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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지식인들, 한반도 문제 크게 왜곡하고 있다.
한호석 (뉴욕 거주 )
한반도 문제를 말하는 미국 지식인들
미국 지식인들 가운데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보이면서 글을 써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북한문제 전문가라고 이름난 미전략국제문제연구소 부소장 윌리엄 테일러, 캘리포니아주립 버클리 대학 교수 로버트 스칼라피노, 하버드 대학 교수 니콜라스 에버스타트, 언론인이며 카네기 국제평화연구소 연구실장 셀릭 해리슨, 미해군대학원 교수로 아시아 전문가라고 하는 에드워드 올슨 같은 사람들이 요즈음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 미국 언론에 글을 써 내고 있는 축에 든다. 이들 지식인들 가운데 스칼라피노, 테일러, 해리슨 같은 사람들은 지난해 방문단을 이끌고 방북, 방남도 여러 차례나 한 ·바있다. 그들은 미국에서 이른바 아시아 문제 전문가로, 더 좁게는 한반도 문제 전문가로 이름이 나있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미국 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 정책을 무조건 잘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나서, 적당하게 여기저기 매끄럽게 다듬고 매만지는 일만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미국 정부 편에 서서 그 정책 세우는 일을 도와주는 태도 밖에는 모른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조금만 따져봐도 미국정부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것이 밑뿌리부터 꼭대기까지 생판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도, 그들은 그 잘못을 들추어내서 비판할 생각은 아니하고 기껏 한다는 노릇이 '부분수정'이다. 세상은 이러한 사람들을 '관변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클린턴이 이끄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게 되자 이들 관변 지식인들은 요즈음 매우 바빠졌다. 그 분야에서 전문가로 이름이 나있는 터라, 언론에 얼굴을 내밀고 미국 정부의 한반도 정책에 관해서 목에 힘을 주고 제각기 한 마디씩 해야 하기 때문이고, 민주당 정권을 위해 정책자문회의 같은 데도 나가봐야하기 때문이다.
스칼라피노가 지난 12월 21일 뉴욕 아시아협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정부에 대한 한반도 정책 건의서'를 내놓은 것이라든지, 에버스타트가 12월 30일에 나온 '포린 어페어즈'라는 외교정책 전문지에 '남북 코리아 통일 가능한가-험난한 통일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낸 것이라든지, 올슨이 새해들어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에 한반도 통일문제에 관한 글을 써낸 것이라든지, 스칼라피노와 해리슨이 클린턴 정부의 정책자문회의에 참석하러 워싱턴 디씨에 들렀다가 **일보와 대담을 한 것이라든지, 그보다 훨씬 앞서 11월 2일 테일러가 부소장으로 있는 국제전략문제 연구소가 새로 들어서는 정부가 다루어야 할 50가지 현안들을 내놓 으면서 한반도 문제를 다룬 것은 다 이러한 정권교체 바람을 탄 것이다.
한반도 정책의 핵심은 통일문제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미국 정부가 한반도를 보는정책적 시각은 모든 분야에서 한 점으로 모아진다. 그 한 점이란 곧 통일문제다. 한반도 통일문제는 우리 사회 모든 부문을 밑바탕부터 완전히 뒤바꿔놓는 큰 변화다. 이 변화는 한반도는 말할 것도 없고, 동북아 지역 전체에, 그리고 서태평양 지역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의 외교, 경제, 군사문제들이 한반도 통일이라는 통과점을 지나게 될 때 미국은 그 모든 것을 다시 조정해야 한다. 다시 조정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통일을 위한 준비, 통일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통일 뒤에까지 미국은 자기가 절대로 손톱만큼도 손해를 보아서는 않되며, 통일이 미국에게 언제나 유리한 방향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이른바 '국익 우선 철칙'을 따라 다시 조정한다는 뜻이다.
미국 정부의 한반도 정책에 관해서라면 척하면 삼천리로 눈치가 빠른 이들 관변 지식인들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미국 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말할 때는 언제나 통일문제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써내놓는 글을 읽어 내려가자면 눈살을 찌프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한반도 문제를 아주 약삭빠르게, 어떤 때는 터무니없이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내놓은 주장들이 과연 어떻게 한반도 문제를 왜곡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때가 되었다.
"통일비용을 대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들 관변 지식인들은 미국이 한반도 통일문제에 관해서 발벗고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올슨도 그랬고, 이 보다 먼저 에버스타트가 발표한 글도 그런 논리를 폈다. 지난 1992년 12월 1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통일에 관한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테일러가 마이니치 신문과 한 대담에서도 클린턴 정권은 부시 정권보다 한반도 통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왜 미국이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해서 발벗고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을까?
올슨은 그 까닭을 이렇게 풀이했다. 한반도를 통일하려면 독일 통일에서 보듯이 엄청난 비용이 드는 데 (1991년 한 해 동안 옛 동독 지역에 들어간 돈은 옛 서독 전체예산의 4분의 1인 5백50억달러였다), 지금 남한 경제력으로는 이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통일비용 가운데 많은 몫을 떠맡을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지금 재정적자라는 늪에 빠져 허덕이고 있으니까 모두 떠맡아 도와줄 수는 없고, 한반도 문제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나라인 돈 많은 일본보고 같이 하자고 해서 통일비용을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다.
이들이 입울 모아 말하고 있는 미국이 한반도 통일문제에 깊이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남한에게는 통일비용이 턱없이 모자랄 터이니 미국이 일본을 끌어들여서 두 강대국이 함께 통일비용울 대주어야 한다는 맺음말로 이어진다.
통일비용? 통일비용이라니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 내막을 잘 모르고 통일문제를 그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랫가락에 실려오는 막연한 민족감정으로만 보고 있는 사람들은 통일이 이루어지면 그냥 한데 어울려서 살면 되는 거지, 뭣 때문에 거기에 엄청난 돈이 들어야 하는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미국 관변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통일비용이란 남북 사이에 경제통합을 이루어내는 데 드는 돈을 말한다. 지난해 1992년 10월 2일 서울에서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연 '통독 2주년의 경제적 평가와 한반도 통일'이라는 국제토론회에서 나온 얘기를 들어보면 그 내막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통일비용이란 경제통합이 시작되어 10년 안에 남북 1인당 국민소득을 같게 만들기 위해 남쪽이 북쪽에 밀어넣을 투자액을 말하는데, 만일 올해 경제통합이 시작된다면 약 2천1백20억 달러 (1백68조원)나 되는 통일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통일비용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경제통합을 하느라고 들어가는 투자액이다.
통일비용은 흡수통합비용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해서 이루려하는 경제통합이란 무언가. 듣기 좋게 경제통합이지, 아니 그게 어디 경제부문만 하나로 만들자는 소린가. 실제로는 흡수통합이지. 그것은 남쪽 자본주의 경제가 북쪽 사회주의 경제를 모조리 없애고 먹어버리는 흡수통합이다. 그래서 저들이 한반도 통일문제를 말할 적에는 언제나 독일의 흡수통합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띄운다. 서독 자본주의가 동독 사회주의를 약 스무해 동안 야금야금 먹어들어가더니 마침내 흡수통합을 완성하고만 역사를 이제는 우리 땅에서 되풀이하려고 벼르고 있다
'한반도 민족공동체 통일안'이라는 흡수통합 논리를 내놓은 노태우 정권이 지난해부터 시작한 '제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에 '남북교류협력부문계획'을 새로 넣어놓고 교류-협력-동화-통합이라는 네 단계 접근방식을 띠르겠다고 한 것도 똑같은 말이다. 미국 관변 지식인들이 요즈음 미국이 한반도 통일에 개입해야 한다고 말할 때는 흡수통합을 이미 전제로 깔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묻는다. 우리 겨레가 진정 바라는 통일은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먹어버리는 흡수통합인가?
지난날 대포와 핵무기를 들이밀어 북녘땅을 모조리 쑥밭을 만들고 잃었던 땅을 되찾자고 핏대를 올리던 그 무시무시한 전쟁명분이 이제는 달러를 마구 쏟아부어 북녘땅을 집어삼키겠다는 흡수통합논리로 탈바꿈 한 것이다.
잘라 말해서 이 두 논리는 모두 미치광이 냉전논리다. 이 논리는 끝없는 대결과 강점을 불러일으키는 범죄심리에서 나온다. 무력이건 달러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를 기어이 꺾고 먹어버리겠다는 이 범죄심리는 평화환경을 깨뜨리고 피를 부른다. 또다시 동족끼리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파멸위기를 불러들인다. 미국 관변 지식인들은 흡수통합비용을 미국정부가 남한정부에 대줄 거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다. 참으로 기막힌 얘기다. 우리가 언제 미국에게 통일비용을 달라고 손을 벌였던가. 통일비용을 대주어야 하겠다는 주장은 말도 되지 않는 허튼 소리다.
우리나라가 통일을 한다는데 째째하게 다른 나라에게 돈 좀 대달라고 손이나 벌여, 미국 달러와 일본돈 얻어다가 하는 그 따위 '통일'은 아예 입 밖에도 꺼내서는 아니된다. 만일 그런 통일을 하려한다면 우리는 통일을 반대해야 한다. 우리 겨레가 둘로 갈라져 끝없는 아픔과 불행과 비극을 겪어온 까닭도 따지고보면 미국이 삼팔선을 그어버리고 옛소련이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데,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자는 마당에 남에게 구걸이나 받아서야 말이나 되는가. 어림 없는 소리다. 통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문제며, 우리 책임이며, 우리 의무이며, 우리 힘으로 해내야할 민족사적 과업이다.
남과 북의 정권이 역사적 합의를 이루어낸 1972년 '7 · 4 남북공동성명'에서도, 1991년 '남북 사이의 화해. 불가침.교류에 관한 합의서'에서도 거듭 다짐한 것은 통일을 이루기 위해 자주 원칙과 평화 원칙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들한테서 돈이나 받아서 다른 쪽을 먹어버리겠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늘 미국 관변 지식인들이 통일비용을 들먹이면서 결국 흡수통합 논리를 고무, 찬양하고 나서는 것은 남북합의서 정신을 짓밟아보려는 파괴행위이며, 미국이 우리 통일문제를 손 안에 넣고 마음대로 흔들어 보겠다는 그릇된 외세 개입 논리를 마치 정당한 것인양 가리우는 어리석은 짓이 아니면 무엇일까.
영향력'이라는 말 속에 숨겨진 논리
이들 관변 지식인들이 미국정부가 한반도 통일문제에 발벗고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두 번째 터무니는 또 무엇인가. 그들은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정치, 경제, 군사문제와 관련해서 한반도가 가지고 있는 중요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미국은 한반도가 통일된 뒤에도 영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므로 지금부터 일찌감치 한반도 통일문제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그들이 미국 정부가 우리나라에게 통일비용을 대주어야 한다고 하는 말을 보아도, 그 말 속에는 통일 뒤에도 한반도를 자기 울타리 안에 꽉붙들어 두겠다는 논리가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쉽게 알아낼 수 있다. 그들이 이 대목을 말할 때 언제나 즐겨쓰는 말이 하나 있다. 영향력이라는 말이다. 한반도가 통일된 뒤에도 전과 같이 한반도를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비끌어매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영향력 아래에 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까놓고말해서 그 말은 미국의 지배력 안에 두겠다는 뜻이 아닌가. 영향력이라는 이름씨 안에 숨겨진 진짜 논리는 크고 힘센 나라가 작고 힘없는 나라를 자기 발 아래 두겠다는 지배논리가 아니라면 무언가. 관변지식인들은 강대국의 지배논리를 듣기에도 부드러운 영향력이라는 말 속에 슬쩍 감추는 교묘한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강대국 지배논리는 미국이 한반도가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거머쥐고 있는 정치, 경제, 군사부문에 얽힌 이해관계를 돈을 들여서라도 지키고 말겠다는 '굳은 결의'로 나타난다.
지배논리의 정책적 표현
강대국 지배논리가 한반도 정책에서 가장 뚜렷하게, 가장 날카롭게 나타나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주한미군 문제다. 강대국 지배논리를 입에 침이 마르게 고무, 찬양하고 있는 미국 관변 지식인들은 주한미군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주한미군 문제에 관해서 두 가지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감축 신중론과 영구 주둔론이 그것이다. 감축 신중론이란 무엇인가. 스칼라피노는 통일 뒤에도 주한미군을 유지하는 문제는 미래에 결정할 일로 남겨두자고 주장한다.
그 문제는 아주 심각한 문제이니 나중에 신중하게 정하는 게 좋겠다는 뜻이겠지. 에버스타트는 클린턴 정부가 주한미군을 추가 감축하는 것조차도 안된다고 펄쩍 뛴다. 사실 따지고 든다면 감축 신중론이나 영구 주둔론은 종이장 차이 밖에 되지 않는 닮은꼴 논리다
되풀이해서 말하기도 우숩지만, 미국이 우리땅에 미군을 주둔한 것은 '북의 남침 위협'때문이라는 것은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아는 뻔한 얘기다. 그런데 만일 우리 조국이 통일을 이룩하여 '남침위협'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면, 주한미군은 어떻게 될까? 상식으로 판단한대도 통일 뒤에는 미군이 더 이상 주둔할 명분이 없어졌으므로 마땅히 미국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미국 관변 지식인들은 언론에서 깜짝 놀랄만한 말을 하고 다닌다. 그 말은 딴 게 아니라, 통일 뒤에도, 다시 말해서 '북이 남침을 하려는 전쟁위험'이 사라진 뒤에도 미군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쳐들어올 적이 없어진 평화로운 땅에서 미군은 도대체 누구에게 뭣때문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겠다는 건가. 이들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 머리로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 소리다.
"균형자를 내보여라"
상대할 적이 없어진 통일 한반도에서 도대체 미군은 뭐 할라고 그대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주장하 느냐는 물음 앞에서 말이 막히게 되자 그들이 요즈음 새로 꺼내든 교묘한 논리가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균형자 논리'다. 균형자 논리에 관해서 미국제전략연구소가 클린턴 정부에게 내놓은 정책건의 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미국은 동북아 지역에서 철수할 것인지, 아니면 이 지역에서 균형자 역할을 계속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 지역은 중국이 군사대국의 길을 걷고 있고 한.일 사이에도 긴장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미국만이 중국의 팽창에 대한 세력균형을 이룰 수 있으며 한.일 사이의 알력에도 중재역할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새 정부는 현재 부시정부가 채택하고 있는 동북아 정책을 그대로 인정하여 급격한 철군이나 일방적인 철수를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서 우리는 관변 지식인들이 미군을 우리땅에 주둔시키는 명분을 '북의 남침위협론'에서 요즈음에는 '동북아 지역 균형자론'으로 슬쩍 바꿔치기 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들은 이러한 바꿔치기 논리를 앵무새 처럼 되뇌이며 언론을 타고 있다.
동북아지역에서 앞으로 영원히 미군을 남겨두려면 동북아지역은 한반도가 통일된 뒤에도 여전히 '북의 남침위협'과는 다른 새로운 군사긴장이 있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핑게를 대고 균형자인 미군을 한반도에 계속 남겨둘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관변 지식인들은 중국의 군비확장과 일본의 군사대국 야망, 그리고 통일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갈등관계 따위를 균형자론의 전제조건으로 자꾸 들먹이기 시작했다. 요즈음 언론에서 뻑하면 오르내리는 이른바 아시아 군비경쟁론은 바로 이러한 균형자론과 짝을 맞춘 논리 한 쌍이다. 스칼라피노와 해리슨이, 그리고 테일러가 이 두 논리를 짝맞추는 데 앞장 서고 있다.
"주한미군이여, 영원하라"
남침위협론이건 균형자론이건 결론은 오직 한가지다. 곧 '주한미군은 영원하다'는 저들의 움직일 수 없는 선언, 영구주둔론이다. 여기서 우리가 놓지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미국정부가 영구주둔론을 그토록 악착같이 붙들고 늘어지는 까닭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이제껏 미국정부와 관변 지식인들은 그 까닭을' 남침위협론'이라고 해왔고, 요즈음에는 '지역 균형자론'을 겉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 진짜 속셈은 다른 데 있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그 진짜 속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줄잡아 말해서 한반도를 영구히 지배하려는 까닭에 무력을 영구배치해 놓는다는 것이다. 우리 조국이 앞으로 계속 분단체제로 이어지건, 흡수통합이 되건, 연방제통일이 되건 상관 없이, 미국은 한반도를 영원무궁토록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을 영구히 남겨두는 정책만이 오직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자기 이익을 가장 확실하게 지킬 수 있는 단 하나 남아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미국정부는 태평양에서 아시아 대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우리땅 한반도에 자기 무력을 깊숙이 들이밀어놓고서야 비로서 안심하고 제 잇속을 채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제껏 미국정부가 주한미군을 영구히 남겨두려고 이른바 '남침위협론'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듯이, 요즈음 미국 관변 지식인들이 언론에 대고 떠드는 이른바 '지역 균형론'이라는 것도 곰곰히 따져보면 영구주둔을 위해 꾸며낸 거짓 명분이지 실질이 아니다. 실질은 미국이 이 지역에서 제 잇속을 채리기 위해 한반도를 계속 지배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이 통일 뒤에도, 아니 영원무궁토록 한반도를 지배하겠다는 주장은 통일문제와 마주 부딪치는 대결논리다. '남북합의서'에 들어있는 자주와 평화라는 통일원칙을 지키는 한, 우리 겨레는 이 영구지배논리와 타협할 수 없다. 미국 관변 지식인들은 바로 이 타협할 수 없는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고, 한반도 문제를 더 이상 왜곡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1993년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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