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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뉴스를 보니까 한국에서는 주식 투자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투자로 큰 돈을 번 사람도 있지만 어려움을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투자에는 성공과 실패가 늘 공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투자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누군가 주식 투자를 통해 대박을 터뜨린 성공 사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 실제로 대박이 난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 성공 신화는 더 이상 과장된 이야기나 근거 없는 소문으로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마음을 열고 좋은 소식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고 병을 고친 사람, 삶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믿고 하나님을 믿기 위해 교회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실제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자기 옆에서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시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성경을 믿습니다. 신앙을 받아들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이 들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예는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복음을 전한 전도자의 경우 삶이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 걸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가 버가를 떠나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이동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이 당시의 정황을 아주 단순하게 소개합니다. 14절인데요.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서 안식일의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이 말씀만 보면 버거를 떠나 곧장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록이 단순하다고 실제 상황마저 단순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근거가 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버가에서 약 2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까지 가려면 해발 2천m에서 3700m가 넘는 험악한 타우르스 산맥을 넘어야 합니다.
요즘 튀르키예 가면 최근에 개발된 사도바울 트레킹 코스가 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걸어 다녔던 이 지역을 트래킹 코스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이 코스를 완주하려고 하면 꼬박 8일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2천년 전 제대로 된 길도 없고 숙박 시설도 없을 때에 이곳을 걸어갔다면 적어도 8일 이상은 걸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숙하는 가운데 고생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는 바울이 자신의 선교 여정을 돌아보면서 남긴 글이 있는데요. 이런 내용입니다.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분 밤을 지새우고 줄이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어쩌면 바울의 이 기록 속에는 타우르스 산맥을 넘을 때에 자신의 고생담도 들어가 있을 것 같습니다. 타우르스 산맥에는 나무가 많지 않은 높은 바위산들이 즐비하다고 합니다.
바위산에 비가 오면 어떻게 될까요? 바위산에 눈이 쌓여 있다가 봄날이 되어서 그 눈이 녹아내리면 어떻게 될까요?
갑자기 계곡으로 물이 쏟아져 내립니다. 나무가 없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쏟아져 내립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강물의 위험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 당시 타오르스 산맥에는 강도와 도적대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강도의 위험입니다.
이 밖에도 여러 번 밖에서 잠을 잔 경험, 굶주림과 추위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제대로 된 텐트도 없이 밖에서 잠을 자다 보면 얼마나 추웠을지 상상이 됩니다. 그의 말처럼 바울은 수천 미터가 넘는 산을 넘으며 엄청난 고난을 겪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듭니다. 바울은 해안가 도시인 살기 좋은 버가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왜 굳이 그 험한 타우르스 산맥을 넘어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간 것일까요?
비시디아 안디옥은 선교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당시에 이 도시는 인구가 약 11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기준으로 보면 대도시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튀르키예 동과 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이 도시가 있었습니다. 중부 지방입니다. 그래서 그 지방에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신약 성경 중에 갈라디아서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갈라디아는 한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지방의 이름입니다. 지역의 이름입니다. 작은 지방인 루가오니아와 비시디아, 그리고 부르기아 지방을 합쳐서 이 갈라디아라고 하는데요. 이 갈라디아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가 바로 비시디아 안디옥입니다. 이곳에 복음의 거점이 마련되면은 중부 지역에 교통의 요충지에 문화의 중심지에 복음의 센터가 생기기 때문에 추리키의 전역으로 복음이 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버가에 머물지 않고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간 것입니다. 바울의 이 노력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감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하나님께 충성한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에게 충성한 바울에게 돌아온 대가는 무엇이었을까요?
갈라디아서 4장 13절의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에 처음 갔을 때를 회상하면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지방에서 제일 먼저 간 도시가 어디입니까?
비시디아 안디옥입니다. 그러니까 비시디아 안디옥에 갔을 때 바울의 몸은 육체적으로 병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병이 가벼운 병이 아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4절과 15절에 이런 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할 수만 있었다면 여러분의 눈이라도 베어서 내게 주었을 것입니다. 당시 바울이 앓고 있던 이 병은 사람이 보기만 해도 아 저 사람 병 들었구나 심각한 병이 들었구나 그것을 알아차릴 정도였습니다. 그 변명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겉으로 볼 때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바울을 보며 시험에 들었다는 겁니다. 아마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했겠죠. 다른 사람에게 구원 이야기 전하러 돌아다니지 말고 먼저 당신 자신이나 구원하시오 그렇게 생각할 정도의 몰골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바울을 배척하지 않고 그를 천사처럼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영접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갈라디아서 3장 5절에 힌트가 있습니다. 3장 5절인데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소식을 듣기 때문입니까?
이 구절을 좀 꼼꼼히 읽어보면 갈라디아 사람들은 지금 성령께서 주시는 기적을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병에 걸려서 몰골이 흉측한 그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보면 흉측한 모습이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받아들였던 겁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앞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은 왜 하나님 자신을 위해 고난의 길을 자처한 그 바울에게 축복이 아니라 질병을 허락한 것일까요?
갈라디아에 있는 그 사람들, 복음을 듣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는 기적을 행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면서 왜 복음을 전하러 간 그 바울에게는 능력을 행하지 않았을까요?
왜 그의 질병은 고쳐주지 않은 것일까요?
사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질문이 있습니다. 고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들에게는 좋은 일만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질병도 찾아옵니다. 오히려 안 믿는 자들보다도 더 어려움이 많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시험이 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믿는 자에게 어떻게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가 있나 신앙적으로 회의감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지다 보면은 신앙적 좌절에 빠지고 신앙을 멀리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 걸까요? 왜 믿는 자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일까요?
정답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안 믿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1장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복음 전도자는 전도를 할 때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줘야 합니다. 어떻게 해요?
예를 들어 아브라함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전하는 하나님의 전도자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메시아의 조상이 될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쉽게 이루어지지가 않습니다. 사라가 90세가 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25년을 기다린 후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이삭이 태어납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이삭은 사람의 노력, 사람의 힘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나이 그때까지 자녀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전도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을 만들어놓고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때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의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한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실 때 대단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보기에 가장 무기력하고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라는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메시아가 완전히 끝나버렸습니다.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부활입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메시아를 믿으면 내 노력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 그 생명으로 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자신의 역사를 이루실 때 복음을 전하실 때 누구를 통해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 27절인데요.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에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에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리석은 자, 약한 자들을 통해 일하신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안 믿는 사람에게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복음 전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 극단적으로 잘 보이도록 하나님은 그 사람을 때로는 낮추고 때로는 약하게 반드십니다. 밤이 어두워야 별이 잘 보이듯이 하나님의 능력이 보이도록 인간의 능력을 낮추고 약하게 만드십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바울 사도가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설교를 했다고 하는데요. 여러분 이 당시 바울의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권위적인 모습, 힘센 능력, 화려한 언변을 가지고 그렇게 설교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병든 모습, 연약한 모습, 인간적으로 볼 때는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설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바울을 통해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그 바울이 전한 전도를 통해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한번 적용해 봅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께 충성한 사람들이 시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고난의 문제를 만났을 때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충성을 했는데 내가 신앙 신실하게 신앙하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선한 것으로 갚아주셔야지 왜 선이 아니라 고난일까 왜 고난을 주실까?
우리도 이런 문제에 만나게 되면 신앙의 걸림돌에 걸리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통해 생각해 보면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증인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복음이 무엇인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실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모든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도적인 고난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닥쳐온 고난을 믿음으로 이해하면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보게 되고 그 고난을 신앙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은 평소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질병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그 질병을 사탄의 하수인 그렇게 부릅니다. 아마 굉장히 괴로웠던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 질병을 사탄의 하수인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병은 일회성으로 아프고 넘어간 게 아닙니다. 수술받고 낳을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늘 때를 따라서 고통이 찾아오니까 하나님께 이 병을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다고 합니다.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기도하는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고린도후서 12장 9절인데요. 내 은혜가 니게 조카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바울은 이 말씀을 들은 후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복음을 드러내는 증인으로 부르셨고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그의 삶을 굉장히 약한 자리로 약한 모습으로 그렇게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오히려 나는 강하다. 왜냐하면 내가 약하면 약할수록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신앙인이지만 바울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에마라는 사람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빌레몬서 1장 24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의 동력자인 마가와 아리스다고와 데마와 누가도 무난합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빌레몬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대마도 자기와 함께 있다 그런 말을 하고 자기와 동력자 관계라고 말합니다. 대만은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동력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때 그 자리에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래서 그 복음을 위해 고난 당하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4장 10절을 보면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데만은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 에마가 바울을 배반하고 떠났다는 거예요.
왜 떠났을까요?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계속되는 고난을 경험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고난에 대해서 성도들이 비난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렇게 고난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다. 사람들의 비난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이런 비난을 들으면서 대만은 시험에 빠지고 맙니다. 하나님께 충성했는데 바울은 왜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 것일까 과연 사람들의 말이 맞는 것인가 바울이 가고 있는 저 길이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신앙의 길인가 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는 형통한 자들, 신앙생활하면서 쉬운 길을 가는 사람들, 형통한 자들, 그 사람들을 보며 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에도 대마와 같은 신앙의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계속되는 어려움 앞에서 심적으로 흔들리고 신앙적으로 힘든 분들이 계십니까?
기억합시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능력은 내 삶이 형통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내 능력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그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때론 우리 삶에 십자가를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자리를 지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는 자리, 부활의 자리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렇게 나타납니다. 조니 에릭센 타다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1949년생입니다. 미국의 충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얼굴도 예뻤고 총명했으며 성격도 밝았습니다. 가정도 여유가 있어서 그의 취미는 그녀의 취미는 승마와 수영이었습니다.
17살이 되던 어느 날, 언니와 함께 승마를 하고 땀을 씻기 위해서 바닷가로 갔습니다. 그리고 절벽 같은 그곳에서 바닷가로 다이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다이빙을 하면서 그녀의 머리가 보이지 않던 바다 속에 바위에 부딪혔고 툭 하는 소리가 나면서 목뼈가 부러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평생을 전신마비로 살아야 했습니다.
사고를 당한 후 그녀는 믿음을 잃었습니다. 가족들과 교우들이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그녀의 몸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침대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천정을 쳐다보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간만 죽이면서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사고가 난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친구가 병문안 왔습니다. 그 친구는 이 타다를 보고는 뭐라고 위로해야 될지 딱히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다는 거예요.
저니 예수님은 니 고통이 어떤지를 아셔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분명히 너처럼 마비가 되셨을 거야.
이 말을 듣고는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쳐다보면서 너 지금 뭐라고 지껄였냐 그렇게 쏘아붙였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두둥거리면서 말을 했어요. 분명히 분명히 그랬을 거예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채찍에 맞았고 그래서 몸이 완전히 찢어졌어요. 그렇기 때문에 감각이 없었을 거야. 그리고 십자가에서 뼈가 못에 박혔기 때문에 몸을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일 수가 없었어. 예수님도 너처럼 마비 상태였을 거야. 이 말을 들으면서 하단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침대에서 친구가 말한 것을 생각하면서 예수님도 나처럼 전신마비였을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을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가 간증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고 전에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질문했던 것은 항상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내 남편감으로 누구를 정해 놓으셨나요? 하나님 내게 어떤 직업을 주시고, 또 또 그 직업을 통해 어떤 복을 주실 건가요?
하나님 내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예비해 두셨나요?
늘 기도하면서 그것을 질문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고가 난 후에 이 기도는 다 사라졌습니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나무 막대기처럼 움직일 수 없는 그 몸뚱아리와 그리고 자신이 만난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늘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내 안에 살아계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 질문을 계속해서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자가 말합니다. 나는 답을 찾았습니다. 그 이후 조니 타다는 자신과 같은 장애인 자신과 같이 고난받는 전신마비의 장애인 그 사람들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서 성경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자서전을 썼고, 장애인 선교 단체를 세워서 희망을 잃어버리고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신마비로 살아가는 그녀를 보면서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복음의 증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낮추십니다. 그 낮아짐의 형태는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으로, 어떤 사람은 경제적으로,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어떤 사람은 심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출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낮아짐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어쩌면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할 것 같아요.
자신의 삶이 복음을 드러내는 증인이 된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떤 보상을 해 주십니까?
결국 그렇게 고난만 당하다가 죽도록 하십니까?
이런 질문이 들 것 같아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분입니다.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은 자기 스스로를 나는 모든 사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입니다. 그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바울을 가장 위대한 사도로 높여주셨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그가 얼마나 위대한 사도였는지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가 기록한 편지는 오늘날 우리가 읽는 성경이 되었고, 그의 신학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삶을 복음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증거로 드린 그 사울에게 그 바울에게도 하나님의 영원한 상으로 갚아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에 품어야 할 진짜 소원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상으로 갚아주시기를 원하십니까?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의 부귀 영화와 사람들의 칭찬이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할 사항은 아닙니다. 우리의 진짜 소원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그 하나님으로부터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영원히 참여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 삶에 찾아온 고난, 우리를 낮추시고 연약하게 만드는 그런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이 고난을 믿음의 눈으로 다시 한 번 해석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로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기를 소망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을 소망하는 가운데 오늘의 삶을 인내하면서 살아갑시다. 진실하게 살아갑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도 바울 사도처럼 그렇게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