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대종사, 불 들어갑니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어금니라도 물으라는 건가.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면서 스님들은 그렇게 외쳤다.
법정이 어찌할 도리가 없음에도 그리 말했다. 원래는 “불 들어가니 어서 나오세요”라고 한단다. 다 버렸는데 나와서 어디로 가란 말인가. 엉뚱해서 아름다운 마지막 인사다. 관도, 열반송(涅槃頌)도, 사리도 없이 법정은 그렇게 갔다. 쇄골이 되면 머물던 산야에 뿌려진다고 한다. 장례가 텅 비니 오히려 삶이 꽉 차는가.
속세에서는 프랑스의 드골이 그렇게 갔다.
드골은 나치의 프랑스 점령(1940~44) 때 저항운동으로 프랑스의 영혼을 살려냈다. 전후에는 대통령으로 프랑스의 현대화를 이끌었다. 그는 69년 국민투표에서 지자 대통령직을 버리고 시골 콜롱베로 내려갔다. 이듬해 11월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공로라면 성대한 국장(國葬)이 당연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18년 전 유서를 남겨놓았다.
국장을 하지 마라, 비문(碑文)엔 이름만 새겨라, 대통령·장관·국가기관장 누구도 장례식에 오지 마라, 공식적으론 군대만 올 수 있다, 누구도 어느 곳! 에서도 연설하지 말고 의회는 추도사를 하지 마라, 프랑스건 외국이건
어떤 훈장도 나는 거부한다··· 드골은 요구했고 프랑스는 지켜주었다. 장례가 홀쭉하니 삶이 풍성해지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라 했다. 아무도 원망하지 말고 그저 고향에 작은 비석 하나 세워달라고 했다.
그러나 성대한 국민장에는 원망의 소리가 높았다. 한명숙 공동장례위원장은 “대통령님,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흐느꼈다.
현직 대통령이 있고 국민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 지키다니 누가 무엇을 빼앗았다는 말인가. 국무총리를 지낸 이가 먼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국가의 엄정한 사법질서인가 아니면 코드 그룹의 정서인가. 진보진영은 6월 2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5월 23일 서거 1주년을 맞아 노무현을 초혼(招魂)하겠다고 한다. 정작 죽은 자는 아무도 원망하지 말라 했는데…. 남은 이들의 요란한 추모가 행여 떠난 자의 삶을 깎는 건 아닐까. 법정의 무소유는 가지지 말라는 게 아니라 탐(貪)하지 말라는 거란다. 법정이 떠나면서 탐은 이 시대 또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70년대 야당 지도자 이철승! 씨는 “종교는 상수도 공사요, 정치는 하수도 공사”라고 했다. 종교는 욕 열차에서 떨어진 승객에게 치유의 생수를 흘려넣어주는 것이다. 법정은 열차를 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철로에서 멀리 있지도 않았다. 그는 30여 권의 책으로 끊임없이 생수를 공급했다.
몸은 멀리 순천과 강원도 골짝에 있었지만 정신은 사바(娑婆)와 뒹굴었다. 그는 1급 상수도 기술자였다. 속세의 욕망은 서로 부닥치고 섞여 갈등이라는 하수를 만들어 낸다. 하수구가 제대로 뚫려야 갈등이 사회를 위협하지 않는다. 정치는 이 하수도를 뚫는 일이다. 누가 제일 먼저 이 일을 해야 하나. 욕망의 탐을 버리고 장화를 신고 삽을 들어야 할 이는 누구인가. 정치 지도자들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이명박(MB) 대통령이 앞장서야 할
것이다. 이명박 장로는 법정을 조문함으로써 종교적 포용성을 보여주었다. 300억 재산을 기부한 것도 법정의 무소유에 영향을 받아서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1급 하수도 기술자가 되려면 그걸로는 부족하다. 권력집단에 그가 시범을 보여야 한다. 이 정권은 권력의 하수공사는 잘하지 못했다. 2년 전 ‘비주류 공천 대학살’은 권력자들의 탐 때문이 아니었나. 박근혜의 마음을 얻지 못한 건 탐 때문이 ! 아니었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이 다음 대통령을 만들 수는 없어도 안 되
게는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또 무슨 탐의 언어인가. MB는 공정경쟁을 버리고 이런 탐의 유혹에 빠질 것인가. 그러면 여권의 하수도 공사는 엉망이 될 것이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