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은 왜 10일간 ‘해병대 캠프’에 입소했을까
화살만 쏜게 아니었다. 다산은 “말 타는 솜씨가 서툴러서 사람들이 얼마나 웃어전한지 ...”하고 부끄러워 했다.
못 이기는척 선물을 하사한 임금,
고풍(古風)은 활을 명중시킨 임금이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는 것을 가리킨다. 임금과 함께 활을 쏘던 신하들이 ‘고풍이요(상을 내려달라)’고 외치면 임금은
못이기는 체하고 여러 상품을 하사했다. 즉 신하가 먼저 임금이 쏜 화살의 점수를 자세하게 적어 ‘고풍’을 올리면 임금은 하사하는 선물명을 써서 내리거나
‘후과(後課·선물은 나중에 정하겠다는 뜻)’라 써서
내려주었다. 선물명을 쓴 경우에는 즉석에서 임금의
‘느낀 바’를 신하의 고풍지에 쓰기도 했다. /
다산은 <여유당전서> ‘북영벌사기(北營罰射記)’에서
굴욕사건의 전말을 전한다. ‘북영벌사기’는 문자 그대로 ‘북영(창덕궁 서쪽 훈련도감 본영)에서 벌로 활쏘기를
한 기록’이다. 때는 1791년(정조 15년) 9월
어느 날이었다.
정조는 창경궁 춘당대에서 규장각 신하들에게 웅후
(곰을 그린 과녁)을 10순(50발)을 쏘라고 명했다.
그러나 다산을 비롯한 7명이 50발 중 단 4발도 맞추지
못했다. 이런 경우엔 정조가 벌주(罰酒) 1잔씩 내려줘야 했다. 그러나 정조는 “벌주를 내리는 것은 그대들에게
오히려 상을 내리는 것”이라면서 다산 등 낙제점을 받은
7명에게 10일 간의 ‘북영 입소’를 명했다.
“문장은 아름답게 꾸밀 줄 알면서 활을 쏠 줄을 모르는 것은 문무(文武)를 갖춘 재목이 아니다. 의당 그대들을
북영(北營)에 잡아놓고 하루에 20순(화살 100개)씩
쏘아서 매 순마다 한 발씩은 맞힌 뒤에야 풀어주겠다.”
100개 중 최소한 20개는 맞출 때까지 풀어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북영 입소’라면 지금으로 치면
‘해병대 캠프 입소’가 아닌가.
졸지에 북영(훈련도감 본영)로 끌려간 다산은 이때의
생고생을 생생한 필치로 토로한다.
“벌로 북영에 가서 활을 당겨야 했다. 처음엔 활이 망가지고 화살은 굽었으며, 깍지(활을 쏠 때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끼는 기구)는 떨어져 나갔다. 팔찌(활을 쏠 때 왼팔 소매를 걷어 매는 띠)는 질질 끌렸으며, 손가락은 부르트고 팔뚝은 부어올랐다.”
정조는 오재순의 ‘고풍’에 손수 쓴 글에서 “원래 활쏘기는 우리 가문의 법도”(射藝卽我家法也)라 어깨를 으쓱댔다. 그러나 10여년 동안 쏘지 않다가 최근 팔힘을 시험해보려고 몇차례 10순(50발)씩 쏘았는데 40여발씩 명중시켰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경(신하)들이 축하의 글을 올리기에 장난삼아 ‘그래 내가 49발까지 맞히면 그때가서 고풍을 청하라’
고 했다. 그런데 마침내 오늘(10월30일) 명중한
화살수가 약속한 숫자(49발)와 맞아 떨어졌으니
선물을 내리려 한다.”
정조는 참석한 각신(규장각 관리)들에게
반숙마(길들이지 않은 말) 1필씩 하사하고
검서관(규장각 5급이하) 이하 관리에게는 차등있게
선물을 내렸다. 오재순은 현종의 셋째딸인 명안공주(1667~1687)의 손자로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냈고 학문에 뛰어나 제자백가에
두루 통했고,
특히 <주역>에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다.
정조는 그날 평소 총애하는 인물인데다 참석자 중
맨머리에 있던 오재순에게 특별히 임금의 소감문을
써준 것으로 보인다.
성인을 만나 활쏘는 법까지 배웠네’
그러나 며칠간 피나는 연습을 한 덕분에 점점 능란해졌다. 1순(5발)을 쏘면 3발을 맞히는 때가 많았다.
정조는 예서 멈추지 않았다.
“이젠 하루에 10순씩(50발) 쏘고 남는 시간에는
경서의 뜻을 연구하라”면서 <시경>과 관련된 문제를
800조목 내린 뒤 “조목별로 답안을 작성해서 올리라”
고 지시했다. 신하들을 이렇게 들들 볶을 수가 있을까.
활쏘기에 경전 공부에 800문제 시험까지….
다산은 그렇게 10일간 훈련하고 나서야 겨우 북영에서
풀려났다. 다산으로서는 섭섭할만 했다.
자신을 그토록 총애했던 정조가 안면몰수하고 합숙유격훈련까지 보냈으니 말이다. 그러나 캠프에 다녀온 다산은 오히려 “난 행운아였다”는 정조의 처사를 고마워했다.
“옛 사람들은 육예(六藝)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유자(儒者)라고 이름 붙일 수 없었다. 그래서 연회 때는 반드시 활쏘기를 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문(文)을
귀히 여기고 무(武)를 천하게 여기게 됐다.
어려서부터 지필(紙筆)을 익혀 먹을 다루고 편지글이나 쓰는 기술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평생 동안 활을
잡아 보지도 못하고 늙는 자가 있다.”
다산은 “그런데 지금 우리 몇사람은 성인(聖人·정조)의 세상에서 태어나 성인의 문하에서 노닐며 화살 쏘는
법까지 이 얼마나 천고에 한번 만나는 행운이냐”
고 한상 말아올렸다.
그 뿐이 아니었다. 다산은 “360일 중에 단 10일만
훈련해도 이 정도인데 여태껏 뭐하고 있었을까”
하면서 “임금의 가르침을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배웠으니 이것은 우리의 죄”라 자탄했다.
시간을 227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활 쏘는 기예는 바로 우리 가문의 법도(家法)여서
유의하지 않을 수 없는데…내가 장난삼아 ‘49발 맞히면 그 때 가서 고풍(古風)을 청하라’ 했거늘 오늘 명중한
화살수가 약속한 수와 맞아 떨어졌기에….”
문예 뿐이 아니라 무예군주도 자처한 정조라는
임금 밑에서 들들 볶이며 신하노릇 했던 이들은 얼마나
피곤했을까. 하기야 똑똑한 군주 밑에서 똑똑한 신하가
나는 법이다. 그런 임금과 신하가 만나 서로 존경하고
믿으며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는 경우를
‘어수지계(魚水之契)’라 한다. 물고기가 좋은 강물을
만나 활발하게 헤엄칠 수 있는 그런 모습이다.
아버지(사도세자)를 닮아 무인의 자질을 이어받은 정조는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활쏘기를 비롯한 무예연마에 매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무의 겸비가 국운을 장구하게 하는 계책’이라는 지론을 갖게 된 정조는 무신은 물론 문신들에게도 ‘무예를 연마하라’고 다그쳤다. 하기야 스스로를 ‘군사(君師)’, 즉 만백성의 군주이자 스승이라고 생각한 정조가 아닌가.
정조는 37살 이하의 당하관(정 3품 이하) 중 글재주가
있는 문신을 선발해서 공부시키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친히 시험문제를 내어 성적을 가르는 이른바
초계문신제도를 두기도 했다.
정조는 이들에게 “내가 만약 먼저 모범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신하들이 공부할 수 있겠느냐”
면서 “그러나 난 원래 공부를 즐겨서 하루종일 해도
피곤한 줄 모르겠다”고 했다.
이런 말을 듣고 공부하지 않는 신하들이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정조가 그토록 총애했던 다산 정약용도 정조가
친히 출제한 시험에서 낙제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다산은 재시험, 3시험을 치뤄 겨우 1등에 해당되는 ‘상중(上中)’의 점수를 받아 체면치례했다.
(<일성록> 1790년 6월8일자)
그런 다산에게 정조가 또한번의 굴욕을 안긴
사례가 있었으니 바로 ‘활쏘기’였다.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