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개발과 사라지는 유적들
4월 어느 날 제주의 연구자, 시민사회 선생님들 사이에 끼어서 제주 유적지 조사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한라산 주변에는 제주 4·3 당시의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이중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경찰의 수악주둔소 정도이다. 제주에서는 4·3관련 유적들에 대한 기초조사를 4·3진상보고서 즈음과 그 이후 실시했지만, 현재 제주의 급속한 개발로 인해 유적지들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있다. 무장대, 토벌대의 초소들, 군숙영지, 피난민들의 삶의 터전들은 곳곳에 남아있지만, 아직은 문화재의 틀거리 안에서 보호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잃어버린 마을의 터들도 개발로 인해 흔적 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제주의 난개발은 자연만을 침식하는 것이 아니라, 제주의 4·3역사도 지워가고 있다. 그래서 제주의 뜻있는 연구자 선생님들께서 4·3 유적지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관리를 위해 연구를 진행하고 계셨다.
도덕적 손상
제주에 연고가 없는 외지인으로 제주를 사랑해 즐겨 찾지만, 항상 마음 한켠에는 4·3의 역사에 대한 부채감이 있었다. 내가 지금 즐거워하고 있는 이곳이 학살터라면,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더라면, 죄책감이 항상 마음 한켠에는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데 무장대, 토벌대의 격전지이자, 제주도민들의 피난터였던 관음사와 아미산 일대를 답사하면서, 4·3의 역사는 잔학한 학살, 고통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치열한 전투, 그리고 이곳에서 사람이 삶을 버텨온 빛나는 승리의 역사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을 마땅히 돌보아야 할 국가가, 본연의 책임을 저버리고 외세와 결탁하여 민(民)을 적으로 만들어버렸을 때조차, 사람들이 존엄한 삶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힘을 발휘했으며, 그리고 종국에는 국가에서 정당한 사과를 받아내기까지 했다.
최근 해외의 트라우마 연구에서는 ‘도덕적 손상(moral injury)’이란 개념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책임 있는 자들이 인간이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참상에 대해 충분히 책임을 지지 않았을 때, 이에 연루된 이들은 책임 있는 자의 배신으로 인해 상당한 영향을 받고, 이때 촉발된 수치심과 모멸감 등 도덕적 감정의 훼손이 다시 자살 및 살인 등 폭력적 행위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제주의 민(民)들은 국가가 자신들을 버리고 적으로 삼았을 때, 엄청난 배신감, 상실감, 모멸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로 인해 발생한 분노는 삶을 포기하고 생명을 파괴하고 싶은 정도로 불타올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주의 4·3유적지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흔적은 이들이 자연, 제주의 각종 구조물들을 지혜롭게 이용하며 삶을 이어갔음을 말해주었다. 무덤 터 옆의 지형을 이용하여, 무장대의 초소를 만들기도 했고, 4·3 이후 마땅한 생계가 없던 제주의 사람들은 한라산 중턱에서 산감의 눈을 피해 숯을 만들어 한라산 700고지에서 동문시장까지 숯을 지고 가 억척스레 생활을 했다. 조선시대 이래 말 목장 관리를 위해 만들어낸 산담을 이용해 무장대는 전투를 했고, 군 숙영지 역시 제주의 머들을 가져다 조성되었다. 적이 되어 격렬하게 싸우거나, 혹은 이 틈바구니에서 삶을 이어 가거나, 사람들은 모두 한라산의 지형, 지세, 인공 구조물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기실 사람의 역사의 태반은 치열한 싸움의 이야기와 그리고 그 안에서의 처절한 하지만 숭고한 삶의 이야기들이다. 국가가 사람들을 버렸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발 딛고 살아가는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엄청난 충격 속에서 살았겠지만, 삶을 이어가기 위해 민의 지혜를 발휘했다. 어쩌면 한라산이 이들을 품어 주었기에 엄청난 참상 이후에도, 사람들의 회복력(resilience)이 가능했을 듯하다.
그런데 지금 제주의 난개발로 인해 한라산의 귀한 역사는 사라져 가고 있다. 조선 시대 이래 동물의 이동을 막기 위한 잣담도, 4·3의 역사의 각종 유적지들도, 한라산 주변의 난개발과 더불어 흔적이 멸실되고 있다. 지금이라도 이러한 삶의 역사를 문화재로 혹은 공공역사(public history)로 후대에 남기기 위해 체계적인 조사와 적극적인 관리 방법을 준비해, 한라산, 한라산의 역사, 그 안에서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들을 지켜야 한다.
* 산담과 잣담 - 제주지방에서 방목하는 가축들이 벗어나지 못하도록 화산돌로 쌓은 담으로 무덤 주위를 둘러싼 것을 산담, 목장 둘레를 막는 것을 잣담이라고 한다.
-글쓴이: 주 윤 정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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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