 악한 길에서 떠나 2. 스스로 겸비하고 3.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4.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대하7:14 그 상황을 부른 악한 길을 먼저 떠나고 그 악한 길을 떠나지 않은 채로는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해도 듣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만약 6.25 재앙이 터지기 전에 저 집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당사자들(교단들 및 목사들)이 실제적으로 회개를 했었다면 어땠을까요? 49년 6월의 기독교 집회에는 많은 숫자가 모였습니다. 유명한 세상 권세자들이 지지하고 축하해주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열심히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집회로는 예비되어 있던 6.25 재앙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숫자가 모이고 아무리 유명한 세상 권세자들이 지지해주고 아무리 열심히 금식하며 기도하였더라도 배교에 대한 회개가 없이는 재앙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역사는 반복됩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합니다. 동일한 장소 동일한 명분 동일한 슬로건 동일한 상황 동일한 기도 동일한 선포 동일한 흥분 동일한 감격 크게 차이 없이 저 1949년 때와 거의 동일한 일이 현재 대한민국에 벌어 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6.25 심판을 휴전으로 일시정지하여 집행유예 상태로 만들어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고 바라실까요? 우리에게는 모든 배교/배도를 회개하고 북한 동포들을 자유케 해야 할 사명이 맡겨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회개가 아니라 배교를 더욱 악질적으로 발전 시켜 왔습니다. 돈 사랑, 형통 사랑, 음란 사랑, 권력 사랑, WCC, WEA, 종북질(從北), 음녀 로마 가톨릭과 일치 연합 등등 회개함으로 심판을 만회 할 수 있는 집행유예 기간에 오히려 더 큰 재앙을 부르는 큰 죄들을 쌓아 온 것입니다. 살펴 보았던 것 처럼 1949년 기독교인들은 나라의 심판을 1년 앞둔 위기 상황에서 극적으로 모인 집회를 허비 하였습니다. 그 집회를 그 당시의 위기와 심판을 부르는 배교/배도에 대해 실제 돌이키는 절대절명의 기회로 삼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들이 고생하며 금식하고 기도했다', '우리들이 거리에 정말 많은 숫자가 모였다', '유명 정치인들도 찬동했다', '애국을 위한 진정 종교간 화합이 일어났다' 등등 '우리의 힘, 우리의 신앙’으로 나라의 위기를 넘기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자화자찬 자기만족식 집회로 만족해 버리고는 6.25 재앙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2019년 현재의 우리 역시 저 1949년 조상들의 실수를 또다시 이어감으로 마지막 기회들을 허비하고 있는 것 같아 두렵습니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촉박합니다. 제발 제발 더 늦기전에 이분들의 모든 고생과 노력을 실제 옳은 방향으로 바꿔야 합니다. 회개는 기도를 눈물로 하거나 기도를 종교성 들여서 열심히 했는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실제 범죄의 당사자가 그 죄를 돌이켜 떠나면 되는 것입니다. 눈물이나 기도가 아니라 회개의 열매로 확인 되는 것입니다. 기도자들이 범죄한 당사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그들의 회개하기 까지 참아주시도록 하나님의 심판을 유보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회개는 당사자가 그 악할 길을 떠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을 위한 눈물겨운 기도가 많아도 여전히 그들이 그 배교를 돌이키지 않는 다면 그들 위에 심판은 여전히 유효한 것입니다. 그들이 실제 회개하기 전까지 말입니다. 개개인들의 인본주의 말씀 변개, 돈 사랑, 음란 사랑 뿐 아니라 모든 교단들의 WEA와 WCC 탈퇴, 북한정권과 연계된 종북질 중단, 로마 카톨릭 일치 연합 철회가 실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것을 결정한 당사자인 교단 차원의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마치 1949년의 위기 상황이 교회의 배교에 대한 심판 과정이었던 것처럼 문재인이 권좌에 있는 것 역시 우리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과정인데 우선적으로 배교를 돌이킴 없이 우리 힘으로 문재인만 끌어내리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집회와 기도들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현재 대한민국이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먼저 배교를 회개함 입니다. 이 회개가 우선되지 않은 채로 그저 문재인 끌어내리지 위해 혹은 나라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기도하고 집회에 많이 모이기만 힘쓴다면 1949년 처럼 또다시 소중한 기회를 허비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고생하며 기도하고 집회에 모이는 그 열심이 이제는 교단들과 관련자들에게 배교/배도에 대한 실제 회개의 열매를 촉구하는 방향으로 가야만 합니다. 한국교회의 이 배교들에 대한 돌이킴 없이는 아무리 많은 기독교인이 광장에 모이고 아무리 눈물 겨운 고생으로 기도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이 글은 나라를 위해 애쓰시는 모든 분들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그분들의 열심과 고생이 헛되이 버려지는 방향에서 진정 나라를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돌이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을 이해하는 분들이 일어나 진정 한국교회가 배교에 대한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 할 수 있기를… 이미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의 거의 대부분이 영적으로 눈과 귀가 닫혀 있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중에서 보고 들을 분들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아 주시길 기도합니다. 참고 영상 *출처:
-먼저 배도 죄 회개부터 해야!청와대 앞과 광화문에 모이는
그리스도인들께 올리는 글
하나님께 그 상황을 타개 해 달라고 기도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