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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 장군 묘소와 충주 중앙탑공원
2017년 10월 22일 충주에 시낭송행사에 갔던차,임 경업장군 묘소와 충주 중앙탑공원을 돌아보게 되었다.
충주를 수없이 다녀왔지만 임 경업장군의 묘소가 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몰랐었다.
그곳을 가보자고 하여 참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가는 길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꼬불꼬불 산 비탈길을 돌아 산허리 중턱에 이르르니 드디어 묘역이 나타났다.
묘역 주변에는 우거진 송림이 무척 보기좋았고, 확트인 전경이 실로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임 장군 묘소를 돌아보고,다음 코스는 충주 중앙탑공원을 택했다.
중앙탑은 여러차례 다녀온 곳이긴 하나, 이곳은 우리나라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중요한 곳이기도 하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볼수 있는 그런 곳이기도 하기에, 때 마침 잘되었다는 생각을 갖고 돌아보기로 하였다.
중앙탑을 찾으니 탑돌이 행사가 엊그제 있었다고 화려한 장식에 둘러 싸여 있기도 하였고.....
중앙탑이 있는 이곳은 삼국시대 백두산에서 사람이 내려오고,해남 땅끝(장흥 정남진이란 말도 있음)에서 사람이 올라오다 바로 이곳에서 만났다고 하는 말이 전해오기도 하는 곳이다.
그런 만큼 한반도 정 중앙의 위치이기에 삼국시대 모든 나라들이 이곳을 차지하려 혈안이 되기도 햇던 곳이다.
차를 통제하기 위한 철책선이 보였고....
ㅡ임 경업 장군의 묘소ㅡ
임 경업 장군은 어떤 분이신가?
임경업 장군은 조선 선조 27년(1594년) 판서 임정의 후손이며, 임황의 아들로 충주 단월 가까운 대림산 아래 풍동에서 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으며 힘도 장사였다고 한다.
소년시절부터 전쟁놀이를 즐겨 하였으며 항상 대장을 일삼는 꼬마 장군이었다.
하루는 돌을 모아 성을 쌓고 군기를 날리면서 진을 치고 진중에서 놀고 있던 중 경주로 부임차 길을 가던 목사 윤섬의 행차가 그 곳을 지나 가게 되었다.
윤섬이 빨리 길을 비키라고 호령을 하니 임 소년이 나와 "사람이 성을 피해야지 성이 어찌 사람을 피하겠소"하고 당당하게 맞섰다.
이에 윤목사는 장차 큰 인물이 되라라 짐작하고, 일부러 아이들 돌성을 피하여 먼길을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 임경업의 나이는 여섯 살이었단다.
그는 아홉살에 이르러 "글은 성명을 기록하면 족하다"는 생각으로 학문을 단념하고 병서를 읽고 무예에 힘썼다.
나이 열 다섯이 되던 해에 집을 나와 단월사에 3년, 보은 속리산 문장대에서 2년 합해서 산중에서 5년을 무술 연마에 힘쓰다가 스물 두 살에 결혼하여 잠시 가사일을 돌보았다.
광해군 10년(1618년), 25세가 되던 해에 무과에 응시 급제하여 삼수의 방위를 위해 소농보 권관이 되었다.
어느날 큰 못가를 거닐다가 한 마리의 용이 입에 물고 나온 단검을 얻게 되었는데, 이 칼을 기념하기 위해 즉석에서 '용천검(龍泉劍)'이라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용천검은 일본사람이 훔쳐갔다고 전해지며 지금 충렬사 유물관에 에는 추련검(秋蓮劍)이 보관되어있다
인조 2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는 등 혼란에 빠졌을 때, 임경업은 길마재에서 적을 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으며, 혼란을 틈타 나타난 도적떼들이 훔쳐갔던 국고의 금은보화를 되찾아와 국가의 재산을 지켰다.
이로 인해 "진무원종공신"이 되었으며, 가선대부로 올랐다.
이듬해 인조 3년에는 첨지중추부사겸 우림위장이 되었으며 방답첨사로 다시 이듬해인 인조 4년 낙안군수가 되었다
이 무렵 만주에는 후금이 요동지방으로 진출하면서 명나라를 공격하였다.
후금의 태종 홍타시는 명을 공격하기에 앞서 우선 배후의 조선을 먼저 쳐서 후환을 없애려고 하였다.
인조 5년(1627년), 후금은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가 즉위한 것은 부당한 처사라는 구실로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으나 형제의 맹을 맺고 돌아 갔다.
이 무렵 일부에서는 청북지방을 방어하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버리자는 제안이 있었다.
이에 임경업과 청북의 지방관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한번의 병화로 가볍게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하여 의론이 정해지지 못했다.
인조 9년 부친상으로 충주 달천으로 돌아와 조용히 지내고 있던 중에, 청북의 백성들이 서울에 올라와 대궐 앞에 엎드려 청북지방을 버릴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
이 사건을 김자점은 필히 임경업이 뒤에서 조정한 곳이라 하고 영을 내려 임경업을 잡아 올렸다.
이에 임경업은 '상복을 입고 있는 내가 어찌 그런 일을 지시할 수 있겠는가?' 하고 변명을 하여 그 정당성이 인정되어 곧 석방될 수 있었다.
인조11년 임경업의 나이 40세에 청북방어사가 되고, 이내 영변부사가 되어 서북지방 중요 산성인 백마산성을 수축하고 의주의 성첩 역시 보수하여 변방인 서북지방을 굳건히 지켰다.
이때 명나라 장군 공유덕 등이 "우가장"으로 도망와서 명나라에 반기를 들고 오랑캐와 내통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는데,이에 임경업은 명나라군과 함께 공유덕 반군을 모두 섬멸하여 명나라 황제로부터 벼슬까지 얻고 이름을 명나라에까지 드높였다.
이 해에 임경업은 부친의 탈상을 위해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돌아왔다.
다음해 인조12년(1634년) 5월 부친 탈상을 끝내고 의주부윤 겸 청북방어사가 되었으며 더불어 후에는 의주진 병마첨절제사의 벼슬을 덧붙여 받았고, 인조 13년에는 종2품격인 가의대부로 승진하였다.
부임하자마자 임경업은 비록 후금과 화친을 했다 하지만 언제나 후금은 재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어 방어 차원에서 군력 증원을 요구하는 글을 올렸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병화에 시달리고 유랑하는 백성들을 구제코자 또다시 상소를 올려 겨우 은 천냥과 금단 백필을 얻어 상평창을 설치하고 중국상인들과 무역을 하여 집없는 자에게는 집을 지어 주고 홀아비와 과부들에게는 각기 베필을 얻어 살게 하니 각처에서 소문을 듣고 백성들이 몰려왔다.
또한 땅을 개간하고 장정들에게 훈련까지 시키면서 방위와 안녕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임경업이 오랑캐를 잡아서 크게 호통을 치고 돌려보낸 일을 오랑캐와 내통하고 있다고 허위 보고 되어 관직을 빼앗긴 일이 있었다.
이에 백성들의 간곡한 호소와 새로 부임한 의주부윤 이준이 백성들의 뜻을 잘 전달하여 이듬해(인조14년)에 다시 의주부윤으로 복직되었다.
이 해(1636년)에 후금의 태종은 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임경업 장군도 적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봉수대를 높이 쌓아 적진을 탐정하고 비변사에 적의 침략이 있을 것을 알리고, 해서지방 군인 2만명을 준다면 결사 방어할 것을 의뢰하였으나 간신들의 반대로 거절되고 말았다.
청 태종은 사신을 조선에 보내어 신국이 될 것을 요구했으나 조정에서는 크게 반발하고 인조 역시 청의 사신을 인견하지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이를 핑계로 청태종은 인조 14년(1636년) 12월 초 여셋날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왔다.
임경업은 적의 침략을 알고 남녀노소 도합해서 겨우 8백여명을 이끌고 작전을 세웠다.
허수아비 수천을 만들어 의주성 주변에 세우고 적의 눈을 속였다.
적은 이에 주춤하고 의주를 피해서 서울로 직접 공격해 내려왔으니 태평만을 꿈꾸던 여러 읍성들은 감히 적에게 맞서지 못하였다.
인조는 여러 왕자와 비빈 및 그밖의 가족들을 급히 강화도로 피신시켰으나 왕 자신은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하였다.
그러나 40여일만인 이듬해 정월 30일에 왕은 친히 삼전도에 나아가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한 우리 역사상 치욕스러운 사건 중의 하나를 만들게 되었다.
이 때 임경업은 적이 서울로 침입한 틈을 타서 손자의 병법대로 적의 수도 심양을 일거에 쳐 없애려 하였으나 그 당시의 김자점은 의주에서 청군을 놓친 것을 책하여 임경업으로 하여금 그런 계교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청군도 수도인 심양이 비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장군 요퇴에게 3백여기의 기마병을 주어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 임경업은 이들을 압록강변에서 맞이하여 적장 요퇴를 단 칼에 베고 모두 섬멸하여 울분의 복수를 하였다.
청나라는 날이 갈수록 오만해져 갔으며 평안도 앞바다에 있는 명나라 군사기지인 가도를 공략하기 위하여 조선에 군사를 요구하고 같이 공략할 것을 명하였다. 조정에서는 임경업에게 청나라를 원조할 것을 명하였다.
명나라군사를 친다는 것은 임경업에게는 당시 괴로운 일이었다. 이에 임경업은 우리나라 군법에는 선봉이 성을 깨뜨리면 성안의 재물은 모두 선봉의 장수가 차지하게 된다고 꾀를 부려 선봉장을 피했다.
그리고 가도에 몰래 척후병을 보내어 준비케 하여 책임자인 "섬세괴"만 전사하게 되었다.
인조16년(1638)에 평안병사겸 안주목사가 되었고, 인조 18년에 청이 또 금주를 치려고 조선에 원병을 요청해 왔다조정에서는 임경업에게 주사의 상장으로, 황해병사 이완을 부장수로 차출하였다.
임경업은 바닷길이라는 핑계를 대고 일부러 지연 작전을 펴면서 석성도 근처에서 몰래 사람을 보내어 명나라 도독 홍승주에게 부득이한 조선의 형세를 알렸다.
그러자 홍승주는 임경업의 뜻을 알고 대책을 세웠다.
명나라 군사와 북신구에서 충돌하게 되자 조선군과 명군은 서로 약속한 바대로 공포만 쏘아 서로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의는 얼마 못가서 청군에게 탄로되어 죄를 묻게 되었는데 임경업은 솔직히 사과했다.
청태종은 임경업을 경계하면서도 그의 용맹과 높은 의기를 보고 용서하였다.
그러나 인조20년 명나라장군 홍승주가 항복하게 되자 그의 부하 예갑이란 자가 임경업과의 내통사실을 고하여 배신을 하였다.
또한 일찍부터 임경업이 중인 독보를 명나라에 보내어 내통한 사실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독보는 본명이 신헐로 묘향산 중이었다.
임경업은 명나라에 우리의 사정을 알리고 또한 청의 새로운 정세를 탐색하기 위하여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의기가 있고 배청사상이 투철한 독보를 만나게 되었고 나름대로 임무완수를 잘 해 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청태종은 이에 관련된 조정의 반청분자들을 일소하고자 최명길 등을 잡아갔으며 임경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큰 뜻을 한번 펴보지도 못하고 오랑캐에게 잡혀서 부질없이 개죽음을 당할 것을 생각하니 억울하게 생각되어 황해도 금교역에서 옥문을 부수고 탈출하였다.
그러자 청은 조선의 조정을 힐책하며 잡아들이라 하니 나라안이 매우 삼엄해졌다. 임경업은 머리를 깍고 중으로 변장하여 명나라로 망명하고자 마음먹고 뱃사람을 속여 배를 얻어 탔다.
배가 강하구에 이르자 중의 복색을 벗은 후 칼을 뽑아 들고 뱃사람을 위협하고 명나라 등주까지 가기로 하고 항해를 계속하였다.
연평도에 이르자 임경업은 선객만 내리게 하고, 절벽 위에 "모월모일 임경업이 지나가다"라고 크게 쓰고 이곳을 떠났다.
연평도에는 지금도 임경업 사당이 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초여름 조기 때가 되면 이 사당에 모여 조기잡이가 잘되게 해달라고 고사를 지내고 있다.
항해는 풍향이 이롭지 못하여 명나라 해풍현에 표착하였다. 해풍현 현관은 임경업을 처음에 오랑캐의 첩자인 줄 알고 옥에 가두었다가 사실을 알고 등주의 황룡도독에게 안내되었다.
황룡은 임경업과 병사를 논의하니 명나라 황제는 임경업에게 부총령의 벼슬을 주고 청나라 공략을 계획하였으나 때는 늦어 청군은 북경을 함락하고 청태종은 산해관에 들어왔다.
이 소식을 들은 황룡은 겁을 먹고 도망하였으나 중군이었던 마등홍이 대신 전군을 영솔하고 임경업과 함께 석성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명나라 숭정황제가 북경함락후 자결하였고, 천도한 남경마저 함락되어 정세가 바뀌자 마등홍 역시 청에 항복하였다.
임경업은 그 기미를 알고 도망가려하였으나, 미리 와있던 독보에게 배신당하여 결국은 청나라의 포로가 되고 말았으니,인조 23년 정월의 일이었다.
임경업은 곧 북경으로 압송되었고 청태종은 그의 항복을 받아 내려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임경업은 내 목을 벨 지언정 너희 오랑캐와 같이 머리를 깍을 수는 없다는 태도로 변발할 것을 반대하였다.
인조 22년에 조선에서는 상신 심기원이 반란을 꾀하다 발각되었다.
심기원이 임경업과 같이 음모했다고 허위 자백을 한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임경업의 죄를 다스리겠다고 환국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청태종은 이를 허락하여 임경업을 내 주었다.
서울에 도착한 임경업은 심문을 받기 시작하였는데,심문의 주 요점은 심기원과의 공모 여부였으나 임경업은 명나라를 왕래하느라 조선에 없었으며 심기원과는 친한 사이도 아님이 참작되었으나 좌의정 김자점이 임경업을 몹시 시기하여 어떻게든 그를 죽이려하였다.
심기원과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지 않자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 국법을 위반하였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형리들의 매질로 숨지게 하였다.
죽음에 임한 임경업은 "천하의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나를 죽이는 것은 큰 일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냐?" 고 외치며 한 많은 생을 마쳤으니 그의 나이 53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그대여 나는 죽이려 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났느냐?" 하고 탄식을 금치못했다 한다.
임경업은 김자점의 독단적인 계획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김자점도 역적으로 몰려 무참히 개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니 비로소 임경업의 충성심이 크게 빛나게 되었다.
숙종23년(1697년)에 특명으로 복관되고, 숙종32년에 충민공(忠愍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임경업이 금교역에서 탈출한후 청은 그 가족들을 모두 잡아 심양까지 끌어갔다가 처만 남겨 놓고 모두 돌려보냈다는데, 처만은 임경업의 행방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매일 고문을 하였으나 장군의 아내답게 "우리 주인은 대명(大明)의 충신이요, 나는 그 충신의 아내이다. 오랑캐의 옥중에서 욕을 보며 남편의 충절을 욕보일 수가 있는가" 하고 품에서 칼을 꺼내어 자결을 하였다.
또한 타고 다니던 준마도 금교역에서 고삐를 풀어 놓아 보냈는데, 그 후 말은 사복사 마굿간에 돌아왔다가 주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길게 세 번 울부짖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한다.
영웅의 아내는 아내답게, 영웅의 말 역시 영웅의 말답게 마지막을 장식했다.
영조 2년(1726년)에 호서지방 사람들이 충열사(忠烈社)를 세웠고 이듬해(영조3년)에 사액(賜額)을 내리고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정조15년(1791년)에는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하였으니 "어제달천충열사비"이다.
1978년, 충렬사는 정부의 특별지원으로 성역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임씨 종중의 묘역이다
중앙탑 공원에 이르러.....
박물관
임 경업 장군의 초상화
김 윤후 장군의 초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