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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앙대문인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광한
단편 소설 코(鼻) 김광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상에는 수십억의 인구가 나라와 언어와 종교를 달리하고 살고 있지만 누구하나 똑같이 생긴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신(神)은 인간을 만들어 낼 때 각사람마다 얼굴을 달리해 그 사람의 특징을 구분해 놓았으며 혼동케 만들지 않았다. 백인이나 흑인들도 처음보기엔 똑같은 생김새로 보이나 자세히 보면 얼굴이 같은 사람은 한명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같은 것이 있다면 백인이고 흑인이고, 한국인이고 일본인이고 간에 얼굴에 붙어있는 장기(?)는 생김새는 각기 다르지만 형태와 용도는 거의 같다는 사실이다.코와 입, 눈, 눈썹, 귀, 귓구멍, 귓볼 등 이비인후과에 속하는 장기는 냄새를 맡고 밥을 먹고, 보고, 듣고 하는 역할을 한다. 신의 창조섭리는 고맙게도 정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이어서 제각기 역할분담을 시켜놓았다. 머리에 머리카락이 돋아나게한 것은 물건과 부딪쳤을 때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요.눈썹이 눈 위에 붙어있게 만든 것은 비올 때 빗물이 눈앞으로 흘러내리지 않기 위함이 틀림없다.신의 은총에 감사함이다. 그런데 문제는 코다. 콧구멍이 만일 거꾸로 하늘쪽으로 붙어있다면 시골집 굴뚝같은 꼴이 될 텐데 그렇다면 비나 눈이 올 때 콧구멍을 막지 않는 한 빗물이나 각종 오물이 거르지 않고 그대로 흘러 들어오게 돼 여간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다고 할 정도로 코란 얼굴에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크다고 할 수가 있다. 성형 외과에서도 눈꺼풀 수술 말고 코를 높이는 수술이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코에 대한 별명도 그만큼 많은 때문도 이런 이유에서 일테다. 높은 코를 뺑코, 딸기처럼 알코올 중독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코를 딸기코, 납작한 코를 짝코,들창처럼 유리창이 필요한 코를 들창코, 주먹처럼 큰 코를 주먹코 우스개 소리 같지만 코의 크기로 남성의 심벌을 유추하는 농담이 있지 않은가? "언니는 좋겠네. 형부의 코가 커서‥‥‥ 코 때문에 일평생동안 "골치 아프게" 살다간 사람이 있다.고인에 대해 무례함을 주기위해서가 아니라 그 분의· 살아생전 코로 인해 있었던 상처를 조금이나마 달래보고자 하는 것이니, 혹시 유족이나 지인이 읽어본다면 양해하기 바란다. 결코 그분의 명예를 훼손시켜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독자들의 천박한 기호에 영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란 것을. 오래 전 대중을 상대로 하는 K잡지사의 B상무는 글 잘 쓰고, 편집 잘하고, 사람 좋고,술 잘 마시고, 부하들에 대한 신망 역시 높아서 K잡지사에 서는 독보적인 인물이었다.60년대 말,참으로 오래 되었다.잡지라야 대중을 상대로 하는 오락잡지 몇 개가 있었을 뿐, 지금처럼 표지 제목이 외국어로 되어 알지 못할 잡지들이 난립하기전이라선지 잡지가 흔하지 않았다. 그중에서 K잡지는 한국을 대표하는 잡지로 발행부수는 물론, 내용면에서도 타 잡지의 추종을 허락하지않았다. 컬러화가 나오기 전 벌써 컬러화를 시도한 것은 물론 일반 기자들 역시 다른 잡지의 편집장을 거쳐야 입사가 될정도로 실력가들이었다.만화가 역시 K잡지를 거쳐야 만화계에 명함을 낼 정도였다.지금의 이름난 노화가들이 그 잡지 출신이었다. K잡지사는 종로 5가 대학천 골목, 책 도매시장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는데, B씨를 이야기 하기 전 대학천의 실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6.25가 끝난 후 청계천은 아직도 복개가 되질 않았다. 지저분한 물이 흐르는 양쪽에 판자촌이 생겨났는데 길 쪽으로 각종 서적 노점상들이 리어카 위에 책을 놓고 팔았다.K잡지사의 윤진복 사장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리어커 위에 놓고 파는 책의 종류도 덤핑 책을 비롯해 세계명작 다이제스트, 탐정소설류 등 대부분 인쇄와 제본, 그리고 지질(紙質)이 조잡한싸구려 책들이었다. 읽을거리가 별로 없었던 당시, 서울의 대부분 고등학생들이나 대학생들은 이곳으로 몰려와 책을 사갔다.그래서 일찍 자리잡은 사람은 그곳에다 말뚝을 박고 터잡이를 했다. 오늘날의 총판 사장들이 그런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다. 그 당시 작고한 조흔파씨의 '얄개전'이라든가 최요한씨의 '남궁동자'등을 찍어 짭짤한 수입을 올린 윤 사장은 맨 처음 이곳에서 건물다운 건물을 짓고 총판업을 시작했다. 노점상에서 시작한 것이 성공을 거둔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윤 사장의 형은 관할경찰서장을 하고 있었는데 4. 19혁명이 나자 그의 형은 원흉으로 몰려 형무소 신세를지게되었다. 형무소에서 나오자 이렇다할 직업을 갖지 못하고 전전하던 중 동생집의 가게에서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그러나 윤 사장의 부인은 이런 경찰서장 출신의 시아주버니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가끔씩 관할서 순경들이 나와 노점상 일체 단속을 한때 동생의 리어카 하나 눈감아주지 못한 앙금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형님이 워낙 고지식해서 그런걸 어떻게 하겠소. 당신이 이해해요." 하고 윤 사장이 부인에게 이해를 시켰으나 "그래도 그렇지요. 그때는 거드름을 부리더니 아쉬울 때찾아와 신세를 지겠다는 건 또 뭡니까?" 하며 윤 회장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60이 가까운 윤 회장이 동생의 가게에서 맡은 일이라곤 책 포장을 하거나 직원들의 출근부 점검을 하는 극히 단순한 일이었다.가끔 직원들이 어려워 가불을 할려치면"벌써 가불인가? 그렇게 해서 생활은 어떻게 하나?" 하며 경찰공무원 특유의 힘 있는 말을 하는 것이 회장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는 유일한 일이었다. 이런 윤 회장 밑에 B상무가 있었는데 B상무 역시 과거가 있는 사람이었다. 6·25때 학도병으로 참전, 상사까지 진급해 백마고지전투에서 전투 중 그만 부상을 입었는데 하필부상 부위가 다름 아닌 '코'였다. 코의 한가운데가 뻥 둘려 그만 침팬지의 코보다 더 볼품이 없게 된 것이다. 요즘같이 성형수술이 발달됐다면 몰라도 그 당시로서는어쩔 수 없이 하늘을 향해 뚫려버린 코를 안고 평생을 살아야 할 판이었다. 군에 입대하기 전, 몇 안 되는 잡지와 신문에 시와 수필, 기행문을 발표하기도 했고, 직접 기자생활도 한바 있는 B상무로서는 코에 대한 타격이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몇 차례의 수술을 받았으나 실패 였다.코가 잘려져 나간 부위는 엉덩이 살을 마치 엿가락처럼잇는다거나 아니면 팔뚝의 신경이 없는 살을 이어 피와 살이 통해야 성공일텐데 워낙 거리(?)가 먼 것은 고사하고 의료시설의 미비 때문에 실패만 연속될 뿐이었다.그래서 생각한 것이 반창고였다. 잘려져 나간 코의 부위를 반창고로 막아야만 했다. B상무는 매일 주머니에 반창고 를 넣고 다니면서 코에 반창고를 갈아 붙였다. 비가 오는 날이거나 궂은날은 반창고가 더 사용되었다.빗물이나 눈에 반창고가 금방 떨어졌기 때문이다. 반창고를 붙이는 데는 으슥한 곳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손거울이 필요했다. 부하직원이나 남들에게 반창고를 갈아붙이는 현장을 발각 당한다는 것은 큰 수치였기 때문에 그는 늘 조심했다.그렇다고 가면무도회서처럼 가면을 뒤집어 쓰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코상무였다.주어진 일에 늘 충실했고 사람 좋기 소문난 B상무는 코때문에 일생동안 불편하게 지냈다. 나이가 서른을 넘자 결혼문제가 걱정이 되었다. 코만 아니면 번듯한 얼굴에다 학식도 만만치 않아 그 문제는 어렵지 않았겠지만 코에 대한 열등의식 때문에 선보기를 주저했다.친구들이나 친척들이 중매를 들기도 했지만 코때문에 번번히 딱지를 당했다. "학력도 좋고 글도 잘 쓰고 잡지사에서 상무란 자리에있습니다. 배필로서는 이만한 사람이 없죠." 여기까지는 일사천리로 잘 나갔다. 그러나 다음 말에서 그만 주저앉아 버리곤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코때문에‥‥‥‥ "코가 어때서요?" "6·25때 부상을 당했죠. 백마고지 전투에서 하필 적군의 탄알이 코를 스치고 지나갔죠." "보기 흉한가요?" "흉할 정도는 아니지요. 가리고 다니니까요." 그래서 맞선을 보게 되면 B상무는 여간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놈의 반창고를 붙여야 되기 때문이다. B상무에게 있어서는 6·25가 원수나 다를 바 없었다. 맞선을 볼 때 B상무는 늘 한손으로 반창고 붙인 코를 가리려고 애쓰지만 상대방의 눈길이 결코 피해가질 않았다.아무 소리 하지 않고 일어서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손 치워보세요. 심한가요?" 하며 심각히 들여다보는 여자도 있었다. 어떤 경망스런여자는 키득키득 웃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까지 했다. 남들에게 희극적으로 생긴 용모는 그 남들에게 가끔씩 즐거움을 안겨줄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로선 즐거움은커녕가히 비극적이고 참담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B상무는 가끔씩 동화책에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를 생각하기도 했다. 도깨비가 휘두르는 방망이에 한대씩 얻어맞을수록 코가 커진다는 이야기다.그 도깨비라도 나타난다면 하느님처럼 모시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그러나 도깨비는 그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번도 나타나질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비나 눈이 오는 날은 아주질색 이었다.반창고 붙이는 횟수가 늘어나고 그만큼 귀찮았기 때문이다. 이런 B상무에게 있어서 어느 날 진짜 배필이 나타났다.단골 이발소 면도사 아가씨가 은근히 접근해온 것이다.머리를 감을 때마다 반창고를 떼어야하는 고역을 치루는 B상무를 면도사 아가씨는 친절하게 반창고를 새로 붙여주었다. "고마워요." "괜찮아요. 선생님 굉장히 불편하시겠어요.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 다방에 마주앉아 그 경위를 B상무는 자세히 설명했다. 6·25 때 이야기와 학도병으로 참전해 백마고지 전투, B상무의 진실에 넘치는 말을 들은 면도사 아가씨는 B상무가 불쌍하게 생각 들었다.코만 아니라면 미남이고 신사였을텐데 단지 코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상대의 처지가 딱했던 것이다.면도사 아가씨 역시 과거가 그다지 순탄하진 않았다. 계 모 슬하에서 구박을 받고 자란 어린 시절과, 면도사가 되서도 흉물 맞은 손님들로부터 받는 수모 등등, 인정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까짓 인물이 뭔데, 인물 뜯어먹고 산다더냐. 성실하고 마음씨 착하고 아내와 자식 잘 건사해주는 사람이면 족하지. 난 뭐가 잘났기에. 그래서 어느 날 B상무에게 면도사 아가씨는 자신의 심경을 솔직히 고백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의 코가 돼 드릴까요? 진정입니다" "코가 되어준다고요?" B상무는 처음에 농담인가 했다. 그러나 아가씨의 태도로보아서 결코 농당같진 않았다. "진정입니까? 댁의 친척들이나 부모들이 내 코 때문에 반대하지 않을까요. 나는 동정 받는 것은 싫습니다. " "정말이에요. 선생님이 코 때문에 남들에게 받는 불이익을생각할 때마다 속이 상했어요. 앞으로 반창고 준비는 제가 알아서 할께요." 그래서 B상무는 면도사 아가씨와 결혼식을 올릴 수가 있었다. B상무는 동대문앞 창신동 산꼭대기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코 때문에 결혼이 늦어졌지만 남들 보란 듯 가정 생활에 성실했고 직장에서도 모범이었다. 직장과 거래처에서는 B상무라고 호칭하는 것보다 코 상무로 통했다. 코 상무란 별명은 어디까지나 맘씨 착하고 성실한 B상무의 애칭이었지 결코 그를 흉보기 위한 별명은 아니었다. B상무 자신도 그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부인이 된 면도사 아가씨의 본색이 세월이 갈수록 점점 드러났다. 워낙 천한 집에서 교육받지 못하고 자란 그녀는 점점 돈 욕심을 부리게 되었고 계꾼들과 함께카바레 등 '출입금지'구역에 출입하면서부터 가정불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코 상무의 월급이 조금이라도 축이 나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해대며 덤벼들었다. "내가 코 병신하고 결혼한 것은 자기가 뭐 잘나서 그런 줄알아!" 어쩌다 술이라도 마시고 들어가면 그 기세는 더 심했다.슬하에 자식이 생겼어도 그녀는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병신에게 시집온 것이 후회가 된다며 가끔 신세타령을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B상무는 자신의 '코'를 한탄해야만 했다. 결혼초기에는 자신의 코가 되어 주겠다고 출근하는 남편의 코에 반창고를 갈아 붙여주는 친절을 보이던 부인이 시간이 지나자 반창고는커녕 본드 한통 사 오질 않았다.B상무는 일을 핑계삼아 사무실에서 늦게 퇴근하게 되었고 동료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시간이 잦아졌다. 술 마시고 들어오는 날은 아예 저녁도 차려주지 않는 등 부인이 남편에 대한 태도는 남들이 보기에도 심했다. 그러다가 병이 들게 되었다. 평소에 폐가 약했던 B상무는 잦은 가정불화로 인해 폐병이 재발되었고 여기에 혈압이상승이 되었다.80년 초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으로 인해 대부분의 잡지사가 서리를 맞았다. B상무가 근무하던 K잡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음란 저속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K잡지사에서 붙어있으면서 녹을 먹고 있던 직원들 모두가 한꺼번에 실업자가 되었다. B상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젊은직원들은 몇 달간 놀다가 출판사 쪽이나 방송국으로 직장을옮기기도 했으나 B상무는 그럴 형편이 못되었다. 50이 가까운 나이에다 건강이 이미 말이 아니었다. 페결핵이 재발되었고 그보다 혈압이 정상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받은 20여 년 동안 일한 퇴직금으로 구멍가게라도 차려 생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남들처럼 이재(利財)에 뛰어나지 못한 그에게 장사란 남의 이야기였다. B상무는 마침 마포에서제본소를 경영하는 친구가 생각났고 거기에 투자하는 조건으로 부사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몸이 아파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제본소에는 그의 부인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집에 있는 B상무에게 들려오는 소문은 좋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친구와 부인이 심상치 않은 사이란 것이었다. 그렇다고 집에 들어온 부인을 다그칠 수도 없었다.그러던 어느 날 제본소의 공장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른 새벽이었다. 공장장은 B상무가 어렸을 때부터 키워주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평소에 B상무를 친형님처럼 생각했었다. "형님, 어젯밤에 형수님 집에 안들어 오셨죠. 이런 말씀드리면 심기가 불편하시겠지만 알아두시는 것이 좋을 것같아 말씀드립니다. 사장과 형수님의 관계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형님이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겠습니다. 제 말 믿으시겠으면 지금 마포경찰서 뒷편 Y여관으로 가보십시요. 지금 출근 전이라 아마 거기 있을 겁니다. " . B상무는 그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친구와 마누라로부터 한꺼번에 배신을 당한다는 생각을 하니기가 막혔다. 평소에 무능하고 못났다는 소리를 하며 바가지를 긁는 마누라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이건 한술 더 떠그것도 남편의 친구와 서방질을 하다니. B상무는 공장장의 말이 거짓이길 바라면서도 아픈 몸을 이끌고 공장장이 가르쳐준 Y여관으로 갔다. B상무는 여관만으로 들어가 방을 확인할까 했으나 다른손님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바깥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아침 9시쯤 됐을까.친구인 제본소 사장의 모습이 여관 문을 열고 나갔다. 그는 B상무를 보자 의외라는 듯 깜짝 놀라는 얼굴을 했으나금방 태연해졌다. "자네 웬일인가?" B상무가 되물었다. "자네야말로 뭔 일인가?" "응, 어젯밤 철야를 했지. 자네 부인도 아마 늦게 들어갔을 거야. 접지 아줌마들 감독하느라고‥‥‥‥ 친구가 근처 다방에라도 가서 커피라도 하자는 걸 뿌리치고 그는 방금 나온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친구가 나온 것 같은 방의 문을 열어보았더니 거기 부인이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여름이라 홑이불을 반쯤 덮어 누워있는 그녀의 하반신 모습이 여간 그로데스크하게 보이질 않았다.그녀의 머리 쪽에는 반쯤 마시다 남은 맥주병이 두어 개놓여 있었고 재떨이에는 타다 남은 당배 꽁초들이 가득 차있었다. B상무는 부인을 깨워 다그칠까하다가 더 이상 물을 필요가없어 그대로 여관을 나섰다. 아침 햇볕이 따가웠다.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친구가 멋쩍은 얼굴이 돼"자네 부인이 피곤할까봐 이곳에다 모셨지. 집으로 전화하지 않았나?" B상무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모든 걸 짐작한 것이다. 공장장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공장에 들를 필요는 느끼지 않아 집으로 곧장 돌아온 B상무는 사홉들이 소주를 사다가 병나발을 불었다.모든 것이 허망했다. 이혼을 하고 혼자 살까 생각했으나 딸린 아이들이 문제였다. 그 이후부터 코 상무의 술 마시는 횟수는 점차 잦아졌다. 몸은 점점 더 수척해졌다. 내가 B상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76년 겨울 마포경찰서 근처에서였다. 우연히 길거리를 지나치다가 코에 반창고를 붙인 중노의 사내가 비척비척하며 마치 쓰러질듯이 버스정류장쪽으로 가고 있었다. B상무였다. "상무님 여긴 웬일이십니까?" "응 오랜만이군." 그때 이미 B상무의 몸은 겉보기에도 페인이나 다를 바없었다.B상무를 근처 다방으로 모시고 갔다. 다방은 2층에 있었는데 잘 걷지를 못해서 내가 부축해야만 했다. 자리에 앉은 그의 얼굴은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깃들여 있었다. 나는 그가 제본소 일에 관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지라."제본소에 일거리가 많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저 그렇지." 하며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B상무를 버스 정류장까지 모시고 나와 버스를 태워보내고 난 후 나는 그가 별로 오래 살 것 같은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몇 달 후 신문사 기자로 있는 친구로부터 B상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 나는 한 세상을 살면서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꼈다. B상무가 좀더 이해심이 많은 여자를 배필로 삼았다면 그의 일생이 그렇게 참담하게 끝나지 않았을 것을 하며 안타깝게 생각할뿐이었다. 이것 역시 결코 남의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잘 찾아보면 우리 주위에 흔히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필자 약력 1944년 서울 용산 출생 중앙대 문과대 국문학과 69년 졸업 한국문인협회회원 문예춘추 소설 문학상 수상(2021년) 소설 백두대간을 비롯해 20여권의 창작집 |
첫댓글 이걸 넣으면 난정님의 수고가 덜할거같아요 읽어보시고
6년전에 월간 문학에 들어간거에요
예, 이 정도이면 괜찮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복받으실거에요
@일송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