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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침 산행을 했습니다. 긴 겨울방학을 마친 셈이지요. 먼지만 푸석푸석했는데 근래 비가 좀 내려서 공기도 한결 상쾌합니다. 밟히는 흙도 윤기가 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나무마다 새순이 돋아있고 파란 싹을 틔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 오면 개나리도 피어 있을 듯합니다. 그렇게 3월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한바탕 곤욕을 치르게 하고서야 비가 자주 오는 것 같습니다. 진작에나 줄 것이지 이제야 주느냐고 불평까지 할 것은 없겠지요. 지금이라도 충분히 내려야 봄 가뭄을 피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발전하는 과학 타령을 해봐야 사람은 하늘 바라보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나저나 이 조그만 지구촌이 요즘 왜 이렇게 요란한지 모르겠습니다. 21세기에도 옛날과 같은 전쟁을 치를 줄은 몰랐습니다. 어른들 손을 잡고 졸망졸망 따라가는 피난길의 어린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메어집니다. 이틀을 굶었다가 스프를 먹는 모습에는 눈물이 절로 납니다. 참으로 힘든 세상에 왔구나. 하필 왜 이런 시대에 왔느냐, 질문이 절로 나옵니다. 하기야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게 다 무엇 때문인가요? 모두들 지나가는 인생들인데 길지도 않은 고 시간들을 참지 못하여 이 지경을 만들다니, 세상이 참 그렇습니다.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립니다. 이제 끝난다 해도 회복하려면 또 긴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왜들 이러는지 ----
우리는 이 코로나가 끝날 수 있는지 앞이 안 보이네요. 그저 이란 완파 소식으로 위안을 삼고 이 주간을 마무리합니다. 모두 건강합시다. *(*
2022년 3월 26일 김종우 목사 드림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 수고하기를 마지아니하며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하나니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 (전도서 4 : 8)
<언포기버블>
과거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특히 좋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개인으로서나 아니면 조직 안에서 한번 새겨진 과거는 계속 재생산됩니다. 좋지 않은 일만큼 좋지 않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전과자라는 기록은 평생 따라다니며 당사자를 힘들게 만듭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도 많은 노력을 쏟아도 웬만해서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희석은 되겠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게 어느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무덤에 들어가는 날에나 같이 그 무덤에 들어가야 끝나겠지요.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니 그런 실수는 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하기야 일부러 그러겠습니까마는 우리의 인생길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모릅니다.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원작이 2009년 나왔답니다. 그 때는 지금과 같은 과학수사대라는 것이 없었나? 좀 더 세밀하게 수사하고 현장검증을 정밀하게 했더라면 혹 다른 수사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내부 집안사람들의 위치나 총의 발사 방향이나 거리 등등을 정밀하게 조사 분석하였더라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물론 정황은 겨우 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여아에게보다는 경찰에게 대놓고 반항하고 있던 스무 살 안팎의 그 언니에게 향합니다. 그리고 본인도 그렇게 자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의 수사를 이끌고 갈 필요도 없었겠지요. 당시의 상황과 본인의 자백,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으니 오래 갈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아마도 피해자 가족에게는 더구나 시간 끌기가 필요 없습니다.
동네에서 그래도 명망 있는 경찰인데 총격을 당해 사망했습니다. 충격이지요. 두 아들에게는 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로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러니 20년이 지났음에도 그 살인범이 가석방 되어 출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어찌 사나 지켜봅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직장도 다니고 별일 없이 지냅니다. 그 꼴을 보기가 괴롭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아픈데 살인범은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니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복수하려고 벼릅니다. 처음에는 동생이 관여하지 말라고 말리지만 결국은 자기가 먼저 나섭니다. 그녀의 동생이 어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고통을 당해보라고 그 동생을 해칠 계획을 가집니다.
술꾼 아버지는 자살하고 엄마는 동생 ‘캐서린’을 출산하다 사망합니다. 결국 그 동생은 언니인 ‘루스’의 몫이 됩니다. 언니이면서 엄마가 되어 둘이서 지냅니다. 아마도 집세가 밀리겠지요. 집은 내놓아야 하고 자기도 떠나야 하는데 동생을 양육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린 동생은 사회복지관을 통해 입양되어야 합니다.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루스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동네 경찰이 찾아와 설득을 하려 합니다. 루스를 자기 집에서 살도록 해주겠다고 제안까지 하면서 루수에게 다가가려 합니다. 루스는 거부합니다. 집에 들어오면 총으로 쏘겠다고 협박까지 합니다. 잘 아는 사이이니 별일 있으랴 싶었겠지요.
사고는 터졌고 루스는 경찰 살해범으로 감옥으로 갑니다. 20년을 살고는 가석방되어 나옵니다. 가석방이니 보호감찰관이 감시합니다. 처음에는 거처와 직장까지 알선해줍니다. 루스는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면접에서 거부당하기 일쑤입니다. 특히 경찰 살해범은 모든 사람에게 경계대상입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주는 곳으로 가서 일합니다. 막일을 하고 허름한 거처에서 하루를 정리하며 살지만 한 가지 꿈이 있습니다. 동생을 찾는 일입니다. 옥에서 수천 통의 편지를 썼건만 소식 한번 없습니다. 양아버지가 받기는 하였지만 캐서린에게 전해주지 않고 숨겨두었습니다. 캐서린의 이름도 바꾸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캐서린이 차라리 살인범 언니를 모르고 사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내린 결정입니다.
루스는 전과자라는 낙인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냉대와 편견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당연히 짊어져야 할 짐이라 생각하며 참고 견딥니다. 오로지 하나 동생만 찾으면 됩니다. 20년, 어떻게 자랐는지 잘 살고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보고 싶고 궁금하고 걱정됩니다. 동생에 대한 꿈 하나로 그 모든 고통을 감수하며 버티는 것입니다. 그 간절함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해줍니다. 변호사의 도움으로 양부모의 거처를 알게 되고 연락이 닿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불행히도 이런 과정 속에서 이런 사실이 피해자 아들에게 노출됩니다. 그는 동생인 줄 알고 납치하지만 사실은 캐서린이 아니라 양부모의 친딸입니다.
내가 살던 집, 내가 자라고 가족이 함께 하였던 집, 그 자리에 20년 만에 왔습니다. 지금은 물론 다른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동생 캐서린과 함께 하였던 시간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이고 오로지 마음 한 구석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리운 날들, 동생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다행히 그곳에서 무료봉사하는 변호사를 만납니다. 그 도움을 받아 동생의 행방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그마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세상은 왜 이렇게 힘든 곳인가 싶지요. 하지만 돕는 자도 있게 마련입니다. 영화 ‘언포기버블’( The Unforgivable)을 보았습니다. 무엇을 또는 누구를 용서할 수 없는지 생각해봅니다. 사실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이 그 짐을 안고 살게 됩니다.
<문폴>
사람은 어디까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아직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물론 이야기가 말로만 전달되고 전해져 내려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아마도 자기가 겪은 일, 보고 들은 것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잘 알고 있듯이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도 아는 것도 서로 나누어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각자 자기 아는 범위를 넓혀 갑니다. 직접 경험해서 쌓은 지식이라고 해봐야 매우 제한적입니다. 자기 것에 합하여 남의 것까지 덧대어 더 많이 쌓아갑니다. 흔한 이야기지만 아는 것이 힘입니다. 또한 아는 만큼 발전하고 사는 것도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지식이 물질의 풍요를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도 더욱 풍족하게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쉬운 말로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면 어느 때 무엇을 사두었다가 언제쯤 내다 팔면 이익이 생기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좀 늦었다 싶기도 하지만 부동산 투기라는 것, 미리 땅값 흐름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발 빠르게 대처하여 부자 된 경우도 많습니다. 비단 재물에 관한 이야기뿐이 아닙니다. 생각의 범위를 넓히고 사고의 깊이를 쌓을수록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망과 성취를 통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소위 형이상학적 행복감이라고 표현할까요? 꼭 철학자가 되지 않아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사람은 그 모든 지식을 가지고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들으며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현실에서의 경험뿐만 아니라 사람의 상상 속의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도 서로 나눌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소설이나 영화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어린이들에게도 있습니다. 그 많은 동화는 사실보다는 상상 속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이 자라면서 꿈을 만들어내고 인내와 용기를 키우며 어른으로 성장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그렇게 자라왔고 그 가치를 알기에 우리 다음 세대에게도 유익한 이야기들을 많이 남겨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니 발전과 성장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독서를 권장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반세기 전만 해도 허황된 이야기들이 이제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음을 경험합니다. 우리 자신이 놀랍니다. 그렇게 인류세계가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발전 속도는 날로 더욱 거세어집니다. 그러니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발전 과정과 20세기에서 21세기로의 발전 속도는 비교가 안 될 지경이 되겠지요. 수자로는 같은 1백년이지만 나타난 현상은 비교가 안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상상의 세계 안에서도 그렇게 기발한 사건들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세상에! 수십억 년 지켜온 우주의 질서가 한 순간 무너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물론 이야기입니다. 동화보다도 더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시간을 들여서 보고 있지요?
달이 떨어진다고? 있을 법하기나 한 일입니까? 혹 별이 떨어진다면 끄덕입니다. 유성은 지금도 떨어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 지구와 함께 돌고 있는 달은 아마도 지구 역사와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달이 떨어질 수 있는 일입니까? 그 달을 떨어뜨리려면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달을 떨어뜨리려는 시도부터 어쩌면 도발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만들어내야 하니까요. 그게 이야기입니다.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머릿속 작품입니다.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그래서 어쩌자고요? 재미를 만드는 겁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인간은 배만 부르다고 행복한 존재는 아니니까요. 어떻게든 재미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인생이 지루하다고 딴 짓거리를 찾아다닐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다운 양심은 조금 있어서 그냥 볼거리나 제공하는 유치한 작품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사람의 이야기를 덧대었습니다. 그 흔한 가족의 사랑 이야기 말입니다. 장면의 웅대함에 비추어 보니 그야말로 아이들 소꿉장난입니다. 역시나 말이 안 됩니다. 그래도 참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웅대함으로 이야기 자체는 묻혀버리니까요. 사실 가족 이야기는 양념 수준조차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우리 신파극을 보는 편이 낫지요. 그냥 화면에 집중하고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속으로 외칩니다. 대단해! 그게 다입니다. 여기서 감동이니 공감이니 그런 후일담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 시대의 기술의 발전이 여기까지 왔구나, 박수를 쳐줍니다.
누가 믿겠는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인류가 구원을 받습니다. 마치 성경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인류 생존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망상의 이야기 속에도 이런 요소가 스며있어야 조금은 이야기답기도 합니다. 그냥 그림만 보여준다면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은 무엇이든 눈에만 새겨지는 것에 대하여는 금방 잊어버립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새겨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극단의 악평은 면하지요. 아무튼 그림 한번 잘 봤다 정도로 생각하고 나옵니다. 영화 ‘문폴’(Moonfall)을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아침 산행을 했습니다. 긴 겨울방학을 마친 셈이지요. 먼지만 푸석푸석했는데 근래 비가 좀 내려서 공기도 한결 상쾌합니다. 밟히는 흙도 윤기가 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나무마다 새순이 돋아있고 파란 싹을 틔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 오면 개나리도 피어 있을 듯합니다. 그렇게 3월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한바탕 곤욕을 치르게 하고서야 비가 자주 오는 것 같습니다. 진작에나 줄 것이지 이제야 주느냐고 불평까지 할 것은 없겠지요. 지금이라도 충분히 내려야 봄 가뭄을 피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발전하는 과학 타령을 해봐야 사람은 하늘 바라보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나저나 이 조그만 지구촌이 요즘 왜 이렇게 요란한지 모르겠습니다. 21세기에도 옛날과 같은 전쟁을 치를 줄은 몰랐습니다. 어른들 손을 잡고 졸망졸망 따라가는 피난길의 어린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메어집니다. 이틀을 굶었다가 스프를 먹는 모습에는 눈물이 절로 납니다. 참으로 힘든 세상에 왔구나. 하필 왜 이런 시대에 왔느냐, 질문이 절로 나옵니다. 하기야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게 다 무엇 때문인가요? 모두들 지나가는 인생들인데 길지도 않은 고 시간들을 참지 못하여 이 지경을 만들다니, 세상이 참 그렇습니다.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립니다. 이제 끝난다 해도 회복하려면 또 긴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왜들 이러는지 ----
우리는 이 코로나가 끝날 수 있는지 앞이 안 보이네요. 그저 이란 완파 소식으로 위안을 삼고 이 주간을 마무리합니다. 모두 건강합시다. *(*
2022년 3월 26일 김종우 목사 드림
질문 5.
유대인들, 특히 목자라는 제사장,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자기네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확신하고 신앙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고 하셨습니다.(요 8 : 41 - 44) 누구 말이 맞나요? 그러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 백성이라 자부하던 유대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질책하셨습니까? 이유가 뭔가요? 혹시 오늘날 목사님이나 성도들에게도 ‘너희 아버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질문 6.
요일 4 :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영들을 시험하라고요? 보이지도 않는 영을 어떻게 무슨 수로 시험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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