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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기획] 가톨릭 제례 알아보기
천주교 제례는 효 실천의 하나… 위령 미사 봉헌을 권장합니다
신자 가정은 명절이면 집에서 차례를 지내거나 성당에서 조상을 기리는 공동 추모의식을 거행한다. 기일(忌日)에 제사를 지내는 가정도 많다.
이를 보고 개신교 신자들은 “조상을 숭배하는 건 미신”이라며 제례를 허용하는 가톨릭교회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곤 한다. 하지만 한국 가톨릭이 허용하는 제례는 조상을 숭배하거나 복을 비는 ‘종교적(미신적)’ 성격이 아니다. 제사를 조상에 대한 효성과 전통문화 계승 차원에서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한 것이 한국 천주교 제례다. 간단히 말해 종교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차원이다.
박해 빌미가 된 제사
18세기 말 조상 제사 거부가 천주교 박해의 빌미가 됐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 교회 창립 선조들은 교리서를 연구하면서 그동안 지내온 제사가 교회 가르침에 어긋나는 점을 발견했다. 그래서 윤유일(바오로, 1760∼1795)가 베이징에 가서 구베아 주교에게 문의했다.
“제사를 드리는 것은 돌아가신 분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하기 위함(事死如事生)인데, 천주교를 믿으면서 제사를 드릴 수 없다면 매우 곤란한 일입니다. 무슨 방도가 없겠습니까?”
구베아 주교는 “사람이 죽은 후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은 (교회가 지켜야 할) 성실한 도리에 크게 어긋난다”고 대답했다. 중국에서는 이미 17세기 중엽부터 100년간 제사를 둘러싼 전례 논쟁이 있었다. 이 전례 논쟁은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1742년 선교지 문화에 맞춘 적응주의 선교를 금지하는 교서를 발표하면서 일단락됐다.
신앙 선조들은 이 방침에 따라 조상 제사를 폐지했다. 전라도 진산의 선비 윤지충(바오로)이 어머니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제사를 드리지 않아 발생한 박해가 신해박해(1791년)다. 성리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제사 거부는 사회 질서와 윤리를 내팽개치는 패륜 행위나 다름없었다. 제사 금령은 1939년 비오 12세 교황에 이르러서야 풀렸다.(훈령 「이제는 분명히」)
그렇다고 교황청이 제사를 권장한 것은 아니다. “미신처럼 시작된 풍습일지라도 현대에 이르러 그러한 요소가 사라지고, 시대 변화에 따라 사람들 생각도 변했기 때문에” 문화적 관습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허용할 수 있다는 게 훈령 요지다. 한국 천주교의 현행 상제례 예식은 이 훈령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토착화 정신, 한국 전통문화 등을 종합적으로 연구해 마련한 것이다.
가정 제례를 거행할 때
한국 주교회의가 허용하는 제례는 유교식 조상 제사나 미신적 요소가 다분한 민간신앙 풍습과 엄연히 다르다. 조상의 영혼을 귀신으로 이해해 복을 빌거나 재앙을 쫓으려는 수단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조상의 영혼(귀신)이 저승에 들지 못하고 배회한다든지, 제사상을 잘 차려야 복을 많이 받는다는 미신적 믿음은 버려야 한다. 교회는 돌아가신 조상을 추모하되, 죽은 자들의 영혼은 온전히 하느님 주권에 맡기라고 가르친다.
천주교 제례는 성경이 가르치는 효 정신의 표현이다. 또 하느님께 바치는 감사의 마음을 담고 있다. 가족 간 우애를 돈독히 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추석 명절에 가정에서 제례를 거행할 때는 주교회의가 2012년 승인한 ‘가정 제례 예식’을 따르면 된다. 제례 예식은 시작 예식→말씀 예절→추모 예절→마침 예식으로 구성돼 있다. 추모 예절에서는 분향과 절,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바치는 한국 교회의 전통적 기도인 위령 기도를 주요 예식으로 한다.
아울러 교회는 탈상과 기일 등 선조를 특별히 기억해야 하는 날에는 가정 제례에 우선해 위령 미사 봉헌을 권장한다.(「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135조 1항)
공동 의식은 미사 전후에
본당 차원에서 추석날 공동 의식을 거행할 경우 미사 전이나 후에 해야 한다. 명절 미사라는 전례와 비전례적 신심 행위인 제례가 섞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명절 미사가 공식적인 전례 행위이고, 공동 의식은 사목적 차원에서 허락되는 부가적 신심 행위이다.
공동 의식은 상을 간소하게 차리고 사제의 설명→분향→위령기도(연도) 순으로 거행하면 된다. 미사 전례 성격상 조상 이름을 일일이 적어 게시하는 것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유교식 제사에서 사용하는 위패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주교회의는 부득이 사목적 이유로 조상 이름을 게시할 경우 음식상이나 제대 앞이 아니라 제대 주변에 미사 지향을 알리는 차원에서 게시하는 방법을 권장한다.
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설문조사(2012년)에 따르면 명절에 합동 위령 미사와 함께 공동 의식을 거행하는 본당은 84%에 이른다.
[전례 생활] 주일, 그리스도인의 근원적인 축일
그리스도인에게 주일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왜 가톨릭 신자들은 주일미사 참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유다인들에게 안식일인 토요일이, 이슬람교도에게는 금요일이 기도와 예배를 위한 날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듯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주일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달려 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교서 「주님의 날」(Dies Domini)은 부활하신 주님의 날인 주일의 의미를 밝혀 주는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이 교서의 머리말에서 교황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서 점차 희미해져 가는 주일의 모습을 언급하며 그 의미를 재발견하도록 강력히 촉구한다.
“불행하게도 주일이 그 근본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단순히 ‘주말’의 일부가 되어버릴 경우, 사람들은 지극히 제한된 지평 안에 갇혀서 더 이상 ‘하늘나라’를 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축제를 벌일 준비가 되어 있어도 사실상 그들은 축제를 벌일 수 없게 됩니다”(4항).
우리는 주일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교황의 우려처럼 주일을 단순한 휴식과 여가의 시간으로서 이해되는 ‘주말’과 혼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서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축제의 날인 주일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안식일에서 주일로
주일은 휴식의 날이다. 이 휴식은 유다인의 안식일의 기원을 이루는 창세기 첫 장의 하느님의 ‘휴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2,2). 여기서 말하는 창조주의 ‘휴식’은 하느님의 ‘무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의 충만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곧 하느님께서 손수 하신 일을 둘러보시며 ‘보시기에 참 좋았다.’(창세 1,31 참조)라고 하신 것처럼 ‘기쁨과 환희에 찬 하느님의 시선’을 표현한다.
창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이 관조적인 시선은 특히 모든 피조물의 으뜸인 우리 인간을 향한다. 유다인의 안식일 노래는 하느님의 이 특별한 시선과 마주하는 순간으로서 안식일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신랑이 신부를 보고 기뻐하듯이 그대의 하느님께서는 그대를 보고 기뻐하시리라. 그대가 사랑하는 백성, 가장 충실한 사람들 가운데로 오라. 오, 신부여, 오, 안식일의 여왕이여.” 마치 신랑이 신부를 바라보듯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가득하신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 주일의 휴식은 바로 하느님의 이러한 사랑의 시선과 마주하는 ‘기쁨’의 순간이자 그분의 사랑에 대한 ‘기억’의 순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을 기억함으로써 안식일 다음 첫째 날을 일찍이 ‘주님의 날’(주일)이라고 부르며 근원적인 축일로 삼았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일은 바로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하였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일의 ‘영적’ 의미가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창조에 대한 기억으로서의 안식일과, 하느님의 창조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대한 기억으로서의 주일은 공통적으로 ‘기억’하는 행위를 핵심 주제로 한다. 주일의 의미는 단순히 일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경축하고,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찬미로 가득 채우는 행위로써 그분을 기억하는 데 있다. 그럴 때 주일의 휴식은 비로소 완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주일, 그리스도의 날
주님의 날, 곧 주일은 명백히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거한다. 복음서는 주님의 부활 사건과 이와 관련된 많은 일화를 안식일 다음 날, 곧 ‘주간 첫날’과 연결 짓는다. 이날 부활하신 주님께서 빈 무덤 밖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고(요한 20,1 참조), 십자가 사건으로 절망에 빠진 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루카 24,13-35 참조)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6; 요한 20,19 참조).
그리고 일주일 뒤 의심 많은 토마스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수난의 표지를 직접 보여 주셨다(요한 20,26-29 참조). 이로써 사도 시대부터 안식일 다음 첫째 날, 곧 ‘주간 첫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날에 자신들의 생활 리듬을 결정하는 관습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곧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주된 특징이 되었다.
초세기 교리 교육에서 유다인의 안식일과 비교하여 주일의 탁월성을 증명하고자 할 때 강조하였던 것은 그리스도교 신비 전체를 담고 있는 부활의 새로움이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전의 사물과도 같은 상태로 살던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면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님의 날을 지킵니다. 이날은 그분과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생명이 나타난 날입니다. 그 신비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받았으며, 그 신비 안에서 우리의 한 분뿐이신 스승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받고자 노력합니다. 성령 안에서 그분의 제자인 예언자들도 스승이신 그분을 기다렸는데, 우리가 어찌 그분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마그네시아인들에게 보낸 서간」, 9,1-2).
부활과 창조 사건의 연관성 안에서 주일은 또한 ‘새로운 창조의 날’이다. ‘주간 첫날’에 일어난 부활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구성하는 우주의 주간 첫날(1,1-2,4 참조), 곧 빛을 창조한 날(1,3-5 참조)과 자연스럽게 연관됨으로써 새로운 창조의 시작으로 이해된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생각에 빛을 던져 주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 1,16).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에페 1,10).
우리는 이 구원의 신비 안에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다. 부활의 날인 주일은 다른 어느 날보다도 그리스도인에게 세례 때의 첫 마음을 상기시키는 날이다, 곧 세례를 통하여 주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한 구원을 기억하는 날이어야 한다. 전례는 부활성야는 물론 주간마다 돌아오는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에 세례를 거행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주일의 이러한 세례적 특성을 강조한다.
주일, 교회의 날
주일의 핵심은 성찬례를 거행하는 데에 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1코린 11,24-25). 사도 시대부터 교회는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하신 바로 이 말씀과 행위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해 왔다. 주님의 만찬인 미사에서 성찬의 희생 제사를 거행하도록 함께 모이라고 부름받은 하느님의 백성이 곧 교회이다.
특별히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주일에 공동으로 거행하는 미사는 정해진 때와 장소에서 보편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준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113항 참조). 그리스도인은 주일 미사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이 체험하였던 것을 강렬하게 다시 체험한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주님과 충만한 일치를 이루기까지 주님께서는 어떻게 이 만남을 이끄셨던가? 두 제자와 함께 길을 걸으시고 대화를 나누시며 그들 마음에 응어리진 절망과 한탄의 이야기를 들으셨다. 그리고 성경을 몸소 풀이하고 설명해 주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타오르게 하셨다. 이 여정을 따라서 엠마오의 두 제자는 말씀의 빛으로 감추어진 의미를 깨닫고, 빵을 쪼갤 때 주님의 현존을 깊이 체험하였으며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사도로 변모되었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로 발견하는 기쁨과, 영적으로 깊이 결속된 일치의 공동체로 발견하는 기쁨이 주일의 약속 안에 있다. 주일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주님의 식탁에 마련된 우리의 자리가 빈자리로 남아 있지 않기를, 그리고 미사 안에서 우리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체험한 모든 것과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주님 만찬으로의 초대] (18) ‘본기도(Collecta)’
모든 신자들 뜻을 모아 드리는 기도 묶음
본기도는 미사 시작 예식을 마무리하며, 앞서 행한 모든 것을 종합해 하느님께 바쳐 올리는 공동체의 기도다. 사진은 미국 뉴욕시의 한 고등학교에서 봉헌된 미사 중 주례 사제들이 본기도를 바치는 모습.CNS 자료사진미사 거행 전체의 절정을 이루는 감사 기도를 비롯하여 본기도, 예물 기도, 영성체 후 기도를 가리켜 ‘주례자의 기도’라고 한다. “이 기도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회중을 이끄는 사제가 거룩한 백성 전체와 모든 참석자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0항).
명칭과 의미
5-6세기경에 로마 전례에 도입된 본기도는 ‘기도’를 뜻하는 라틴 말 ‘오라씨오’(oratio)라고 불리다가 차츰 ‘꼴렉따’(collecta)라는 말로 정착되었다. ‘꼴렉따’라는 명칭은 ‘한데 모으다’, ‘집결시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colligere’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용어는 본디 백성이 미사가 거행될 본당으로 행렬하여 이동하기 전에 모여 있던 장소에서 주례자가 바친 첫 기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래서 ‘집회에서 바치는 기도’, 곧 모인 회중 앞에서 바치는 기도나 신자들의 뜻을 모아 주례자가 바치는 기도라는 의미에서 ‘모음 기도’라 부르기도 한다.
본기도는 집전자가 자신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위해 간구하며 주님께 모아들이고 올려드리는 기도들의 묶음과도 같다. 우리는 미사의 시작 예식에서 주님의 현존을 선포하고(인사) 주님의 자비를 간청하며(참회와 자비송) 주님의 영광을 노래했다(대영광송). 본기도는 이 시작 예식을 마무리하며 앞서 행한 모든 것을 종합해 하느님께 바쳐 올리는 공동체의 기도이다.
구조와 내용
본기도는 권고, 침묵, 기도, 백성의 환호인 ‘아멘’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제는 먼저 손을 모으고 신자들을 향해 “기도합시다”(Oremus)라고 권고한다. 이 기도의 공동체적 성격은 언제나 ‘우리’를 주어로 삼고 있는 권고의 말과 기도문의 형식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느님의 현존 앞에 한데 모인 당신의 교회, 당신의 백성, 당신의 종, 당신의 신자들은 다름 아닌 ‘우리’다. 사제는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같은 자세를 취하며 그 백성의 일원임을 드러낸다. 동시에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회중을 이끄는 존재로서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모으도록 신자들을 초대한다. 이어지는 잠깐의 침묵은 미사 거행의 본질적 요소로서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이 침묵은 신자들에게 능동적이고 내적인 참여의 공간을 열어준다. 이 침묵 가운데 신자들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 있음을 깨닫고 간청하는 내용을 마음속으로 생각한다”(총지침, 54항).
그 다음에 사제는 팔을 벌리고 그날 미사의 성격을 표현하는 본기도를 바친다. 이 기도는 분명한 방향성을 갖고 있다. 곧 하느님 아버지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바치는 기도다. 하느님께서 들으시고 받아들이시도록 교회의 모든 기도는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두 팔을 벌린 채 서 있는 사제의 동작과 자세도 “천사의 손에서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는 향 연기”(묵시 8,4)처럼 하늘을 향해 오르는 기도의 말을 동반한다. 무엇보다 이 자세는 십자가에서 팔을 펼치시어 죽음으로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을 선포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십자가의 희생 제사인 미사에서 사제는 이 동작으로 공동체의 이름으로 바치는 첫 기도에 모든 신자들을 참여시킨다.
로마 전례 전통에 따른 본기도는 그 내용이 군더더기 없이 아주 간결하고 분명하다. 그리고 단순한 구조 안에 기도의 핵심 요소들을 잘 종합한다. 예를 들어보자. 주님 세례 축일의 본기도는 다음과 같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그리스도께 성령을 보내시어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아들로 선포하셨으니/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저희도 언제나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먼저 본기도는 언제나 하느님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경우에 따라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과 같이 하느님의 칭호와 결합된 다양한 수식어가 덧붙여진다. 그 다음에 주님 세례 축일 미사의 성격을 드러내는, 하느님께서 행하신 구원 사건에 대한 ‘기념’ 부분이 나타난다(요르단 강에서… 선포하셨으니). 그리고 기도의 동기라 할 수 있는 하느님께 드리는 청원의 내용이 뒤따른다(물과 성령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끝으로 사제는 삼위일체 성격의 맺음말로 기도를 마친다. 한편 신자들은 ‘아멘’으로 환호하며 사제가 바친 청원에 함께 참여하고 이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삼는다.
본기도는 이러한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대림, 성탄, 사순, 부활과 같은 중요한 전례 시기나 축일에는 그날 미사의 성격을 더욱 잘 드러내는 특별한 구원 사건이나 주제가 언급된다. 사순 시기 제3주일의 본기도는 회개와 은총의 시기인 사순 시기의 정신과 주제를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낸다.
“하느님, 온갖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단식과 기도와 자선으로 죄를 씻게 하셨으니 진심으로 뉘우치는 저희를 굽어보시고 죄에 짓눌려 있는 저희를 언제나 자비로이 일으켜 주소서.”
[거룩한 미사전례] 제대와 백성에게 하는 인사
사제는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 백성을 향하여 팔을 벌리고 세 가지 인사 양식 가운데 하나를 골라 인사한다. 인사 양식은 성경에서 뽑았으며 주님의 현존 또는 주님의 구원 은총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제1양식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언급하고 있는 사도 바오로의 2코린 13,13의 원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을 그대로 옮겼는데,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통하여 내리시는 은총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과 그 은총과 사랑을 이루시는 성령께서 베푸시는 친교의 힘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라는 의미가 있다. 제2양식(“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리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은 바오로 사도의 편지 서두(로마 1,7; 1코린 1,2; 2코린 1,2; 갈라 1,3 참조)에 흔히 나오는 초대교회의 전형적인 전례인사이다. 본래 유대인들의 평화 인사인데 여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다준 구원의 열매라는 의미를 덧붙여 그리스도교 인사로 발전시켰다. 사도교회는 평화와 은총(또는 구원)을 함께 사용하였다. 제3양식(“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판관 6,12; 룻 2,4; 루카 1,28; 2테살 3,16 참조)은 초세기 이래 가장 널리 사용하는 대표적인 인사로서 현행 미사 통상문에 네 번 사용되고 있다.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한 몸을 이루고 그분과 함께 살고 있으며 그분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 이런 인사를 통해 그분과 완전한 일치를 준비하는 것이다. 손을 합장하고 있는 백성은 사제의 인사에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틴어 원문: Et cum spiritu tuo은 “또한 당신의 영과 함께”라는 뜻)라고 응답한다. 이 영은 사제나 부제가 서품을 받을 때 안수를 통하여 받은 성령을 나타낸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직자들에게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인사하였고 그 응답인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도 오직 성직자들에게만 하였다(3세기 히폴리투스, 「사도 전승」 참조). 백성은 서품을 통하여 하느님의 특별한 영을 받은 사제들(주교와 신부)에게 그렇게 인사하지만 부제에게는 “또한 부제의 영과 함께”라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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