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 본문에서는 예수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이나 냉담의 감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중요성을 갖고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침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본문의 경우와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의 견해를 요구했을 때의 두가지 경우이다 본문의 경우에 예수의 침묵은 다음의 네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1) 뒤 따르는 말씀으로 보아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불신과 이 이방 여인의 환영을 비교하시면서 생각에 잠기셨을 것이다. (2) 이 여인이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자신을 부른 것과 비교하여 그것이 다만 예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아첨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참으로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알고 있는지 시험하시고 싶었을 것이다.(3) 구속사의 전개는 분명히 유대인 중심이다.
즉 구약성경이 유대인에게 주어졌고 예수께서도 유대인으로 나셨다. 그리고 천국 복음도 유대인에게 먼저 전파되었다.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굴레를 벗어나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문제에 직면하시게 됨으로써 잠시 침묵이 필요하시게 된 것이다. (4) 이방 여인의 인내와 믿음을 더욱 깊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한편 본문의 예수의 침묵을 통해서 우리는 귀중한 영적 교훈을 깨달을 수 있는데 (1)예수 그리스도의 침묵 속에는 우리의 복음과 열성을 시험하시려는 의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간구가 쉽게 응답되지 않는다고 해서 곧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2) 우리의 소망하는 바에 대한 주님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잘못된 간구야 당연히 거부되는 것이지만 올바로 구한 간구는 하나님이 계획하심에 따라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 보내소서 -
제자들의 이 말이 '그녀의 요구를 늘어 주지말고 그냥 보내소서'라든가 아니면 '그녀의 요구를 빨리 들어주고 보내소서'였든지 간에 이 말은 귀찮은 그 여자를 빨리 쫓아버리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말이었다. 따라서 침묵하는 예수 앞에 그들이 중재자로 나선 것은 그 여자에 대한 진정한 동정심 에서가 아니라 단순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마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 이 구절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의 선교 명령의 반복으로서 예수께서 맡으신 사명이 어떠한 것임을 보여준다. 한편 이것은 구원의 복음이 결코 유대인에게서만 영원히 국한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하는 요 4:22 말씀처럼
(1) 예수께서는 자신의 민족의구원 문제를 일차적으로 생각한 것 같다. 왜냐하면 유대인을 중심으로한 구속사의 전개는 하나님이 직접 작성하신 엄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울도'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고 하였다. (2) 유대인은 예수를 배척했어도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음을 보여준다.
(3) 예수께서는 당신이 주로 유대인 사역에 힘쓰시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전도할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셨는 바, 제자들은 예수의 뒤를 좇아 힘써 선교해야 할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란 표현은 선민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양'이라 표현했던 선지자들의 메시지어서 유래한 것으로 이스라엘이 그들의 참 목자되신 예수를 오히려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잃어버린 양'이 된 것이다.
[마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와서 예수께 절하며 - 가나안 여자는 예수 자신의 무시)와 냉대 그리고 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가까이 접근하여 무릎을 꿇고 예수께 경배하였다. 22절과 관련하여 언급된 두 가지 즉 그 여자의 경건한 자세와 쓰라린 고통은 본절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마태는 '절하다' 의 미완료형을 사용함으로써
그녀가 예수의 발앞에서 계속 연이어 절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를 도우소서 - '도우소서'의 헬라어 '보에데이'는 '부르짖음'의 뜻인 '보에'와 '달리다'의 뜻인 '데오'에서 합성된 '보에데오'의 명령형으로 긴급한 구조를 요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예수께서 침묵하시면 하실수록 예수의 침묵하시는 의도를 알지 못하는 가나안 여자는 더욱 더 간절하게 그의 도움을 구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 15: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저녀가 떡을 취하여 -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을 가지고서'라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그 우선권이 있음을 상징하는 말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이러한 배타적 특권이 영구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말씀하시고 하였다.
그러나 복음 전파의 순서는 먼저 유대인에게였고 그 다음은 이방인에게였으며, 본격적 이방 전도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 그의 제자들 특히 사도 바울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한편 바울도 이스라엘 민족은 택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남보다 먼저 받은 종교적 특권이 있음을 인정하였고, 민족적 구원의 문제가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과제임을 인정하였다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 성경에서 '개'라고 하는 말은 모두 악한 것을 상징하고 그것을 야유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서,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인 이방인이나 이단자를 가리키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용하신 '개'라고 하는 말인 헬라어 '퀴나리온'은 경멸적 의미에서의 '들개'나 거리를 어슬렁 거리며 다니아 사납고 악한 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 기르는 '애완용 개'나 '강아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개'라는 표현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부를 때 사용하던 경멸적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이방인들이 '자녀' 곧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마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 반의 접속사 '마는...도' 는 '그러나...조차도'의 의미로, 본문에서는 앞사람의 딸을 일단은 긍정하면서도 그 말에 완전히 승복하지 않고 또 다른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가나안 여자는 하나님의 질서에 의해 유대인들에 비해 이방인인 자신들이 선택되지 못한 족속이요 권리를 갖지 못한 자, 즉 개들임을 인정했다.
이처럼 자신을 개로서 인정하는 것은 성경에서는 가장 큰 겸손의 행위로 여겨졌다..특히 사람들은 자신을 극도로 비하시켜 표현할 경우 바로 '죽은 개' 또는 '개 같은'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제 주인의 상에서...먹나이다 - 팔레스틴근방의 지역들에는 식사하는 주인 곁에서 부스러기를 얻어 먹기 위해 개들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고 한다.
특별히 그 지역들에서의 식사법을 보면 주로 손으로 찢어 먹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자연 부스러기가 많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여하튼 가나안 여인은 사실상 자신이 개의 취급을 받는 이방인 으로서 메시야가 베푸시는 구원과 은혜의 식탁에 참예 할 수는 없다고 하여도 최소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의 일부를 힘입을 수는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실로 그녀는 자신에게 적용된 비유를 놓치지 않고 유효 적절히 선용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내용을 의역해 보면 "주님 당신이 저를 개로 취급한 것은 결국 저의 요구를 당신께서 들어주신 것과 같습니다. 정녕 당신은 당신의 법을 어기지 않고도 충분히 저의 요구를 채울수 있습니다. 저는 그 정당한 일에 따를 뿐입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는 아무런 권리 주장도 못할 뿐 아니라 하지도 않을 것 입니다. 저는 다만 가장 비천한 피조물의 몫으로 할애된 것만을 위하겠습니다. 진정 당신은 그것이 없다 해도 아무런 손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로 풀어볼 수 있다. 그녀는 하나sla의 은헤가 비록 적으나마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지는 것임dmf,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독점된 하나님이 아니라 만민의, 열방의 하나넘이심을 믿고 있었다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자야 - 헬라어 성경에는 '여자야'라는 말 앞에 감탄사 '오'가 붙어있다. 이는 눅 22:57;요 2:4;4:21과같이 '오'없이 단순히 호격으로 '여자여'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호격과 함께는 드물게 사용되는 '오'는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 주는데 본문의 경우에는 예수의 놀람과 감탄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네 믿음이 크도다 - 여기서 '믿음'이란 그녀의 신뢰, 확신과 아울러 겸손과 인내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께 칭찬을 받은 두번째 이방인이다 이방인 백부장의 이야기와 본문의 이야기는 몇가지 공통되는 요소가 있는데
(1) 두 경우 모두 이방인에게 백 부장의 하인, 가나안 여자의 딸 예수의 병고침의 능력이 베풀어졌다고 하는 점
(2) 두 경우 모두 이방인 자신의 큰 믿음이 예수에게서 칭찬을 받았다고 하는 점인데 앞에서는 이스라엘 중에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만한 것이 없으며, 이곳에서는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강조가 되어 있다. (3) 두 경우 모두 예수의 병치료는 병자를 현장에서 만나보지 않은채 멀리서 말씀으로 고치신 '원거리 치료'였다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방인 백부장과 가나안 여자의 기사는 유대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배척했으나 오히려 이방인들은 믿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약적 개념이 신약적 개념으로 옮기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유대인에 국한 되었으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전 세계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광의적이며 영직인 선민론을 암시하고 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 여자의 첫번째 말에 침묵으로 일관하시고, 두번째 말에는 냉정한 말로 그녀를 무시하셨으며, 마침내 세번째 말에 이르러 칭찬과 함께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신 예수께서는 비유에 나타난 불의한 재판관처럼 끈질긴 간청에 못이기어
그녀의 소원(所願)을 마지못해 이루어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그녀의 큰 믿음을 알고 계셨었다. 그러나 (1)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조차도 부정한 메시야를 참메시야로 올바르게 인식한 그녀 자신의 내면의 지혜와 믿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냄으로써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며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2) 유대인들이 거부한 구원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이방인들도 그 축복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그녀의 소원을 외면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녀를 위허 이미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소원대로'란 직역하면 '원하는 만큼'으로 각종 난관을 인내로 극복한 그 여자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시겠다는 예수의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