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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영화 <킹덤 오브 헤븐>
“창조적이고 경이로운 두뇌들이 모여 거대한 역사의 현장인 중세 예루살렘을 부활시켰고, 당시 십자군 전쟁의 정수를 탁월하게 묘사하다!” 개봉 당시 이 영화에 대한 극찬이었다. 이 영화는 감히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역량이 집대성된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서사 액션 대작 중 하나이다. 그동안 수많은 영화인들이 십자군 전쟁을 영화화하기를 꿈꾸어 왔다. 하지만 그 방대한 스케일을 감내하기가 어려웠는지 누구도 감히 도전장을 내밀지 못했던 금단의 소재이기도 했다. 사진, 문둥병 환자 예루살렘왕
그러나 리들리 감독은 해냈다. 개인의 휴먼 드라마에 이 방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버무려넣으면서 중세에 일어났던 이슬람과 기독교도들 간의 치고받던 전쟁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이뿐만 아니라 영화사상 가장 웅장하고도 완성도 높은 작품 중의 하나로 만들어 역사를 신화로 변모시켰다는 평을 들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스케일과 세부 묘사까지 리얼하게 그려낸 대규모 전투 장면, 여기에다 화면을 압도하는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지중해와 거친 사막 위에서 벌어지는 십자군과 이슬람군의 장쾌한 격돌, 피 터지는 예루살렘 공성전, 가슴 시린 사랑, 그리고 현대인들에게 과연 진정한 종교가 무엇인가를 묻는 묵직한 주제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다.
이 영화에서 전투 장면은 주로 모로코 와르자자트에서 촬영했는데 스콧 감독은 이곳에서 〈글래디에이터〉, 〈블랙 호크 다운>을 촬영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스콧 감독과 모로코 왕 모하메드 6세는 절친한 관계로 알려져 있다. 모하메드 6세는 영화 촬영을 위해 자국 병사 1,500명을 지원했는데, 이들은 의복과 장비만 바꾸면서 십자군과 이슬람군으로 겹치기 출연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벨린의 발리안(올랜드 블름 분)은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프랑스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대장장이도 아니었다. 그는 순수한 예루살렘 왕국 태생의 귀족 출신이었다. 사진 포위당한 십자군
이 영화는 미국에서의 흥행은 별로였으나 아랍세계에서는 흥행돌풍을 일으켰고 특히 이집트에서는 대박을 터뜨렸다. 이는 영화에서 십자군이 이슬람국가들을 도발하고 약탈하는 모습을 여러 번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다가 그들의 우상인 살라딘이 근사하게 나오니 아랍인들이 열광했을 것이다. 종교 문제라는 민감한 뇌관을 다룬 이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종교의 허망함’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주 무대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부르는 예루살렘이다. 영화 내내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이라는 한 뼘의 땅덩어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피터지게 싸운다.
영화는 예루살렘이라는 돌무더기는 종교가 남기고 간 빈껍데기에 불과한 곳이라는 것을, 지금 자신이 살아 있고 살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진짜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냐고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십자군을 이끄는 주인공 발리안과 아랍군을 이끄는 살라딘(가샨 마수드 분)이 영화의 종말부에 협상을 끝내고 헤어지기 전에 주고받는 문답에는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그대로 녹아있다. 사진 주인공 발리안
발리안: 예루살렘이 무슨 가치가 있소?
살라딘: 아무 가치가 없소.
살라딘 역시 발리안과 같이 ‘성지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일말의 가치도 두지 않는 합리주의자였다. 이 말을 마치고 뒤돌아 걸어가던 살라딘이 되돌아서서 또다시 말한다.
살라딘: 모든 것이오,
하지만 아랍 세력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예루살렘이 그에게는 ‘Everything’인 것이다. 살라딘은 발리안을 향해 씩 웃고 다시 뒤돌아선다.
이 영화의 극장판은 무려 40분이나 잘라 먹어서 이야기의 진행을 따라가는 데 상당히 애를 먹는다. 가급적이면 감독판(무삭제판)을 보아야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진 살라딘
II. 최고의 비주얼리스트 리틀리 스콧 감독
리들리 스콧은 다양한 시대 배경을 가진 명작 영화들을 만들어낸 거장감독으로 손꼽힌다. 흔히 '비주얼리스트'라는 별칭으로 불리울 정도로 영화의 시각적인 부분에 있어서 뛰어난 영상미를 보여준다. 디자인을 전공하고 CF 업계에서 단련되어 비주얼은 할리우드 최고 수준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반전 같은 평범한 스토리를 스릴 넘치게 연출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을 영화에 몰입하게 하는 비상한 능력의 소유자이다. 할리우드에서 최고 수준의 영상미를 자랑하는 감독들에게 붙이는 별명인 '비주얼리스트'의 이른바 원조 격인 감독이다.
1937년 11월 30일 영국 사우즈실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그는 화가가 되기를 바라면서 런던 왕립미술학교에서 수학했지만 이후 웨스트 하틀풀 예술대학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이때부터 그는 화가보다는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이곳에서 그는 영상 제작, 사진학 등 다방면의 시각 문화 요소들을 흡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영상 산업에 관심을 가졌다. 이곳에서 비주얼적 감각의 천재성을 인정받으면서 장학금을 받으면서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1년간 뉴욕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을 경험한 뒤 영국으로 돌아와 BBC의 세트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 후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스콧은 1977년 데뷔작 <대결자 The Duellists>로 칸느 영화제에서 만장일치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면서 할리우드 영화계에 알려졌다. 이후 할리우드로 건너가서 <에이리언>, <블레이드 러너> 등을 연출하였다.
1989년에 일본에서 야쿠자와 대결을 벌이는 두 미국형사의 이야기를 그린 <블랙 레인>페미니즘 영화 <델마와 루이스>늠 스콧을 대표적인 흥행감독으로 부상시켰다. 이후에 찍은 <1492 콜럼버스 1492>, <지 아이 제인>이 잇달아 흥행에 실패하면서 잠시 침체기를 겪다가 2000년에 발표한 <글래디에이터>의 성공으로 화려하게 재기하였다. 이후 <킹덤 오브 헤븐>, <로빈 후드>, <블랙 호크 다운>, <어느 멋진 순간>, <아메리칸 갱스터>, <마션>, <올더 머니>, <라스트 듀얼-최후의 결투>, <하우스 오브 구찌> 등의 화제작을 연달아 발표했다. 사진 영화 글래디에이터 I
2023년에는 대작 <나폴레옹>을 제작했으나 그의 장기인 영상미 표현은 뛰어나나 시대를 풍미한 나폴레옹이라는 거물의 일대기를 담아냈다기엔 많은 부분에서 부족했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또한 정작 나폴레옹을 배출한 프랑스에서의 반응이 안 좋았다. 곧바로 2024년에는 <글래디에이터 II>를 발표하면서 세인의 기대를 한껏 모았다. 영화 개봉 후 평론가들은 "전작만큼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시각적으로 관객을 사로잡고 흥분시키는 영화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호평을 했으나 한편으로는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전작의 영광을 재현하는 데는 모자란다" 등의 비판도 따랐다.
이런 대작들을 연속으로 쏟아놓고 있는 그는 현재 90에 가까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차기작을 구상하고 있다는 소문이 일고 있다. 알 수 없는 펜데믹이 미국을 파괴한 미래에 개 한 마리와 함께 사는 전직 해병이자 민간인 조종사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노익장이다. 사진 영화 나폴레옹
III. 십자군 전쟁
인류 역사상 200년(서기1096~1291년)이라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치러진 전쟁이자 세계 2대 종교가 격돌한 십자군 전쟁은 인류 역사상 대사건이었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이 위력적인 한마디로 촉발된 십자군 전쟁은, 그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 자신이 일으킨 전쟁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신이 아니라 인간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200년에 걸쳐 총 아홉 차례 치러졌다. 이 중에서 제1차 십자군 전쟁(예루살렘 함락), 제3차 십자군 전쟁(사자심왕 리처드 1세와 이슬람의 전설인 살라딘과의 격돌), 제4차 십자군 전쟁(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눈여겨볼 만한 전쟁이다.
십자군 전쟁의 배경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와 1077년의 ‘카노사의 굴욕’. 이 두 가지 사건이 없었다면 십자군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은 11세기 초까지는 동유럽과 중동에서 막강한 위력을 떨쳤다. 그러나 1025년에 바실리우스 2세가 죽은 후 약 반세기 동안 13명의 황제가 죽고 죽이고 쫓겨나는 등 지지고 볶고 하면서 혼미 속에 빠져 있었다. 이때 동쪽에서 셀주크튀르크가 노도와 같이 밀려오면서 제국은 위기에 몰렸다.
마침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군에 대패하면서 터키반도(소아시아반도, 혹은 아나톨리아반도라고도 한다) 대부분이 셀주크의 손에 들어갔다. 이후 셀주크튀르크는 이집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중동을 장악한다. 6년 뒤에는 서유럽에서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로마교황과 독일 황제 사이의 극한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독일 지역 사제들의 서임권을 두고 하인리히 4세 황제와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이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벌어진 충돌이었다. 처음에는 교황이 황제에게 파문을 선언했다. 당시 제후들의 지원을 못 받았던 황제는 할 수 없이 교황이 머물던 북이탈리아 카놋사 성으로 찾아왔다.
황제는 칼바람이 부는 엄동설한의 차디찬 땅에서 3일간 맨발로 서서 빌고 또 빌었다. 드디어 교황이 사면을 내리자 황제는 이를 갈면서 독일로 돌아갔다. 와신상담하면서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마침내 그는 1082년에는 로마를 공격해 그레고리오 교황을 내쫓아 버렸다. 원한 속에 숨진 그레고리오를 이어 1088년에 선출된 우르바누스 2세도 교황권의 부활을 외친다. 이처럼 동서의 로마(동로마제국과 로마교황)가 모두 위기에 처한 가운데, 양측에서 서로 힘을 합쳐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 뒤 비잔틴에서는 1081년에 알렉시우스가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제국의 위기에 때맞춰 나타난 영명한 군주였다. 그는 나중에는 자력으로 셀주크를 물리치고 터키반도를 대부분 수복하지만 당시는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받아 똥줄이 타던 다급한 처지여서 서유럽으로부터 지원을 받아보자는 생각을 했다. 알렉시우스가 보낸 사절이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 참석해 “이교도와의 전쟁에 힘을 보태주기 바란다.”라는 뜻을 전하자,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이를 황제와의 싸움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호기라고 보고 무릎을 쳤다. 자신이 치켜든 깃발 아래 전 유럽의 봉건영주와 기사들이 모여든다면, 로마교황으로서는 단숨에 자신의 입지를 끌어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본 것이다.
차근차근 준비하던 그는 8개월 뒤, 프랑스 남부의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마침내 다음과 같이 외치며 역사적인 ‘십자군 운동’을 제창한다. “이슬람교도들이 성지를 빼앗고 그곳을 찾는 순례자들을 박해하고 있다. 이슬람교도들과 싸워 예루살렘을 되찾길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순례자의 맹세를 하라. 그리고 1096년 8월 15일 성모마리아의 승천 축제일을 기해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해 그곳에서 성지로 출발하라. 그 보답으로 누구든지 모든 죄를 사면해 주는 면죄부를 받을 것이다.”
교황이 굳이 프랑스 땅인 클레르몽에서 십자군을 부르짖고, 프랑스인들이 앞장설 것을 촉구한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황제의 영향력이 너무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사진 십자군
십자군 전쟁의 시작, 민중 십자군(거지 십자군)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ls Lo vult”
교황 우르바누스의 이 한 마디의 위력은 굉장했다. 중세 유럽인들은 매일매일의 소소한 죄가 쌓여 죽은 다음에 혹시 지옥불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전전긍긍을 하며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은자 피에르’라는 수도사를 따라 십자군에 참여해 성지 탈환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모든 죄가 사해진다고 교황이 약속한 것이다. 십자군에 참가하면 지옥은커녕 죽으면 천당으로 곧바로 직행한다는 것이었다. 귀가 번쩍 뜨일 만한 굉장한 뉴스였다. 이때부터 십자군 광풍은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각처에서 가족을 남겨두고 너도나도 먼 동방으로 떠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은자 피에르의 열변에 감동해 동쪽으로 향하는 십자군에는 농민, 부랑자, 떠돌이 기사, 유랑민, 여자와 애들까지 무려 10만 명이 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장비도 없었고, 식량도 준비가 안 된 어중이떠중이들로 이루어진 완전 오합지졸이었다. 누덕누덕해진 옷에 쪼록쪼록하는 배를 움켜잡고 길을 나서는 이들은 그냥 거지떼와 다름없었다. 이들은 변변한 무기도 식량도 없이 출발했기에 현지에서 보급받아야 했다. 헝가리에서 이 문제로 현지인들과 충돌을 일으켜 ‘십자군 사상 첫 싸움’을 같은 유럽 기독교도들과 치르기도 했다.
어찌어찌해 비잔틴제국의 경계로 들어가서부터는 그런대로 제대로 된 보급을 받았다. 그러나 멋진 갑옷으로 치장한 위풍당당한 지원병을 기대했던 알렉시우스 황제는 이런 거지발싸개 같은 군대를 보고 기겁했다. 더구나 이들의 전쟁 목표조차 알렉시우스가 바라는 ‘셀주크 침략의 격퇴’라기보다는 ‘성지 예루살렘 탈환’이었다. 그래도 알렉시우스는 약속한 것도 있고 해서 이 거지 십자군을 먹여주고 재워주었다. 이렇게 한 것은 서유럽인들을 이슬람과 싸우게 하면서 그동안 자신은 천천히 힘을 기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옳은 전략이었으나, 장기적으로는 비잔틴제국에 재앙이 되었다.
아무튼 이 거지떼 민중 십자군은 간신히 소아시아 반도로 진입했으나 셀주크 튀르크군에게 1096년에 당연히 박살이 났다. 일부는 여기저기 흩어져 떠돌아다니다가 제1차 십자군에 합류한다. 이 패배는 이슬람 쪽에서 십자군을 가볍게 보게 만듦으로써 이후 전개되는 십자군과의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 십자군을 정식 십자군으로 치지는 않는다.
제1차 십자군(1095~1099년)
예루살렘 점령
1096년 말, 벨기에 남부 부용의 고드프루아, 그의 동생인 볼로뉴의 보두앵, 툴루즈의 레이몽, 블루아의 스테판, 타란토의 보에몽등 주로 프랑스 출신의 영주들이 이끄는 군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모여들었다. 이를 제1차 십자군이라 한다. 그리고 이들은 1097년에 소아시아반도 초입의 니케아를 점령한다. 허를 찔린 튀르크군은 도릴라이움에 약 3만의 병력을 집결시켜 습격을 시도했으나 격퇴 당했다. 십자군은 소아시아 반도를 거침없이 가로질러 진격할 수 있었다. 1098년에는 보두앵이 시리아 지역의 에데사를, 보에몽이 안티오크를 점령했다. 마침내 1099년 6월, 성도 예루살렘의 성벽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당시 예루살렘은 셀주크가 아니라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다. 파티마는 십자군에게 “이제까지 점령한 영토는 모두 줄 테니 예루살렘만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라는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일언지하에 퇴짜 당했다. 한 달 정도 계속된 공성전에서 보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십자군은 고전했다. 하지만 성서의 ‘여리고 공성전’을 흉내 내어 맨발로 예루살렘 성벽 주변을 돌며 찬송가를 부르는 퍼포먼스를 하는 등 사기를 북돋웠다. 마침 제노바의 보급선이 도착하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사진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
예루살렘의 이슬람 수비대는 일종의 화약인 *‘그리스의 불’까지 동원하며 악착같이 버텨보았지만, 7월 15일에 십자군의 공성기에서 처음으로 두 명의 기사가 성벽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 그리스의 불
그리스의 불은 물로 잘 꺼지지 않았고 수면에서도 불이 계속 타오르는 특수한 성질이 있다. 그리스의 화약이라고도 불린다. 동로마 제국의 군대가 주로 무기로 사용하던 폭발물을 말한다. 동로마 제국이 수많은 외침을 당하면서도 약 천년간 꿋꿋이 버틴 것은 바로 이 그리스의 불이라는 훌륭한 병기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리고 홍수가 범람하듯이 성스러운 도시는 십자군 병사들에게 함락되었다. 이어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노인도, 여자도, 어린애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슬림은 물론 유대인들도 십자군의 칼부림에 쓰러졌다. 이슬람 최초의 사원인 알 아크사 모스크에도, 유대인들의 예배당인 시냐고그에도, 1,000년 전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갔다는 길에도, 예외 없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흘러넘쳤다.
기록에 따르면 피가 무릎까지 차고 넘쳤다고 한다. 낯선 땅에서 오랫동안 고된 싸움을 하며 쌓인 울분과 이교도에 대한 극단적인 적개심은 정복자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러한 광란의 학살극은 불과 몇 백 명만 살려둔 채 일주일 만에 가까스로 멈추었는데, 살아남은 자들도 도시를 뒤덮은 수많은 시체들을 눈물로 치우고는 이들 역시 시체 더미 위에 쓰러졌다. “주님의 심판은 공정하며, 참으로 위대하시도다!” 현장의 어느 성직자는 이렇게 외쳤다.
제2차, 3차 십자군
이렇게 제1차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은 본래의 목적대로 예루살렘을점령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에 새로운 기독교 왕국도 세웠다. 네 개의 지역(에데사, 트리폴리, 안티오크, 예루살렘)으로 분리해 사이좋게 통치했다. 12세기 중반이 되자 아랍의 지도자들은 프랑크놈(당시 아랍인들은 십자군을 프랑크군이라 불렀다)들이 우리 땅에 와서 이렇게 설치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다고 일어섰다. 그들 중 가장 세력을 떨친 이가 이마드 앗 딘 장기였다.
그는 십자군 나라들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에데사를 함락 후 그곳의 기독교인들을 몰살시켰다. 이 소식은 유럽을 경악케 했고 이는 제2차 십자군 전쟁을 불러왔다.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콘래드 3세가 2차 십자군을 일으켜 팔레스타인으로 왔으나 다마스쿠스를 공략하다가 참패를 당했다. 이후 장기의 아들 누르 알딘은 십자군을 전방위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전쟁은 몇 년 동안 아랍군의 우세로 흘러갔다. 이때부터 십자군 병사들은 아랍인들을 ‘사라센’인이라고도 불렀다.
누루 알 딘이 죽고 이어서 살라흐 앗 딘 아이유브의 뒤를 이어 마침내 아랍인들에게 전설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살라딘이 등장한다. 전설적인 지도자 살라딘의 등장 쿠르드출신의 살라딘은 14살 때부터 누르 알 딘의 군대에서 복무했다. 1169년에 삼촌인 시르쿠를 따라 카이로를 점령했다가 두 달 만에 시르쿠가 죽자 그를 대신해 파티마 왕조의 재상이 되어 이집트의 실권을 쥐었다. 2년 뒤에는 파티마 왕조를 폐하고 아이유브왕조를 세웠으며, 다시 3년 뒤인 1174년에 누르 알 딘이 죽자 1186년까지 시리아와 이라크를 병합해 중동을 석권했다. 살라딘이 중동을 통합하는 동안 십자군의 사정은 점차 나빠졌다.
하틴의 뿔 전투 - 이슬람의 예루살렘 탈환
1176년에는 비잔틴의 마누엘이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튀르크군에 대패하면서 당분간 십자군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예루살렘에서는 문둥병 환자였던 보두앵 4세와 5세가 잇달아 죽고 보두앵 4세의 매제인 기 드 뤼지냥이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지도부 내에 혼란이 있었다. 살라딘은 1175년에 예루살렘과 휴전협정을 맺었으나, 본격적인 전쟁만 자제했을 뿐 서로가 적대 행위를 지속하던 중 1187년 초에 자신의 누이까지 포함된 대상隊商이 약탈되자 마침내 그해 3월 지하드(聖戰)를 선언했다. 지하드를 내세운 살라딘은 1187년 7월, 갈릴리 호숫가의 티베리아스를 함락했다. 이에 기 드 뤼지냥은 군사를 모아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이는 중대한 판단착오였다.
병력 집결지인 아크레에서 티베리아스까지는 30킬로미터에 불과했지만 이 지역은 건조하고 황폐한 사막 지역이었다. 때는 7월이었다. 그야말로 뜨겁게 달궈진 염천炎天의 행군길이었다. 십자군은 살인적인 더위와 갈증 때문에 기진맥진했다. 병사들은 목이 타들어갔으나 물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한 방울도 없었다. 이때 매복해 있던 살라딘군이 덤불에 불을 질러 연기를 피우고, 화살을 소낙비처럼 쏟아부었다. 불과 연기와 화살 때문에 병사들은 죽을 맛이었다. 탈진한 기사들은 갑옷을 벗어버리고 달아나다가 이슬람군의 칼에 쓰러졌다.
날이 밝자 십자군은 북쪽으로 길을 돌아 ‘하틴의 뿔’이라고 알려진 언덕으로 올라가서 일단 한숨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이를 낱낱이 지켜보고 있던 살라딘은 십자군들을 사방에서 에워싸고, 하늘을 새카맣게 덮을 만큼 엄청난 화살을 쏟아부었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기 드 뤼지냥의 군대는 사로잡히거나 죽음을 당했다. 그래도 살라딘은 포로들을 정중하게 대우했다. 이 하틴 전투는 십자군 역사상 최대의 패배였다. 이 전투로 예루살렘 왕국의 군대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3세는 이 패전 소식을 듣고 쇼크를 받고 급사했다. 살라딘은 이 기세를 타서 거침없이 진격, 9월에는 예루살렘을 에워쌌다. 궁지에 몰린 예루살렘 수비대 지휘관인 발리안 이벨린은 최후의 수단으로 살라딘에게 도시를 파괴하고 이슬람 주민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너 죽고 나 죽자.”라고 덤벼든 것이다.
이에 살라딘은 타협책을 제시하고 항복한 기독교인들에게는 자유롭게 도시를 떠날 수 있도록 했다. 이제 성도는 88년 만에 다시 이슬람의 손에 들어갔고, 살라딘의 관대한 처분은 제1차 십자군 점령 때의 지옥 같던 학살극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이 부분은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제3차 십자군(1189~1192년)과 이후
이슬람군의 예루살렘 점령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각국은 발칵 뒤집혔다. 교황 그레고리오 8세와 그 후임자인 클레멘스 3세가 부랴부랴 새로운 십자군 파병을 호소하자 여러 군주가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독일에서는 붉은 수염(바르바로사)이라고 불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에서는 존엄왕 필리프, 영국에서는 전투 시에 성난 사자같이 덤벼든다고 ‘사자심왕獅子心王’이라고 불리는 리처드 1세가 그들이었다. 그 결과물로 탄생한 제3차 십자군은 중세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사 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십자군 운동의 정점이기도 했다.
또한 살라딘과 리처드 1세라는, 중세 이슬람과 유럽의 전설적인 두 영웅이 격돌했다는 점 때문에도 각별한 주목을 끌었다.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아들로 당대 최고의 명성과 무훈을 자랑했다.
세 번째 십자군 원정 이후 6차에 걸쳐 십자군 원정이 더 이루어졌으나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이로써 예루살렘 재탈환은 완전히 물 건너갔다.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이슬람문명을 비롯한 동방문명에 대한 서구인들의 이해가 깊어졌다. 무역과 국제교류에서 아시아와 유럽의 교류는 십자군 전쟁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활발해졌으며, 십자군 지역이 멸망한 뒤에도 그런 흐름은 이어졌다. 동방의 문물이 유럽으로 퍼져 가면서 철학과 과학, 예술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고, 교황의 권위와 기독교의 맹목적 신앙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무역의 중심에 선 베네치아, 제노바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부흥하고, 전쟁 중 생겨난 성전기사단이나 구호기사단 등은 근대 유럽의 상비군의 원형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십자군은 서양이 중세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 동과 서의 길고도 처참했던 이 전쟁을 놓고 18세기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볼테르나 루소는 십자군의 의미를 평가 절하했다. 또한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십자군을 “광신에 따른 야만행위”에 불과했다고 잘라 말했다.
* 사자심왕 리처드 1세와 살라딘
로빈 후드 전설이라든지 월터 스콧의 소설 『아이반호』 등을 통해 중세 기사도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프리드리히 1세는 소아시아 반도를 가로질러 오다가 작은 개천에 빠져 익사했고 리처드 1세와 필리프는 배를 타고 지중해를 가로질러 팔레스타인으로 오고 있었다. 이렇게 제3차 십자군이 오고 있는 동안, 팔레스타인에서는 기독교 국가의 잔존 세력이 다시 한 번 결집해 살라딘의 대군을 상대로 전투를 재개했다. ‘하틴의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있는 기 드 뤼지냥이 지휘하는 십자군은 이슬람군이 장악하고 있는 항구 도시 아크레를 탈환하려고 육지에서 포위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사진 사자심왕 리차드
그런 십자군의 배후를 살라딘의 군대가 또다시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살라딘은 막강한 군사력에도 적을 쉽사리 굴복시키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달려왔다. 전세는 기독교인 군대 쪽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신규 병력에 리처드 1세라는 탁월한 지휘관까지 보유했기 때문에 살라딘의 대군은 물러났다. 3차 십자군은 아크레를 함락했으며, 이후 서서히 진군해 이듬해 7월에는 예루살렘의 코앞에까지 다다랐다. 그러나 그때 마침 잉글랜드에서 국왕의 부재를 틈타 리차드의 망나니 동생 존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훗날 형 리처드가 죽은 뒤 왕이 된 존은 폭정 끝에 귀족과 시민들에게 *마그나 카르타를 강요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 마그나 카르타
1215년 6월 15일, 잉글랜드 왕국의 존 왕에게 실망한 귀족과 기사가 백성의 지지를 받아 왕을 협박함으로써 받아낸 일종의 법률적 계약서이다. 세계 정치사에서 엄청난 위상을 지닌 문서 중 하나다.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초석과도 같은 유물로 간주된다.
게다가 절친이자 경쟁자였던 프랑스의 필리프 2세도 일찌감치 십자군에서 발을 빼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휴전 서약을 깨트리고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영토를 야금야금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래저래 리차드는 즉시 귀국해야 했다. 1192년 10월 9일, 살라딘과 평화조약을 서둘러 맺은 리처드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고국으로 향함으로써 제3차 십자군 전쟁은 일단 막을 내렸다. 전쟁 내내 살라딘과 리처드 1세는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는 와중에도 상대방에 비상한 관심과 호의를 드러냈다.
가령 살라딘이 병상에 누운 잉글랜드 국왕에게 과일과 얼음을 선물로 보낸다든가, 전투 중에 땅에 서서 싸우는 리처드 왕의 모습을 보고 “체통에 어울리게 말에 올라 싸우시라.”라며 명마 두 필을 선물한 것이 그것이다. 리처드 1세 역시 살라딘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췄으며, 심지어 (물론 어디까지나 립 서비스였겠지만) 자신의 여동생과 살라딘의 남동생을 결혼시키자고까지 제안하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을 떠나며 리처드 1세는 조만간 다시 돌아올 테니, 그때 가서 제대로 한 번 싸워보자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러자 살라딘이 만약 내가 이 땅을 결국 누군가에게 내준다면, 차라리 당신 같은 훌륭한 적에게 내주고 싶다고 재치 있게 응수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재대결은 결코 성사되지 않았다. 리처드 1세는 귀국길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붙들려 1년 넘게 억류당했으며, 살라딘은 1193년 3월 4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 와중에 피어난 낭만적인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아이유브왕조는 살라딘의 사후에도 반세기 넘게 지속되었으며, 이후로도 지속된 제5차(1217~1221년), 제6차(1228~1129년), 제7차(1248~1254년) 십자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 덕분에 팔레스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이 점령하기 전까지 이슬람 세력의 영토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 이슬람의 전설, 살라딘
오늘날에도 이슬람 세계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살라딘 살라딘은 이라크 서쪽 티크리트에서 지위가 높은 쿠르드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살라딘은 탁월한 군사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했다. 또한 당시 아랍 세계와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군주들에 비해서 보기 드물게 관대하고 합리적인 면모가 있었다. 사진 살라딘
전투에 임해서는 단호하면서도 교활한 작전을 펼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타협과 외교라는 무기를 활용하기도 했다. 살라딘은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했고, 신심이 깊었으며 정무도 결코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다. 그의 본명은 ‘살라 알-딘 유스프 이븐 아유브’라는 긴 쿠르드 이름이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과거 오랫동안 살라딘은 이슬람 세계보다 오히려 유럽의 역사가들이나 문학가들에 의해서 칭송을 받으면서 오래 기억되어 왔다. 월터 스콧의 소설을 비롯해서 십자군을 소재로 한 여러 낭만적 문학작품에서 살라딘은 종종 리처드 1세의 멋진 숙적이면서도 존경할 만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이슬람 세계에서 살라딘을 지하드의 영웅, 즉 저항과 독립의 상징으로 드높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아마 근세에 접어들어 서양 제국주의자들의 횡포에 시달려 왔고 현대에 와서는 미국을 등에 업고 ‘중동의 깡패’로 불리면서 툭하면 아랍인들을 두들겨 패곤 하는 이스라엘 때문에 살라딘이 더욱 그리울 것이다. 한편 살라딘에 대한 미화는 아랍의 여러 독재자들이 대외적으로 이용하거나 테러를 정당화하려는 얄팍한 선전술이라는 비난도 따른다. 여하튼 과거 예루살렘 성지를 되찾았던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은 아랍인들의 마음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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