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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0. 묵상글 (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 그냥 죽겠습니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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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그냥 죽겠습니까?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 라우렌시오 축일에 씨앗과 관련한 복음을 듣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라우렌시오 성인과 분명 연관이 있기 때문이고,
라우렌시오 성인이 씨앗과 같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죽어 진정 많은 열매를 맺은 분이시고,
그렇기에 교회는 그의 죽음을 기념이 아니라 축일로 기념합니다.
전례적으로 축일은 열두 사도만 축일로 기념하고 열두 사도 외에는
성녀 막달라 마리아와 스테파노뿐인데 라우렌시오도 축일로 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이고 사도들의 사도이기 때문이고,
스테파노는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로서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씨앗이라는 떼르뚤리아노의 말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씨앗이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라우렌시오는 왜 축일 급으로 지내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가 로마 교회의 씨앗이었기 때문인데
그의 죽음과 표양이 로마의 회개를 가져왔고, 로마에서 이교의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프루텐티우스 시인의 말대로 그의 영웅적인 순교와
그의 아름다운 행위는 후대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귀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을 때 생선 석쇠 구이처럼 석쇠 위에서 화형을 당했는데
한쪽이 다 익자 뒤집으라고 할 정도로 죽음의 고통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적인 순교의 모범을 보였으며 로마 교회의 재산 관리를 맡은 그에게
보물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자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후
가난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 이들이 교회의 보물이라는 하여 우리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보물로 여겨야 하는 모범을 남긴 그였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죽음과 그의 사랑이 다 로마 교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보며 사랑으로 죽고, 사랑하며 죽는 삶을 오늘 묵상합니다.
왜냐면 우리도 다 죽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차피 다 죽습니다.
다 죽는데 죽음이 다릅니다.
사랑으로 죽는 죽음과 그냥 죽는 죽음이 다릅니다.
죽음만 그러겠습니까?
사랑하며 사는 삶과 그냥저냥 사는 삶이 다릅니다.
사실 그렇게 산 삶이 그렇게 죽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산 사람은 사랑으로 죽고 그냥저냥 산 사람은 그냥 죽습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냥 죽겠습니까?
어차피 죽는데 사랑의 씨앗이 되어 열매 좀 맺고 죽을 수 없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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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요한 12,26)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들이 예수님 뵙기를 청합니다. 그러자 이를 알리는 필립보와 안드레아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왔음을, 곧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습니다.”(요한 12,23)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대체 어떤 힘이 이 밀알을 죽음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묘하게도 밀알을 죽게 하는 힘은 생명력입니다. 그러니 (살리기 위해)‘죽을 수 있는 힘’이 생명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밀알은 먼저 땅에 떨어져야 하고, 죽어 묻혀야 하고, 묻혀 사라져 자신이 없어지고서야 비로소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죽음의 고통이 꼭 필요합니다. 곧 죽음의 고통은 ‘새 생명의 또 다른 이름’이요, 자기를 벗게 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당위성을 말해줍니다. 곧 땅에서의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참된 생명’(“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곧 ‘죽음’이 실재를 보존하는 길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방이 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요한 12,26)
이는 ‘섬긴다는 것’과 ‘따른다는 것’의 긴밀한 연관성을 말해줍니다. 누군가가 따른다고 말하면서 따르는 그를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따름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섬긴다고 말하면서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도 진정한 섬김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따라 나서서 그분을 섬길 때라야 진정 따르는 것이 됩니다. 곧 우리가 그분을 따라 나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분을 섬기기보다 ‘따라 나선 자신’을 섬기고 있거나, 수도자가 집과 가족을 떠나 왔지만 ‘떠나온 자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면, 진정한 따름에도 진정한 섬김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는 사람은 당신을 영광스럽게 할 그 죽음의 길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죽음의 길에 함께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당신을 따르고 섬기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살 속에서 죽는 장엄한 순교의 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함께 있는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곁에 있는 형제를 종중하고,
함께 있는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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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2고린9,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소유한 것이 무엇이든지 하느님 앞에 씨를 뿌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탈랜트, 시간을, 능력, 재능을, 물질을, 믿음을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몇 갑절로 늘려 주셔서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는 데 어찌 열매가 풍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밀알을 심는 것은 열매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 원하면 그만한 정성과 사랑으로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밀알이 땅속에 묻히면 죽어서 싹을 틔우게 됩니다. 만약에 씨앗이 땅속에 묻히길 거절한다면 아마도 새한테 먹히거나 짐승한테 밟혀 으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묻혀야 합니다. 밀알이 땅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어짐을 뜻하지 않고 생명을 낳기 위하여 뿌리를 내림을 뜻합니다. 사실 죽는다는 것은 곧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얻기를 원하는 만큼 심어야 합니다. 얻기를 원하는 만큼 죽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진정한 생명을 위하여 감당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리고 더 높은 가치 때문에 지상의 생명을 거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과 그분의 나라 때문에 지상의 매력에 집착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 안에서 이웃을 위하여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생명의 기쁨이 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12,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고 결국 그리하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함께해 주시고 또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감당하고 있는 모든 일상의 삶을 기왕이면 밀알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순명으로 하면 주님의 일이 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내일일 뿐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사랑하면 ‘내 나라’가 만들어지고, 예수님처럼 사랑하면 ‘예수님의 나라’가 만들어집니다. 사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라우렌시오 성인은 “로마 교회의 부제직을 수행하고 거기에서 거룩한 피의 봉사자로 일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는 모진 박해를 예상하고 교회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며 총독에게“나는 주 하느님을 경배하며 그분만을 섬기니, 네 잔인한 고초를 두려워하지 않는도다.”하며 믿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총독이 라우렌시오를 불타고 있는 장작더미 위에 눕혔는데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후 "모든 것이 잘 구워졌으니, 뒤집어서 잡수시오!" 하고 말했답니다. 바로 그 믿음의 씨앗이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열매로 주어진 것입니다. 과연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입니다”(성 예로니모).
일상 안에서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상대를 위한 배려를 하다가 그만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당신도 바뀔 때가 되었지 않느냐! 이제는 철이 들 때가 되지 않느냐! 왜 나만 양보해야 하느냐! 이제는 당신차례야!”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것은 남에게 미뤄야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묻혀 썩어야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12,24). 그렇다면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나의 죽음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색을 내지 말고 끝까지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 그날까지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합니다.
지금은 미약하게 보일지라도 풍성하게 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밀알의 두려움을 극복하십시오.“하느님은 당신의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2,13). 그러므로“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2코린 6,1).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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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9월 24일 뉴저지의 메이플우드 성당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있습니다. 본당 설립 50주년 감사미사가 있습니다. 50년 전에 작은 공동체를 시작한 사제가 있습니다. 7년 전에 선종하신 박창득 아우구스티노 몬시뇰입니다. 신부님은 교우들과 함께 3가지를 중점적으로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공동체의 분가입니다. 신부님의 땀과 노력으로 50년이 지난 지금 뉴저지에는 많은 한인 공동체가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공동체는 ‘성 마이클, 103위, 마돈나, 데마리스트, 메이플우드’입니다. 두 번째는 문화의 복음화입니다. 신부님께서는 한국의 평화신문을 미국에서도 발간하도록 하였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께서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의 창간호에 ‘축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미주 한인 공동체를 위한 선교지가 되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발행하였던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저도 일하고 있습니다.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한국에서 발행되는 ‘매일미사’의 미주판을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미주판 매일미사는 영어와 한국어가 같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영어가 편한 2세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미주판 ‘매일미사’의 수익은 ‘북미주한인사제협의회’의 운영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한인 공동체를 위해서 ‘가톨릭회관’을 마련하였습니다. 가톨릭 회관에서 한인 공동체는 꾸르실료, 엠이, 성서공부 등의 모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톨릭 회관에는 ‘가톨릭 방송’ 있습니다. 가톨릭 회관은 한인 공동체의 ‘오아시스’가 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사제양성’입니다. 신부님은 젊은이들이 사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신부님의 따뜻한 사랑과 도움으로 젊은이들이 사제가 되었고, 지금 한인 공동체에서 사목하고 있습니다. 박창득 몬시뇰 기리며 사제들은 가톨릭회관에 ‘박창득 아우구스티노 몬시뇰 기념관’을 만들었습니다. 9월 17일에는 축성식이 있습니다. 이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밀알 하나가 뉴저지에 떨어져 밀알 하나로 남지 않고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신부님의 열정과 헌신 그리고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5월에 동북부 엠이 주말이 있었습니다. 팬데믹 때문에 3년 만에 열리는 주말이었습니다. 준비하면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엠이 물품을 준비하는 것, 주말 대요를 준비하는 것, 장소를 섭외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걱정은 주말에 참석하는 부부였습니다. 팬데믹 전에도 주말에 참석하는 부부가 적었다고 들었습니다. 팬데믹 이후 처음 하는 주말이라서 걱정이 컸습니다. 발표 부부를 비롯해서 많은 엠이 부부들이 동북부 엠이 주말을 위하여 홍보를 다녔습니다. 동북부에 있는 한인 성당은 모두 가서 홍보를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20부부가 신청하였고, 주말이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열정과 헌신이 있으니 팬데믹의 터널도 잘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엠이 부부들의 땀과 노력이 20부부의 엠이 체험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뜨거운 태양을 온 몸으로 받으며 결실을 맺는 들판의 곡식들이 있습니다. 가을이면 들판에서 흘린 농부의 땀과 눈물은 기쁨이 될 것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마당에는 대추나무가 있었습니다. 작고, 부실한 열매들은 스스로 떨구어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야만 알찬 열매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추나무조차도 자신의 아픔을 감수하면서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 역시 하느님 앞에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라우렌시오 부제도 바로 그런 봉사자였습니다. 더운 여름을 식혀주는 소나기처럼, 우리들 모두는 주님을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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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섬김, 나눔, 따름-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오늘 화답송 시편 112장이 참 좋습니다. 자연재해 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 깨닫습니다. 더구나 혼자는 너무 미약합니다. 그래서 더불어의 삶과 여정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회개에 이어 공동체의 회개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사상 유례없는 폭우가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보여줍니다. “폭우 하루 381.5mm, 102년만의 기록, ‘기후변화, 국지성 폭우 불러’”란 기사와 “역대 최악의 물폭탄에 수도권 마비상태, 피해 속출”이란 기사가 한눈에 들어 왔습니다. 이 또한 회개의 표징입니다.
새삼 그리스도 에수님께 관심이 집중되는 요즈음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우리에게 참 가까이 느껴지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요, 우리의 현재와 그리고 미래의 희망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부단히 회개에로 이끄는 영원한 회개의 표징인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제 행복기도를 예닮기도(예수님 닮기)로 바꿨고, 오늘 강론 제목도 예닮의 여정으로 정했습니다. 섬김과 나눔의 사랑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예닮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3년전 나온 교황님의 사도적 권고, “CHRISTUS VIVIT(그리스도는 살아계시다)”라는 글을 대략 읽으며 감탄했습니다. 현시대의 모든 문제점이 망라되고 있으며, 결국은 그리스도께 우리의 관심을 집중토록 하는 글이었습니다. “예수님, 영원한 젊음(Jesus, ever young)”이라는 제2권의 제목도 좋았습니다. 세월 흘러 나이는 들어도 정신은, 마음은, 영혼은 언제나 푸르른, 늘 새로운 청춘이면 좋겠습니다.
특히 제4권의 제목이 좋았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너희는 하느님의 ‘지금’이다(You are the ‘now’ of God)”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하느님의 ‘지금’임을 깨달아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전형적인 모범이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한평생을 하느님의 지금으로 투명한 하느님의 현존으로 하느님 나라를 사셨던 그리스도 예수님이셨고 이런 예수님을 뒤이은 교회의 참 보물인 성인들이었습니다.
오늘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길이 기억될 감동적인 성인입니다. 매일미사책의 소개가 간명하고 좋아 그대로 인용합니다. 성인은 스페인 태생으로 로마교회의 일곱부제중 수석부제였으며 그의 임무는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빈민들을 구제하는 일이었습니다. 258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때, 이들이 교회의 보물을 바치라 하자 부제는 남몰래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그들을 박해자들 앞에 데려갑니다.
“이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분노한 박해자들은 성인을 처형했지만 만고불변의 진리를 선포한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야말로 교회의 참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용감하고 의로운 성 라우렌시오 부제 역시 하느님의 지금을 살았던 성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배치도 이런 라우렌시오 순교성인에 잘 드러맞습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즉 사랑의 순교자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일치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대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그리고 예수님 뒤를 잇는 무수한 성인들, 순교자들을 지칭합니다. 얼마전 단체 피정신청한 분의 부탁도 잊지 못합니다. “희생과 봉사”에 대한 주제로 강의해달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책임을 맡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지금을 잘 드러내는 일이 사랑의 희생과 섬김이겠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지금을 살 수 있는지 다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섬김의 겸손, 섬김의 순종, 섬김의 추종, 섬김의 사랑입니다. 수도공동체는 주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는 학원이라 정의한 베네딕도 성인입니다. 예수님 또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섬김으로 당신의 사명을 요약합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만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섬김의 삶을 통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입니다. 섬김에 이어 나눔의 삶이, 하느님의 지금을 잘 반영합니다. 자발적으로 기쁘게 선행의 나눔을, 자선을 강조하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나눔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게 되는 작금의 상황입니다. 교황님의 문헌에서 마음에 와닿은 “난민들은 우리 시대의 전형(Migrants as an epitome of our time)”이란 제목이었습니다. 곳곳에 보금자리 품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 넘치고 있는 시대입니다. 디지털 시대, 고립과 단절, 소외로 인해 날로 늘어나는 영적 난민들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함께 살아도 그리스도 예수님께 정주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영적난민들입니다.
오늘은 우리 수도원의 정 라우렌시오 수련수사의 영명축일이고 엊저녁식사때는 조촐한 축하식도 가졌습니다. 열두명의 수도가족 전부와 묵고 있는 손님 4분이 함께 하니 4명 식탁의 넷이 가득하니 말그대로 이 시대 보기드문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정주定住 수도원의 환대歡待가 ‘하느님의 지금’을 잘 표현하며 섬김과 나눔에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혼란한 세상 한복판 “난민수용소”같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지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평생 하느님의 지금으로 사셨고 그 뒤를 이어 무수한 성인들이 이렇게 살았고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 과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항구한 것이겠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섬김과 나눔의 정신으로 항구히 한결같이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가난한 이에게 넉넉히 나누어 주니, 그의 의로움은 영원히 길이 이어지고, 그의 뿔은 영광 속에 높이 들리리라.”(시편112, 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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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대한민국 직장인들이 가장 힘들고 불행하다고 여기는 요일은 언제일까요? 월요병을 생각하며 ‘월요일’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실제로 가장 힘들고 불행하다고 여기는 날은 ‘목요일’이었습니다. 가장 행복한 날은 토요일이었고, 주일은 월요일보다도 행복감이 낮게 나왔습니다. 주일은 행복이 다하는 시점이니 불행하고, 월요일은 이미 불행을 예감하고 준비하니 차라리 주일보다 더 나은 것입니다.
결국 행복은 어디와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바로 희망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곳으로 여행 가는 사람이 많고, 맛집을 찾아 나서는 사람도 그 수가 대단한 것입니다.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의 행복도 희망에서 찾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리라는 희망, 그 희망을 바라보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여행 가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한 준비가 꼭 필요합니다. 사랑의 실천이라는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삶이 가장 필요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희망의 완성이 바로 행복입니다. 희망의 완성을 위해 우리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살고 있나요? 특히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에는 의료진들의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산불이 났을 때는 소방관들의 활약으로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희망의 완성인 행복에 모두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현세에서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다 보면 결국은 목숨마저 잃게 될 것이니, 현세의 목숨은 내세의 영원한 생명을 겨냥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영원한 생명을 믿고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다 보면, 그 희생의 보상은 노력의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만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미워하다’라는 표현은 복음적인 용법으로, 제 목숨을 부차적인 것으로, 더 정확하게는 영원한 생명을 일차적으로 생각하고 현세의 삶을 그 수단 또는 방법을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세의 삶 자체가 희망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가장 첫 번째에 둘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늘만 바라보며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더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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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빛이 있어도 볼 수 없는 게 있습니다. 오히려 눈을 감아야 보입니다. 그리운 사람이 그렇습니다(조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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